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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이 점령한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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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며칠 전 교보문고에서 발표한 ‘2017 각 분야별 도서시장 점유율 변화’를 보고 좀 놀랐다. 사회과학 분야의 성장 때문이다. 20퍼센트 이상 신장되어 전 분야 통틀어 가장 성장률이 높았다. 이는 지난 한해 정권 교체, 일자리, 페미니즘, 과학혁명 등 사회 이슈가 한국사회를 지배했고 독자들을 견인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었다.

 

디비피아의 올 한해 논문 이용 순위지표에서도 이런 경향은 두드러졌다. 통계에 잡힌 1만 편 가량의 논문 가운데 상위 1000위를 살펴본 결과 사회과학 이슈가 점유율이 가장 높았다. 과연 어떤 덩어리들이 트렌드를 이루었을까.

 

[표 1] 2017년 논문이용순위 top 10

순위 논문명 간행물명 저자명 소속기관
1 제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 한국경영학회
통합학술발표논문집
안상희, 이민화 KAIST
2 4차산업혁명,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STSS지속가능과학회 학술대회 김진형 KAIST
3 개인정보 노출에 대한 인터넷 사용자의 태도에 관한 연구 한국전자거래학회지 백승익, 최덕선 한양대
4 [EU] 2016 다보스포럼: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우리의 전략은? 과학기술정책 장필성 과학기술정책연구원
5 4차 산업혁명 핵심, 산업인터넷 경제규제와 법 김병운 UST
6 4차 산업 혁명 시대, 대학 교육과 콘텐츠 인문콘텐츠 한동숭 전주대
7 회귀분석을 이용한 매개된 조절효과와 조절된 매개효과 검증 방법 한국심리학회지: 일반 정선호, 서동기 걍희대, 한림대
8 4차 산업혁명시대의 지적교육 방향 한국지적정보학회지 김영학 청주대
9 초미세먼지(PM2.5) 배출량이 호흡기계 질환에 미치는 영향 연구 환경정책 최종일, 이영수 조선대, 항공대
10 청소년의 선거연령 18세 인하문제에 관한 소고 한양법학 이상경 서울시립대

 

‘4차 산업혁명’ 논문 상위 10위 중 6편 차지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4차 산업혁명’이다. 「제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이 전체 논문 중 6,804회 이용됨으로써 1위를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상위 10위 중 4차 산업혁명 관련 논문이 6편이나 되고 200위로 범위를 넓히면 30편이 넘게 들어와 있다. 이 주제로 얼마나 많은 논문이 생산되고 있으며 또 읽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2위),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우리의 전략」(4위), 「4차 산업혁명 핵심, 산업인터넷」(5위), 「4차 산업혁명 시대, 대학교육과 콘텐츠」(6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지적교육 방향」(8위) 등이 최상위권이고 그 밑으로 인공지능, 딥러닝, 드론,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 연관어들을 합치면 분량은 더 늘어난다. “초구조화된 도구들이 범세계적으로 연결된 세상”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와 우려가 봇물 터지듯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일자리를 위협할까?

제4차 산업혁명은 ‘일자리’를 위협하고 ‘교육’의 방향과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특히 ‘일자리’는 압도적인 키워드로 작용했다. ‘4차 산업혁명과 일자리’ ‘인공지능과 일자리’ 등 어떤 일자리가 인공지능 시대에도 살아남을 것인가가 전국민의 화두가 된 듯하다. 미래에 정말 기계가 많은 인간의 일자리를 대신한다면, 인간의 기본 의식주는 국가가 보장해줘야 할 것이다. ‘기본소득’ 이슈가 부상하는 것도 4차 산업혁명과 무관치 않다.

 

[표 2] 2017년 가상화폐 주제 논문이용순위 top5

순위 논문명 간행물명 저자명 소속기관
28 비트코인의 이해 Korea Business Review 전주용, 여은정 중앙대
69 최근 디지털 가상화폐 거래의 법적 쟁점과 운용방안 증권법연구 김홍기 연세대
133 블록체인패러다임과 핀테크 보안 한국통신학회지 박성준 동국대
151 한국·미국·독일의 비트코인 활용 현황과 공유가치창출에의 함의 탐색 Financial Planning Review 이경미, 고은희, 주소현 이화여대
253 비트코인 취약점 및 현 대응방안의 한계 분석 한국정보과학회 학술발표논문집 양지연, 김소희, 김윤정 서울여대

 

‘가상화폐’, ‘비트코인’ 논문 새롭게 주목

이와 연관하여 올해 새롭게 주목받은 주제로 눈길을 끈 것은 「비트코인의 이해」(28위)와 「최근 디지털 가상화폐 거래의 법적 쟁점과 운용방안」(69위), 「블록체인패러다임과 핀테크 보안」(133위) 등 1000위 안에 관련 논문이 10편 넘게 검색되었다. 비트코인은 처음에는 1BTC에 0.0008달러였으나, 2012년 초 비트코인 거래가 활발해짐으로써 1BTC에 10달러 선으로 올라섰고, 2015년 현재 280달러까지 시세가 올라갔으니 얼마나 급성장해왔는지 알 수 있다. 주변에 비트코인 거래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수익을 올린 이들의 소식은 많은 이들을 가상화폐 러쉬로 내몰고 있다. 그만큼 피해자도 늘어나고 있는 형국이라 앞으로 이에 대한 규제와 연구가 더 적극화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초)미세먼지, 사드 배치, 가짜뉴스, 동물실험, 젠트리피케이션, SNS, 1인 가구, 청소년 폭력, 트럼프, GMO, 감정노동, 자유학기제, 일본군 위안부, 저출산, 북 핵실험, 촛불시위, 기본소득, 줄기세포, 유전자편집 등이 100위 안에서 1번 이상 보이는 키워드들이다. 이런 사회문제에 대한 학문적 대응은 트렌드로 보긴 힘들 것이고 현실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과학’ 주제 논문 급부상

반면 ‘과학’이라는 단어를 다시 주목해보면 그야 말로 ‘메가트렌드’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 과학은 대중의 삶과 거리가 있었다. 과학은 과학자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우리는 과학이 제공하는 편의성을 누리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과학’이 일상생활에 부수적인 만족을 주는 것을 넘어 삶을 구조화하고 일자리의 대부분을 그것과 연관시켜 생각하게 만들고, 삶의 소소한 이벤트에까지 들어와서 우리를 붙들어 맨다. 이러한 과학의 급부상에 비한다면 문학, 역사, 철학 등 전통 인문학 주제들은 ‘그들만의 리그’에 가까워지고 있다. 문학 분야도 창작을 제외한 비평이나 연구는 점점 소수의 동아리로 되어가는 국면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적 세계관과 인간관」(91위)이 100위 안에 이름을 올린 것은 의미심장하다. ‘과학적 세계관’은 국가 예산의 투자규모나 대학의 학제 시스템, 전세계적 네트워크와 연구 경쟁 등을 고려할 때 이미 지배적인 세계관이 되었다. 어쩌면 과학은 역사, 철학, 문학 등의 전통 분과과학을 흡수하는 상위 개념으로 거듭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 등의 ‘빅히스토리’가 그 산물이 아니겠는가.

