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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문제는 끝? 한국 입장 세우는 균형외교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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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_frame] DBpia Report R이 한국대학신문과 함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김동엽 교수를 만났습니다. 김동엽 교수는 2017년 10월 DBpia 정치외교학 논문이용 1위 사드 한반도 배치의 군사적 효용성과 한반도 미래 의 저자입니다. 논문의 주요 내용과 사드 문제, 동북아의 미래에 대해 김동엽 교수의 생각을 들어봤습니다.[/su_frame]

 

“사드는 아직 미완성 무기…자신 있다면 검증 왜 안 하겠나”
中 야망은 공산당 창건 100주년에 태평양 진출…‘도련선’ 주목
“韓, 외교·군사·통일 세 날개 노력 같이 해야 균형외교 가능”

“중국 측은 (중략) 한국에 배치된 사드(THAAD, 종말고고도지역방어) 체계를 반대한다고 재천명했다. 동시에 중국 측은 한국 측이 표명한 입장에 ‘유의’했으며” 외교부가 한·중 관계 회복을 알린 지난달 31일. 김동엽 교수는 중국에서 현지 고위직 인사를 만나 양국 협의에 관한 흥미로운 해석을 들었다. 이날 나온 한국 외교부의 협의문을 보자.

이 인사는 이렇게 분석했다. “신화통신이 같은 날 공개한 전문에는 유의가 아닌 ‘주의’라고 돼 있다. 유의는 두리번거리는 것이고, 주의는 집중해 그것만 보는 것.” 사드는 적어도 중국에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외교부가 제시한 ‘무언가’를 지키지 않는다면 회복된 것처럼 보이는 관계는 언제라도 깨질 수 있다는 의미다.

한-중 관계는 과연 완전히 회복된 것일까. 김동엽 교수는 선을 긋는다. 그는 이번 협의를 “분명 외교적 성과”라면서도, 사드에서 드러나는 미-중 간 대결 구도 속에 “언제 터질 모래주머니를 정교하고 완전하게 바느질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가 지난 6월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에 게재한 ‘사드 한반도 배치의 군사적 효용성과 한반도 미래’는 지난달 학술 지식 플랫폼 디비피아(DBpia) 정치외교학 분야 논문 이용 순위 1위를 기록했다. 그는 사드를 대북 억제라는 효용성보다 본인의 전공인 동북아 정세 국제정치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일 서울 삼청동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실에서 김동엽 교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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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가 북핵 만병통치약? “단정할 수 없어”

김동엽 교수의 논문은 본래 의도와 달리 ‘사드의 군사적 효용성’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사드가 북핵을 실어 나를 미사일을 방어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지적이다. 시민들에게 공개된 정보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김 교수는 국방부가 사드의 제원과 능력을 감추고, 북핵을 방지할 무기라고 믿어주길 강요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국방부가 유튜브(Youtube)에 공개한 동영상 등으로 공개된 정보만으로 사드 도입 당위론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무기라는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봐야 한다. 위협과 효과성이다. 북핵이라는 위협은 분명 있지만 문제는 효과성이다. 우리는 사드가 지상 40Km~250Km에 있는 모든 미사일을 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리 200Km 안에서 발사하는 미사일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검증된 바가 없다. 북한과 우리의 거리는 짧다. 게다가 미국 국방성의 시험도 15차례 중 앞선 13차례는 목표 미사일의 좌표를 알고 실험한 ‘약속 대련’이다. 실전에서 그런 일이 있겠나.”

김 교수의 근거를 몇 가지 더 소개하면 이렇다. 미국 미사일 방어국이 공개한 동영상에 따르면, 사드는 중앙통제장치가 요격할 미사일을 감지하면 좌표와 발사 각도를 계산해 미사일을 발사한다. 발사한 사드 미사일이 목표를 인식하는 거리는 10Km 정도다. 북한 무수단과 노동의 속도는 마하 5~7이다. 반면 사드는 마하 8.17이다. 조금이라도 예상을 벗어나 요격 미사일을 지나치면 격추에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 의회 청문회에서도 사드는 열과 기상 상황에 따른 한계가 있다는 내용이 제기된다. 핵과 미끼(Decoy)를 함께 발사하면 구분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지금까지 진행된 실험 결과를 못 믿겠다는 것은 아니다. 효용성 전부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만능이라고 이야기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간단한 의약품을 수입하면서도 우리 환경과 건강에 맞는지 꼼꼼히 따져보지 않나. 한국의 책임 있는 누군가는 검증해 보지도 않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사드가 이 땅에 들어올 수밖에 없던 이유는 한반도의 미래와 결부된 정치적 판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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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대립 속의 사드라는 장기 말

 김 교수는 사드가 “군사적인 의미가 없다”라고까지 잘라 말했다. 그런데도 중국이 사드 배치에 반발해 온 것은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 때문이다. 중국이 경계하는 것은 미국 MD라는 유형의 하드웨어가 아니라, MD라는 이름으로 중국을 둘러싸고 대륙에 가둬 놓는 무형의 전략적 포위망이라는 것이다.

“냉전 시대 미국이 소련의 유럽으로의 서진(西進)을 막은 전략은 ‘피봇 투 유럽(Pivot to Europe, 유럽회귀정책)’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오일머니’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중동이 패권의 두 파이프라인이다. 지금은 아시아 회귀정책이다. 소련이 붕괴한 자리에 오늘날 중국이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사드는 MD 그리고 한-미-일 군사협력과 한 통이다. 과거와 달리 미국은 지금 돈이 없다. 2000년대 유럽이 경제적으로 붕괴했다. 미국에 한국과 일본은 매우 중요하다.”

중국은 어떤가. 지난달 18일 열린 19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입에서는 ‘샤오캉(少康) 사회’, ‘현대 강국 구체화’ 두 중국몽(中國夢)이 나왔다. 공산당 창당 100주년(2021년)까지는 모든 인민을 평안케 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2049년)까지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짜 최고의 패권국이 되겠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미국과 중국이 만나는 한반도, 그리고 중국이 1980년대 스스로 설정한 해상 방어선인 ‘도련선(島鏈線·island chain)’을 주목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중국의 육상 실크로드로 알려진 일대일로(유럽,동남아,중앙아시아,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중국의 육·해상 경제벨트)는 도련선 확대를 위한 속임수일 수 있다. 중국이 10년 내 미국을 이길 것으로 전망하지만 생각보다 난관이 많다. 내수경제, 정치적 약점이 많고 미국이 이를 알게 모르게 견제하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개도국에 인프라를 마련해주고, 경제적 이권을 가져가면서 본심은 미국의 견제를 뚫고 도련선을 확장하는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미-중 공통의 이익에 남북이 함께 뛰어들어야”

김 교수는 미국이 막으려는 힘과 중국이 나오려는 힘이 교차하는 첫 지점이 바로 한반도라고 말했다. 지금도 한반도 휴전선은 미국과 중국엔 그들의 대치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이 사드가 있음에도 한국과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주의”하는 ‘무언가’를 짚어볼 수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3NO’를 제시했다. △사드 추가 배치 △미국 MD 참여 그리고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의 군사 동맹화에 나서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한국은 합의문에서 이 세 가지를 ‘유의’한다고 했다.

▲ (사진=김정현 기자)

“미국과 중국을 배제하고 북한만 보면 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동안 투자한 국방력만 봐도 우리 군사력으로도 북한을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혹자가 ‘3NO’ 때문에 북한을 상대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런 국제 정세를 간과한 것이다. MD에 참여한다는 것은 지금부터 중국을 완전히 적대시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말하면 미국도 ‘3NO’ 못 받는다. 이 협의는 잉크가 마르기도 전, 순방에 나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발을 딛는 순간 깨질 수도 있다. 우리는 미-중관계의 엄중한 변화 속에 그 중간을 과감히 뚫고 들어간 것이다.”

양자택일을 섣불리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맥락에서 ‘균형외교론’이 나온다. 김 교수는 균형외교가 ‘박쥐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국이 해결할 문제도 많다. 사드만 놓고 봐도 성주군에 임시 배치된 봉합 상태다. “여기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가느냐가 한국의 힘이고 능력에 달렸다”고 김 교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합의는 미래를 본 큰 결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쪽으로 무게추를 쏟았다, 다시 다른 쪽으로 기우는 식으로는 오히려 양쪽의 불신만 산다. 미, 중 공통의 이익이 있는 영역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이는 외교, 군사로만 되지 않는다. 우리 혼자서 그 무대 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생존을 위해 통일이라는 꼬리 날개를 장착하고 북한의 손을 끌어 달려나가야 한다. 결국 남북관계를 우리 생존을 위해 최우선시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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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종료후 10년, 중국 학계의 동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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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이승호 동국대 사학과 강사가 쓴 2007년 이후 중국의 고구려 종교·사상사 연구 동향(『고구려발해연구』 , 57, 2017)은 동북공정이 공식적으로 종료되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의 중국 학계의 동향을 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결론은 ‘위험’ 사인이다.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중국 학계에서는 여전히 고구려를 중국 중앙왕조의 지방정권·소수민족정권으로 간주하고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분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이와 같은 시각은 고구려의 종교·사상 관련 연구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는데 해당 주제에 대한 치밀한 학술적 분석보다는 종교·사상의 기원이 중국에 닿아 있고, 국가 성립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중국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는 주장이 큰 흐름을 이룬다는 분석이다.

양적으로 확대되는 반면 한국과 일본의 연구 성과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매년 비슷한 연구 주제와 주장이 저자를 달리해서 반복된다는 점도 큰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학술 발표회에 참석중인 리러잉 박사(중국사회과학망http://www.cssn.cn)

 

동북공정은 계속된다

2007년 이후 중국학계의 고구려 종교·사상 관련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박사논문 1편과 석사논문 1편을 포함해 대략 40여 편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성과는 ‘고구려 종교 신앙’을 다룬 리러잉李樂營의 박사논문 「고구려 종교 신앙 연구」(둥베이사범대, 2008)다. 필자는 이 논문을 집중 분석하고 있는데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리러잉은 2016년 현재 퉁화사범학원通化師範學院 고구려연구원 원장으로 재직중이다.)

일단 이 논문은 폭넓게 종합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고구려의 종교와 사상을 다루고 있다. 분석이 용이치 않은 주제에까지 연구 범위가 미치는 등 미덕도 있다고 필자는 말한다. 하지만 주요 내용을 보면 우리로선 기함할 부분이 많다. 아래의 인용을 보자.

1) 고구려는 우리나라 고대 동북 지역의 일개 변경 소수민족 정권이었다. 한대漢代부터 당대唐代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종교신앙은 시종 중국과 함께 했다.

2) 또 고구려의 종교신앙은 중국 고대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큰 배경으로 하여 발생하고 변화했다.

3) 유교화와 도교화가 진행되었음을 밝혔다.

