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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인문학’이 만나면 무슨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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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융합’에 대한 높은 관심은 과학과 인문학의 교류에 대한 여러 시도를 낳았다. 그러나 한편에서 이런 시도가 단순히 정책과 제도적 지원을 계기로 생겨난 피상적인 유행에 불과하다거나 과학이 인문학에 침투하는 대등하지 않은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비판도 잇따랐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는 과학기술학의 관점에서 본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안과밖』 , 41, 2016)에서 그의 전문 분야인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의 관점을 통해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라는 문제를 분석”(117쪽), 그 동안의 융합 담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였다.

 

과학과 인문학 관계의 변천:
과학혁명의 이전과 이후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우선 살펴보면, 과학이나 인문학이 포괄하는 범위가 역사적으로 또는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가령 인문학 내에서도 문학, 역사, 철학은 각각 과학과 다르게 관계를 맺어왔다. 철학을 우선 예로 들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자연의 규칙성이나 변화를 통해 인간의 삶과 정치의 합리성을 찾을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상 과학과 철학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과학과 철학이 지금처럼 각기 다른 학문으로 분화된 데에는 16-17세기 과학혁명 시기 실험과 수학적 방법이 과학에 도입 되면서부터 과학자들이 사변적인 철학을 지양하고 자연의 법칙을 수학의 언어로 기술하기 시작한 영향이 크다. 이 때부터 철학자들과 지금 우리가 과학자라 부르는 당시 자연철학자나 수학자들의 구분이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과학과 철학 논의를 분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학과 철학의 상호작용은 이후로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예를 들어, 뉴턴의 물리학은 로크와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다시 칸트의 철학은 19세기 독일의 물리학자인 헬름홀츠(Herman von Helmholtz)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과학혁명 이전에는 지금 과학에서 사용하는 법칙(law), 사실(fact), 증인(witness)과 같이 과학적 사실이 믿을만하다고 평가되는 과정에서 쓰이는 개념들을 법학에서 차용했고, 이후 과학의 확실성이 높게 평가되며 다시 법학과 같은 인문학 분야에서 과학을 모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과 철학의 호혜적인 관계와 비교해 다른 인문학인 문학이나 역사와 과학의 관계는 교류가 거의 없거나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와 시인이자 화가였던 영국의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뉴턴 과학이 인간에게 중요한 자연의 감정, 아름다움, 숭고함과 같은 특성을 배제하고 자연을 수학화하고 추상화된 것으로 변질시켜 버린다며 과학을 비판했다. 1960년대에 화학자 스노우(C.P.Snow)와 ’두 문화’ 논쟁을 야기했던 리비스(F.R.Leais) 또한 영문학자였다. 문학과 비교해 역사는 과학혁명 시기 베이컨(Francis Bacon)이 자연의 역사도 인간의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 정도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상호작용을 맺고 있지 않았다. 이처럼, 한 때 과학과 인문학의 일부 학문이 과학과 어떤 형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반면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분화된 각 학문들이 점차 서로 다른 방법론을 쓰고 과학은 자연을, 인문학은 인간과 사회를 다루는 등 연구 대상이 달라지며 간극이 생겼고 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융합 담론 역사:
다양한 형태의 만남과 깊이있는 접촉의 관점에서

홍성욱은 한국에서 진행된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기원을 대략 4가지 측면으로 정리한다. 우선, 이과-문과의 분리를 극복하자는 움직임이 첫 번째이다. 이는 1970년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 IT) 이후 나노기술(nanotechnology, NT), 바이오기술(biotechnology, BT), 인지기술(cognitive technology, CT)등 4가지 기술이 융합되어 만들어진다 생각한 새로운 패러다임 NBIC수렴기술(converging technologies)에 대한 기대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융합 기술 담론의 흐름에 영향 받은 인문학에서 형성된 ‘인문-기술 융합’ 담론이 두 번째 요소, 이어 생물학자 윌슨(Edward O. Wilson)의 『통섭』(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이 한국에 번역, 출판된 후 생긴 ‘통섭’ 열풍이 세 번째 요소로 볼 수 있다. 통섭 담론은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에서 미학이나 윤리학이 결국 생물학으로 환원될 거라는 극단적 환원주의가 인문학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 근거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 현상은 당시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분과 학문들 간의 소통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요구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정리한 융합 담론의 마지막 진원지는 2010년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iPad2발표에서 인문학과 결합된 기술을 강조하는 지점에서 나왔다.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 열풍을 일으킨 애플