 

[표 3] 2017년 페미니즘 주제 논문이용순위 top5

순위 논문명 간행물명 저자명 소속기관
17 여성혐오와 젠더차별, 페미니즘 문화와 사회 이나영 중앙대
38 전략적 여성혐오와 그 모순 미디어, 젠더 & 문화 엄진 이화여대
67 힙합은 여성혐오적인 장르인가요? 대중음악 김수아 서울대
99 여성혐오적 표현과 표현의 자유의 한계 이화젠더법학 이승현 연세대
108 문화영역의 여성화와 여성혐오 여/성이론 황미요조 한국예술종합학교

 

 

한편, 지난해 상위권을 휩쓸었던 페미니즘 이슈는 순위에서 대폭 사라졌다. 하지만 이는 수그러든 게 아니라 저변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전반적으로 논문 편수는 더 증가한 듯 보였고 「여성혐오와 젠더차별, 페미니즘」(17위), 「전략적 여성혐오와 그 모순」(38위), 「여성혐오적 표현과 표현의 자유의 한계」(99위) 등 여전히 상위권은 ‘여혐’ 관련 논문들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이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것을 침해로 받아들이는 일부 남성들의 과도한 반응이 구조적인 문제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내년 2월부터 본격시행을 앞둔 연명의료결정법 때문인지 안락사(존엄사)에 대한 논문들이 200~300위권에 다수 포진했다. 접근방식은 헌법학적 고찰, 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한 개념 정의 등이고 해외사례를 자세히 리뷰해 한국은 어떤 식으로 법을 제도화시켜 나갈 것인지를 모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2017년 발표된 논문 중 많은 관심을 받은 것들을 추려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올해 발표된 논문의 이용순위 상위 500편 중 ‘4차 산업혁명’ 관련 논문이 거의 절반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이 주제가 뜨겁긴 뜨겁나 보다. 그 외에 앞에서 언급한 키워드를 제외하고 주목할 만한 2017년 발표 논문은 「’복학왕’의 사회학」(19위), 「촛불시위, 대통령 탄핵과 한국 정치의 새 국면」(84위), 「언론의 위기와 가짜뉴스 파동」(165위),「비즈니스 패러다임 변화와 그 활용방안」(215위), 「한미 FTA 재협상 시의 대응방안 고찰」(322위),「부동산 시장의 신뢰성 향상을 위한 블록체인 응용 기술」
(405위) 등이다.

 

강성민 리뷰아카이브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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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사건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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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_frame] DBpia Report R이 한국대학신문과 함께 성균관대학교 천정환 교수를 만났습니다. 천정환 교수는 2017년 8월 DBpia 인문학 논문이용 1위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메갈리아’ 논쟁까지 : ‘페미니즘 봉기’와 한국 남성성의 위기 의 저자입니다. 논문의 주요 내용과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 천정환 교수의 생각을 들어봤습니다.[/su_frame]

천정환 교수는 작년 5월 외국에서 강남역 사건을 접했다. 강남역 인근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10번 출구는 포스트잇으로 덮였다. 경찰은 조현병 환자의 피해망상에 따른 묻지마 범죄라며 여성혐오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고 발표했다. 여성들은 경찰의 해석을 거부했다. 강남역에서는 시위가 이어졌으며 ‘해시태그(#)살아남았다’는 구호가 됐다. 천 교수에게 이전과 다른 대중들의 단호한 움직임이 읽혔다. 새로운 여성주의 흐름의 맥락을 읽어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천 교수가 지난해 계간지 역사비평에 게재한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메갈리아’ 논쟁까지 : ‘페미니즘 봉기’와 한국 남성성의 위기 평론이 학술 지식 플랫폼 디비피아(DBpia) 인문학 분야 논문 이용 순위 1위(8월)를 차지했다. 여성주의 현상이 지속되는 동력과 맥락은 무엇일까. 지난 19일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천 교수를 만났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라는 맥락과 뒤이은 변화

천정환 교수는 사건 최초의 원인 분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여성과 스스로를 성찰한 이들에 의해 사건의 맥락이 재구성되면서 강남역 사건은 여성혐오 사건이 됐다는 것이다. 맥락은 문화연구에서 어떤 현상의 원인을 돌아보는 기준이 된다. 사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힘에 의해 곧 맥락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였을까.

“강남역 사건은 여성이 맥락을 구성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여성이 여성주의 운동에 나선 근본적인 배경은 그간 민주주의 문화가 확산됐고, 여성의 학력이 높아졌으며 경제활동 참가율도 늘어난 데 따른 현상일 것이다. 여기에 지난 20년 간 한국사회가 신자유주의를 경험해 오면서 사회적 불평등도 심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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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문화도 바꿨다. 일례로 ‘맨스플레인(Man+Explain, 남성이 여성을 가르치려 드는 오지랖)’이라는 표현을 만든 미국 여성주의 작가 리베카 솔닛이 지난달 26일 방한했을 당시, 130명을 대상으로 계획된 간담회에 1300명이 몰려 이목을 끌었다. 천 교수는 여성주의 담론이 독서, 강연, 문화적 민주주의 등에서 분위기를 크게 바꿨다고 바라봤다.

“여성주의의 내용이나 실천은 굉장히 치열하다. 요즘 20~30대 여성들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 같다. 서울에 사는 한 학생이 아침 열시에 인천에서 열리는 강연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같이 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념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여성들이 중무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배운 여성들이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이 열풍은 단기적인 게 아니고 지속성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문화에 부적응하는 ‘아재’들과 남성의 위기

여성주의에 대한 반작용도 높아졌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것에 반대하며 여성주의 담론이 도를 넘었다는 주장이다. 천 교수는 남녀 대결이라는 틀로 여성주의 운동을 단정 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경제적 계급, 지역, 학벌과 같은 문제가 얽히고 설킨 것이라는 설명이다.

“성차별과 여성혐오는 인류사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적 조건 하에서 그 버전이 달라졌다고 봐야 한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됐다. 실제로 그간 기성세대 남성들이 누리던 가부장제의 프리미엄이 이제 젊은 남성들에게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반작용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오래된 한국사회의 가부장제와 성차별, 여성혐오에 새로운 소외와 양극화가 합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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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교수는 오히려 이같은 반작용이 남성의 위기를 보여준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경제적 우위에 서서 가족을 부양한다는 남성의 지위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노년층 남성은 전 연령과 성별을 통틀어 자살률이 가장 높다. 중·장년층은 부채와 직장 스트레스로 인해 병들고, 젊은 남성들은 취업난에 허덕이며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주의 담론을 끌어나가는 여성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말하는 데 억하심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지식인이나 젊은 사람들 외에도 근저에서 일어난 젠더관계의 누적된 변화가 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중년 이상의 남자들은 대부분 지배적 남성성의 주변에 있고 고립돼 가고 있다. 경제적 지배계급 남성을 제외하면 이전과 같은 권위를 누리는 남자는 없다. 이들은 문화적으로 부적응의 상태에 있다. 이 부적응 상태를 넘어서는 일은 남자들의 삶 자체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 된다. 늙을수록 의존할 수밖에 없고 고독사와 자살을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성주의는 모두를 위한 것…새로운 남성상 찾아나가야”

천 교수는 평론에서 남성성의 위기를 짚어냈고 남성이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대안적인 남성상이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남성성의 위기인 자살에 대해서, 계급과 젠더의 문제를 은폐하는 청년세대론의 한계에 대해서 문화연구를 진행했다. 지금 주목해야 할 사안들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과 새로운 담론을 찾아나가는 모습에서 해결책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었다.

“긍정적인 남성상은 아직 잘 모른다고 보는 게 맞다. 여성주의 움직임이 계속되면 2~3년 뒤에 나타날 것으로 본다. 지금도 일과 가족의 모순을 느끼는 남성들이 많다. 문화연구에서는 문화를 통해 구현되는 지배와 저항, 사람들이 지역, 인종, 젠더, 계급과 같은 문화적 정체성의 소유자로서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담론에 개입하고 의미를 부여해 사회에 전달하는 것은 중요한 책무다.”