4) 종교는 고구려 사회의 발전과 중국고대사의 발전 과정 중 일부이자 불가분의 구성요소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고구려 문화는 ‘중국문화의 하위’라인 인식

필자는 가장 먼저 고구려의 문화를 중국 문화에 종속된 위치에서 파악하는 관점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문화전파론’과 ‘사회진화론’적 연구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고구려의 원시종교가 중국의 유가사상을 수용하면서 보다 규범적으로 발전했다”는 식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또한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기반을 둔 시조신앙에 대한 외면은 큰 결함이라고 비판했다. 시조신앙은 물론 고유의 토착 신앙(수신隧神, 천天 관념, 하백河伯 등)의 발생 배경과 자체적 발전과정에 주목하기보다는 이들 신앙을 “초기의 원시적인” 것으로만 치부하는 시각도 문제점이고 말한다. 결국 당시 외래종교와 병존했던 토착신앙에 대한 무관심은 반쪽짜리 연구결과를 내놓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게 필자의 논평이다. 면밀한 사료 비판이 선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도 보완 논의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다음으로는 고구려의 중국 유가사상 및 도가사상을 수용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류웨이劉偉의 연구를 분석하고 있다. 류웨이 또한 중국의 일방적 전파 강조, 중국의 고급 종교와 사상이 고구려의 문화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되풀이하고 있다. 또 「고구려본기」 초기 기록에 대한 사료 비판을 결여한 채, 기록에 나타나는 유가적 색채를 그대로 당대의 사실로 신빙하는 점도 문제다. 후대 고구려인의 관념이 반영될 소지가 다분함에도 이를 외면하는 것이다.

한편, 필자는 비록 초보적 단계이지만 중국 학계가 고구려 불교 문화로부터 유교·도교로까지 연구를 확장하는 것에 비해 한국 학계는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없다는 점을 우려했다.

또한 논문은 근래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제사·의례 문화와 관련해서도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 또한 중원 문화의 일방적 영향을 전제로 이뤄지고 있다.『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 등에 기반을 둔 중국의 예학적 전통이 고구려에 영향을 미쳐 고구려의 의례 규범을 진전·완성시켰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제사의례, 혼인의례, 상장례 등이 검토되고 있다.

 

고구려의 종교와 신화를
고대 중국문화와 연결

그러나 대체로 문헌에 보이는 고구려의 제사 및 기타의례 관련 기록을 하나하나 나열해가며 피상적으로 논하는 수준이라는 게 필자의 지적이다. 특히 고구려 왕릉 묘제와 왕실 제사체계는 상호 밀접한 관련 속에서 변화·발전해 갔는데,35) 아직 중국학계에서는 여기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또 억지로 중국과 연결시키려다보니 고구려 후기에 나타나는 ‘가한신可汗神’에 대해 당시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가졌던 당태종일 가능성을 제기하는 등 다소 무리한 주장도 일부 확인된다고 말했다.

필자는 이를 포함해 주몽신화 등 건국신화에 대한 중국 연구자들의 집중된 연구의 허점도 파헤쳤는데 이 부분은 대동소이한 지적들을 받고 있어 생략한다. 결론적으로 지난 10년 중국 학계의 고구려사 연구의 공통된 문제점은 아래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고구려 종교·사상사 분야에 대한 중국학계 연구의 양적 확대가 확인되며, 다양한 주제로 연구 범위의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건국신화와 기타 전설, 유교·불교·도교 등 전통적인 연구 분야뿐만 아니라 제사와 의례, 법률사상, 샤머니즘 등 다양한 주제로 연구가 확장되는 경향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한국 학계에서도 이에 발맞춰 고구려의 종교·사상사 분야에 대한 폭넓은 연구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특히 그동안 깊이 연구되지 못했던 고구려 유교·도교 문화에 대한 연구 확장이 요구된다. 중국학계의 주장에 대한 단순한 비판 및 대응논리 마련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세밀하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유교·불교·도교 등의 문화를 고구려가 어떻게 그들 문화에 녹여갔으며, 자기화해나갔는지 적극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둘째, 고구려의 종교와 사상 및 신화·전설의 연원을 고대 중국 문화에서 찾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게 확인된다. 물론 중국 문화가 고구려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고구려 주몽신화 속 난생설화나 하백녀 신화, 신마 전설과 황룡 승천 전설 등 고구려 고유의 신 관념이 포착되는 여러 신화 및 전설의 주요 모티프가 중국 문화의 영향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일방적인 시각은 앞으로 여러 논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전망된다. 결국 이러한 학문적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한·중 학계의 지속적인 학술 교류를 통해 상호 간에 견해의 간극을 좁혀나갈 필요가 있다.

셋째, 관련 분야에 대한 한국·일본학계의 연구 성과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점은 큰 약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특히 고구려의 불교문화나 건국신화와 관련해서는 이미 한·일 학계에서 상당한 연구의 축적이 이루어져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중국 학계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다보면, 근래까지도 관련 연구에 대한 한·일 학계의 선행 연구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학계 내에서도 비슷한 연구 주제와 주장들이 매년 저자를 달리해서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현상도 확인된다. 이와 같은 연구의 중복현상을 피하기 위해서는 관련 분야의 선행 연구 성과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집적이 이루어지는 한편, 이를 학계 간 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꾸준히 중국학계에 소개할 필요가 있다.” (53쪽)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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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한 중국 지식인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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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19세기 말, 중국이 서양의 무력 침략에 굴복한 이후 그들이 오랑캐라 불렀던 서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 수용은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등의 문제는 중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이 시기에 활동한 저명한 사상가인 옌푸(嚴復, 1854~1921)는 중국인 최초로 해외 유학을 떠나 서양문물을 접한 중국인이자, 그렇게 배운 서양의 문화를 중국에 가져와 정착시키려 했던 학자였다. 옌푸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중국과 서구의 문물을 모두 잘 이해하고 있던 인물임과 동시에 중국 내 주류 사회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이 서양을 대하는 태도가 혼란스럽게 변화하던 과도기적 시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양일모의 논문 엄복: 서양에서 새로운 학문을 구하다 (『동서인문』 , 6, 2016)는 옌푸라는 한 지식인의 외국 경험을 사상적으로 분석하며 그가 살던 중국 사회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옌푸(嚴復, 1854~1921)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서양의 충격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 배우기 & 중국인 유학생 파견

중국은 야만적인 오랑캐라 무시했던 서양에 대한 인식을 아편전쟁 이후 새로이 했다. 부분적으로 서양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하고, 서양의 강한 군사력을 인정하며 그들의 과학기술을 배우려는 태도를 취했다. 이는 중국의 입장에서 매우 큰 변화였는데, 1876년 타국에 상주하는 외교관을 영국 공사로 최초 파견한 사건이 이런 변화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과거 중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문화 내에 포섭되는 국가들과 조공체제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타국과 문제가 생겼을 때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흠차대신을 파견보냈던 것이 전부였다. 이에 타국에 상주하는 근대적 의미의 외교관을 정식으로 파견시킨 것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더불어 중국 내부적으로도 외국어 학습을 위한 경사동문관(1862), 서양을 의식하여 그들에 대항할 군사 함대와 대포를 만들기 위한 강남기기제조총국(1865) 등이 설치되었다.

외국으로 학생을 직접 내보내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일 또한 비슷한 시기 추진되었다. “청조는 1871년 12세에서 16세까지의 학생 30명을 선발해 4회에 걸쳐 120명을 국비로 미국에 보내 15년 동안 공부하는 계획을 수립”(8쪽)하고 이듬해 30명의 학생들이 미국으로 떠났다. 중국의 유학생 파견은 중국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서양의 뛰어난 기술을 모두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양무운동의 영향 하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유학생 파견은 국방 관련한 기술의 필요성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학생들은 주로 군사학과 항해술, 제조술을 배우게끔 배치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 하에, 옌푸의 영국 유학 기회는 푸젠 성에 있는 푸저우 선정국(福州船政局)이라는 조선소에 1866년 초빙된 외국인 근로자들이 1874년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만들어졌다. 옌푸가 다닌 선정학당은 군함을 조종하는 항해사나 배를 만드는 조선공을 양성하는 일종의 기술학교로 조선술, 항해술을 공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와 같은 외국어 공부 및 중국의 유교 학문 역시 함께 공부할 수 있던 곳이었다.

옌푸는 “5년 동안 영어와 항해술, 항해술에 필요한 수학, 물리학, 화학, 지질학, 천문학 등 기초적인 자연과학 과목을 공부”하고, 청조 황조의 지침을 싣고 있는 『성훈광유聖訓廣諭』, 효도를 강조하는 『효경』 등 유교적 이념을 담고 있는 서적 역시 강독했다.

그러나 기술 교육을 담당한 외국인 근로자들이 귀국한 이후 조선소와 학당 운영이 어려움을 겪자 일부 학자가 선정학당 출신 학생들을 유학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청 정부는 이런 의견을 받아들였고,1877년 3월 31일 옌푸를 포함한 영국으로 갈 학생 12명, 프랑스로 갈 학생 16명이 배를 타고 출발했다.

 

한 중국 지식인의 외국 경험기: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이상적 사회 경험

국비 유럽 유학생에 선발된 옌푸는 1877년 영국에 도착, 같이 간 6명의 학생과 함께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리니치 해군대학(Royal Naval College)에 입학해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중국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던 옌푸지만 영국에서 접한 과학기술은 그에게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옌푸가 유학하던 당시의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하던 시기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주의가 최고도로 발전한 시기였다.

그의 유학생활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한 당시 영국 주재 중국인 공사였던 곽승도의 기록에 따르면 옌푸는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영국의 선진적 해군 교육을 배울 수 있던 그리니치 해군대학에서 “수학, 역학, 화학, 전기 등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구성된 교과목을 학습하면서 서양의 근대적 학문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15쪽) 뿐만 아니라 그는 해군전술, 해상전 공법 및 무기, 진지구축 등의 기술과 전술 역시 공부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옌푸의 유럽 경험은 단순히 자연과학 및 기술의 습득에 그치지 않았다. 일례로 1878년 7월 프랑스에서 개최 중이던 파리 만국박람회 관람을 통해 옌푸는 파리에서 정비된 근대 도시의 도로와 교통 체제, 배수 시설 등을 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근대적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공회’라는 합의를 도출해내는 일종의 민간 사회의 조직과 구성 원리”에 주목하기도 했다.(18쪽)

19세기 성숙된 자본주의의 전시장이라 할 수 있는 만국박람회를 경험하며 옌푸는 “조리”가 있는 서양의 뛰어난 점을 진정한 의미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서 옌푸가 말한 “조리”는 영국에서 학습한 자연과학이 기초가 된 것으로, 서양인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이끌어가는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까지 확대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유학 경험은 귀국 후 중국에서의 경험과 결합하여 옌푸의 행보, 즉 서양에 대한 부분적 수용을 비판하며 서양의 핵심을 진리의 탐구로 여기고, 공익의 실현 및 자유 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자신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번역자의 길:
불합리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청조 말 중국이 서양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과학기술을 배우려는 태도를 취한 건 사실이지만, 이를 중국이 모든 영역에서 서양의 우월함을 인정했다는 뜻이 아닌 점은 주의해야겠다. 청조는 군사적인 방면에서 서구 열강에 뒤쳐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기에 서양의 무기 제조 기반이 되는 과학기술의 수용에는 긍정적이었지만, 정치와 도덕의 영역에서는 여전이 중국이 우월하다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옌푸의 관점에서 1860년대 시작한 서구 문화를 받아들여 강해지자는 양무운동 역시 서양에 대한 부분적 수용에 그칠 뿐이었다. 반면 옌푸는 영국 유학 시절 수학한 자연과학 공부와 더불어 서양 세계가 구성되고 운영되는 “조리”라는 원리에 관심을 두었다. 그가 보기에 서양은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적 태도, 공익의 실현 정신을 포함해, 자유가 사회를 조직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었기에 경제적으로 부를 획득하고 군사적으로 강대해질 수 있었다.