 

이처럼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사회적인 관심이 무르익고 다양한 논의를 통해 “과학과 인문학이 하나로 통합되지는 못하더라도 이 둘을 이어 주는 다양한 형태의 만남이나 접촉을 만들 수 있고, 이로부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그 만남의 결과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 (130쪽) 정도 합의를 보았다. 여기서 저자는 ‘융합’을 “다양한 형태의 만남과 깊이있는 접촉”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가정 하에 명확하게 정의된 목적 하에 이루어지는 공동연구와, 정해진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가능한 세미나나 학회 형태의 대화가 가능함을 소개한다. 즉, 융합이 의미하는 바를 다양한 형태의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많은 가능성의 수렴을 강조하는 것이다.

융합은 무엇을 위한 필요인가?:
사실과 가치의 융합

흔히 과학=사실, 인문학=가치 라는 등식을 전제하여 과학과 인문학의 교집합이 없다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는 오히려 사실과 가치의 관계가 인간을 중심에 놓고 볼 때 엄격히 구분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윌슨을 비판했던 진화학자 굴드(Stephen Jay Gould)의 논의를 빌려 과학과 인문학, 사실과 가치가 서로의 영역을 그대로 보존하며 소통을 가능케 하는 접점들이 있음을 설명한다. 사실과 가치의 관계는 과학기술이 낳는 위험을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위험 분석 단계는 특정 과학기술의 위험을 전문가들이 여러 모델, 확률 계산, 전문가 설문 등에 입각하여 결과를 내는 “위험 평가(risk assessment)”과정과 이 결과에 기반하여 시민과 정치인, 이해당사자들이 사회가 이 위험을 어떻게 수용하거나 할 수 있는지 등을 평가하는 “위험 관리(risk management)’ 의 두 단계로 나뉜다. 그러나 저자는 전자가 가치가 배제된 사실에만 입각한 과정이고 후자가 가치 판단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기존의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 전자의 위험 평가 과정 역시 전문가들이 다 동의하지 않거나 불확실한 가정들이 다수 포함되는 점이 있고, 후자인 위험 관리 단계에서 역시 지역 전문가들이 앞선 전문가들의 판단과 갈등을 빚을 수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에는 기존의 두 개로 분리된 상태에서 사실과 가치 판단을 나누는 모델에서 벗어나 사실, 판단의 단계부터 시민들이 참여하는 사실과 가치가 융합된 형태의 모델을 사용한다.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과학적 분석이 다루는 대상은 가치가 배제된 ‘사실물(matter of fact)’이라는 생각이 만연했다. 그러나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뚜르(Bruno Labour)는 최근 현대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GMO, 핵발전소, 온실가스 등의 기술적 문제들은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관심물(matter of concern)’이라 주장한다. 사실물이 과학자 집단 내에서 실험실 안에서만 다루어지는 대상이라면, 관심물은 그보다 확장된 형태의 공동체에서 시민과 주민, 이해당사자들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사실과 가치가 혼재된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 과학자는 사실, 인문학자나 시민들이 가치를 분리해 각자의 영역을 나누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설령 특정 과학이 가치를 배제한 인간의 호기심에서 시작했을지라도 그 연구가 진행되고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필요와 편의를 고려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대부분인 상황에서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 이미 가치가 적재된 복합물이기 때문이다.

[su_quote]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 사실과 가치의 융합을 포함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런 융합이 21세기 위험사회를 극복하는 단초를 제공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근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임을 주장할 것이다.(118쪽)[/su_quote]

저자는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이 하나가 다른 하나로 통합되거나 둘이 합쳐져 새로운 학문 분야를 만드는 식의 논의에 국한되기보다, 자연 또는 인간만을 따로 생각하는 기존의 틀을 극복하자는 시도라는 점을 강조한다. 애초에 순수한 자연 또는 순수한 인간이 존재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인공물을 매개로 복잡하게 얽힌 자연과 인간의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다. 과학자들은 사실만이 존재하는 비인간의 세상을 연구하고, 인문학의 대상은 가치가 지배하는 인간 세상이라는 극명한 분리가 근대성의 특징이라면 새로 등장한 융합 담론은 이런 근대성의 한계를 타파하는 것이다. 즉, 현대 과학기술의 문제가 사실과 가치가 혼재된 복합물임을 인정하고 이를 해결하는 더 나은 방향으로의 한 발을 제안하는 것이다.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양 근대철학자들은 전쟁을 어떻게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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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것 같다. 현재 우리는 7000억 정도의 미군주둔비를 부담하고 있는데, 이걸 1조 원 정도로 늘리는 수준이 아니다. 이를 훨씬 초월하여, 미국이 그간 아시아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는데 들여온 비용을 분모로 놓고 한국이 감당해야 할 부분을 분자로 요구할 거라는 얘기다. 현재 군사 전문가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전쟁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손자가 말했다. 그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그만큼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한다. 그래서 전쟁은 억제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차츰 세계는 전쟁 억제국면에 도달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쟁을 억제하는 데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힘으로 균형을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오직 군사적 실력만이 상대방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할 수 있다. 그게 현재의 진실이다.

