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조선

어우동의 사형은 정당했나?

shin2_1

logofinale어우동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많은 이에게 어우동은 15세기 후반 많은 남성들을 홀린 요부로 인식되어 있다. 물론 최근 들어 그녀가 조선의 엄격한 분위기에서 성적 자유를 추구한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어우동이라는 개인을 ‘성性’이라는 한정된 범주 안에서만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정해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은  「조선전기 어우동 사건에 대한 재검토」(『역사연구』, 17, 2007)에서 사회의 경계를 넘어선 한 여성이 어떻게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으며, 이 비극이 어떻게 사회로부터 주조되었는지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어우동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어우동은 15세기 중반 무렵 양반 가문인 박윤창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또한 어우동의 남편은 효령대군의 손자 태강수(정4품) ‘이동’이었다. 이동은 아버지 이정이 적자가 없는 상태에서 첩에게서 낳은 서자였다.

그럼 어우동 사건에 대한 정황을 살펴보자. 어느 날 태강수는 자기 집에 젊은 은장이를 불러 은그릇을 만들게 했다. 그런데 어우동이 여종인 척 은장이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태강수는 어우동을 친정으로 쫓아 버렸다. 이때부터 어우동은 신분을 숨긴 채 ‘현비玄非’라는 가명으로 첩이나 기생 또는 여종으로 행세하면서 남성들을 만났다. 그녀는 종친에서부터 관료, 생원, 서리, 남자종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만남을 가졌다. 여기까지가 『성종실록』에 실린 어우동 사건의 전말이다. 저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사항은 어우동이 마치 부나비처럼 자신의 욕망을 맘껏 채우기 위해 상대를 끊임없이 물색했다는 측면이 부각됐다는 점인데, 남자종 지거비만 제외하면 어우동과 연루된 남성들 대부분이 그녀의 적극적인 유혹에 현혹되었다고 기술돼 있다.

eoudong2
이장호 감독의 85년 영화 <어우동> 포스터. 출처: http://namu.mirror.wiki/w/%EC%96%B4%EC%9A%B0%EB%8F%99


한편, 『성종실록』을 이외 또 하나의 자료인 『용재총화』에서는 어우동이 남성들을 적극적으로 유혹한 측면을 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종실록』에서는 어우동이 은장이와 이야기하며 가까이 했다고만 되어 있으나, 『용재총화』에서는 “드디어 내실로 끌어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고 기술한다. 또 “꽃피고 달 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어우동과 여종)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고 기술되어 있다. 『용재총화』의 기록은 저자가 마치 그녀를 직접 관찰한 듯 적혀있다.

미심쩍은 기술방식이야 어찌됐든 어우동은 사회에서 용납하지 않은 비행을 맘껏 저지른 여성이었던 듯 하다. 그런데 어우동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진짜 원인은 다른 데에 있었다. 바로 남편 태강수가 기생 연경비를 사랑해 어우동을 제멋대로 내쳐버린 것이다. 1476년(성종7) 9월에 종부시宗簿寺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쫓아버렸다”고 고발했다. 결국 성종은 종부시의 판단과 건의를 받아들여 태강수에게 어우동과 다시 결합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태강수는 왕명을 듣지 않았다. 어우동 사건에서 남편 태강수의 이러한 행동은 부각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어우동의 행동만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왜 어우동에게
차별적인 판결이 내려졌을까?

어우동 사건이 터졌을 때 의금부에서는 성종에게 그 죄가 간통죄로서 장仗 1백에 유流(리뷰어 주: 유배지에 살게 하는 것) 2천리에 해당한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법에 따르면 간통죄의 경우 신분 남녀를 불문하고 같은 벌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한 양반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반인과 똑 같은 형률을 적용하면 기강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엄하게 처리하는 관행이 있었다. 가령 양반 여성이 간통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장형 仗刑으로 다스린 후 관비로 만들거나 유배를 보내는 것이다. 저자는 어우동에 대한 형량 부과 역시 이러한 사례들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어우동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일반적이지만은 않았다. 단순 간통이 아니라 종친의 처이자 양반가의 딸로서 기생처럼 수많은 남성들과 부도덕한 행위를 했다는 것이 큰 논란이 된 것이다. 게다가 종친과의 간통은 근친상간에 해당하며, 지체 높은 부인이 ‘종놈’과 간통했다는 사실도 양반들로서는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이러한 어우동의 처벌에 대한 논의는 치열했다. 일각에서는 어우동의 죄가 비록 무거우나 사형에 해당하지 않을뿐더러 임금의 덕은 죽일 사람도 살릴 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이므로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쪽에서는 어우동이 강상을 무너뜨렸으며, 음란한 풍속을 확산시킬 수 있기에 본보기 차원에서 최고 형률인 사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 측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성종은 결국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1480년(성종11) 10월, 어우동은 목매달아 죽이는 형벌인 교형에 처해졌다.