논문의 저자는 옌푸의 서양에 대한 인식, 중국에 대한 비판의식은 그가 중국으로 귀국한 후 겪은 여러 문제점이 유럽에서의 경험과 비교되며 더 명료하게 갈고 닦아진 것이라 주장한다. 옌푸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왔지만 중국 해군 정책의 주요 업무에서 계속 배제되었다. 이는 중국이 국비로 외국 유학을 보내는 정책을 시행하던 초기가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대부들이 중화주의적 사고방식을 고수하던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권력층의 자제들은 중국에 남아 과거시험을 보길 선호했고, 초기 국비 유학생들은 가정 형편 등의 사정으로 과거시험 준비에 매진할 수 없었던 학생들이 주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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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푸가 번역한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좌),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우)  출처: 한중교류재단 http://www.withchina.org/foundation/board_XELV01/4178

옌푸가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중국의 핵심 권력은 여전히 과거시험을 통과한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옌푸는 영국에서 배워온 지식이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그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자리를 얻지 못했고, 유럽에서 배워온 지식은 과거시험에 도움이 되질 못해 시험에서도 번번이 낙방했다. 저자는 옌푸가 조국 내에서 그 자신이 마주한 문제점을 서양과 대비하는 방식을 통해 중국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22쪽)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스펜서의 『사회학 입문』, 밀의 『자유론』, 스미스의 『국부론』 등 서양 근대 사회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다수의 저서들을 중국에 소개한 번역가로도 유명한 옌푸의 사상은 그의 번역서에서 더 잘 드러난다. 자신의 의도에 맞추어 편집되고 의역, 해설이 많이 추가된 형태로 오늘날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옮기는 번역 방식과는 매우 다르다. 번역자의 개입이 많다는 점에서 옌푸의 번역서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분석된다.

일례로 옌푸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번역하며 원문의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설명한 내용을 “벌을 재판하는 일에서 현명한 자가 못난 자를 다스릴 수는 있지만, 귀한 자가 천한 자를 다스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유럽의 입법은 법관과 죄수가 평등한 지위에 있다”라며 원문의 내용을 상당히 벗어난 의역을 보여준다.(23쪽)

저자는 사법제도에 관해 중국과 서양의 근본적 차이를 지적한 이 번역은 옌푸가 영국 법원을 방문하며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했던 경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설명한다. 정리하면, 옌푸가 주장한 “자유와 평등”의 가치, “중국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유교적 이념에 의한 구속과 계층적 차별제도에 대한 비판” 등의 사상에는 그가 유럽에서 지낸 경험의 이상과 귀국 후 중국에서 마주한 현실의 벽 사이의 고민에서 온 결과물인 것이다.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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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발 미세먼지 논란, 과학적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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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미세먼지는 여러 모로 간단치 않은 문제다. 2016년 5월 말 무렵 연이은 고농도 미세먼지로 사람들의 신경이 있는대로 날카로워져 있는 상황에서, 고등어 구이와 경유차를 연이어 주요 미세먼지 발생원으로 지적한 정부의 발표에 여론은 불에 기름이 끼얹힌듯 달아올랐다. 정부가 매년 봄마다 막대한 양의 중금속과 미세먼지를 황사에 실어 보내는 중국에는 당당히 항의하지 못하면서 애꿎은 서민들에게 미세먼지의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것이 정부에 대한 대중적 비난 여론의 핵심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환경단체 그린피스도 유탄을 맞았다. 2015년 무렵부터 국내에서 석탄화력발전소 감축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던 그린피스는, 초미세먼지의 50~70%가 국내에서 발생한다는 내용의 홍보자료를 배포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2016년 4월 무렵 인터넷 여론으로부터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그린피스 측에서 자료의 출처가 환경부 및 서울시 자료임을 밝혔음에도 비난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한국 내 재단법인 그린피스의 대표로 등록된 인물이 중국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에 인터넷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과학적 사실에 대한 논쟁은 뒷전으로 밀려난 탓이었다.

두 사례 모두에서 미세먼지 문제는 대중에게 반중 정서를 표현하는 일종의 매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린피스 한국 재단 대표의 국적에 대한 논란이 과학적 사실에 대한 논의를 밀어내고 여론을 일방향적으로 과열시키는 양상을 보인 것은, 한국 내에서 반중 감정이 과열되어 모종의 인종주의와도 같은 것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세먼지의 원인을 중국에 귀속시키는 대중의 태도는 그들 나름의 경험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록 2013년 환경부의 발표에서는 국내 초미세먼지에 대한 중국의 영향을 연간 30~50% 수준으로 추산하는 선에 그쳤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와 반대로 중국의 영향을 강조하는 결과도 발표되고 있다. 핵심은, 적어도 미세먼지 농도가 매우 높아지는 날에 한해서 볼 때는 중국의 영향이 지대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지역별 기여도 분석을 위한 모델링 영역 및 20개 발생 지역. 해당 논문에서 발췌.

컴퓨터 모델링을 통한 

기여도 분석

예를 들어, 안양대학교 환경에너지공학과의 김종희 등이 2016년에 낸 논문 「2014년 2월 서울의 고농도 미세먼지 기간 중에 CMAQ-DDM을 이용한 국내외 기여도 분석」(『한국대기환경학회지』 32(1), 2016.2, 82-99)를 읽어볼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연구진은 한국, 중국, 북한 등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기상, 미세먼지 배출량, 화학물질의 수송량 등을 시뮬레이션으로 모델링하여, 서울 지역의 고농도 미세먼지에 각 지역이 어느 정도로 기여했는지를 추정했다.

기술적 방법의 측면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연구진은 동아시아 지역, 구체적으로 말해 동경 82도에서 149도, 북위 18도에서 53도에 해당하는 사각형 영역의 대기 환경을 컴퓨터로 모델링하여, 2014년 2월 15일부터 3월 5일까지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했다. 그런 뒤 시뮬레이션에 나타난 풍속, 풍향, 기온, 습도 등의 수치를 실제 해당 기간에 각 위치에서 관찰 기록된 수치와 비교함으로써 모델의 타당성을 검증했다.

컴퓨터 모델 속에서는 서울 지역에 도달한 미세먼지 입자들 각각이 원래 어느 지역에서 출발한 것인지를 추적할 수 있다. 연구진은 우선 국내 지역을 8개 영역으로 나누고, 북한 지역에 하나의 영역을 할당하고, 중국과 몽골 지역을 10개 영역으로 세분화한 뒤 대만, 일본 및 해양 등 기타 지역을 하나로 묶어 총 20개 영역으로 동아시아 지역을 분할했다. 그런 뒤 서울 지역 미세먼지 농도에 각 지역이 어느 정도의 비율로 기여했는지를 측정했다.

2014년 2월 24~27일의 서울 지역 미세먼지 농도 및 지역별 기여도. 해당 논문에서 발췌.

연구진은 서울 지역의 미세먼지 농도가 특히 높았던 2014년 2월 24~27일의 농도 및 기여도를 분석했다. 위 그래프에서 가로축은 날짜, 세로축은 미세먼지 농도(μg/m3)이며, 검은 색은 한국, 붉은 색은 북한, 녹색은 중국 지역에서 이동해 온 미세먼지의 양을 나타낸다.

서울 지역 미세먼지에 대한 중국의 기여도는 24일 51.94%에서 25일 53.19%까지 높아졌다가 26일 46.03%를 거쳐 27일에는 39.77%까지 떨어진다. 반면 한국 지역의 기여도는 24일에는 15.37%였다가, 시간에 따라 20.65%, 34.83%, 37.10% 등으로 높아진다.

같은 기간의 기상 자료와 함께 살펴보면, 23일에서 25일까지 서해상에 위치했던 정체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25일까지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양의 미세먼지가 유입되다가 26일부터는 고기압의 영향이 약해지면서 중국으로부터의 유입이 줄어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해상에서 한국 내륙 방향으로 바람이 불면서, 이미 유입된 미세먼지가 서울 상공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지는 기간에 황산염(SO4 이온을 포함하는 물질)과 질산염(NO3), 암모늄염(NH3+)의 농도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연구진은 강조한다.

중국 각 지역의 서울에 대한 일 평균 기여량. 해당 논문에서 발췌.

연구진은 구체적으로 중국의 어느 지역으로부터 미세먼지가 불어오는지를 분석했다.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하늘색 영역은 산둥반도, 그 다음 연보라색 영역은 베이징과 톈진 부근의 기여도를 나타낸다. 짙은 푸른 색 영역은 둥베이 공업 지역을 포함하는 만주이며, 흰색은 상하이와 난징 부근의 기여도이다.

황사의 주요 발원지인 몽골 및 내몽골 지역의 기여도는 그래프 맨 밑바닥에 깔린 붉은 색, 녹색, 노란 색 영역으로 극히 미미하다. 둥베이, 화북, 화동 등 중국 동해안에 밀집된 공업지대로부터의 기여도가 그래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서울 지역 고농도 미세먼지 현상에 대한 중국의 기여는 자연적인 원인보다는 인위적인 원인이 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과의 해석과
한계

서울 지역 미세먼지 농도가 최고조에 달한 2월 24일에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 국내 영향을 단순히 상회하는 것을 넘어서 국내 영향의 세 배에 달하는 지배적인 기여도를 보인다는 사실은 센세이셔널하다. 적어도 한국인들이 미세먼지의 피해를 가장 극심하게 겪는 시기에 한해서는, 그 책임의 대부분이 중국에게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이다.