서구 주요 철학자들의 전쟁론을 살펴본 서영식 충남대 교수의 논문 「서양 근대의 전쟁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철학논총』, 86, 2016)은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바로, 철학이 전쟁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이 ‘철학적 유산’이 “오늘날에도 서구사회에서 이른바 정의로운 전쟁론이 강력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배경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진단한다.

본문에서 살펴보는 인물은 다섯 명이다. 마키아벨리, 홉스, 클라우제비츠, 칸트, 헤겔이다. 필자는 이들 각각의 전쟁론을 분석적으로 요약하고 그 한계를 일목요연하게 짚고 있어서 아래에 그 중심 대목을 정리해본다.

백년 전쟁의 주요 장면들. (출처: 위키피디아)
‘정치’를 단순화시킨
마키아벨리의 한계

『군주론』은 전제군주가 정치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차원의 윤리적 고려를 전적으로 배제할 것을 강권하는 정치공학적 논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당시 사분오열되어 있던 그의 조국 이탈리아가 맞닥뜨린 정치적 위기상황을 냉철히 분석하고 대응책을 철저히 군사적 차원에서 마련하도록 촉구함으로써, 탁상공론에 빠져있던 정치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후대의 현실주의 지식인 그룹이나 군사 사상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

『군주론』에서 전개된 마키아벨리의 선군정치사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현실정치 상황에서는 어디서든 적용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의 정치관은 권력지향성 이외에도 정치현실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예컨대 사회경제적인 요소, 종교와 윤리적 측면, 지리적 조건이나 자연환경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들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또한 그는 국가 간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를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해결할 수 있고 따라서 군주는 주로 전쟁의 준비와 실행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힘으로써, 정치현실의 다양하고 복잡한 측면을 자신의 이론 속에 포섭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일보한 사유 보여준 홉스,
안타깝지만 현실적 대안 못돼

홉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달리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거나, 현실 속에서 선악의 구별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원리나 도덕법칙 같은 것을 통해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는 인간의 특성을, 그리고 삶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이해하고 묘사했다. 그렇지만 그는 일부의 오해와 달리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자연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졌다고 봤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Commonwealth)’의 성립과 사회의 존속이 가능함을 강조했다.

또한 홉스는 전쟁을 미화하거나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오히려 계약에 기초하되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국가(군주국)의 등장을 통해 인간사회의 안정과 역사적인 발전이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홉스는 전쟁의 원인과 본성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위한 방안을 심층적으로 논구했다.

그렇지만 그의 국가관과 전쟁의 종식을 위한 논의는 사실상 국내적인 갈등상황의 종식과 관련해서만 실제적인 의미를 지닐 뿐, 개인 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틀에서는 현실적인 대안이나 해결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판단중지’한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은 출간되고 약 170여 년 동안, 수많은 지휘관과 군사 전략가들이 전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군사이론서이자, 정치와 전쟁 양자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정치인들이 탐독한 실용적 정치이론서로 각광받아 왔다. 또한 이 저술은 오늘날 일반인들도 각자의 고단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참고하고 도움을 받는 고전이다.

그런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자체에 대한 가치평가를 시도하거나, 평가에 기초하여 전쟁 방지책을 제시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아마도 평가는 철학자의 몫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쟁의 현상이나 전쟁의 발발을 인간사에서 피할 수 없는 경험칙으로 받아들이고, 직업군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하여 적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고, 승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만 사고와 관심을 집중했다.

