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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대통령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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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서희경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센터 연구교수의 「한국 헌정사와 개헌: ‘대통령의 임기’ 논의를 중심으로」(『한국정치외교사논총』, 35(2), 2014)는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대통령 임기가 첨예한 쟁점이었음을 1954년 제2차 헌법개정(개헌)에서 살펴보는 논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이승만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의 연임을 원했다. 이에 야당은 연임을 독재로 가는 길로 보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이승만은 결국 하야했지만, 나중에 박정희는 1969년 삼선개헌과 1972년 유신헌법 제정을 통해 또다시 대통령 연임을 관철시켰다. 이 점에서 개헌은 국가의 이념과 현실정치의 세력관계 간 긴장을 보여주는 사건이며, 그 때문에 지극히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차 개헌의 논리
“국난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정치체제는 단순한 대통령 중심제가 아니었다. 1948년 건국헌법은 내각제 요소가 포함된 ‘중간형 대통령제’ 혹은 ‘내각제적 대통령제’를 보장했다. 건국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되며 국무원은 합의제 의결기관이었고 국무총리의 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건국 당시 이승만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원했지만, 대중적 정치지도자가 없었던 한민당은 의원내각제를 선호했다. 그럼에도 이승만 없는 국가 수립은 어려웠기 때문에 이런 절충이 이뤄진 것이다. 건국헌법은 제55조 1항을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보장했고, 대통령은 재선을 통해 한 번 중임할 수 있었다. 1954년 제2차 개헌은 여기에 “헌법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을 추가하면서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이때 개헌을 둘러싼 논의는 상황주의situationism와 민주주의democratism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su_quote]개헌론자들은 국난의 비상 상황에서 영도력 있는 지도자에 한하여 계속 집권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78쪽)[/su_quote]

이런 말은 헌정사에서 거듭 반복된 것이기도 했다.

이때 개헌 반대론자는 세 가지 비판을 내놓았다.

첫째, 비상상황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전쟁이나 자연재해, 경제공황 등은 쉽게 비상상황임을 판단할 수 있지만, 이런 판단을 일상적인 상황에도 적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더욱 곤란한 지점은 대통령제가 ‘비상상황의 정치’의 유혹에 취약하다는 데 있다. 대통령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1인 기관이었고 국가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자리다. 그래서 대통령제에는 일종의 영도자주의 내지는 메시아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둘째, 이승만 대통령에게만 중임금지 조항을 예외로 하는 것이 법 앞의 평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에 개헌 찬성론자들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4선을 예로 들면서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개헌 찬성론에 대한 반대 논거로 아테네 민주정을 제시했다. 아테네 민주정은 개인이 독선과 부패에 취약하다고 보았기에 ‘탈인격화된 통치’로서의 법치를 중시했고, 법률을 관리·유지하는 데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참여해야 했다는 것이다.

셋째, 개헌 반대론자들은 임기 연장이 권력의 독점 즉 독재를 불러온다고 주장했다. 이 논리에도 개헌 찬성론자들은 미국의 사례를 들었다. 미국은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함으로써 정치적인 안정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이 임기와 연임이 자유와 긴장관계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미국은 ‘정치적 지혜’를 통해 그 긴장을 잘 조화시켰다고 보았다. 비록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한국이 미국과 같은 ‘정치적 지혜’나 유럽과 같은 정당체제가 잡혀 있지 않기 때문에 연임이 독재로 이어지는 길이 되곤 했다고 간주하는 듯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4년 제2차 헌법개정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고자 했다.

 