어우동이 기존의 판례와 다르게 중벌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여성의 몸가짐을 둘러싸고 진행된 여러 논쟁이나 정책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은 개국 이후 고려의 몰락을 교훈으로 삼아 국가의 긴급한 사명은 인간의 본성을 순화하고 풍속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때문에 조선의 개혁가들은 고려와 다른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규범도 강화하였다. 즉, 우주론적으로 하늘에 해당하는 남자가 땅이라 할 수 있는 여자에 군림하며, 이 보편성을 인간 사회에 잘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낮은 존재인 여성의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남성 중심의 질서에서 여성은 성적 주체가 아니었다.

그 결과, ‘정(貞: 정조 또는 정절)’을 여성의 타고난 본성으로 여겼고, 이 본성을 어기는 여성에게는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분리라는 형벌이 주어졌다. 그뿐 아니라, 여성의 성은 한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집안 문제로 전화되어 여성의 가족도 부도덕하다는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여성의 ‘성’은 늘 문제의 성으로 규정되어 혼인 전에는 친가에 의해, 혼인 후에는 시가와 친가 양쪽으로부터 감시 받아야 했다.

[su_quote]한 마디로 어우동은 15세기 조선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공공의 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우동 대한 판결에는 15세기 여성에 대한 다양한 ‘규정’을 매개로 하여 조선을 성리학적 사회로 이끌고자 한 남성들의 야망이 숨어있던 것이다. (20쪽)[/su_quote]

사회로 복귀한
남성 연루자들

어우동이 교형을 받고 죽은 뒤 어우동과 관련된 양반 남성들은 한바탕 큰 소동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풀려났다. 뿐만 아니라 다시 관직에 임용되어 출세하는 데도 큰 제약을 받지 않았다. 천한 기생처럼 행동한 어우동 때문에 오히려 ‘뜻있는 선비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식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우동이 중죄를 면하기 위해 거짓으로 죄 없는 많은 남성을 끌어들였다는 기록까지 등장하였다.

논문에 자세히 소개된, 연루된 남성들이 사회에 아무 일 없이 복귀하는 과정은 실로 장관이다. 심지어 어우동을 강간한 사노 지거비는 가벼운 형을 받기도 했다. 물론 신하들이 지거비의 형이 너무 가볍다는 건의로 형이 다소 무거워 졌지만 교형을 받은 양반가의 여성보다 가벼운 형을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끝나지 않은
어우동 이야기

[su_quote]종종 사소한 문제를 놓고도 심각한 차이를 드러내던 국왕과 관료들은 여성의 규범 문제에서는 어느새 동조자가 되었고 갈등을 잘 풀어나가는 협조자로 변해있었다.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 특권이 이러한 통치방식을 유지할 때에 더 공고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28쪽)[/su_quote]

한국사에서 어우동은 15세기 후반 조선 사회가 아직까지 여성이 자유롭게 생활했다는 증표로 많이 이용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반대의 의견을 제시한다. 어우동에 대한 차별적인 판결과 남성들의 사회 복귀를 통해 이미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서서히 가동되었다고 본 것이다. 성종이 무리하게 어우동을 교형시킨 것은 의도적이었고, 그 의도 속에는 사회가 그어놓은 테두리를 넘어선 여성의 결말이 얼마나 비극적으로 끝나는지를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점차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어우동의 목소리를 통해 15세기 후반 여성의 사유 방식이나 자기 인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그 목소리를 찾지 못했다는 점을 아쉬워한다. 어우동이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옹호 또는 시인했는지 등은 제한된 사료를 다르게 읽는 방식을 통해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이러한 아쉬움이 이후 발표된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에 반영되었는지 차후 기회가 되면 소개하고자 한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외람되어 송구하오나 쇤네 ‘독녀’이옵니다”