이러한 태도는 『전쟁론』의 저술 목적을 말하는 부분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필자는 아쉬운 점이 남는다고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참혹함을 당대의 누구보다도 잘 알고 경험한 사람으로서, 참혹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나아가 화해와 평화의 길을 얼마간이라도 모색했다면, 그의 사유와 발언은 어떤 사상가의 그것보다 공명감이 컸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유일한 존재,
전쟁의 제도적 억지 고안한 칸트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이해 대립으로 발생하는 전쟁을 제도적 차원에서 방지함으로써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자는 명제를 제시했다. 그는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이성과 합치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나아가 모든 국가가 그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국제연맹을 창설할 것을 주창했는데, 평화는 오직 국가 간의 합리적인 연대의 방식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국가의 모든 구성원에게 세계시민권이라는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할 것과 국제기구에 속한 국가의 헌법이 공화주의에 입각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가 구상한 ‘세계시민권’은 현대의 인권 개념과 유사하며, 공화주의 이념은 내용상 현대의 민주주의 제도와 대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평화라는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를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 최초의 공식기구인 국제연맹은 1920년 창설과 더불어 민족 간 평화적인 연대를 핵심 이념으로 내세웠는데, 이 이념은 바로 세계의 영구평화에 관한 칸트의 구상과 내용상 일치했다.

또한 민주적인 정치질서가 범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된 이후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료들에 대한 분석은, 칸트의 민주적 평화명제가 1980년대 들어서 단계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평화 연구자들은 칸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화사상가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헤겔의 전쟁론에 대한
비판

헤겔의 전쟁관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필자는 말한다. 그는 낙관적 전쟁관으로 전쟁의 참상을 애써 무시하고 전쟁을 규칙 준수가 몸에 밴 신사들 간의 결투의 장이나 된다는 듯이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으로 묘사했다. 또 20세기 전체주의의 등장에서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더불어 중요한 사상적 배경을 형성함으로써 이후 제국주의와 열강들의 침략전쟁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사실 헤겔은 전쟁 상황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 금지나 초토화 작전 금지 등과 같이 국제법의 존중을 강조했으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의 전쟁관이나 전쟁윤리에 대한 언급은 모두 그의 철학적 관점과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총체적인 차원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지만, 대부분의 전쟁은 제한전쟁이 아니라 총력전의 양상을 띠며,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기존의 국제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필자는 대부분의 서양 근대철학자들은 전쟁 현상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 운영과 정치활동에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하나의 필요악으로 간주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전쟁이 발생하면 인간과 사회뿐만 아니라 전쟁의 영향권 안에 있는 자연 세계 전체가 거의 회복 불가능한 수준의 타격을 받는다. 이라크 전쟁 중에 자행된 유전 파괴로 인한 자원낭비는 아쉬워하지만 그와 동시에 발생한 해양 오염사태나 어류와 조류의 떼죽음은 그저 언론의 기사거리로 취급될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 사회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인명의 손실이나 물질적 피해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생태계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인간 역시 생태계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전언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서양 중세의 정의로운 전쟁: 11세기의 평화론과 전쟁론을 중심으로」
차용구, 2012, 『역사학보』, 216, 165-189.

「헤겔의 전쟁론과 영구평화의 문제」
최동민, 2010, 『동서사상』, 9, 231-256.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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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관심사는 지금, 여기, 현재의 문제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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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_frame align=”leftnone”]DBpia Report, R은 DBpia의 논문이용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매월 한 차례 분석 기사를 게재합니다.
이번 10월은 10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한 달간 DBpia 논문 이용 순위 1위부터 1만위를 대상으로 분석하며,
모두 4부에 걸쳐 게재됩니다.

 
(1) DBpia 10월 이용통계 상위 1만편 논문 키워드 분석
(2) DBpia 10월 이용통계로 본 사상가, 문인, 영화감독
(3) DBpia 10월 이용통계로 본 인문학 트렌드
(4) DBpia 10월 이용통계 상위 100위 변동현황[/su_frame]

 