내각제적 대통령제에서 
‘제왕적 대통령제’로

제2차 개헌은 정부형태에 관한 논쟁 또한 불러일으켰다. 건국 초기 대통령을 견제하는 주요한 장치는 국회였다. 국회가 대통령 선출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에 속한 사안은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며, 대통령의 국무에 관한 모든 행위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副署, 대통령이 서명한 다음 국무총리 등이 함께하는 서명)가 필요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여기에는 국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만큼 당시 대통령의 권한은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작았다. 하지만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전시 부산을 비롯한 23개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대통령은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게 하면서 국회의 견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아직 몇 가지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제2차 개헌은 이승만이 남은 장애물을 제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첫째, 개헌 찬성론자들은 국무총리제를 폐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대통령이 행정 수반으로서 이미 국무를 총괄하는데 국무총리가 존재한다는 건 이론적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그들은 국무위원 연대책임제 또한 폐지하고자 했다. 국무위원 연대책임제는 일종의 내각 불신임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국무위원의 전원 총사퇴가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1952년 비상계엄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대통령은 국회가 아니라 국민이 선출하는 직책이 되었다. 그 때문에 국무위원 연대책임제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셋째, 개헌 찬성론자들은 중대한 국가 현안에 대한 국민투표제를 주장했다. 이승만은 그동안 정치인의 잘못으로 나라를 망쳤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을 국민투표에 맡기자면서 적극 동조했다. 그는 더 나아가 국회의원소환제까지 제안했다. 이때의 국민투표제는 비록 인민주권의 원리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회를 통제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대중으로서의 유권자는 선전과 선동에 매우 취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국민투표제 정치plebiscitary politics는 어떤 의미에서 순수대통령제를 넘어서는 것(93쪽)”이라고 보며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이런 조항들을 포함했던 제2차 개헌은 1954년 11월 27일 국회의 제90차 회의에서 부결되었다. 하지만 자유당이 야당의 총사퇴를 이용해 수정결의안을 가결하면서 결국 개헌이 이뤄지고 만다.

저자는 공산주의와 빈곤과의 대결 속에서 건국 초기 대통령제의 채택을 정당화할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동시에 정치문화의 미성숙으로 인해 대통령 임기를 둘러싼 논쟁이 독재로 이어지곤 했다고 분석한다.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이라는 위치와 정파적 정치인이라는 측면을 함께 가짐에 따라 모순에 빠지는데, 한국에서는 대통령의 영도자주의가 더욱 강하게 나타나면서 혼란도 커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논문에서 미국 정치를 높이 평가하고 인민의 참여를 부정적으로 살피는 등 보수적인 정치관을 드러낸다. 하지만 우리는 논문을 통해 개헌이 순수한 법의 영역이 아니라 이념과 현실정치 사이의 길항을 보여주는 전장戰場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개헌을 말하는 이들을 냉정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1950년대 후반 ‘포스트 이승만 정치’의 헌정사」
서희경, 2016, 『한국정치학회보』, 50(4), 77-104.

「개헌절차의 강한 경직성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이한태, 2013, 『법학연구』, 24(1), 117-153.

김주원 리뷰어  leopord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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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은 누구를 ‘국민’으로 정의하나

출처: http://blog.naver.com/par73ever/220860317427

logofinale‘국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국가 주체로서 국민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통치대상으로서의 국민을 떠올릴 것이다. 또 누군가는 단어 자체에서 몰개성과 권위주의의 향기가 난다며 거부감을 표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공동체 위기 앞에서 연대할 동료 시민으로서 국민을 가까이 느낄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경험에 따라 어휘의 뉘앙스는 다르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무정부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하더라도 어쨌건 현재 세계는 국가 단위로 돌아간다. 또 적극적으로 ‘탈’국민하고 싶은 요즘이지만 그렇다고 생활기반 없는 이민자나 난민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국민’이 무엇인지 최소한의 지표 정도는 합의 해야 하지 않을까? 조한상 청주대 법학과 교수의 「국민의 헌법적 의미: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중심으로」(『법학연구』, 48, 2012)에서 그 최소한의 지표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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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 모습, 출처: http://blog.naver.com/par73ever/220860317427

 