다만 이 논문을 근거로 한 쪽 측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우선, 한반도 상공에 공기 덩어리가 정체해 있는 기간 동안에 국내 지역에서 배출된 미세먼지가 계속해서 축적됨에 따라 국내 지역으로부터의 미세먼지 기여도가 상승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내에서 생성되는 미세먼지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끼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연구 자체의 한계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데, 우선 이 연구는 PM10, 즉 직경 10마이크로미터 이하 미세먼지의 생성 및 이동에 관해 다룬 연구로서, 최근 특히 논란이 되고 있는 PM2.5, 즉 직경 2.5마이크로미터 이하의 ‘초미세먼지’에 관한 문제와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연구는 1년 가운데 미세먼지 농도가 높게 나타나는 4일간의 미세먼지 기여도를 분석한 것으로서, 1년간의 농도 및 기여도 변화 추이 및 그것이 우리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피해 정도에 관해서는 이 연구만으로는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연 평균 미세먼지에 대한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제한적으로 평가한 2013년 환경부 자료 자체가 이 연구를 통해 전면적으로 반박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사회는 어떻게 관계맺어야
하는가

그럼에도, 이 연구 결과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최근의 추세는 동아시아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중국의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인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의 환경 문제가 한국을 비롯한 이웃 나라들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예전부터 논의되어 왔고, 그린피스에서도 일찍이 이 문제를 인식하여 이미 2008년부터 중국에서 석탄화력발전소 감축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해 오고 있다. 그린피스가 한국에서 석탄화력발전소 감축 캠페인을 시작한 2015년보다 훨씬 일찍임을 고려할 때, 미세먼지 등 대기환경 오염 문제에 있어 그린피스가 중국의 책임을 경시하거나 은폐하려 한다는 시각은 부당한 오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떤 한 과학적 사실의 안과 밖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무시하고서, 단편적인 측면만을 과장 혹은 왜곡하여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여론몰이를 해서는 안된다고 당위적으로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인류사에서 그런 식의 비합리성이 작동하지 않은 시기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있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성적인 토론’과 ‘감정적인 선동’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고, 사회 변화의 동력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시민사회 영역의 여러 실천들을 모조리 후자로 몰아 냉소해버리는 보수적 엘리트주의 또한 과학과 사회 사이의 건강한 관계를 예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과학적 사실의 어느 측면을 강조하고 어떤 맥락에서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상호)주관성, 인문성, 정치성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과학적 사실의 제시가 전가의 보도처럼 논쟁을 종결시키고 하나의 결론을 강제할 수 있다는 상상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정당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과학은 정치적, 사회적 논쟁 속으로 끊임없이 불러들여질 것이고, 불러들여져야 마땅할 것이다. 과학과 정치, 과학과 사회는 어떤 식으로 관계맺어야 할 것인가 하는 오랜 고민을 다시금 곱씹게 되는 부분이다.

 

* 함께 읽어볼 만한 논문

「언론은 미세먼지 위험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미세먼지 위험보도 프레임과 정보원 분석」
김영욱 외 3인, 2015, 『한국언론학보』,  59(2), 121-154.

「한국과 중국의 경제성장이 한국의 미세먼지에 미치는 영향분석」
장경수·여준호, 2015, 『환경정책』, 23(1), 97-117.

강병준 리뷰어  iyyagg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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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토템부터 전통론까지, 고대사 중화주의 점입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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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傳統만큼 논란의 전통이 긴 주제도 드물 것이다. 서구에서도 그렇지만 동양에서는 전통이 더욱 문제적이었는데, 서구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전통의 꼴사나운 모습을 누누이 지켜보면서 근대화를 이룬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중국, 다 마찬가지고 일본은 좀 다를까 싶지만 마찬가지의 속성을 지닌다. 여기까지가 20세기의 내용이다. 20에 1을 더한 21세기가 되자 전통을 바라보는 동양권 학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특히 중국이 그러했다. 개혁개방이후 동북공정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중국이 자신의 전통을 다시 일으켜 세운 뒤 먼지를 털고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자 한 것이 2000년대 들어서다. 하·상·주 단대공정 등 지난 10여 년, 한국과의 고대사 논쟁을 일으켜가며 중국이 추진해온 ‘고대의 재발견’ 노력은 여기서 굳이 일일이 재론하지 않는다. 그냥 한마디로 요약하도록 하자. “정말 열심히 달렸다.”

 

‘곰 토템’론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예수셴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 속에서도 유달리 ‘창의적’인 학자가 한 명 있으니 그의 이름은 예수셴葉舒憲이다. 동북공정을 주도한 중국 사회과학원의 비교문학연구실 주임을 맡았고 중국신화학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줄곧 역사 속에서 자극적인 반전을 시도하는 인물이다. 먼저 ‘곰 토템’ 논의를 들 수 있다. 지난 2006년 펴낸 저서에서 예수셴은 중국 문명이 곰 토템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곰 토템이 중국 문명의 고고학적 출발인 홍산문화 및 황제 신화와 두루 연결되며 이후 문명의 토대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단군신화 등 북방 이민족의 신화를 이것의 변형으로 파악했다. 이를 두고 한국 고대사학계가 들끓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동북아 곰 신화와 중화주의 신화론 비판』(2009)이라는 관련 연구서를 내놓았고, 여기서 김선자 연세대 교수는, “홍산문화를 곰이나 용이 아닌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전통인 매와 샤머니즘의 관련성 아래에서 읽어내야 한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셴을 비판했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예수셴의 연구는 ‘전통의 터미놀로지terminology’에 집중되었다. 앞서 ‘곰 토템’ 주장이 갖는 맥락은 이렇다. 유라시아로 시야를 넓혔을 때 한족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 사이에 가장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고대 토템이면서 동시에 ‘황화’로의 귀류 현상이 관찰되는 토템이 바로 ‘곰’이었다. 이는 예수셴이 평소 주장한바, 중국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계적인 것으로 그것을 위치 지을 수 있는 요소의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곰 토템’의 고고논리학만으로는 그것의 ‘문명적 위상’을 확보하기란 무망한 일이다. 토테미즘은 과거 중의 과거이고 현대 중의 현대인 요즘의 과학혁명시대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현대를 이룬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더라도, 현대에 공헌하는 것은 ‘먼 과거’보다는 ‘가까운 과거’이리라. 푸코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18세기의 산물이라고.

예수셴, 출처: 리뷰아카이브

 

‘대전통/소전통’을
‘소전통/대전통’으로 반전

 

그런데 ‘먼 과거’의 반란이 예수셴을 기수로 중국 땅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대大전통-소小전통’ 논의가 그것이다. 원래 이 ‘대전통-소전통’ 개념을 제시한 이는 미국의 인류학자 로버트 레드필드Robert Redfield다. 그는 상층high·고전classic·엘리트learned 등 이른바 지배층/문자의 문화를 대전통great tradition으로, 하층low·민속folk·통속popular으로 묶이는 민중/구술문화를 소전통little tradition으로 분류했다. 이것이 1950년대의 일인데, 그 이후 이 개념은 “인류학·문학·철학·역사학 등 여러 분야에 수용되어, 대전통은 상층·주류·관방의 전통을 가리키는 한편 소전통은 하층·주변·민간의 전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곰 토템은 오히려 아이누 족처럼 곰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전통이 아닐까. 사진은 곰의 영혼을 신에게 돌려보내는 의식. (사진 출처: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oisam523&folder=12&list_id=12842714

그런데 예수셴은 이것을 역전시키고자 한다. 문자 이전의 수천 년의 시공간이 ‘대전통’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 문자 이후의 ‘소전통’이라고 말이다. 이로써 수십 년간 학계에 통용되어온 개념이 호떡 뒤집히듯 뒤집혀버렸고 곧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최근 이런 예수셴의 연이은 주장들을 소개하고 조목조목 비판한 국내 학자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유진 연세대 인문학연구원대전통·소전통 담론의 전복인가, 변주인가?(『중국어문학논집』, 102, 2017)가 그것이다. 여기서 이유진 연구원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논의를 출발시키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페터 빅셀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의 한 대목이다. 아래에 인용해본다.

[su_quote]‘언제나 똑같은 책상, 언제나 똑같은 의자들, 똑같은 침대, 똑같은 사진이야. 그리고 나는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고, 사진을 사진이라고 부르고, 침대를 침대라고 부르지. 또, 의자는 의자라고 부른단 말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지?’ (…)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질 거야.’ 그는 이렇게 외치면서,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그 날 이후,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한참 동안 사진 속에 누운 채로 의자를 무엇이라고 부를지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의자를 ‘시계’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는 아침에 ‘사진’ 속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시계’ 위에 앉아 양팔을 책상 위에 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의자는 시계라고 부르는데 책상을 ‘책상’이라 불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책상을 ‘양탄자’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그는 아침에 ‘사진’ 속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양탄자’에 놓인 ‘시계’ 위에 앉아 있게 된 것이다. _ 『책상은 책상이다』 중에서, 논문에서 재인용[/su_quote]

무얼 말하려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대전통-소전통 개념은 이미 수십 년간 학계에 공인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을 거꾸로 뒤집는다는 것은 ‘랑그 체계’에서 이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문적 시민권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다. 만에 하나 이것이 가능하려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와 ‘열렬한 호응’이 있어야 한다는 게 이 연구원의 지적이다.

 

문헌은 증거능력 없다,
오직 유물과 도상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식의 도발이 가능한 걸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어 논문을 따라가본다. 예수셴이 주장하는 대전통/소전통 개념의 핵심은 무無문자전통/문자전통이다. 그는 『곰 토템: 중국 시조신화의 근원 탐구』에서 올빼미의 상징을 분석한 적이 있는데, “대전통의 문물과 도상圖像이 보여주는 올빼미의 문화사가 소전통의 한자 텍스트에서는 은폐되고 왜곡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문자전통에 의한 무문자전통의 왜곡 현상을 수정하기 위해 ‘사중증거법四重證據法’이란 것을 제시한다. 루카치의 ‘최종 심급’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이것은 “문헌 자료(1중증거), 고고발굴로 출토된 갑골甲骨·금문金文·죽간竹簡·백서帛書 등의 문자 자료(2중증거), 구전과 의례 등 인류학·민속학 자료(3중증거), 실물과 도상 자료(4중증거)”로 분석 단계를 높여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가운데 “4중증거에 해당하는 고고학적 실물과 도상 자료를 법관이 중시하는 물증에 비유할 정도”로 신뢰한다. 그는 계속 “중화문화 내부의 다양성과 풍부함은 중원중심과 한자중심의 소전통에 의해 은폐되었”고 21세기 고고학의 발전으로 사중증거의 새로운 지식이 가져온 대전통의 재발견은 “공자와 사마천이 보고 싶었어도 볼 수가 없었던 중요한 실물 자료와 부호 정보를 보게 해준다”라고 말한다.

이어 이유진 연구원은 그런데 전문자시대의 역사전통을 지칭하는 데 있어서 예수셴은 왜 굳이 ‘대전통’이라는 술어를 사용하고자 할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아래와 같이 그 이유를 정리하고 있다.