2_1

logofinale2016년 말에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5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 결과’에 따르면 2015년 한국의 1인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의 27.2%에 해당하는 520만 가구라고 한다. 1인가구는 2015년 주된 가구 유형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 50.2%에 해당하는 260만 가구가 여성이다. 남성 1인가구를 지칭할 때와 달리, 여성 1인가구에 대해서는 독신·비혼·노처녀·골드미스·올드미스·싱글·돌싱 등 다양하게 명명하며 ‘노처녀 히스테리’ 등의 언어로 평가·분류하고 범주화한다. 여기에는 ‘혼자 사는 여성’에 대한 호기심과 경계, 염려나 배려 등 유난스럽고 특별한 사회적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혼자 사는 사람이 ‘대세’인 세상이지만, 여전히 이성 간의 결혼을 전제로 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 지금의 1인가구와 비슷한 형태로 살았던 여성들에 대한 연구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정지영의 조선시대의 외람된 여자 ‘독녀’: 위반과 교섭의 흔적들(『페미니즘 연구』16(2), 2016)에서는 ‘독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던 여성들이 그 이름을 통해 어떤 삶의 전략과 행위성을 구사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 논문은 ‘정상가족’의 경계에서 자신의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때로는 그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의 규범을 위반하기도 하고 그것과 협상하기도 하는 21세기 ‘독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비가시화된 서발턴
‘독녀’ 기록을 읽는다는 것

조선 시대 ‘독녀’는 남편과 자식이 없는 나이가 든 여자를 가리킨다. 때로는 과부라는 말과 혼용되기도 하고 중첩되기도 한다. 하지만 독녀는 남편뿐 아니라 자식이 없어서 나이 들어 의지할 곳 없는 상태의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엄밀하게는 과부와 구별된다. 그들은 부모·자식 관계, 부부관계 등의 관계 밖에 놓여 있으며 혼자이면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또는 의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규범에 따라 누군가 다른 남자에게 소속되어야 했던 조선시대 여자의 규범적 정상성 밖에 놓여 있었다. 남자가 혼자인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자가 혼자인 것은 불쌍하고 불안하며 위험하다. ‘불성인: 온전치 못한 존재’라는 것이 그들을 묶는 이름이었다.

과부들이 집에서 술을 팔았던 ‘내외술집’의 풍경. 조선 18세기 회화로 추정됨. 출처: 리뷰 아카이브

조선시대 인구를 늘리는 동시에 ‘부부’의 일원이 되어 백성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는 혼인 장려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나이 들어서 혼인하지 않은 처녀를 “성질이 사납다”고 표현하며 비난하고 폄하하곤 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독녀’는 더욱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보호할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녀들을 특정한 ‘범주’로 묵어내고 분류하는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정지영,  「조선시대 ‘독녀(獨女)」’의 범주: ‘온전치 못한’ 여자의 위치」, 『한국여성학』 , 32(3), 2016)

조선시대 ‘독녀’에 대한 기록은 주로 국가의 공식 문서인 호적대장과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관찬 자료에만 남아 있는데, 그 자료 속에서도 그녀들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내용을 찾기는 어렵다. 역사적 기록 속에 비가시화 된 그녀들은 국가에서 금하는 일을 범했거나, 특별한 물질적 지원을 요구하거나, 호소문을 올린 일에 대한 처리 과정의 논의 속에 모습을 남겼다. 그녀들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거나 기록되지 못한 비가시적 존재들이었으며, 역사 속에서 지워졌고,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그녀들을 부르던 이름과 함께 사라진 존재들이다. 또한, ‘독녀’는 조선시대 지배 규범인‘삼종지도(三從之道)’에서 전제한 정상적 여성이 되기 위한 기본 전제인 혼인의 밖에 놓인 존재이기도 했다. 연구자는 그러한 점에서 그녀들이 신분과 성별 등의 경계와는 또 다른 경계 밖에 놓인 채 스스로를 서술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대변하지 못한 ‘서발턴’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연구는 기존의 역사서술에서 비가시화되어 있던 ‘독녀’라고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삶의 기록을 찾아, 그녀들이 그 ‘독녀’라는 이름을 활용하면서 유리한 위치에서 교섭하고 위반했던 흔적을 읽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 흐릿한 흔적으로만 남은 독녀를 찾아 그녀들의 삶의 전략과 행위성을 읽는다. 그리고 서로 다른 지층의 ‘복수적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전략적 개입과 교섭, 그로부터 생겨나는 저항 지점의 생산 가능성에 대해 탐색한다. 그러한 움직임은 구조 안에서 작동하지만, 동시에 그 구조에 균열을 내는 틈새를 파고들며 지배질서를 어그러지게 만들고, 변화를 만들어낸다.