‘국민’ 개념,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대립

‘국민’이란 일종의 집합명사로서 같은 종류의 사람이 모인 하나의 집합체를 지칭한다. 물론 ‘같은 종류의 사람’이란 거대한 통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징표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느슨한 개념이라는 것이 더 맞겠다. 저자는 국민이 누구인지 대답하기 위해서는 이 징표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가 기대는 틀은 ‘주관적 관점’과 ‘객관적 관점’이다. 이 두 관점은 국민 개념 생성 이래 늘 대립해왔다. 먼저 주관주의를 살펴보자. 주관주의는 “특정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 또는 정치적으로 연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이 ‘국민’이라 주장한다. 다시 말해 국민은 특정한 국민정신, 국민의식 또는 국민감정과 같은 주관적·심리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주관주의는 대체로 프랑스에서 유래한 이론이라고 본다. 특히 주관적 관점은 근대 초기 프랑스의 정치적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시기에 주권 개념이 확립되고 이러한 주권을 공유한 집합체를 국민이라는 범주로 확정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국민은 이상적 미래를 함께 꿈꾸고 행동하는 감정 및 정서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즉, 주관주의는 국민의 형성과 관련된 근대주의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객관주의는 국민이 주관적 요소보다는 일정한 객관적 요소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객관적 요소에는 언어와 전통, 관습과 정서, 종교와 같은 문화적 요소들이 포함된다. 객관주의는 대체로 독일에서 유래했다고 파악된다.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뒤늦게 근대국가로의 통합을 달성하였으며, 정치적 의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하면서 근대국가로 발돋움 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을 규정하기 위해 독일어와 독일문화, 게르만족으로서의 혈통과 자부심과 같은 객관적 요소들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저자는 한국 역시 객관주의적 경향이 강하다고 본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프랑스보다는 독일의 과정과 유사했다. 즉 독립과 정부수립을 이루어나갈 국민을 규정하고 단합시키기 위해 이전부터 공유되어 오던 객관적 요소를 발견하는 작업을 했고 그 작업을 통해 국민 개념이 정립된 것이다. 다만 독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객관적 요소가 언어나 종교와 같은 문화적 요소보다는 혈연 내지 혈통을 강조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는 점이다. 즉, 대한민국 국민은 한민족 혈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짙게 배어있다. 이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어, 많은 이들이 국민과 민족을 혼용하거나, 겨레나 동포와 같은 개념을 함께 쓰곤 한다.

 

객관주의의 문제점과
주관주의로의 전환 필요성

저자는 국민을 이해하는데 객관주의는 여러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특히 국민에 대한 객관주의적 관점은 권위주의와 연결될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다. 객관주의가 상정하는 국민의 징표는 개개인의 자유 및 의지와 무관한 또는 그것을 초월한 것들이다. 따라서 국민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가 공동체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귀결되기 쉽다. 이러한 맹목적 복종은 종종 이웃 국가에 대한 배타성과 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저자가 드는 대표적인 사례는 나치의 침략과 만행이다. 그들은 혈통적 순수성이라는 객관적 요소를 바탕으로 국민을 개념화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국민의 객관적 징표의 의미를 조작하고 강요했다. 그리고 유태인 등이 자신들의 혈통을 오염시킨다고 낙인 찍고 그들을 잔혹하게 말살하려 했다. 같은 객관주의적 특징을 갖고 있는 한국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해방 이후 이범석과 민족청년단의 민족 지상·국가지상주의는 나치의 사상과 상당히 유사한 것이었다. 또한 이승만의 일민(一民)주의는 “한 백성인 국민을 만들어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으나, 역시 국가 이외의 다른 것을 희생시키는 권위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객관주의의 문제점은 과거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한국의 경우 경제수준이 높아지면서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국적을 취득해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 사회의 내부 구성이 이전보다 훨씬 다양해지고 있음에도 강한 혈통주의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장벽으로 기능한다. 나아가 객관주의적 관점은 인종차별,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시각을 조장할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는데, 급기야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는 한국의 단일민족사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저자는 국민을 이해하는 관점이 주관주의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헌법상 국민은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가지며 정치적 자유를 비롯한 기본권의 주체로서의 지위도 가지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국민의 헌법적 지위는 주관주의와 호응하는 면이 크다. 즉,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동의, 정치적으로 연대하고자 하는 의사, 국민으로서 부담해야 하는 책임의 감수 등을 위한 의지를 공유하고 있다고 입증된다면 혈통과 같은 객관적 요소 없이도 원칙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주관주의를 채택한다고 하더라도 객관적 요소들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주관적 의지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그 판단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면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국민으로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가 불분명할 때 이를 추측하기 위한 단서가 필요하며 잠정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결국 혈연이나 언어, 문화와 같은 객관적 징표에 기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객관적 요소나 주관적 요소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의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는 절충설이 제기되는데, 저자는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물론 주관적 의지가 핵심이며, 객관적 요소는 이를 보완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도 함께 덧붙인다.