[su_quote]예수셴은 자신의 시도가 기존 대·소 전통 개념의 문화엘리트주의를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이 포스트모던과 포스트콜로니얼 관점에 입각한 것임을 강조한다. 대·소 전통 개념의 역전은 ‘무엇이 대大이고 무엇인 소小인가?’라는 가치 판단의 재정립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엘리트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문자 권력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문화엘리트주의에 반대하는 예수셴은 문자 권력이 만들어낸 전통을 ‘대’전통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대’와 ‘소’에는 전통의 합법성과 정통성에 관한 가치 판단이 농밀하게 녹아들어가 있다. 전통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가늠하는 지표로서 근원적 시간의 ‘시간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공동체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 온 사상·관습·행동이 바로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su_quote]

예수셴은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 등 프랑스 아날학파가 보여준 ‘장기지속longue durée’의 역사가 역사에 대한 거시적 관점으로 주목할 만하지만, 장기지속의 시간이 불과 500년에 불과하다며 무문자문화를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즉, 그는 대전통/소전통의 이항대립구조의 역사인식 틀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장기지속 역사’의 개념마저도 수정하려 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출되는 틀에 예수셴은 ‘신화역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이 연구원은 말한다. 신화와 역사를 이어붙인 이 개념은 “역사와 신화의 대립을 해소하는 동시에 신화를 문학이라는 협소한 개념에서 해방시켜 중화문명의 근원을 탐색하는 열쇠”로서 기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중화문명의 ‘본토성’이 제대로 보인다는 게 예수셴이 다음 걸음을 떼어놓는 지점이다.

 

‘옥玉’이라는
이데올로기

무엇이 본토성인가? 여기에 또 다른 새로운 콘텐츠가 제시된다. 바로 ‘옥玉’이다. 예수셴은 옥을 “중국 대전통의 원형부호”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유구하고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su_quote]옥기 제작과 관련된 ‘물질의 서사’ 연대가 8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은 유구성의 강조다. 한편 6000년 전 홍산紅山문화의 옥조각 신인상神人像에서부터 청나라 소설 『홍루몽』에서 가보옥賈寶玉이 옥을 물고 태어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대전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전승의 맥락은 연속성의 강조다.[/su_quote]

이 연구원은 예수셴이 이런 ‘유구함’과 ‘연속성’ 양자를 ‘코딩coding’이라는 개념으로 발생학적으로 관련짓는다고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의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수만 년의 구전문화가 신흥의 문자문화 속에서 종결·대체된 과정이 살펴지고, 연속이라는 측면에서는 대전통 속의 신성물 숭배와 신화관이 한자 발생에 중요한 원형 코딩의 기초를 다져주었다. 그리하여 예수셴은 “문물과 도상이 구성한 대전통의 문화텍스트 코딩을 1급 코딩으로 간주하고, 문자 소전통의 맹아를 2급 코딩의 출현으로 간주하며, 문자텍스트인 초기 경전을 3급 코딩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경전시대 이후의 모든 글쓰기는 거듭하여 코딩된 것으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기에 N급 코딩(N-level coding)으로 통칭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연구원은 이를 쉽게 사례로 설명해주는데, 예수셴에 따르면 “중국문화 속의 ‘개구리신蛙神 주제’를 ‘코딩 이론’에 따라 분석하자면, 양저문화의 옥조각에 보이는 개구리신이 1급 코딩, 한자의 ‘와蛙’가 2급 코딩, 고대의 경전인 『월절서』에 나오는 개구리 이야기가 3급 코딩이다. 『요재지이』의 「청와신靑蛙神」에서부터 모옌의 『개구리蛙』에 이르는 후대의 창작은 N급 코팅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뭔가 일목요연한 듯하면서도 예수셴의 이론이 매우 도식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논문은 이런 입장이 예수셴에게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기존 학계에 참조할 만한 논의들이 있어왔다며 그 맥락을 보강해주는데 그 부분은 직접 읽어보면 될 것이고, 우리의 관심은 이 연구원이 예수셴의 ‘개념화 작업’에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다.

 

탈서구가 곧 학문적 윤리는
아니다
문자가 새겨진 홍산문화의 옥 유물. 출처: 리뷰아카이브

 

논문의 뒷부분에서 여러 인터뷰를 통해 소개되는 바로는, 문자지식과 사회권력이 공모 관계에 있다는 것이 예수셴의 입장이다. 때문에 그는 문자전통이 구축한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인식상의 식민주의를 해체하고 패권 담론을 해체하는 학문 윤리의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무문자전통을 ‘대’전통으로 끌어올린 작업이 과연 패권 담론의 해체라는 학문의 윤리성을 구현한 것일까? 논문의 필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는 오히려 ‘또 하나의 패권’을 읽어낸다. 예수셴은 가장 최근의 글인 「옥석신화신앙과 화하정신」에서 결국 무문자전통의 ‘대’전통 탐색은 ‘중화’의 추구와 공명共鳴하는 것이라는 게 드러난다. 8000년의 옥문화를 강조하는 이유도 “중화문명이 어떻게 옥문화를 통해 ‘다원일체’를 실현했는지 밝히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옥문화의 연구성과가 ‘일대일로一帶一路’의 국가전략에 부응하고, 다민족의 단결·공영·호혜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는 기대”도 내비친다. 이 연구원은 예수셴의 이런 의도가 그가 말하는 학문적 윤리와 얼마나 부합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전형적인 중국 담론과 중국 경험이 세계 평화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도 덧붙인다.

[su_quote]분명한 것은 새로운 ‘대전통’ 개념이 중국의 시공간적 범위의 확장과 연동된다는 사실이다. 중화의 유구함을 증명하기 위한 역사 끌어올리기, 유기체로서의 중화를 강조하는 다원일체론, 이는 중국의 시공간적 범위의 확장과 관련된다. 예수셴이 주장하는 대전통 개념은 바로 이러한 중국의 시공간적 범위의 확장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su_quote]

고대사나 사상 분야에서는 예수셴을 비롯해 리쉐친, 거자오광 등이 근현대에서는 간양, 왕후이 등의 학자가 반서구 내지는 탈서구적인 자세에서 중국적인 것을 재탐구하여 보편으로 끌어올리려는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작업들이 얼마나 설득력을 얻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유진 연구원의 이번 논문을 통해서 볼 때 중국적인 것의 보편화를 통한 현실 중국의 확장은 적어도 순수하게 문화적인 차원에서는 그 전파력을 쉽게 얻기는 힘든 것으로 보여진다.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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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러시아 민족주의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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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최근 한국 내 사드 배치 문제를 두고 중국과 우리나라 간에 갈등이 전개되고 있다. 중국은 노골적인 경제 제재를 진행하고 있으며 중국인들도 중국 당국의 대응에 적극 호응하면서 반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극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산 자동차를 비롯한 수출품을 공개적으로 불태우거나 부수는 과격한 행위도 벌어지고, 자발적인 불매운동과 문화상품 퇴출 바람까지 불고 있다. 중국인들의 이러한 집단 행위는 달라이 라마를 후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직격탄을 맞았던 까르푸 사태, 남중국해 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미국과 필리핀 상품의 불매운동과 관광 중단 등 다양한 정치적 이슈로 인해 빈번하게 벌어진다. 이런  시위의 배경에는 중국의 민족주의가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다.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조형진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연수연구원 이선우「중국과 러시아의 민족주의 정책 비교: 탈정치화와 재정치화의 동학」(『다문화사회연구』, 9(1), 2016)은 중국과 러시아의 민족주의 정책 및 그 결과를 분석한다. 물론 “민족주의는 여전히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를 통해 분석되기가 쉽지 않은 영역이다.” 하지만 이 논문은 중국과 러시아의 비교를 통해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흔히 공격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권위주의 국가로 함께 묘사되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교함으로써 “개별적인 국가별 분석에서 뚜렷하지 않았던 미묘한 차이를 좀 더 명확하게 서술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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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탈정치화 전략을
구사하는 중국

논문은 국가를 중심으로 민족주의를 분석한다. “민족주의의 개념 자체가 아니라 민족주의 정책에 대한 비교연구를 위해서는 정책의 입안과 시행의 주체인 국가가 핵심 변수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석의 전제로 국가 민족주의, 대중 민족주의, 종족 민족주의 등 세 가지 유형의 민족주의를 개념화하는데, 이는 “현실을 과도하게 단순화할 위험성”이 있는 데다, 이 세 가지 유형들이 두 국가의 민족주의 또는 민족주의 정책을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지만, “민족주의 정책 분석이라는 연구 목적과 중국과 러시아라는 연구 대상의 현실에 가장 부합”하기에 세운 전략이라고 필자들은 밝힌다.

 

 

먼저 국가 민족주의(state nationalism)란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국가건설과 민족건설의 일치를 추구하는 민족주의와 그 정책을 의미한다. “국가건설은 유럽 봉건제의 위기에서 시작되었으며, 어떠한 민족적 감정도 개입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민족감정이 개입되어 민족건설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였다.” “국가건설이 정체성, 언어, 종교, 가치와 상관없이 영토 내의 동일한 규칙 적용과 같은 외양적 제도의 일치성에만 기초해도 가능했던 것인 반면, 민족건설은 보다 기초적인 가치들의 일치를 요구했다. 양자는 상호필수적이면서도 배타적이다.”

종족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는 말 그대로 하나의 단일한 종족임을 강조하면서 표출되는 민족주의를 의미한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는 국가와 민족의 불일치로 인해 국가 민족주의와 종족 민족주의가 대립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에 해당된다.”

대중 민족주의(popular nationalism)는 국가가 내세우는 국가 민족주의의 방향과는 상관없이 대중들의 합의에 의해 표출되는 민족주의를 가리킨다. 사회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는 대중 민족주의는 자율성이 전혀 없는 사회가 아닌 이상 정치권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며, 정치적으로 활용되어 권력의 기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중국과 러시아에서 종족 민족주의의 발현은 가장 민감하면서도 위험한 지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족 민족주의를 억제하는 가장 논리적인 전략은 이 문제를 정치로부터 주변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은 예부터 소수민족에 대한 정치화 전략보다는 탈정치화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즉 민족을 탈정치화함으로써 문화의 영역에 머물도록 한 것인데, 후에 사회주의 국가가 되고 난 뒤에도 중국은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정책 등으로 포장된 전형적인 탈정치화 전략을 이어나갔다. 러시아 또한, “연방이 15개 종족의 거주영역 기준 공화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소련 시기에 대중 민족주의와 이에 이은 종족 민족주의의 발흥을 억제하고 민족주의를 탈정치화하는 것을 주된 전략으로 택했다.

이렇듯 “권위주의 국가의 대중 민족주의와 종족 민족주의에 대한 탈정치화는 민주주의와 소수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로막기 위한 시도”이다. 하지만 “미성숙한 민주주의 체제가 민족주의와 결합하면 정치권력의 분절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민족주의 감정을 권력 경쟁에 이용하려는 정치엘리트들의 유인이 상승하여 비민주주의 체제보다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 심지어 종족 간 대학살”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내재한다.