rDBpia의 논문은 8개의 대분류로 나뉜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의약학, 농수해양학, 예술체육, 복합학 등이다. 각각의 대분류는 5~17개의 소분류를 거느리고 있다. 소분류를 모두 합치면 84개 분야다. 이번 기사에서는 키워드 분석에 이어 가장 많은 17개의 소분류를 거느린 ‘인문학’ 각 소분류의 상위 20위 논문들의 트렌드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료를 보며 머리를 스치는 인상은 먼저 ‘오늘날 학문 존재론’이라는 부분이다. 무엇이 학자들로 하여금 연구하게 추동하는가? “앎에 대한 욕구” “지적 호기심” “분과별 논쟁적 주제 해결” “잘못된 것에 대한 문제제기” 등 다양하겠지만 오늘날 학문은 주로 “문제 해결”에 대한 요구를 많이 받는 것 같다. 즉, 현실에서의 다양한 사건, 현상, 제도의 변화 등이 연구를 추동하고 있다. 학문의 존재 이유가 명확해진 것 같아서 좋긴 한데, 기초가 부실해지는 건 아닐까 우려가 들 정도로 깊이 있는 개념적, 역사적, 철학적 탐구와 그에 대한 관심이 줄고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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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일반’에서 1위를 차지한 건 「왜 한국 남성은 한국 여성들에게 분노하는가」다. 이 논문은 전체에서 5위 안에 들 정도로 소위 ‘핫’한 논문이다. 논문의 저자도 한윤형이라는 2030세대의 대표적 논객이다. 그리고 「‘먹방’의 욕망에서 ‘쿡방’의 욕망으로」(3위), 「헬조선의 N포 세대와 노력의 정의론」(7위)도 순위가 높다. 「‘우리’는 어떻게 ‘일베’가 됐는가」(11위)도 보이는가 하면, 「박근혜 화법, 헛소리에 담긴 모순적 징후들」(14위), 「대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다」(17위), 「한국의 청년실업과 대학교육 과정의 파행」(20위) 등으로 이어진다. 모두 현실의 어두운 면과 그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 모색 류다. 그리고 현재진행형 이슈들이다.

역사학’ 분류에서도 이런 현상은 이어진다.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메갈리아 논쟁까지」(1위), 「젠트리피케이션 효과」(4위), 「한국사회의 인종차별」(5위), 「1940년대의 남자 동성애 연구」(6위), 「중등 “역사”·고등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반론」(7위), 「전염병, 안전, 국가」(9위),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 그 이후?」(12위), 「1970년대 이후 뉴욕의 젠트리피케이션」(12위), 「강남의 역류성 젠트리피케이션」(16위) 등 거의 절반이 현실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철학’ 분류는 더욱 심하다. 「GMO의 윤리적 문제」(1위), 「전복적 반사경으로서의 메갈리안 논쟁」(2위), 「체세포복제배아 줄기세포의 최근 연구 동향과 관련 윤리지침」(3위), 「동물실험과 심의」(4위), 「뇌사판정과 장기이식의 윤리적 문제」(5위), 「대학생의 연애, 결혼에 대한 의식과 문화 연구」(7위), 「‘김영란법’의 시행에 즈음하여」(8위),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9위), 「다문화 가정 현황 및 한국어 교육 지원 방안」(11위), 「배아복제 기술의 윤리적 문제와 줄기세포 연구의 한계」(123위), 「한국 중등교육의 문제와 철학교육」(15위), 「동물 실험 옹호 논증의 논리적 분석」(19위) 등 절반 이상이 현실의 첨예한 이슈들이다. 하이데거라든지, 아리스토텔레스라든지, 주희나 공자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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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잉의 시대, 도덕붕괴의 거울인가?

또 하나의 트렌드는 윤리, 도덕, 합당과 같은 단어로 포괄될 수 있다. 그것은 올바른가?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한가? 와 같은 질문이 논문 목록에서 압도적으로 표면화되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유행도 사실 “새로운 시도도 좋지만 기존 주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게 합당한가?”라는 질문으로 압축이 가능하며, ‘여혐’ 관련 논문도 “남성들이 여성 혐오는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판단을 전제로 쓰인 것들이 많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역사를 국가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주입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느냐는 것이다. 안락사, 동물실험, 유전자조작식품, 동성애, 종교다원주의, 비속어, 원전사고, 언어폭력 등 “과연 이게 올바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논문들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철학 연구는 이런 현실적 문제들을 좀더 정교하게 사유하고, 판단하고, 정리해나갈 수 있도록 ‘윤리학적 차원’에 치우쳐 있다. ‘열등감에 대한 탈가치의 윤리학을 위한 시론’ 등이 그렇다. 가치에 얽매어 열등해진 존재를 열등감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선 그것은 열등하지 않다는 논리와 그 논리의 체계로서의 윤리학이 필요한 것이니까.

오늘날 SNS에서는 매일매일 도덕적 규탄대회가 열리고 있다. 성폭력·성추행과 관련된 폭로와 사과, 이를 둘러싼 대중참여만 해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도덕에 민감해졌는지 여실히 드러내준다. 논문은 그것의 반영이다. 그리고 도덕 과잉은 도덕 붕괴의 거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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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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