[su_quote]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의의가 있다. 객관주의를 통해 국민을 이해한다면 국민은 우연히 형성된, 고착화된 집단으로 인식되기 쉽다. 주관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공동체 의식, 연대감, 책임 등의 주관적 요소는 국민에게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항목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소모적이고 약탈적인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갈등을 보다 양질의 갈등으로, 그리고 합의 내지 타협으로 이끌 주체는 깨어있는 국민이다. 주관주의 중심의 절충설로의 전환은 변화를 주도할 국민을 새롭게 인식하는 초석이 될 수 있다. (93쪽) [/su_quote]

이후 저자는 주관주의 중심 절충설에 입각해 법제도의 변화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외국 국적을 취득했거나 지속적으로 보유하는 이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의지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과 또 국민으로서 또는 그에 준하는 지위를 인정하는 데는 지금보다 신중함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귀하적격심사 역시 높은 장벽이 되지 않는 선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의지도 심사할 수 있는 수단으로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과 같은 ‘인간의 권리’는 누구에게나 인정되어야 할 부정할 수 없는 조건이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누구를 한 국가의 ‘국민’으로 볼 것인가는 배타적 원리로 정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국민 권리와 책임은 다양한 국가만큼 다양 방식이 존재할 것이고, 한 국가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 및 가치도 그만큼 다양할 것이다. 주관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그것에 동의하고 국민이 되는 것은 자발적 의지와 선택에 의해야만 한다. 또 그에 따라 헌법적 권리와 기본권 그리고 의무가 이어질 것이며, 공동체 내 자발적 연대나 갈등도 건강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하다면, 역시 “생득적인 객관적 징표보다는 자발적 의지에 따른 주관주의적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다만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가치라는 것은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닌 자발적 의지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가치 역시 계속 개선되고 생성되는 것이라는 전제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사회통합을 위한 국민 개념 재고」
도회근, 2013, 『저스티스』, 134, 429-449.

「민족의 개념에 관한 정치사회학적 고찰」
조홍식, 2005, 『한국정치학회보』, 39(3), 129-145.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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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공화주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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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트럼프의 대선 승리로 많은 미국인과 비미국인들이 “미국을 모르겠다”라는 말을 한다. 자부심의 근간이었던 미국적 가치들이 증발해 버린 가운데 시민들은 연일 거리로 나와 반트럼프 시위를 벌인다. 그들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한 미국 공화당이 추구하는 공화주의의 본래 의미는 무엇일까? 김남균 평택대 미국학과 교수의 「미국 혁명의 공화주의: 고든 우드의 『공화국의 창건』을 중심으로」(『미국사연구』, 35, 2012)에서는 미국의 탄생 시기 미국식 공화주의가 독립과 연방국가를 만드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미국 건국의 지배적 가치는
자유주의? 공화주의?

1776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전쟁에 가담한 13개 주들은 각각 주권국가이면서 동시에 연합체의 형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연합체 방식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결국 1787년 연방헌법이 제정됨으로써 마침내 미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은 왜 독립을 선언하고 또 연방국가를 창건하게 됐을까?

미국 독립선언문을 보면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았고, 이런 기본권에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다고 쓰여 있다. 즉, 국가 권력으로부터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지키는 것이 미국 독립의 기본정신임을 독립선언문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많은 미국사학자들은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국민의 자유를 수호하려는 자유주의가 미국 건국의 가장 중요한 이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 역사에 대한 자유주의 해석은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된다. 바로 개인의 자유보다 공익을 우선으로 하는 공화주의가 미국 건국의 핵심이념이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공화주의로 미국 건국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저서는 1967년 하버드 대학의 버나드 베일린Bernard Bailyn교수에 의해 출판되었다. 그의 공화주의 역사해석은 그간 간헐적으로 주장되던 공화주의 담론을 미국 역사학의 핵심 화두로 올려 놓았다. 이어 1969년 베일린의 제자 고든 우드Gordon S. Wood교수가 『공화국의 창건』(The creation of the Republic)을 출판함으로써 공화주의는 미국 독립뿐 아니라 연방 헌법제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정치 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논문에서 저자는 공화주의를 설득력 있는 역사이론으로 발전시킨 이 『공화국의 창건』의 핵심 쟁점을 살펴본다.