천 교수는 여성주의 담론이 요구하는 성차별, 여성혐오 혁파를 유지하면서 경제, 문화 구조, 관행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먼저 성찰하고 변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부적응하는 남성들을 위한 재교육, 차별금지법이나 혐오 발언에 대한 법적 규제도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 공동체 모두의 실질적 권익 향상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인식 개선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고, 우리의 엄마, 동생, 애인, 부인, 친구들이다. 여성주의자는 그중 더 모순과 문제점을 깊이 많이 느끼고 분노하는 사람들이라 할 만하다. 여성주의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여성과 성소수자에게는 물론 남성에게도 필요한 자유와 평등의 아이디어다. 단지 양성평등과 반성폭력, 반성희롱을 위한 쟁론만이 아니라 대안사회를 상상하고 논하는 지적 원천의 하나가 여성주의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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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폐허에서 다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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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2010년대 이후 한국 담론장에서 유행처럼 번져온 키워드는 바로 재난, 재앙, 파국, 천재지변, 폐허 등으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사건들을 암시하는 심상들이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은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영구적 승리를 선언한 이후로 예고되어 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는 다른 세계, 다른 질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표지하는 일말의 가능성이 비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으로 현상하는 정치는 단독적이고 일회적이며 반성 불가능한, 은총처럼 개시되는 사건의 정치학, 혹은 메시아주의이고, 그 반대급부에서 나타나는 것은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상들에 거리를 두면서도 이와 관련된 유비들을 체현하고 있는임옥희의 「재난 이후, 추락의 재의미화: 페미니즘은 어디로」(『여성학연구』, 25,  2015; 이 논문은 후에 저자의 저작 『젠더 감정 정치』(2016)의 부분으로 묶여 나왔다)은 흥미롭게도 재난 이후의 젠더정의와 페미니즘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헌데 어째서 저자는 재난과 페미니즘을 연결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그는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사태로부터 한국사회의 “미래가 가라앉고 있는 듯한 묵시록적인 비전”을 보게 된다고 말하며, 이를 1997년의 IMF,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와 병치한다. 그는 어떤 기대와 희망도 갖기 힘든 조건이 편재할 때, 파국의 상상력이 도처에 함께 편재하게 된다고 말하며, <지구를 지켜라>에서 등장하는 편집증에 시달리는 주인공, 인간사냥꾼들로부터 달아나며 방랑하는 「더 로드」 문화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사례들을 열거한다. 그런 한편 저자는 재난이 신의 심판으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재앙” 또한 그러한 천재지변으로 여겨짐으로써 재난의 효과는 개인이 감내해야할 책임이 되며, 재난의 일상화와 동시에 비극은 과잉상태와 과소상태에 빠진다고 말한다.

 

종말론 대잔치

이런 상황에선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에서부터, 페미니즘의 종언 등 갖은 종언의 시리즈들이 들끓는데, 저자는 페미니즘 또한 종말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한다(이 논문이 발행된 2015년 초만 하더라도 영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의 소요에서부터 시작된 페미니즘의 대약진(?)이 가시화되기 이전이라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저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재난이 망각되는 것인데, 그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처럼 취급된다”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법의 제정이 아니라, 오래오래 잊지 말고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이라 말한다.

잠시 다른 접근을 소개하자면, 이와 대조적으로 서동진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롯한 일군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세월호와 같은 사안을 통해 주체화되는 것과 별개로, 많은 이들이 파국, 재난과 같은 심상과 사건들에 우리가 매료당하는 이유를 캐물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바 있다(「변증법의 낮잠」, 2014). 요컨대 삼풍백화점 이후 한국사회, 와우아파트 이후 한국사회, 성수대교 이후 한국사회라는 식의 문제설정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현 시점엔 재난을 둘러싼 ‘애도의 공동체’와 ‘애도의 정치학’이 저항의 유의미한 준거로 격상되느냐는 것이다. 그는 제임슨 식 표현으론 역사 감각에 해당될 법한 적대 혹은 규정적 부정성의 상실이, 재난과 파국에 관련된 ‘사건event’들을 소비하도록 하는 기제가 아닌지 질문하며, 세월호를 둘러싼 지식인들의 반응이 역사에 대한 실어증에 가까운 것이 아닌지 추궁한다(한편 이러한 서동진의 문제의식은 주체-객체, 표상, 재현, 개념으로부터 도피하며 존재론의 실체화로 나아가는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적 존재론 등 그레이엄 하먼, 브루노 라투르를 위시한 신유물론의 흐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볼 때, 본 논문의 저자(임옥희)는 어떤 희망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조응하는 의식형태가 바로 “파국의 상상력”이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국’과 관련된 담론들을 이데올로기로서 규정하면서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재난들이 날마다 일어난다”고 말할 때는 ‘파국(재난)’을 일종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인 것으로 자연화시키는데, 이는 그가 양자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거나, 개념상의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어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국은 새로운 꿈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말하며 벤야민의 환등상 개념을 인용한다. 즉 “파국적 상상력의 충격이 마비를 초래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환등상’과 같은 꿈에서 깨어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파국적 상상력은 환등상의 고착에 봉사하는 화석화된 신화인 동시에 미래의 창조적 가능성을 암시하는 회복과 치유이며, “폐허에 남겨진 사물들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바닥모를 추락의 순간은 꿈에서 깨어나는 각성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때 파국은 종언이면서 시작인 것으로 간주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의 종언은 한편으로는 몰락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작”으로 볼 수 있고, “페미니즘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편차와 틈새로 인해, 다양한 페미니즘으로 귀환할 것”이라 주장하는데, 이러한 진단 직후 페미니즘의 귀환정도가 아니라 페미니즘의 광풍이 불어닥친 상황을 생각하면 꽤 의미심장하다(허나 메르스갤러리에 이어 메갈리아에서부터 워마드, 혹은 트위터 등지의 성폭력아카이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전선(?)이 남녀 간의 투명한 대립으로 상상되며, 그로부터 어떤 물질적인 원인과 기제도 찾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지식인의 역할은 파국을 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전선을 철저히 상징화하고 원인을 규명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저자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추락한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자들(조앤 스콧, 낸시 프레이저 등)을 언급한 뒤, “매춘, 성노동, 성폭력, 성희롱, 강간을 비롯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대상화하고 물신화하는 것에 대한 페미니즘의 저항은 젠더 정의의 실천이 아니라 남성을 거세하려는 ‘불편하고 편파적인’ 젠더당파성으로 읽”히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역설을 드러내 보여주는 존 쿳시의 소설 「추락」을 검토한다. 저자에 따르면 가야트리 스피박이 비평한 적 있는 이 소설은, 페미니즘의 정치학에 화두를 던져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국의 재의미화
숭고한 결단?

「추락」의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는 이혼한 중년 남성이자 전형적인 가부장적 백인 지식인으로서,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교수로 재직하며 따분하게 학생들을 가리키는 인물이다. 그는 이따금 매춘으로 성욕을 해결하며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한 여학생과 잠자리를 하게 되고, 그녀가 루리를 신고함으로써 성희롱혐의를 지고 진상규명위원회에 추궁 당하게 된다. 적당히 합의하고 심리 상담을 받으며 사과를 한다면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는 외려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를 되물으며 자신을 변호한다. 그는 자신이 법적으론 유죄임을 인정하지만 그에 반성하지는 않겠다고 말하며, 중년 남성의 사랑을 불가능한 것으로 단죄하는 페미니즘적 윤리에 반발한다. “사랑을 권력관계로 해석하고 나이를 초월할 수 있는 낭만적 사랑과 에로스를 세대간의 거래로 정치화하는 페미니즘적인 해석을 그는 수긍할 수 없”는 것이다. 루리는 몰락을 경험하고 딸 루시가 사는 케이프타운 고지대의 흑인거주지로 건너간다. 루시는 레즈비언이며, 꽃 농사를 지어 팔고 동물복지와 관련된 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보는 아버지에게 루시는 완곡하게 자신의 활동이 사회적으로 위계 지어진 ‘좋은 일’보다 못할 것이 없음을 어필한다. 그녀에게는 “여기에서의 삶이 유일한 삶”이며, 이를 “동물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인간과 동물의 차이와 분할은 없고, 따라서 더 높은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관해 부녀는 완전히 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다. 그러던 중 흑인 강도들이 루시의 집에 칩입하여 루리를 가둬놓고, 루시를 강간한다. 루리는 경찰에 신고해야한다고 말하며 강간범들을 처벌하여 정의를 실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루시는 이를 역사적 부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신고를 원치 않는다. 루시는 강간으로 인해 생겨난 태아를 지우려하지도 않고, 강간을 사주한 흑인 농장주의 세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한다. 루시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하며, 이는 단순히 굴욕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루리는 자신이 저주했던 결혼, 가정, 아이 등이 딸을 통해 되돌아옴을 확인하고, 자신이 끌고 다녔던 수컷강아지를 안락사 시키는데, 이는 모든 소여의 질서로부터 추락한 루리 자신의 상징적 죽음을 암시한다. 모든 체계와 상징으로부터 이탈하여 무nothing의 상태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su_quote]루시는 정상적인 이성애가부장제가 규정했던 것들을 전부 깬 인물이다. 레즈비언이면서 강간으로 임신한 아이를 낳고, 강간을 당했음에도 도무지 그것을 고발하고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짓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의 품위를 측정하는 화폐인 이성애정상성에 부착된 재생산과 애정가치를 완전히 치욕으로 몰아넣는다. 그녀는 강간을 치욕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역사의 부채를 변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19쪽)[/su_quote]