 

Book with the national flag and contour of Russia on cover.

선거 권위주의 체제하에서의
러시아 민족주의

앞에서 언급했듯이 러시아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온건한 국가 민족주의의 접근에 입각해 러시아인 중심의 민족주의 성향을 가급적 탈각함으로써 종족 민족주의의 발흥 가능성을 억제하고, 연방의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정책 기조로 인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가 진행되어 공산당의 위계적 통제력이 사실상 소멸되어버렸을 때, 해당 공화국들의 엘리트들이 정치적 동원을 목적으로 종족 민족주의를 활용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1991년 말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지는 않았지만 연방 내에서 독립을 시도하는 공화국이 생겨났다. 옐친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전형적인 민족주의의 탈정치화와 이에 기초한 종족 민족주의 발흥 억제 및 그에 따른 연방의 유지책을 전략화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를 기준으로 연방정부는 무려 47개의 연방구성주체들과 쌍무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로 인해 “대다수 연방구성 주체에 해당하는 지방정부들이 연방 체제로 안착함에 따라, 특정 소수민족이 거주의 중심을 이루는 공화국들 역시 종족 민족주의를 고의적으로 준동하는 것을 차츰 자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방정부의 민족주의 정책은 푸틴의 부상 및 집권과 함께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푸틴은 그의 전임자와 달리 이미 집권을 전후한 시점부터 야권 측이 선점했던 민족주의 담론을 일정 부분 재정치화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기반 구축에 활용”하고자 했다. 푸틴의 선거 권위주의 체제는 “거대 권력당인 통합러시아당(United Russia) 등 다양한 통로를 통해 애국주의 담론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이를 지지 기반으로 공고화시킴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다.” 체첸 반군이나 우크라이나 사태는 사회적 차원에서 대중 민족주의가 점차 종족 민족주의로 변질되는 추세가 강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푸틴의 선거 권위주의 체제는 체제 안정성 강화를 위해 대중 민족주의를 활용해 왔으나, 대외적 환경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종족 민족주의의 부상 가능성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민족주의에 대한
정치화 양상

중국과 러시아에서 종족 민족주의의 재등장은 두 국가의 뇌관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관리하는 두 국가의 정책은 약간 다른 방향으로 작동한다. 공산당이라는 하나의 정치권력 아래에서 정치엘리트들의 합의에 의해 일사불란하고 통일된 정책 시행이 가능한 중국과 달리, 선거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민족주의의 정치화에 대한 유혹이 반복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러시아는 “다수 종족의 배타성과 외교적 공세성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물론 중국 내 소수민족의 저항 또한 매우 심한 사회 갈등과 외교 마찰까지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중국은 대내외적으로 여전히 “민족주의에 대한 탈정치화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종족 민족주의와 대중 민족주의가 결합하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지금까지도 중국은 “정치엘리트들 간에 소수민족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고양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강력한 합의가 존재한다.” 중국 당국이 종족 민족주의에 대한 대중 민족주의를 전면적으로 “조작·통제하여 국가의 ‘꼭두각시(puppets)’로 만들 수는 없지만, 민족주의적 저항에 대하여 ‘신호등(red light, green light)’처럼 한계와 규칙을 설정하여 관리할 수는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 내 종족 민족주의의 발현이나 민주화 요구 등 내부적 문제에 대한 대중 민족주의, 외교적 문제에 따른 외부적 대중 민족주의를 관리하는 데 모두 해당된다.

그에 반해 형식적으로는 선거를 통한 집권이 제도화되어 있는 러시아에서는 대중 민족주의와 종족 민족주의가 결합하고 서로를 자극하는 상황을 조장하거나 이용한다. 다시 말해, 민족주의의 재정치화가 작동하기 쉬운 선거 권위주의 체제인 러시아의 민족주의는, “탈정치화를 용이하게 유지하고 조정할 수 있는 중국의 민족주의보다 훨씬 더 공세적인 외교정책을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세계화 시대에도 민족주의가 지속적으로 재조명되는 것은 개별 국가의 존재 가치와 국민적 통합이 집권에 유용할 뿐만 아니라, 국제질서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지속시키는 강력한 수단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국의 이익이 최우선 가치가 되고 있는 지금의 국제질서 속에서 가장 공세적인 중국과 러시아의 민족주의 속성과 방향성을 분석하고 지켜보는 일은, 우리의 외교적 스탠스를 설정하고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제5장 중국 민족주의의 비판적 고찰을 통한 한국 민족주의의 방향성 모색」
한주희, 2012,『민족사상』, 6(3), 139-168.

「러시아민족주의의 성격과 푸틴주의의 민족주의적 지향」
우평균, 2014, 『슬라브학보』, 29(3), 115-152.

“한국문학이 이렇게 뛰어난 줄 몰랐다”

knovelinchina

 

logofinale한류를 등에 업고 한국문학의 해외수출이 본격화되고 있다. 중국에도 많은 소설이 소개되었는데 최근 중국 번역 한국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리뷰해주는 논문이 발표되어 눈길을 끈다. 이화여대 강경이 씨의 「한국번역문학에 대한 중국 현지 독자들의 반응 연구」(『번역학연구, 17(5), 2016)가 그것이다.

강씨는 논문에서 3편 이상 중국에 번역된 작가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독자리뷰의 숫자를 비교해보았다. 최근 10년, 즉 2007~2016년까지 중국에서 정식 출간된 작품 편수가 3편 이상인 한국 작가는 은희경, 신경숙, 박완서, 김주영, 김영하, 공지영, 박범신, 천명관, 김애란, 한강 등 10명이었다. 그중에서 공지영(7권), 신경숙(6권), 김영하(5권)의 순서로 많이 소개되었다.

[su_quote]분석하게 될 온라인 서평들은 중국 최대의 도서, 영화, 음악 리뷰사이트로 꼽히는 ‘더우반닷컴(豆瓣ㆍwww.douban.com)’ 내 ‘더우반독서(豆瓣讀書)’ 카테고리에서 추출하였다. 더우반닷컴은 이용자 제작 콘텐츠 기반의 커뮤니티 사이트로 온라인 회원들이 도서, 영화, 음악에 대한 평점을 매기거나 관련 평론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도 있고, 타인의 추천 콘텐츠들을 검색할 수도 있다. 그 중 도서 분야를 특화한 ‘더우반독서’는 도서와 관련된 제반 정보들을 상세하게 제공하는 전문 독서사이트이며, 중국 내에서 방문자 수가 가장 많은 커뮤니티다. 이처럼 중국 현지에서 실질적인 영향력과 신뢰도를 지닌 온라인 독서사이트라는 점, 판매 기반 플랫폼이 아니기 때문에 독자의 순수한 견해와 입장이 대거 반영되어 있을 거라는 점을 감안하여 분석대상을 이 사이트의 독자서평만으로 한정했다. (12쪽)[/su_quote]

위의 분석대상 리뷰 선정 기준은 적합해 보인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독자리뷰는 얼마나 될까? 공지영 작가의 작품이 다른 작품에 비해 압도적인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161건, 『도가니』가 139건으로 가장 많다. 그 뒤를 50개의 리뷰가 달린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따르고 있다.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 김주영의 『멸치』, 신경숙의 『리진』은 독자리뷰가 0건이었다. 신경숙의 작품은 2010년에 『엄마를 부탁해』가 처음 소개됐는데 어느 정도 반응을 얻어서인지 2012년 3권, 2015년 1권이 소개되었는데 독자리뷰는 거의 달리지 않았다. 이는 책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맨부커상 수상 이전인 2013년에 소개되었는데 거의 반응이 없다가 수상 이후 독자리뷰가 45개나 달렸다. 김영하는 5권이나 소개되었지만 독자리뷰는 작품당 2~17건을 오가는 데 그쳤지만, 3작품이 소개된 천명관은 『고래』가 32편의 독자리뷰가 달리는 등 중국 독자들에게 훨씬 소구력이 높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중국어판, 출처: 리뷰아카이브

 

강경이 씨의 논문은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我们的幸福时光』과 『도가니熔炉』 두 작품의 독자리뷰를 번역해 소개하고 있어 유용하게 읽힌다. 우선 고려해야 할 사항은 두 작품 모두 영화로 만들어져서 중국에 개봉된 이후 원작 소설이 번역소개됐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훨씬 좋은 흥행조건 속에서 시작했다. 그러면 아래에서는 중국 독자들의 감상평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강경이 씨는 거의 300편에 달하는 독자리뷰를 1) 한국문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 표명, 2) 작가에 대한 공감, 3) 주제나 내용에 대한 공감, 4) 소설과 영화를 비교, 5) 번역 품질에 대한 평 등 다섯 카테고리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다.

도가니 중국어 판, 출처: 리뷰아카이브

 

1) 한국문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 표명

∙예전에는 한국소설 하면 떠오른 것이 중학교 때 읽었던 귀여니의 『그 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 류의 소설이 전부였다. (…) 지인이 이 책을 추천해 읽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무겁고 깊이 있는 화제를 다루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 영화 하면 미남미녀, 산뜻함, 복잡한 애정구도, 감동적인 생사이별, 원수 집안 간의 갈등 등 젊은 세대들이나 선호할 법한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도가니』는 한국드라마에 대한 편견을 바꾸고 한국에 대해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2) 작가에 대한 공감

∙공지영은 한국문학의 자존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학의 양심이다.
∙공지영은 정말 대단하다. 특히 강인호라는 인물의 묘사 부분에서는 더욱 그렇다.

3) 주제나 내용에 대한 공감

∙한국작가들이 그려내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인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식어버리는 패스트푸드식 사랑과는 무관한 이야기다. 가벼운 명제로 무거운 생명감과 행복감을 그려낸 두고두고 읽어도 좋은 명작이다.
∙이런 형식의 책은 처음 접해본다.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읽고 난 후 전율이 느껴졌다.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설을 읽고 나니 만감이 교차한다. 일전에 중국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이 생각나면서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4) 소설과 영화 비교

∙책은 영화에서 표현되지 못했던 구석구석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영화에서 인물 심리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느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접했다. 영화가 충격적인 장면들을 스크린에 담아 관객 앞에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소설은 절제적이고 함축적이다.

5)번역 품질에 대한 평

∙주제는 좋으나 소설 자체로만 보면 가독성이 그저 그렇다.
∙번역이 감정 몰입을 해치지만 스토리는 좋다.
∙번역이 형편없다. 한국어 고유명사들에 대한 주가 없어서 읽는데 힘들었다.
∙영화보다는 책이 낫다. 번역 수준은 보통이다. 잘 읽히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역자의 번역이 뛰어나다. 원작도 번역도 영화도 좋다. 강추!