 

하층 신분 불쌍한
배려의 대상 ‘독녀’

연구자는 조선시대 기록물에서 ‘독녀’에 관한 내용을 찾는 것에서 본 연구를 시작한다. 연구자는 우선 『단성호적』에서 1678년부터 1789년 사이에 여성이 호주가 되어 혼자서 호를 이루고 있는 경우를 찾아 제시한다. 과부가 아니면서 여성 혼자서 호를 구성한 경우는 전체 호구 가운데 약 1~3% 정도로 매우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예외적이지만 조선의 여성이 살았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들이 어떤 사정으로 혼자 호를 구성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하층 신분의 여성들이다. 하지만 여성 혼자서 호를 구성한 경우에도 남편이나 아들이 다른 호에 기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호적대장에 혼자서 기재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독녀’는 아니다.

연구자는 다시 『단성호적』에서 ‘독녀’로 기재된 사례를 찾아 1678년 5건, 1732년 1건, 1759년 1건을 제시한다. [표2]는 1678년의 호적에서 호주의 직역이 ‘독녀’인 경우를 찾아서 그 호에 대한 간단한 정보와 그 구성원을 표시한 것이다.

 

dokyeo_2_1
1678년 『단성호적』에 기재된 독녀와 그 호의 구성원. 저자 논문에서 인용.

 

1678년에 보이는 5건의 독녀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들의 신분은 모두 사비이다. 연구자가 『단성호적』에서 찾은 내용을 보면 독녀라고 쓰인 경우에 남편이 함께 기재된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독녀는 대개 혼자가 아니라 자녀와 함께 기재되어 있었다. 호적대장에 등장한 독녀들의 경우 반드시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며, 자녀가 없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su_quote]이서구가 진휼청의 말로서 말하기를, ‘한성부별단을 보니, 남부 이태원의 독녀 양소사 집이 무너졌다고 하니 휼전으로 돈 2량을 지원해주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승정원일기』정조 13년(1789) 4월 20일) (326쪽)[/su_quote]

『승정원일기』중에 집이 무너진 독녀에 대한 부분이다. 조선시대에 독녀는 대개 왕이 먼저 보살펴야 할 대상이며, 의지할 곳 없는 존재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조정은 진휼(흉년에 가난하고 군색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을 할 때도 독녀를 먼저 배려하도록 했고, 각종 세금에서 면제해주는 등 특별한 대우를 했다. 『승정원일기』에는 그러한 진휼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구체적인 명단인 ‘별단’이 들어 있어서, 그 속에 포함된 독녀의 이름과 피해 상황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었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읽어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그렇게 등장한 독녀의 명단은 130여 명이다. 그 가운데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경우가 2건, <한성부실화별단(漢城府失火別單)>으로 보고된 화재로 사망한 경우가 1건이다. 나머지는 <한성부민가퇴압별단(漢城府民家頹壓別單)>으로 보고된 집이 무너진 일과 관련된 경우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진휼청(賑恤廳)의 주관으로 포(布) 1필, 전(錢) 2량 등의 휼전을 거행하도록 조처되었다. 그러한 기록 가운데에도 ‘독녀’라고 칭하면서 아들 또는 딸이 죽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모호한 경계에
위치한 존재 ‘독녀’

연구자는 위의 호적대장이나 진휼 기록을 통해 ‘독녀’ 가운데 자녀가 있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엄밀하게 독녀가 아닌데, 독녀로 기록된 것이다. 연구자는 이것이 어떤 맥락에서 가능했던 것인지를 조선시대의 다른 기록들에서 찾아본다.