저자는 소설이 그리는 타자로서의 루시는 추락의 의미를 재의미화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때 “역사의 부채를 여자를 통해서 갚아야”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역사의 부채를 상환하기 위한 알레고리적인 인물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게 루시의 결단은 페미니즘이 다시 시작할 지점을 암시하는 환유적 표지이다. “루시는 부채의 역사를 상속함으로써 미래를 약속하는 자”이며,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하고, “부채의 청산과 더불어 치욕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루시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치욕적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순순히 그 점을 인정한다”는 말인데, 이는 상징계를 갖지 않는 동물과 그녀가 맺는 도착적인 수평적 관계에서부터 암시된다. 그녀는 대상과의 모든 거리와 차이를 존재론 속에서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모든 사물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인간과 동물의 거리는 삭제된다. 언어와 기호, 상징, 재현의 지배를 유발하는 기제를 끝까지 상대하고 그것을 탐색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목가적이고 관조적인 영성주의와 관계하는 동일성이 그 자리를 채운다. 언어가 수반하는 동일성은 지배와 공모하는 현실적인 환상이지만, 반대로 존재론이 수반하는 비위계적 동일성을 택한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또한 그조차도 결국 언어를 매개로 사고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저자가 루시의 선택을 지나치게 낭만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녀에게 역사의 부채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고행(흑인들에 의한 욕보임)을 통해서, 주관적으로만 해소될 뿐, 결코 백인들의 식민통치와 지배의 흔적을 객관적으로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의 부채를 객관적으로 지양하는 것이라기보다 역사로부터의 도피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루시의 실천은 급진성을 담지한 세속화된 시민의 저항윤리가 아닌, 전근대적 소승불교의 구도자와 유사하다. 오히려 모든 상징(여기엔 지배와 위계가 포함되지만, 인권 또한 포함된다)을 거부하는 순간 도래하는 것은 추상적 상징의 위계적 배열 보다 끔찍한 구체적인 인격적 예속(강간을 모의한 농장주에게 보호를 받고자 하는)인 것이다. 이런 견지에선 “자기 자신에게 타자라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굴욕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야말로 심리의 영역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기에 상호주관성과 주체의 탈중심성을 강조하는 버틀러식의 테제는 외려 소여의 지배와 공모한다. 차라리 우리는 부르주아적 주체 개념으로부터 달아나는 순간 ‘나’와 대상세계와의 비판적 거리마저도 소멸하게 된다는 역설을 떠올려야하는 것이 아닐까.

글로벌 타자의 몫과
글로벌 젠더정의를 위하여

그러나 저자는 “치욕 속에서 평등해지고 내가 타자를 관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제나 타자에게 포획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추락의 시학이라고 한다면, 추락 가운데서 ‘마법적으로’ 구원으로 나갈 수 있는 비상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라며, 루시의 행위를 긍정하고, 이를 “지구적 젠더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단초로 출발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여자들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비체로 떠”도는 상황을 지적하며, 그 예로 제 1세계 남성들을 욕망하는 우크라이나 여성들, 한국의 남성들을 욕망하는 베트남 여성들, 외국인 신부를 거느린 스위스 남성들이 기거하는 태국의 스위스마을을 예로 든다. 이어 그는 하층 이주노동자들의 초국가적 이동이 ‘아래로부터의 초국적 실천’을 유발하며, 이는 “다국적 혼종성을 재영토화”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즉, “결혼이주는 사랑, 신뢰 등의 감정교환과 송금 같은 물질적 지원이 새롭게 교환가치를 획득하는 ‘초국적 호혜관계’의 한 형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글로벌 경제질서 속에서 몫 없는 자들로서의 여성들의 몫을 찾기 위해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는 ‘지구적 젠더정의’를 실현해야 하고, 그 방안은 ‘최소수혜자 차등원칙’에서부터 시작해서 “비체화되어 배제된 사람들, 잉여, 좀비, 유령으로 떠도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러한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저자의 주장을 따라, 지구적 차원의 ‘젠더정의’ 혹은 지구적 규모의 젠더윤리학을 설립해야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글로벌 자본세’를 부과할 것을 역설했듯, 세계화 이후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더 이상 일국적 차원의 해법으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국민국가가 강제할 수 있는 법 제정의 효과와 위상을 무시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는 양자를 동시에 사고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추락을 대하는 루시의 태도를 논한 저자의 주장은 페미니즘이 폐허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추는 유비에 가까울 것이다. 허나 이제 저자의 바람대로 페미니즘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시점에, 우리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 전통적으로 경험은 이성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저평가되어 왔기에, 말할 수 없는 것, 상징화에 저항하는 것, 언어 외부에 있는 것, 남성의 부정항으로서만 존재하는 것 등으로 특징지어진 ‘여성’ 주체에 관한 논의는 마찬가지로, 경험의 소멸을 한탄하고 경험의 계기들을 강조한 벤야민의 논의에 매료당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보여준 루시의 결단에서 볼 수 있듯, 파국적인 사건에 대한 침잠은 그와 한 짝을 이루고 있다. 허나 그런 속에서 글로벌 젠더정의를 제정하고 설립하는 일은 이뤄질리 만무하다. 세계적 차원의 불평등을 인지시켜주고, 일국적 규모 이상의 젠더적 양태를 일깨워주는 것은 결국 추상적인 이성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사건, 혹은 반대로 말해질 수 없는 사건 자체가 정치의 대상이 되는 한 페미니즘은 남녀 대립의 구도 이상의 전선을, 혹은 대립을 구조화하는 기제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취해져야할 첫 번째 단계는 파국을 논하지 않은 채 정치를 사유하는 일이 아닐까. 외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적 시간성 속에서 정치를 사유하는 일이 아닐까.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구원 없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2000년대 한국문학에 나타난 ‘재난’과 ‘파국’의 상상력」
정여울, 2010, 『문학과 사회』, 92, 333-346.

「증오, 폭력, 고발: 반지성주의적 지성의 시대」
서동진, 2017, 『황해문화』, 94, 87-103.

정강산 리뷰어  wjdrkdtks9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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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vs. 페미니즘: 가사노동을 둘러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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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오늘날 양자의 실천이 교차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을 짐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경제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려하고, 계급 모순 이외의 모순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페미니즘은 단지 문화적일 뿐이고, 최종심급에 무지하며 성별환원주의적인 정체성 정치의 경향을 띤다” 대략 이런 모양새로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지 않은가. 과연 이들이 상호협력적일 때가 있기나 했던 건지 궁금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알다시피 볼셰비키는 10혁명에 뒤이어 곧바로 1918년의 1차 헌법에서, 북한은 1946년 북조선인민위원회의 발족과 동시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내전 승리 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더불어(물론 쑨원의 삼민주의에 입각한 중화민국의 1946년 헌법에서 여성참정권이 먼저 공표되었으나, 헌법 반포를 전후하여 공산당과의 2차 국공내전에 돌입하며 헌정이 실질적으로 중지되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참정권을 전면적으로 천명했다. 이렇듯 현실 사회주의국가에서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은 초기 자유주의적 개혁의 흐름과 결합한 여성참정권운동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후로, 세계 각지의 많은 좌파들과 급진주의자들의 반자본주의적 실천들과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당대의 뛰어난 혁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르 콜론타이 등은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연대가능성을 증언하는 화신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동거는 대략 70년대를 기점으로 깨지고 마는데, 그것은 객관적 측면에선 권위적인 관료들과 국가에 대한 반발에 잇따라 자유를 지상의 가치로서 천명했던 68을 포함하는 당대의 정세적 측면과,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프레드릭 제임슨)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 등의 영향으로부터 연원하며, 주체적 측면에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가사노동 논쟁”에서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경상대 경제학과 정성진 교수(이하 ‘필자’로 표기함)의 논문 「가사노동 논쟁의 재발견: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페미니즘의 결합 발전을 위하여」(『마르크스주의 연구』, 10(1), 2013)은 이 가사노동 논쟁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다시금 양자의 연대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 쓰인 글이다. 가사노동 논쟁 당시 논자들이 공통적으로 전제했던 “‘무급 가사노동 착취-> 자본의 잉여가치 증대’” 명제를 비롯한 ‘이중체계론’의 함의와 한계를 따져보는 것이 본고의 주된 목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리뷰 아카이브

 

생산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
비생산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

필자에 따르면 가사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지, 혹은 생산적 노동인지를 규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페미니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간에 상충하는 입장이 제출 되었는데, 이는

1. 가사노동의 생산물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갖는 노동력상품이라고 간주하고, 따라서 가사노동은 가치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노동이며,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여성은 착취당하고 있다“는 입장과,

2.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임금노동과 달리 가정 구성원의 직접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만 생산하며, 노동자계급의 전반적 유지와 갱신에 기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생산적이지 않다고 보”는 입장으로 나뉜다.