 

강경이 씨가 소개하는 독자리뷰는 대략 이와 같은 분위기로 내용이나 주제, 작가의 역량 부분에서는 점수가 높은 반면, 번역에서는 점수가 낮다. “번역이 몰입을 해친다”라든지 “형편없다”는 표현도 보인다. 반면 “번역이 뛰어나다”라는 평도 있어 독자들의 평가도 일정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근대 계몽기 번역문학과 독자층 연구: 『춘희』번역을 둘러싼 한·중·일 독자 경향 비교」
전은경, 2012, 『우리말글』, 56, 765-802.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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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로, 팍스시니카의 실크로드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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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1월 1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동부에 위치한 바킹 지역에 화물열차 한 대가 도착했다. 중국 저장浙江 성 이우義烏시에서 실어온 중국산 의류, 양말, 여행가방, 생활용품 등으로 가득 찬 40피트짜리 컨테이너 34개를 실은 이 열차는, 지난 1일 이우를 출발해서 영불 해저터널을 통과하는 1만2451킬로미터의 여정을 거쳐 바킹에 도착했다. 2013년 말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순방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처음 제시한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 프로젝트가 현실화된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화물열차는 컨테이너선에 비해 운송량이 작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 보도했지만, 중국이 더 크게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중국이 꿈꾸어왔던 원대한 꿈이 실현됐다는 상징적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계명대 정치외교학과 김옥준 교수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과 정치·경제적 함의: 실크로드 경제벨트 구축을 중심으로」(『국제정치연구』, 18(1), 2015)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의 의도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정치·경제적 의미를 분석한다.

 

경제와 정치 패권을 노리는
동시 전략

“‘일대일로’구상에서 ‘일대’는 중국의 서부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연결하는 ‘실크로드 경제벨트’를, 그리고 ‘일로’는 동남아와 서남아를 거쳐, 중동, 아프리카, 최종적으로 유럽까지 이어지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말한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교역로의 의미를 초월하여 시장과 생산네트워크의 연결 및 통합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통과 통신, 그리고 산업기반 시설 구축뿐만 아니라 경제회랑 형성을 위한 제도와 기구의 정비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구상이다.”
막강한 경제력으로 세계경제를 주무르고 있는 중국은 경제대국을 넘어서 정치적 리더십까지 발휘하고 싶어 한다. 그런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바로 신 실크로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인데, 중국은 이 신 실크로드 전략이 “시진핑 지도부가 향후 10년간 추진할 초대형 프로젝트이며, 대외진출과 내부 개발을 결합한 개념”이라 강조하고 있다. 미국과 주변국들의 반발을 우려해 정치적 야심은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중국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봉합하고, 세계 금융 중심지로 거듭나며, 중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공동벨트를 구상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세계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한다.

일대일로의 출발점이 되는 중국 서부지역은 신쟝 위구르지역의 분리독립운동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다. “상대적으로 발전에 소외된 내륙과 서부지역 주민들의 괴리감과 불만은 이들의 종교, 민족문제 등과 연계되면서 중앙으로부터의 분리독립운동으로까지 발전했으며, 이는 곧 테러로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소수민족과 한족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까지 치닫고 있다. 일대일로 전략은 서부지역이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극단적 갈등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일환이다. 서부지역의 개발전략을 통해 심각한 부의 편중을 완화하고 경제적 활성화를 통해 정치적 갈등을 완화해보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중국은 2014년 8월 초 낙후한 서북부 5개 성省, 산시陝西 성과 닝샤寧下 회족자치구, 간쑤甘肅 성, 칭하이靑海 성, 신장新彊 위구르자치구 등을 ‘실크로드 경제벨트 핵심지역’으로 선정하고, 이들 성을 실크로드 경제벨트로 연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이 지역은 실크로드 경제벨트 구축을 통하여 중앙아시아로 통하는 인프라 투자와 물류망을 구축하여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며, 실크로드 경제벨트가 관통하는 거점지역으로서 서부 대 개발에 이어 또 한 번의 발전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라고 중국 정부는 기대한다.

일대일로는 심각한 공급과잉으로 인한 수급의 불균형문제에 봉착해 있는 중국의 경제 여건을 구조조정하는 일환이기도 하다. 성장이 둔화되고 산업구조가 개편되는 등의 변화로 중국경제의 고속성장은 종말을 맞았다는 평가가 많다. ‘일대일로’는 이런 변화의 시대를 맞아 “구조조정정책의 새로운 전환을 의미한다. 즉 해외수요확대를 통한 과잉산업의 새로운 구조조정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중국 내의 과잉산업에 대한 공급을 축소함과 동시에 대외수요를 확대시켜 공급 축소와 수요 확대의 양방향성 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국은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4조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를 활용하여 전후 미국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 등을 통해 지배하고 있는 세계 금융질서에 도전장을 던지면서 금융대국으로의 부상과 위안화의 국제화를 추구하고 있다.” 일대일로 전략 과정에서 추진되는 인프라 사업은 그 규모가 방대하여 이를 지원하는 금융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 과정을 통해 금융 영향력을 높이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독주곡이 될 것인가,
세계의 합창곡이 될 것인가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중국이 팍스아메리카에 도전하기 위해 유라시아대륙과 유럽을 더해 만든 팍스시니카의 새로운 지도다. 따라서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단순히 중국의 경제권 확대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2049년까지 중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강대국으로 가기 위한 경제·정치외교·안보를 아우르는 장기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44억 인구의 경제 영토를 육상과 해상 인프라를 통해서 통합한다는 구상이다. 이는 아시아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아시아 회귀’를 선언하고 중국을 압박하고 있는 미국의 대중 포위망을 타파하는 동시에 자신을 아시아의 패권적인 지위에 올려놓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다.”

개발이 시급하지만 인프라가 부족해서 좀처럼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하지 못하는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지역 등은 중국의 자본에 눈독을 들이면서 일대일로 전략에 적극 동참하게 될 것이고, 중국이 주도권을 쥔 경제적 규합은 미국의 반발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킬 것이다. 경제 강대국의 지위와 글로벌경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확대된다는 것은 중국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계 리더로 자리매김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일대일로 전략을 볼 때 중국은 태평양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주변국과의 경제적 통합을 통하여 유라시아대륙을 중국 중심의 권역으로 만드는 우회로인 서진전략을 선택함으로써 미국과의 충돌 가능성을 최소화하였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또한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와의 주도권 경쟁에서는 실크로드 경제벨트 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상황으로 판단할 때 중국의 판정승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전략은 다차원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광범위한 경제벨트 구축이 중국 국내의 공급과잉문제를 얼마나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중국의 경제에 활력을 불러일으킬 것은 분명하다. 또한 실크로드 경제벨트 프로젝트에 가장 직접적인 수혜자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서부지역일 것이다.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출발점이 되는 이 지역에 대한 대규모의 인프라 투자는 중국이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있었던 신장 지역을 포함한 서부지역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의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 이것은 곧 중화주의의 재현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국의 전략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강대국들이 우려하고 있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이런 타국의 의심과 우려를 의식하고 있는 중국은 “‘중국의 꿈’이라는 용어를 비교적 자제하고, ‘유라시아대륙의 전체적인 부흥’, ‘세계 각국과의 공동이익’ 등 전체의 이익을 힘주어 언급”한다. “자국의 주도권에 대한 타국의 민감성을 희석시키고, 전 세계를 아우르려는 의도인 것이다. 또한 ‘일대일로’ 구상이 주변국과 관계국들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고 공동의 번영을 모색하는 윈-윈 전략임을 강조하고 있다.”

트럼프는 취임사를 통해 강력한 보호주의무역과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로써 위대한 미국, 퍼스트 미국을 부르짖는 트럼프의 구호는 위대한 중국을 외치는 시진핑의 구호와 세차게 부딪칠 위험이 높아졌다. 미국과 중국의 기 싸움, 미국과 러시아의 돈독해진 유대관계가 세계질서를 어떻게 재편할지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의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시진핑은 “일대일로는 독주곡이 아니라 합창곡”이라고 언급하면서 “문명 간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특징이 있을 뿐”이라며 “무릇 천지에 똑같은 것이 없는 것은 자연의 이치夫物之不齊, 物之情也”라는 의미의 맹자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자국의 야심을 온화한 미소 뒤에 감추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보호무역을 주창하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있는 트럼프를 상대로 그 온화한 미소가 지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토록 치열한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 속에서 우리는 어떤 전략적 태도를 취해야 할까. 사드 배치 문제를 거울삼아,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중국의 서진전략과 일대일로: 아시아 협력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는가?」
이남주, 2015, 『황해문화』, 89, 34-50.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 에 대한 전망 분석: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주용식, 2015, 『국제정치연구』, 18(2),169-190.

최은영 리뷰어  octovemb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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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를 해결할 또다른 재앙, 중국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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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전 세계가 핵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지진이 많은 나라의 사람들일수록 이런 심리는 더하다. 일부 국가에서는 후쿠시마 이후 원전 개발 중단한 나라도 있다. 그렇게 되면 에너지 연구는 대체에너지의 상용화에 대한 개발로 나아가게 된다. 반면 원전이 계속 증가 추세인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현재 나라의 전력 75퍼센트를 석탄에 의존하고 있다. 그 결과는 엄청난 양의 스모그다. 자국 국민은 물론 타국에까지 이 스모그는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을 여행해본 사람들이라면 이 스모그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스모그는 삶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매우 중요한 환경오염임이 분명하며, 이는 중국 정부 또한 인식하고 있는 바다. 그런데 그 해결책이 삶을 ‘재앙’에 빠뜨릴 수 있는 원전 층축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나영주 한국민족연구원 연구원이 발표한 중국의 원자력 발전 증가와 원자력 안전에 관한 국제 협력(『국제정치연구』, 18, 2015)에 따르면 중국의 원전 추진의 현황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아래는 논문의 핵심 부분만 요약한 것이다.

2007년 중국 국무원은 ‘2005-2020년 원자력 중장기 발전 계획’을 발표하고 2020년까지 원자력 설비용량을 4천만 kw로 늘리고 원자력 설비용량 비중을 4%로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체 전력 생산에서 석탄의 발전 비중을 75%에서 과감하게 축소하겠다는 것다.

2015년 3월 전국 인민대표대회가 폐회될 무렵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리커창 총리는 “지난해 정부는 스모그와의 전쟁을 선포할 만큼 결연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인민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엔 모자라다”며 “올해는 환경 보호법을 손질해 결코 솜방망이가 되지 않도록 하겠다. 법을 어긴 기업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고 환경문제를 에너지 문제와 함께 국정과제의 우선 순위로 다루겠다”고 말했다.