유희춘의 ‘미암일기(眉 巖日記)’,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 ‘심심당한화(深深堂閑話)'(이우성·임형택 역편, 1973) 등에는 양반이 자신 또는 남의 비를 첩으로 삼으려다가 취소하거나 첩을 얻고 버리는 내용이 나온다. 연구자는 자녀가 있을 뿐 남편은 없는 정당한 위치를 점하지 못한 모호한 상태인 그 비와 같은 여성들이 ‘독녀’로 기재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검녀(劒女)'(이우성·임형택 역편, 1973)에서는 양반집 딸의 몸종이 남자를 골라 그의 첩이 되는 길을 선택하고, 첩이 된 뒤에 다시 그를 떠나기로 결정하여 그녀 스스로 혼인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녀는 혼인을 했었기에 처녀도 아니고 남편이 죽은 것은 아니므로 과부도 아니다. 그녀들을 어떤 범주 속에 묶어내기는 어렵다. 때로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여자도 있을 수 있다. ‘독녀’는 그러한 모호한 상태의 그녀들을 부르는 이름인 것이다.

양반의 일기나 문헌, 설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신분은 모두 사비였다. 앞에서 살펴본 호적대장 속에 ‘독녀’로 기재된 사람들은 모두 남편이 없지만 자녀를 갖고 있기도 했다. 또 조선 사회의 어느 구석에서 양반 남성과 관계가 있지만 그들의 첩조차 될 수 없었던, 또는 첩이 되었다가 그 상태를 벗어난 여자들이 있었다. 호적대장에서 20~30대의 젊은 여자가 ‘독녀’ 로 인식되고, 독녀로 통용되었던 것을 볼 때, 조선시대의 독녀는 단지 나이 들어서 남편 없고 아이 없는 여자라는 의미일 뿐 아니라, 규범적 혼인의 질서 밖에 놓인 존재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독녀’는 규범적 혼인 밖에 놓인 존재, 혼인했음과 혼인하지 않았음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위치한 존재들이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유기아(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키우는 경우가 꽤 나온다.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독녀들이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것에 대해 지원을 해주었고, 이러한 정책을 통해 ‘자식을 가진 독녀’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자식이 있다면 더 이상 ‘독녀’가 아니지만, 그 자식은 데려다 키운 아이일 뿐이므로, 독녀는 역시 독녀였다. 그들은 ‘독녀’라는 이유로 국가의 보조를 받아 자식을 데려다 키우고, 그 아이의 혼례에도 보조를 받는 등 특별 대우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독녀’는 더욱 모호한 존재가 되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독녀’가 없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다. 모든 여자가 아버지, 남편 또는 아들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이 적절한 것이었다. 독녀에게 자식을 두게 하는 것은 ‘독녀’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자식이 없는 독녀에게 자식을 갖도록 하는 것은 한편에서는 버려진 아이를 구제하면서 동시에 혼자 늙은 여자에게 자식을 만들어주어 의지할 곳을 마련해주는 기획이었다. 이러한 국가의 노력이 독녀이지만 독녀가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었다. 어쨌든 국가에서는 그녀들을 여전히 예의주시해야 하는 ‘독녀’로 간주했고, 그에 따라 그녀들은 아이가 있더라도 ‘독녀’일 수 있었다.

 

‘독녀’라는 이름으로
위반하기

독녀를 특별하게 대우했던 것은 그들이 불쌍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한편에서는 이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어렵다는 이유로 세금 면제를 받았을 뿐 아니라 국가로부터 주어지는 각종 시혜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요구를 하고, 때로는 ’범법행위‘도 저질렀다. 특히 금주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술을 만들어 파는 일에 독녀가 종종 범인으로 등장하곤 했다. 『승정원일기』에는 금주령이 가장 엄격하게 내려졌던 영조 39년에서 48년 사이에 독녀가 술을 빚어 판 일이 11건 이상이 기록되어 있다.