미국 독립 과정에서
공화주의의 역할

 

존 트럼 불 (John Trumbull)의 그림, 독립 선언서 (Declaration of Independence)

우드는 『공화국의 창건』 서론에서 ‘사상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며 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동시에 미국의 독립혁명 역시 사상의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념적 혁명은 독립으로부터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치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 시기에 미국인들은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고전적인 정치 담론을 현대적 정치이론으로 재구성했다.

저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우드는 영국에서 시작된 공화주의가 어떻게 미국의 독립혁명에 사상적 토양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식민지인들은 영국의 공화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영국의 부당한 과세에 대항하는 논리를 제공받았다. 특히 식민지인들에게 가장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저작물은 급진적 휘그주의자들의 작품이었다. 권력에 대한 휘그주의자들의 “질시와 의심”은 영국의 권력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정당화해주었다. 독립혁명 직전까지 식민지인들은 급진 휘그파의 공화주의에 대한 글을 읽고, 재인용하고, 출판하며 하나의 거대한 사상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우드는 미국 혁명을 주도했던 존 애덤스, 알렉산더 해밀턴, 토마스 제퍼슨 같은 인물들 모두 영국의 공화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영국이 전례 없던 세금을 미국 식민지에 부과하는 것은 영국 정치가 미덕(virtue)을 잊어버리고 부패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식민지의 미덕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부패한 영국사회에서 독립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영국 사회로부터 독립하는 데는 여러 장애가 놓여있었다. 그 중 하나가 왕의 부재였다. 18세기에는 모든 법적 윤리적 권위가 왕으로부터 나왔기 때문 왕이 없는 사회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한다면 무엇이 그런 권위를 대신할 것인가? 이런 문제의 해답으로 식민지인들이 찾아낸 것이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왕 없는 공화정을 넘어 미덕의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는 개인이나 파벌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선(public good)을 위하여 정치가 행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 선언은 곧 미덕의 정치를 실시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미덕의 정치 즉, 공화정을 위한 독립 열기는 빠르게 번져갔다. 이미 5월 10일 대륙회의는 각 주에 공화정을 실시하기 위한 헌법 제정을 권고한 상태였으며, 주 헌법들은 시민을 권력의 근원으로 삼았다. 또 행정과 사법이 독립적인 기관으로 조직되었지만 행정의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국민의 대표로 구성된 의회를 권력의 중심에 두었다. 이어 사법심사권에 대한 사상도 생겨났다. 영국에는 없었던 헌법이란 개념이 생기면서 일어난 변화였다고 우드는 강조한다.

독립 지도자들은 13개 주 공화국에서 공공의 선이 실천되는 진정한 공화정치가 실현되기를 기대했다. 같은 목적과 이념을 가진 국민들이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왕정이나 귀족정치 때 겪었던 부패가 사라지고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공화정치는 예측과 달리 순조롭게 실현되지 않았다.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다고 해서 국민들이 모두 같은 이익과 가치를 공유하는 동종의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정치적 지도자로 선출된 사람들 역시 유능하고 미덕을 갖춘 지도자들이 아니었다. 지역민들의 이익이 훨씬 중요하게 여기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 선출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국 공화정은 위기에 빠졌다. 공화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화정치의 중심이 된 주를 통제하는 것이 필요했다. 주보다 우위의 권위가 있어야 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 지도자들은 주를 통합한 중앙정부의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주와 중앙정부의 권한관계가 문제였다. 이론적으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주권을 의회를 통해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방의 창설은 상위기관이 만들어진다는 것, 곧 주의 독립성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생각한 방안이 연방제였다. 연방제는 주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중앙정부가 존재하는 중복적 구조이다. 하지만 두 정부가 병존하는 구조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연방주의자들은 국민 주권론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주권의 소유자인 국민은 주가 필요하면 주를 창건할 수 있고, 또 연방이 필요하면 연방정부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즉, 주 정부에는 주 정부에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고 연방정부에는 연방정부에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의 주권에서 두 가지 정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미국 공화주의자들은 거대한 중앙정부를 만들어낸다면 지역의 이익을 초월한 미덕을 갖춘 인물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될 것이라 생각했다. 주보다 큰 규모의 공화국이 창건되면 졸부가 아닌 진짜 부와 미덕을 가진 천부적 귀족이 의회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연방헌법을 제정하다