IAEA의 자료에 의하면 2015년 현재 중국이 가동 중인 원자로는 27기이며, 건설 중인 원자로는 23기다. 중국이 2014년 생산한 전력량은 원자력을 포함하여 총 546만3천800GWh이며, 원자력 발전은 13만580GWh로 전체 전력 생산의 2.39%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011년 3월 곧바로 당시 원자바오 총리 주관 하에 새로운 원전 승인을 중단하고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대대적인 안전 점검을 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내륙의 원전 계획은 12.5 계획 기간 중 중단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2014년 12월 4일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NRDC)는 구체적으로 지역을 명시하지 않았으나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원자력발전소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2015년 전국인민대표대회 기간 중에 흘러나온 소식에 의하면 중국의 원전 전문가들은 중국의 전력 수요와 이산화탄소 배출 이행 계획 때문에 해안의 원전만으로는 이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아 내륙의 원전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중국 공산당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8년 중국 국무원은 후난 성의 타오후아장桃花江, 장시 성의 펑저彭澤, 후베이 성 시엔닝咸寧의 다판大畈 원전 등 3기의 준비 작업을 승인한 바 있었는데 13.5 계획이 시작되는 2016년도에는 내륙의 원전 건설을 시행할 것을 민간 원자력업체들이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원자력 발전소 숫자가 압도적이다.

에너지 수입국의 경우 원자력은 대외의존도를 낮추고, 국제시장의 에너지 가격 변동에 노출되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원자력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감축하고 동시에 기저부하base load 발전을 제공하거나 다른 형태의 기저부하 발전을 대체할 수 있는 발전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타의 국가들은 원자력을 미래 대안으로 고수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2040년까지 원자력 발전량 증가에서 중국은 45%를 차지하고 인도, 한국, 러시아 등이 합해서 30%, 미국의 원자력 발전은 16%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원자력 발전 전망 속에 중국 국무원은 ‘2014~2020년 에너지 발전전략 행동계획’에서 “원자력의 과학적 보급과 핵안전 지식 선전을 강화하여, 2020년에는 원전 설비용량이 5800만Kw에 도달하며, 건설 중인 용량이 3천만kw 이상에 도달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안전을 강조한다 해도 천재天災를 막을 기술력이 현재로서는 없다는 점이다. 중국의 원전 설치 지역이 지진과 화산대에서 자유롭지 않다.

[su_quote]수심이 깊은 대만이나 일본 오키나와 해역에서 지진이 발생하면 수심이 낮은 서해로 바닷물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쓰나미가 발생할 수도 있다. 중국은 2008년 쓰촨대지진과 2010년 칭하이성 위수玉樹대지진의 악몽을 경험하는 등 큰 지진의 피해가 잦은 나라다. 그럼에도 지진 위험 지역인 쓰촨성 등지의 지역에서조차 원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안후이 성에서 산둥 성을 거쳐 만주, 연해주로 이어지는 ‘탄루 단층대’는 강력한 지진이 발생할 수 있는 중국의 대표적인 곳이다. 중국과 한반도 사이 서해는 1억20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분지로 지반이 연약해 판 경계부의 에너지가 전달되면 역시 지진이 발생할 수 있는데 중국의 신설 원전들은 바로 이 탄루 단층대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또한 중국 원전 시설이 들어설 백두산 인근의 지역도 화산 분화 및 지진 발생의 가능성 큰 지역이다.(320쪽)[/su_quote]

중국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즉각적이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편서풍에 의한 방사능의 확산이다. 원전의 특성상 많은 냉각수(바닷물)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중국원전이 해안에 위치해 있다. 만약 중국에서 원전사고로 인해 방사능이 누출 시 3일째 되는 날 한반도 전역이 요오드 131로 오염될 것이다. 연평도에서 서쪽으로 200km 지점인 산둥 성 웨이하이 시의 롱청榮成에 만들고 있는 중국의 최대 원자력 발전소인 스다오완石島灣발전소에 불의의 사고가 있을 경우에는 방사능이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확률이 높다.

하지만 중국으로부터의 핵 위협 뿐만이 아니다. 한국도 2035년까지 원자력 발전의 비중을 현재의 26.4%에서 29%로 늘리고, 원자력 발전소는 41기까지 늘릴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동북아 3국에 원전이 밀집되어 있어 핵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규모에 따라서는 돌이킬 수 없는 핵 재앙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

강성민 리뷰위원  review@bookp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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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동생들을 일본군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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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한국도 그렇지만 중국 또한 과거 일본군에 의한 무참한 성폭력의 기억을 간직한 나라다. 일본군이 진주한 곳에서는 어김없이 이와 같은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것은 동아시아 전체의 아픈 과거이기도 하다. 중국 위안부 성폭력 피해 실태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에 그리 잘 알려져 있지 못한 가운데 이선이(경희대) 씨가 일본군의 성폭력에 대한 일고찰: 중국 산시山西성 피해자의 구술을 중심으로(『사학연구』, 120, 2015)를 발표해 이해를 돕고 있다.

산시 성 위현의 아름다운 산간마을의 모습.

산시 성 주민들은 1940년 8월 20일부터 1941년 1월 24일까지 허베이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 공산당의 국민혁명군과 일본 제국 육군 사이의 전투 백단대전百團大戰의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중국 팔로군이 일본 제국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 광산, 수송 통로를 기습 공격했으며 120사단, 129사단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전투는 100개 연대가 참여했다고 하여 백단대전이라고 부른다.

피해자들은 전쟁이 본격화되기 전 일본군이 침투해 들어온 1939년과 점령과 탈환을 반복하며 전투가 엎치락뒤치락하던 1941년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41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잔인하고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다. 논문 228쪽에 실린 지도에서 보듯 산시 성 타이위안과 양취안의 접경 지역에 있는 위孟 현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붉은 점). 이 씨는 관련 자료들을 모두 모아 개별 사례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당시 마을 원로는 증언했다.

산시 성과 허베이 성의 접경에 위치한 위현.

 

진격하는 팔로군.

[su_quote]하나는 주변 마을에 할당되어 가족이 돈을 받고 인신공양처럼 모인 여성들, 두 번째는 ‘토벌’ 등으로 다른 지역에서 연행되어 와서 가족이 인질금을 내고 해방되는 경우, 세 번째는 닥치는 대로 납치 감금한 경우다.(214쪽)[/su_quote]

피해자와 관계자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필자는 이를 다시 “첫째, 거점에 만들어진 ‘강간소’에 마을의 안전을 위하여 희생양으로 제공된 피해자들, 두 번째, 일본군과 괴뢰군이 무작위로 행한 납치 강간, 세 번째, ‘한간漢奸’의 개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지명하여 이루어진 피해, 네 번째, 항일(공산당) 활동에 대한 고문과 복수 등”으로 나눈다.

다음은 중국인 할머니들이 증언한 개인별 구체적인 증언이다.

[su_quote]피해자 柴玉花는 자신이 감금된 곳과 도망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밤이 되자 일본군이 나의 집으로 찾아와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나를 노새의 등에 싣고 작은 산촌의 한간의 집에 가두고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했다. 나에게 도망하지 못한다고 했으며 만약에 도망가면 우리 가족 전부를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나는 일본인이 가족을 살해할까 두려워서 그곳에 있었다.’ 또 다른 사람 楊喜何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의 친정은 河東촌 내에서 羊馬山으로 향하는 외길을 끼고 경비대가 있는 포대의 맞은편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일본군 두 사람이 집으로 들이닥쳐 강간, 차례로 밖에서 지키면서 강간 (…) 시댁으로 돌아왔으나 부모님의 상처와 일본군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왔다. 강간당할지 알면서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 달 간격으로 친정과 시댁을 오가는 생활 (…) 부모님과 동생들을 일본군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야만 했다.’[/su_quote]

이는 비교적 소수의 피해 사례로 ‘강간소’ 등의 거점 밖에서 자택 등에서 피해를 입은 경우다.

그 외 대다수는 감금 피해자들이다. 감금 기간은 길게는 2년부터 짧게는 10여 일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군 다수’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5명은 특정인에게 ‘독점적’으로 강간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 5명은 피해 기간이 장기간이다.

증언에서 ‘일본군 반장’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왔는데 이는 중국인 마을 안에 있는 경비대주둔지에 교관으로 상주한 소수의 하사관을 가리킨다. 이들은 마을 밖 일본군 토치카 거점에 있는 상관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곳의 최고 권력자로서, “나쁜 짓은 무슨 짓이든 했다”고 한다.

증언을 보면 曹黑毛는 “일본군 정보반장이 무리 속에서 맘에 드는 여자들을 골라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끌려갔지만 사람들이 무서워서 어쩌지 못하였는데 강간 후 괴뢰군에게 넘겨 進圭거점으로 데려가 요동에 가두었으며 정보반장이 매일매일 찾아와 자고가기도 하였다”는 식이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촌장이 나서서 위안부로 나설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우리집과 마을에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며 촌간부들이 매일 우리 집으로 와서 설득하여 어쩔 수 없이 허락”하거나 “일본군이 격노하여 그냥두지 않겠다고 협박, 더 이상 끌 수가 없어서 성격이 내향적이고 말수가 적은 侯金良을 선택하였다”(238쪽)는 식이다.

[su_quote]일본군은 주민을 가옥에서 내쫓고 마을 안에 여성을 상시 두는 장소를 만들게 했다. 말 매매를 했던 楊福手가 장남인 4형제의 집이 정원이 넓고 방이 많아서 그 집이 접수되어 사용되었다. (…) 상시 수명의 여성이 있었으며 외출은 자유였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여기에 여성은 모두 다른 마을에서 데려온 자들이었다. (…) 여성들을 산위 포대로 데려가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好看, 二毛, 二妹로 불린 여성들을 기억하며 노새에 실려 가는 그녀들은 무표정으로 포기한 모습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과 팔로군도 납득한 가운데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일본군이 사라진 후 무사히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다.(241쪽)[/su_quote]

결론에서 필자는 “감금 기간과 폭행에 관여한 일본군의 인원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폭행은 일본군에게 협조했던 ‘한간’들과 괴뢰조직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전쟁 이후 석방된 상황을 보면 “일본군이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하거나 마을의 유지회維持會 등의 괴뢰조직을 거쳐서 행하는 식으로 여성들의 석방을 위해서는 금전이 거래되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금전적으로 어려워서 구출할 수 없는 경우는 몸이 완전히 망가진 후에 버려졌다”는 증언도 적지 않게 보인다.

[su_quote]일본군의 성폭력을 겪어낸 피해자들에게는 심각한 후유증이 남았다. 후유증은 육체에 남겨진 상흔을 넘어 2차, 3차 정신적, 사회적 피해를 낳으며 피해자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항상 가해자들에게 보다 피해자들에게 더욱 잔인한 오욕이 뒤따르는 특징을 보이는데 중일전쟁기간에 일본군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251쪽)[/su_quote]

위의 표 3개는 논문에서 필자가 표로 작성한 77명 중 25명에 대한 구체적 피해 내용들이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와 시간, 형태부터 이후의 삶에 남겨진 후유증의 종류까지 살펴볼 수 있다.

 

강성민 리뷰위원  review@bookp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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