당시의 논자들을 위의 도식에 따라 분류해본다면, 논의의 강조점은 조금씩 다르지만, 거칠게 묶어 전자에는 달라 코스타(Dalla Costa), 세콤베(W.Seccombe), 후자에는 벤스톤(H.Benston), 힘멜바이트(S.Himmelweit), 모훈(S.Mohun), 몰리뉴 (J.Molyneux) 등이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위의 논자들이, 그 첨예한 대립에서조차 근본적인 문제설정을 공유했던 것으로 바라볼 수 있음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의 두 입장은 가사노동을 생산노동으로 간주하는지 여부에 대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이 자본의 잉여가치 증대에 봉사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며, 이는 당시 가사노동 논쟁 참여자 대부분이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에 따르면 “무급 가사노동 착취->자본의 잉여가치 증대”라는 도식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가부장제 가족의 ‘이중체계’ 혹은 ‘접합’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도식은 “가사노동에 대한 경제적 보상(‘Wages for Housework’)을 당면과제로 요구했던 당시 여성해방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가사노동 논쟁의 주역들이 공유했던 위와 같은 명제의 문제의식과 어떤 수준에서의 설명력을 인정하면서도, 근본적으론 “가사노동이 자본축적의 진전에 장애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동시에 고려해야”함을 지적하며, 원리상 이러한 도식이 마르크스의 가치론 속에선 “논증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그러한 논증의 비유효성을 열거한다. 우선 필자가 드는 첫 번째 예는, 굳이 마르크스의 가치론이 아니라 스라파(P.Sraffa)의 생산가격 방정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예는 사용가치만을 만드는 구체적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을,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추상적 노동인 생산노동과 동일한 기준으로 상정함으로써 유발되는 개념적 혼란이다. 시장을 통해 사회적 총노동 속에서 승인됨으로써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추상적 노동이 구체적인 유용노동과 비교하는 순간, 상품에 관한 마르크스의 핵심적 진술, ‘가격 형성과 교환의 준거점으로서의 가치’라는 과학적 도식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노동의 이중성을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데에 동원할 수 없게 된다. 덧붙여 “가사노동이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무상으로 제공함으로써 노동력 가치를 억압한다는 주장” 또한 한계를 갖는데, 그 주장에 따르면 무급가사노동의 축소 경향은 이윤율의 저하를 초래했어야 하나, 현실 속에서 “무급 가사노동의 축소는 자본이 이용할 수 있는 잉여노동의 풀을 증대시킴으로써 자본주의에 고유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경향을 상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어 필자는 1980년대 이후 고소득 OECD국가를 비롯한 한국에선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급격히 증가했고, 가사노동의 시장화가 진척되었으나, 자본주의의 발전에는 아무런 타격을 가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가사노동과 자본축적 사이의 관계는 이처럼 양가적이기에, 보다 세심하고 총체적인 접근이 요구됨을 주장한다.

이후 필자는 가사노동을 비생산노동으로 간주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장을 반복하며, 생산노동과 비생산노동의 개념적 구분을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에서 생산노동은 무엇보다 사용가치가 아니라 시장에서의 판매와 이윤을 목적으로 가치와 잉여가치, 즉 이윤을 생산하는 노동인데, 가사노동은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무급노동이기 때문에, 가치 생산 노동이 아니다”. 허나 이는 가사노동의 위상을 폄하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가사노동이 (상품교환의 근거가 되는,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가치’를 직접적으로 생산하지 않는 것과, 그것이 노동력 재생산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양립가능 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론의 계승이냐,
가치론의 확장이냐

따라서 우리가 필자의 논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어떤 유일하고 소중한 것을 명시하기 위한 일상 용법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마르크스의 엄밀한 개념으로서의 ‘가치’가 가사노동 논쟁에서 상당부분 오해되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의 삶을 재생산하는 데에 소모되는 상품들을 생산하는 일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통해 규정될 수 있다. 이때 “사회적으로 필요한”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적 총노동과 개별 노동 간의 관계 속에서 비교를 통해 수렴하는 평균값’이며, 따라서 상품의 가치는 이 평균값 언저리에서, 사회적 관계와의 매개를 통해 규정된다. 허나 가사노동(가정 내부에서의 빨래, 밥 짓기, 설거지, 육아 및 돌봄, 청소 등)은 그것이 외주화 및 시장화 되지 않는 한, 평균으로 수렴하기 위한 비교대상을 갖지 않으며, 그 노동의 과정과 산물이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한 것도 아니다. 즉 가사노동은 시장에서의 교환을 염두에 두고 작동하는 ‘추상적 노동’이 아닌, 구체적 노동인 것이다.

경험세계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노동은, 이런저런 신체적 소요를 야기하는 다양한 구체적 노동이 있을 뿐이다. 허나 그것이 고용관계 속에서 이뤄지며 화폐와의 교환 속에서 수행되는 임금 노동인 이상, 구체적 노동은 자본주의적 추상화를 거쳐 이중화되고, 동시에 생산, 교환, 유통, 분배의 전 과정에 유기적으로 참가하는 추상적 노동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노동의 이중성,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을 구분한 까닭이며, 전자를 사용가치에, 후자를 교환가치에 조응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그 자신의 업적을 ‘노동과 노동력의 차이를 구분해낸 것’이라 설명한 이유이다. 즉, 마르크스에게 (상품)‘생산’개념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매개된 것이며, 그 속에서 특징적인 것이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생산노동’이란 그 앞에 ‘(자본주의적)’, 혹은 ‘(가치를 생산하는)’이란 표현을 생략한 상태로 사용되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연대를 염두에 둔 이론적 기획 속에선 오히려 가사노동은 비생산노동이며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히 합의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요지이다. 즉, “가사노동은 마르크스가 말한 ‘진정한 노동(reale Arbeit)’이라 할지라도 노동력상품의 가치 규정에는 정의상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자본주의 하에서 비자본주의적인 제도들의 역할과 위상을 설명하기 위해 던(B.Dunn)등이 시도하는 가치개념의 확장을 비판하며, 그와 같은 주장을 “초역사적인 가치 개념”으로 간주하고 “리카도의 투하노동가치론으로 역행”하는 것이라 말한다. 결국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사노동과 같은 비상품 비자본주의 영역을 설명하는 데는 마르크스 가치론의 설명력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오히려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과 이에 따른 가사노동의 시장화 현상이 “마르크스 가치론의 적용 범위”를 확장시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가사노동 논쟁의 내적 한계와
페미니즘의 체제 내화

그가 보기에 가사노동 논쟁 자체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1. 남성과 여성간의 분업과 차별이 발생했던 이유를 증명하고자 했던 여성주의의 애초의 목표를 망각하고, 성별분업과 차별을 전제로 삼은 채 진행된 논의(한편 이는 남녀임금격차를 성별대립의 관점으로 독해하는 최근의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2.(주로 여성이 수행하는)무급가사노동 이외에 유급 여성노동의 문제를 소홀히 했다.

3. 논의 전개 속에서, 주제는 당초 가사노동 논쟁의 쟁점이었던 가사노동이라는 토픽을 벗어나 ‘재생산 노동’과 ‘사회재생산론’으로 이동하는데, 이는 임금노동-생산, 가사노동-재생산이라는 도식을 만들어 냄으로써 양자 모두가 함께 “현재와 미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사회재생산에 연결되어 있음을 간과”하는 것이었으며, 성인 남자노동자의 유지에만 강조점을 둠으로써 남성노동 재생산 이외의 세대재생산의 문제를 간과했다.