연방은 연방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창설되었다. 역사에 유례가 없는 방식이었다. 헌법을 제정하는 방안으로 제헌회의가 고안되었는데, 제헌회의는 통상적인 의회와는 달리 제헌을 목적으로 구성하는 특별 대표회의였다. 헌법은 의회의 개정 대상이 될 수 없고 국민 전체의 의지가 담긴 최상위 법이어야 했다.

연방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양원제의 채택이었다. 연방 창설을 주도한 연방주의자들이 양원제를 주장한 것은 하원의 독주를 방지하자는데 숨은 뜻이 있었다. 상원은 하원과 달리 훨씬 적은 규모로 구성함으로써 대표의 자질을 높이고자 했다. 또한 연방제의 담보자 역할과 하원에 대한 견제 장치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다. 국민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한 고전적 공화주의자들과는 달리 연방주의자들은 국민을 여러 가지 이익을 가진 이질적 공동체로 파악했기 때문에 구현 가능한 제도였다.

전통적 공화주의자들과 달리 새로운 미국식 공화주의자들은 공화국의 성패를 미덕에만 기대지 않았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대중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창안해낸 것이다. 연방정부가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민주적 요소를 갖고 있으면서 궁극적으로는 공화정의 성공을 보장하도록 만든 제도적 장치가 바로 연방헌법이었다. 모든 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가 만든 헌법에 의해 창설된 행정부와 입법부 그리고 사법부 역시 국민의 대표라는 법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우드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검토

저자는 우드의 『공화국의 창건』을 해석하고 그것의 연구사적 의미를 밝힌 후 말미에 그럼에도 몇 가지 남는 의문을 비판적으로 제시한다. 우선 우드는 확대된 공화국을 통해 좀 더 나은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규모가 커진다고 어떻게 지도자의 자질에 질적 변화가 생길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 없다.

또한 저자는 권력분립에 대한 우드의 해석도 수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본다. 우드는 국민이 주권자이기 때문에 권력남용에 대한 우려가 해소되었다고 보는데, 저자는 당대의 이해를 무시한 채 권력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말한다. 덧붙여 독립선언문 정신이나 연방헌법에 권리장전을 첨부한 것은 자유주의가 강력했다는 증거가 아닌지 되묻는다.

마지막으로 우드는 미국 정치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연방의 창설 과정에서 공화주의에 민주주의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며, 따라서 미국 공화주의는 민주적 공화주의였다고 밝힌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저자는 공화주의 개념 자체에 대한 의문을 드러낸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당연히 공화주의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차라리 미국 민주주의라고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공화국의 창건』은 영국에서 나온 정치 이념이 미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미국화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은 미국의 예외주의를 보여주는 연구서라고 보고 있다.

미국 독립과 제헌 과정에서 공화주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논문에서 소개된 우드의 역사관 또한 인상적이다. 우드는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가 불안한 현재를 위해 편안한 답변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적어도 역사 연구가 “불안한 현재와 예측불허의 미래를 감수하게 해 주는 한 가지 방식”임은 분명하지만, 역사를 통해 얻게 되는 지혜는, 과거의 인물들이 그들 자신들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주어진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발버둥 쳤던 사실들을 이해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에 대한 지혜와 겸손 그리고 삶의 비극성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이런 한계 속에서도 역사가 지속된다는 점이다. 혼란한 시국에서 유난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다.

고든 우드 ⓒKenneth C. Zirkel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어떤 공화주의? 존 애덤스 대(對) 존 테일러 : 미국 공화주의 논쟁을 되돌아보며」
곽차섭, 2011, 『미국사연구』, 34, 29-54.

「미국 헌법의 제정과 미덕: 고든 우드의 해석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정경희, 2000, 『역사교육』, 76, 213-233.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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