4.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양자를 결합하는 방식으로서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와 역사적 산물로서의 가부장제 모두를 강조할 것을 주장하는, 이른바 ‘이중체계론’을 제창한 하트만(H.Hartmann)에 이어 이를 체계화 시킨 델피(C.Delphy)의 ‘가내 생산양식론(domestic mode of production)’에 따르면 “가내생산양식에서 남성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는 착취자 계급”이 되는데, 이에 입각한다면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양자를 동시에 평등한 심급들로서 인정하는 것이 당위적으로 요청되어 ‘전제’가 되기 때문에, 애초에 양자의 관계와 그 구체적인 역학을 규명하고자 했던 가사노동 논쟁 본래의 문제의식이 흐려진다.

필자가 제시하는 이러한 모든 한계들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과정에서 식별된 것들인데, 그 결정적인 불화의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관철과 함께 이뤄진 정치의 보수화와 급진운동의 약화로 논쟁 당초의 문제의식들은 이어지지 못하고 “거의 소멸”되는데, 이에 따라 사회운동과 결합한 페미니즘의 영향력은 급격히 수축하여 많은 분파가 이론적 방향으로 선회하고 경도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와 공모하고, 엘리트화 되며, 제도화되고 협소해졌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와의 반목인 동시에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의 공명이었으며, 자본주의를 향한 문제의식에서의 퇴보를 뜻했다. 필자는 포겔(L.Vogel), 기메네즈(M.Gimenez), 하우크(F.Haug) 등과 함께 이러한 과정에 주목하며, 페미니즘이 체제 내화 되어가는 과정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간의 연대 가능성을 긍정하고, 그 근거를 마르크스의 <기계와 대공업>(자본론 1권 15장)에 대한 독해로부터 찾는데, 이 속에서 마르크스는 “19세기 페미니스트”로서 제시된다.

 

19세기 페미니스트로서의
마르크스

[su_quote]기계는, 근육의 힘을 요구하지 않는 한, 근육의 힘이 약하거나 또는 육체적 발달은 아직 미숙하지만 팔과 다리는 더욱 유연한 노동자를 사용하는 수단으로 된다.(…)기계는 즉시로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노동자 가족의 구성원 모두를 자본의 직접적 지배하에 편입시킴으로써 임금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되었다.(…)기계는 노동자 가족의 전체 구성원들을 노동시장에 내던짐으로써 가장의 노동력의 가치를 그의 전체 가족구성원들에게로 분할한다. (중략은 인용자. 「자본I」, 김수행 역, 비봉, 1991, 503-504쪽. 36쪽에서 재인용)[/su_quote]

여기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 전유를 위한 생산성 향상시도의 연장에서 이뤄진 기계설비의 도입이 아동노동과 여성노동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며, 자본이 “여성노동을 대거 활용할 수 있게 했다”는 점과, 이를 통해 “성인 남성 노동력의 가치가 전가족 구성원으로 분할되어 성인 남성 노동력의 가치가 저하”되는 동시에 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율, 즉 이윤율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밝힌다. 필자에 따르면 이는 가부장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성 노동자와 남성 자본가가 합작하여 가족임금체제를 유지하고 노동시장에서의 배타적 지위를 누리겠다는 주장이 아니라,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사회 전체 측면에서의 자본주의적 착취의 심화의 연장에서 이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필자는 마르크스가 동시에 자본주의의 생산력 향상의 시도가 열어젖힐 수 있는 긍정적 토대를 발견하기도 했음을 강조한다:

[su_quote]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종래의 가족제도의 해체가 아무리 무섭고 메스껍게 보일지라도 대공업은 가정의 영역 밖에 있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과정에서 부인, 미성년자, 남녀 아동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가족과 양성관계의 보다 높은 형태를 위한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창조하고 있다.(…) 남녀노소의 개인들로서 집단적 노동 그룹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자연발생적이고 야만적인 자본주의적 형태(여기에서는 생산과정이 노동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과정을 위하여 존재한다)에서는 부패와 노예상태의 원천으로 되지만, 적당한 조건하에서는 이와 반대로 인간적인 발전의 원천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또한 명백하다. (중략은 인용자. 같은 책 617쪽. 38쪽에서 재인용)[/su_quote]

이때 마르크스가 가동시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논하는 “변증법적 비판”의 원형으로서, 이는 곧 대상의 모순, 양가성을 파악함으로써 그것의 전화가능성을 승인하는 인식론이다. 가부장제도의 와해와 여성노동의 문제들을 논하기 위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요체를 종교비판과 물신주의 비판에서 뿐만 아니라, 기계화 비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필자는 마르크스를 “19세기 페미니스트”로서 규정하고, 페미니즘의 급진화와 반자본주의 투쟁과의 연대에서 여전히 마르크스의 원형적 사유가 일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는 그 구체적인 방식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으며, 양자의 연대 가능성 자체를 하나의 전제로서 간주하길 요청하는 데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현재화시켜낼 수 있을까? 혐오, 폭력과 관련된 담론이 여성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주된 개념어가 되어버린 오늘날, 사실상 성별분업과 남녀 임금격차, 차별 등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체제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유물론적 설명의 모델은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유물론적 전제를 공유한 채 수행 되었던 가사노동 논쟁을 복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계급을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특수한 정체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력과 특권 관계를 계급억압으로 환원하지 않는”(J.Brenner/N.Holmstrom)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출현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함께 읽으면 좋을 논문

「생각하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지식인이 두루두루 살피는 삶의 세계」
서동진, 2010, 『여/성이론』, 22, 248-258.

「마르크스 사상의 역사지리적 생태과학으로의 확장과 사회주의 페미니즘과의 만남: ‘적-녹-보라 연대’의 약도 그리기」
심광현, 2013, 『마르크스주의연구』, 10(1), 79-123.

정강산 리뷰어  wjdrkdtks93@hanmail.net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페미니즘의 여전한 인기∙∙∙인공지능, 4차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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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_frame align=”leftnone”]DBpia Report, R은 DBpia의 논문이용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매월 한 차례 분석 기사를 게재합니다.
이번 10월은 10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한 달간 DBpia 논문 이용 순위 1위부터 1만위를 대상으로 분석하며,
모두 4부에 걸쳐 게재됩니다.

 
(1) DBpia 10월 이용통계 상위 1만편 논문 키워드 분석
(2) DBpia 10월 이용통계로 본 사상가, 문인, 영화감독
(3) DBpia 10월 이용통계로 본 인문학 트렌드
(4) DBpia 10월 이용통계 상위 100위 변동현황[/su_frame]

 

r마지막으로 가장 인기를 끈 논문들이라 할 수 있는 100위권 논문 그룹에서 9월과 10월의 차이를 짚어보려 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상위권 100위까지 논문들의 변동사항이다. 그중에서도 9월에 1~50위를 차지한 50편이 10월 통계에서는 각각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래  9월에 1~10위를 차지한 논문들 중 100위권 밖으로 밀려난 것은 단 2편뿐이다. 나머지 8편은 소폭 이동을 하며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11~20위도 2편을 제외한 나머지는 남아 있었고, 그다음부터는 3편(21~30위), 6편(31~40위), 5편(41~50위)이 100위 밖으로 밀려나 변동폭이 커졌다. 지난달 1~50위 논문 중 이번 달에 100위권 밖으로 밀려난 논문은 총 18편으로 전체의 약 37% 수준이다. 이 같은 수치는 한 논문에 대한 관심 이용 층이 예상보다 길고 두텁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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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점은 공학·실용 분야 논문들의 등락폭이 인문사회 분야보다 월등이 높았다는 것이다. 9월에 6위를 기록한 「(…)전장관리정보체계 소프트웨어 시큐어 코딩룰(…)」은 245위로, 8위 「LVC-G COTS SW  개발 기대격차 분석」은 546위로, 12위 「호주 대학생들의 한식에 대한  인식과 선호도 연구」는 3107위, 40위 「동시공학적 접근법 및 응용 사례」는 1491위로 각각 떨어졌다. 등락폭이 가장 컸던 논문은 「성공적인 고객 경험 관리를 위한 서비스 경험 실사」로 41위에서 6,064위로 급락했다. 이는 공학이나 실용 분야 논문의 정보 사이클이 인문사회 분야보다 짧고, 집중적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아주 세부적인 주제일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무인기/드론의 이해와 동향」(35위->102위)이나 「3D 프린팅 기술과 건축적 활용」(36위->432위) 등 신기술·첨단기술 관련 논문들은 순위가 하락해도 소폭이었으며, 순위는 하락했지만 다운로드 횟수는 오히려 지난달보다 늘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같은 공학 분야라도 타 분야와의 접목성이 높은 분야는 광범위한 이용자의 선택을 꾸준히 받는 것으로 보였다.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유일하게 1편이 10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계간 『창작과비평』에 실린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그것인데, 24위(168회)에서 368위(84회)로 대폭 떨어졌다. 이는 지난 5월 맨부커상 수상 이후 갑자기 이용자가 몰렸다가 점차적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1위부터 100위까지의 논문을 지난달 자료와 비교한 표다. 맨 왼쪽 순위에서 괄호 속은 9월의 순위라 비교해서 볼 수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최상위권 이용률(다운로도 횟수)가 100~200회 정도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반면 중상위권의 다운로드 횟수는 지난달보다 100회 가까이 늘어났다. 머리가 가벼워진 대신 허리가 두터워졌달까? 아무튼 전체적으로 볼 때 100위권 다운로드 횟수 총합은 9월보다 10월이 높다.

새롭게 9월엔 1만 위 바깥이었지만 10월에 100위권으로 급속히 진입한 논문들은 모두 18편이었다. 이중 70%가 넘는 13편이 공학·과학 분야다. 앞서 말했듯이 공학 분야 논문들은 단시간으로 집중적으로 소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현장 설문조사를 통한 실사연구를 통한 정책 관련 연구들이 많이 포진돼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브렉시트 현장 리포트와 이후의 영국」은 유일하게 사회과학 분야에 속하는데, 논문은 아니고 월간지 기사였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 상황을 리포트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련 연구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su_accordion]
[su_spoiler title=”9월 이용통계 10,000위 밖에서 10월 이용통계 100위권으로 진입한 신규논문” style=”fancy”]
「[두뇌사용설명서] 단월드-브레인 공동기획」 2편(18위/44위)
「비혼 남녀의 콘돔사용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부장성」(32위)
「지게차용 추진축의 가속 수명 평가」(35위)
「조기 영어 교육이 유아의 이중 언어 발달에 미치는 영향」(51위)
「공항서비스에 대한 인천국제공항 이용자의 지각된 서비스품질과 만족에 관한 연구」(54위)
「SU-8 기반 나노 구조가 PC12 세포의 신경돌기 성장에 미치는 영향」(56위)
「폴리에틸렌 시편의 균열진전거동 시뮬레이션」(60위)
「한국영유아 보육정책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65위)
「유한요소기반 다중스케일 연성파손모사기법을 이용한 원주방향 균열이 존재하는 탄소강 실배관 예측 및 검증」(68위)
「고온 성형을 이용한 인코넬 718 샌드위치 코어 구조 성형」(75위)
「칼만 필터를 이용한 휠로더 버킷 적재물의 질량 추정 시스템」(78위)
「브렉시트 현장 리포트와 이후의 영국」(82위)
「포토리지스트 혼합액의 미세패턴내 표면 및 체적 변화율의 제어를 통한 마이크로렌즈 제작에 관한 연구」(84위)
「Experimental Investigations on the Temperature Characteristics of Loop Heat Pipe」(93위)
「배플이 설치된 잠수함 압축기용 오일 냉각기의 전열 성능에 관한 수치연구」(94위)
「마이크로 파일의 시공 사례 및 공법 개선 방안」(99위)
「강원랜드 리조트카지노의 강원지역에 대한 경제적 파급효과와 영향력 분석」(100위)[/su_spoiler]
[/su_accord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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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적 양상을 보자면 지난 9월의 가장 두드러진 흐름이었던 페미니즘(여혐)은 여전히 최상위권에 포진해 있지만 약간씩 순위가 하락했고, 사드 배치(핵실험)·브렉시트 등 국제정세 이슈, 인공지능·3D프린터·드론·사물인터넷 등 인기 과학주제도 등락폭이 미미했다. 1~100위 논문들의 전체적인 트렌드는 9월의 상황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범위를 1만위로 넓혀서 이들 논문 편수를 헤아려보면 이들 주제에 대하여 사회적 니즈가 점점 증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페미니즘(25편)·성역할(18편)·여혐(22편)·젠더(45편) 등 관련어로 논문들이 끊임없이 검색된다. 이는 ‘여성’이란 단어를 키워드로 했을 때 262편의 논문이 검색되는 반면, ‘남성’을 키워드로 했을 땐 28편에 그친다는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인공지능(로봇·딥러닝)을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상위 1만 위 논문 중 96편이나 검색된다. 사물인터넷(72편), 드론(25편), 3D프린터/프린팅(23편), 4차 산업혁명(19편) 등으로 1만 위에 이들 관련 논문이 235편이다. 연관 단어로 좀 더 확장 검색하면 400편까지 되지 않을까 예상된다.

다만 유독 눈에 띄는 한 편의 논문이 있다. 하나는 「제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에 미치는 영향」으로 이 논문은 DBpia에 9월 20일 이후에 등록된 논문이다. 그런데 9월에 곧바로 4000위권을 차지하더니 10월에는 33위로 순위가 껑충 뛰었다. 4차 산업혁명은 다가오고 있는데 제대로 된 긴 호흡의 정책과 그에 따른 예산 책정과 실효성 있는 R&D는 이뤄지고 있지 않은 우리 사회의 불안증도 겹쳐 읽을 수 있었다.
 
[su_frame align=”leftnone”](1) DBpia 10월 이용통계 상위 1만편 논문 키워드 분석
(2) DBpia 10월 이용통계로 본 사상가, 문인, 영화감독
(3) DBpia 10월 이용통계로 본 인문학 트렌드
(4) DBpia 10월 이용통계 상위 100위 변동현황[/su_frame]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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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페미니즘’, 그 황당한 헛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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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2016년 5월. 강남역 인근에서 젊은 여성이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살인’의 배경에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여성혐오’가 자리한다는 점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은 큰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으며, 다양한 형태의 추모 행렬을 통해 애도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계기로 ‘여성혐오’를 둘러싼 사회문제에 대하여 온라인상에서는 대립각을 세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구분하는 것을 언짢게 여기는 시선과, 이 ‘죽음’이 ‘나’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공감 속에서 두려움을 표출하는 시선이 첨예하게 맞부딪친 것이다. 논쟁은 실로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일상 속에서 자행되는 ‘여성혐오’를 문제시하는 모든 수사들이 ‘꼴페미’, ‘프로불편러’와 같은 말로 조롱되기에 이르렀다. 정인경은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인터넷 여성혐오」(『페미니즘연구』, 16, 2016)에서 오늘날 인터넷 매체 속에서 다뤄지고 있는 여성혐오적 발언들이 ‘포스트페미니즘’ 이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포스트페미니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을 밝히고 ‘성차의 윤리’를 통하여 ‘혐오’를 극복하고 공생을 모색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논문으로 쓴 리뷰 “‘위대한 거짓’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여성혐오” 가 있다-편집자]

[su_pullquote align=”right”]‘포스트페미니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을 밝히고 ‘성차의 윤리’를 통하여 ‘혐오’를 극복하고 공생을 모색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su_pullquote]

여성혐오 문제는 남녀의 성별을 이원적으로 구분하는데 그 근원이 있다. 여기서의 ‘구분’이란 남성을 공적인 영역에, 여성을 사적인 영역에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별의 차이를 표상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우에노치즈코는 이와 같은 ‘성별이원제’에 대하여 “여성혐오는 특정한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 전반에 스며있는 여성의 열등성을 전제하고 강화하는 관념”이라고 주장한바 있다. 필자는 문명적 관점에서 남성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언제나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주체성’ 문제를 상기시키며 이를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공간적 특수성과 결부시켜 논의함으로써, ‘혐오’의 문제를 ‘정치적 갈등 구조’나 ‘사회학적 특성’, 청년이라는 ‘세대적 특성’을 통해 분석하는 기존의 논의들과는 다른 관점을 취한다.

 

인터넷 마을세계와
여성혐오의 사회성

오랫동안 인터넷 문화에 대한 논란과 비판은 ‘익명성’ 문제에 기대왔다. 자신의 이름 즉, 정체를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을 기반으로 악의적인 댓글이나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일탈이 자행되어 왔고 이것이 수많은 반사회적 인간들을 생산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인터넷 속에서 더욱 견고하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 ‘사회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현실의 ‘나’와 인터넷 상의 ‘나’가 구분된 익명의 상태에서 노골적인 혐오와 모욕의 표현 같은 반사회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회와 괴리되고 싶어 하는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도리어 인터넷 공간 속의 수많은 ‘익명’들과 상호작용하고자 하는 사회성 추구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특정 집단(특히 소수자)을 향한 혐오의 감정 표출은 “일시적이고 즉각적인 감정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소통’으로서 일련의 연대감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날 이것은 일종의 유희로서 ‘놀이’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온라인 내의 혐오 표현은 주로 ‘여성’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베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뿐만 아니라 인터넷 상에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 하는 ‘문화’는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성을 막론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만연해 있던 ‘남성 간의 유대’ 현상 중 하나였다.

[su_quote]여성혐오를 통해 증진되고 강화되는 것이 온라인 사회성의 한 측면이며, 소통 행위자들이 그러한 사회성을 추구할수록 여성혐오는 현실에 저항력을 갖는 독자적이고 새로운 사실이 되어 실시간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퍼져나가는 방식으로 자기강화 한다. 또한 이렇게 네트워크를 통해 퍼져나간 ‘정보’로서 여성혐오의 영향력이 사이버 세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매일 온라인에 접속하는 현실의 인간들의 사고와 언어에 영향을 미치면서 성별 동일성(identity)의 형성에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194쪽)[/su_quote]

 

온라인 여성혐오 담론
남성의 피해의식과 여성의 자기혐오

‘욕설’과 ‘혐오’표현들이 인터넷 공간 어디에든 만연한 것임에도 일베라는 특정 사이트가 더욱 두드러지게 문제시 되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여성혐오’ 발언에 있다. 일베는 ‘보지년’이나 ‘보슬아치’와 같이, 여성을 성기로 환원하고 또는 ‘○○녀’와 같은 표현을 통해 여성 혐오적인 담론을 조장해 냈으며 이는 현재진행중이다. 일부 여성의 문제적 행위가 아닌, 그것을 ‘여성’ 전반의 문제로 확대하는 ‘○○녀’ 담론은 여성에 대한 고정적이고 정형화된 표상으로 자리 잡고, 여성 혐오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즉, ‘○○녀’ 담론을 통해 여성이란 “공공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남성의 능력에 기생하며 무엇보다 성적으로 방종한 존재”로서 재생산 되는 것이다. ‘○○녀’ 이야기는 이렇듯 사례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사례를 접하는 이들에 대하여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이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와 타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남성에게는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여성에게는 ‘자기혐오’를 낳게 한다.

남성들의 ‘피해의식’이란, 예컨대 성평등을 위한 국가적 정책들을 ‘여성에 대한 특혜’로 인식하고 ‘남성의 박탈감’을 자극하는 사례로 여겨 이를 역차별 이론으로 수용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군가산점 폐지’나 ‘호주제 폐지’, ‘성폭력/성매매 특별법’은 “안티 페미니즘의 발화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반면 여성들에게 여성혐오는 ‘자기혐오’의 문제로 이어지는데, 상당수의 여성들이 “문제가 되는 여성의 특징을 한심하게 여기거나 그러한 여성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방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무언의 ‘규범’을 통해 재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주체적인 욕망과 그러한 욕망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자기표현들은 남성의 ‘피해의식’적 공격―“꼴페미라는 낙인찍기와 신상털기 등”―과 여성의 ‘자기혐오’라는 이중의 덫에 갇혀 그 목소리를 잃게 된다.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안티페미니즘

[su_pullquote align=”right”]‘여전히’ 성별 불평등이 현존하고, 각종 데이터를 통해 그것이 가시화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개인의 노력’이라는 테제를 강조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은,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열등한 지위를 영속화 하는 데 공모”한다는 점에서 결코 정당하지 못하다.[/su_pullquote]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상당수의 이론들의 공통점은 “페미니즘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그 주장을 공고히 하며 ‘포스트페미니즘’ 이론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오늘날 여성인권의 상승세와 더불어, ‘페미니즘’이란 낡고 시대적으로 뒤쳐진 이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는 곧 “페미니즘의 과제가 완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오늘 날의 ‘자기계발 열풍’, 즉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과 어딘가 닮아 있다. 즉, 성별과 관계없이 기회는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라는 믿음을 부추겨, 낙오된 자들에 대하여 “개인의 무능”이라는 비판을 일삼는 인식적 잣대를 ‘여성’을 둘러싼 모든 논의들에 똑같이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포스트페미니즘의 수사는 ‘여성’이,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안티페미니즘’적 인식을 교묘하게 숨긴다. ‘여전히’ 성별 불평등이 현존하고, 각종 데이터를 통해 그것이 가시화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개인의 노력’이라는 테제를 강조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은,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열등한 지위를 영속화 하는 데 공모”한다는 점에서 결코 정당하지 못하다.

 

인터넷 여성혐오를 넘어
성차의 윤리

이렇듯 인터넷 문화를 통해 일종의 연대를 형성하고, 포스트페미니즘이라는 그럴 듯한 수사 속에서 ‘정당화’ 된 여성혐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이를 법적인 규제와 처벌이 아닌, 소통 문화에 대한 윤리적 고찰을 통해 모색해야 함을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2~ )의 이론을 빌려 주장한다.

그간 인간의 성차는 ‘자연적 요소’로 분류되었을 뿐 그 ‘문화적 의미’가 논의된 적은 없었다. 즉 여성은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자연적 재생산자”로서, ‘인간적 성취’인 ‘문명’과 달리 ‘자연’적인 요소로만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리가레는 남성과 여성간의 ‘성차’라는 토대 위에 ‘생성(becoming)’되는(되어야 하는) ‘인간성의 실현’을 주장한다. 문화가 남성의 전유물로서 ‘일자화’된 것이 아닌 ‘둘이 됨(to be two)’으로 자리할 때, “더 현실적이고 더 공정하며 더 보편적인 문화의 재정초가 가능”해 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시민 공동체’는 “서로에게 절대적 타자인 구별되는 성을 존중하는 관계에 기초해서만 건설”된다고 주장하며 이 모든 것의 시작에는 ‘여성성’의 고유함에 대한 존중이 필요함을 지적한다. 즉, 이리가레가 ‘문화’로 규정하는 것은, ‘이성’으로서의 ‘진리’에의 도달과 같이 오로지 ‘정신성’만을 추구하는 가운데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성’마저도 끌어안을 때 발생하는 ‘인간적 생성’이며, 이러한 ‘인간적 생성’을 통해서 모든 ‘차이’가 한 쪽으로 포섭되지 않고 그 자체로 공존하는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su_quote]이러한 인간적 생성은 더 이상 고독한 여정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 단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결정된다. 타자는 나와 동일한 이상 또는 절대를 공유하는 타자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 속한 타자, 내가 나와 다른 인간으로 고려해야만 하는 타자이며 그 다름의 원형이 바로 성차이다. …타자에게 향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보존하는 이 두 운동은 인간으로 생성되는 과정, 즉 타자와 맺는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요컨대, 이리가레가 주장하는 성적 차이의 윤리로서 ‘둘의 생성’은 자신을 포기하거나 내주지 않으면서 타자와 관계 맺고 사랑하는 문화의 창조와 관련된다. (209-210쪽)[/su_quote]

이리가레의 주장은 꽤나 복잡한 듯 보이나 사실은 매우 단순하고 ‘상식적’이다. ‘차이’는 한 쪽이 어느 한 쪽에 대하여 우위에 서고자 할 때 ‘차별’로 변질된다. 그러나 ‘둘이 됨(to be two)’ 자체가 ‘문화’의 근간으로 작용한다면, ‘차이’는 다양성으로 보존되며 이를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필자의 제언처럼 “중성적인 개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가시화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옹호”해야 하는 이유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좋아요’가 만드는 ‘싫어요’의 세계: 페이스북 ‘여성혐오’ 페이지 분석」
김수아∙김세은, 2016, 『미디어, 젠더 & 문화』31(2), 5-44.

「전략적 여성혐오와 그 모순: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의 게시물 분석을 중심으로」
엄진, 2016, 『미디어, 젠더 & 문화』, 31(2), 193-236.

이단비 리뷰어  ddanddanbi6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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