[su_quote]독녀로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지난 임오년 8월에 몰래 술을 빚어서 추조에 붙잡혀서 형을 받은 후에 경상도 고성현으로 유배를 갔다가 같은 해 9월에 풀려나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 춘궁기를 맞아서 생계가 매우 어려워서 7되의 쌀로 중간 항아리에 술을 담가서 청령교에 사는 사노 송시태의 집에 술 2그릇을 팔고 남은 술은 보관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지금 붙잡혔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40년(1764) 3월 21일) (337쪽)[/su_quote]

위 기록은 영조 40년에 술을 빚어서 판 ‘독녀’에 관한 내용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엄한 벌로 처단하는 것으로 논의하였고, 왕 또한 동의하였다. 그러나 엄한 처벌을 명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독녀에 대한 정상참작이 되기도 했다. 왕과 관료들 사이에 그녀들을 너무 가혹하게 처벌할 수는 없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여자가 술을 빚었더라도 남편이 있는 경우 그 가장을 처벌하는 조선시대의 방식과도 관련이 있는데, 남편 없는 ‘독녀’가 범법행위를 했을 때 그 책임을 엄하게 묻기 애매한 상황이 벌어졌다.

‘독녀’는 가장이 없고 기댈 곳 없는 가엾은 존재이기 때문에 국가의 입장에서 그들의 범법행위는 늘 곤란한 문제가 되곤 했다. 독녀는 가장을 통한 단속이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불쌍하기에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으므로 ‘독녀’ 자신이 직접적인 처벌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장’을 대신 처벌하는 방식의 규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실패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녀의 행위를 단속하고 그에 책임을 지고 처벌받을 가장이 없는 여자인 ‘독녀’는 엄단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보면 가혹하게 처벌하기도 어렵고, 교묘하게 어기면서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존재였다.

 

심히 외람되나
처벌할 수 없는 그녀들

독녀를 불쌍하게 여기고 보살피는 것은 유교 정치에서 왕이 ‘인정(仁政)’을 행하고 있다는 것의 주요한 징표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독녀가 먹고 살기가 어렵다고 호소할 때, 국가에서는 우선적으로 그녀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었다. 그러한 가운데, 한편에서는 독녀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사소한 억울함을 왕에게 호소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에는 가족 관계에서 벌어지는 문제 등 소소한 문제에 대해 관청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하거나 지인에게 돈을 떼이자 왕의 행차 앞에서 꽹과리를 울리며 격쟁(조선시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거동하는 길거리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하소연하던 제도)하는 ‘독녀’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그녀들은 왕에게 상언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규정을 따르지도 않았다. 독녀들의 호소가 과도하여 ‘외람’된 것으로 논의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외람율(猥濫律 분수에 지나침에 관한 법)로 처벌받는 일에서도 예외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녀들은 가혹하게 처벌할 수 없는 불쌍한 존재였기에 엄격한 규제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독녀’들이 다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실상 기와집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고, 노비를 거느리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과도하게 자기 이해에 밝고 국가의 금제를 어기며 왕에게 거침없이 상언하는 그녀들이 골칫거리로 논의되기도 한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기에 국가의 특별한 배려와 감시가 필요했던 그녀들은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기에 어디서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주의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었다. 조선시대 사회에서 신분의 위계와 중첩되면서도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혼인’이 부여한 지위에서 최하층에 위치한 그녀들은 감시와 보호의 대상으로서 국가 기록 속에 흔적을 남겼다. ‘독녀’라는 이름은 여성을 부르는 이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었다. 늙은, 남편 없는, 자식 없는 여자는 ‘비-삼종’이었고 ‘불-삼종’이었다.

그녀들은 조선 국가에서 위험하고 불안정하며, 온전치 못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고 정상적 범주에 속한 부녀들과 구분되어 한편에서는 보호를 받고, 한편에서는 배제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설정하는 매개가 그녀들이었다. 그녀들을 ‘독녀’라는 이름 속에 묶는 것으로, ‘삼종의 도’는 더욱 강한 울타리를 두르고, 그 내부를 결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러한 경계 밖에 내던져진 채 단순히 배제된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오갔다. 삼종의 구속 밖에서 국가의 혜택과 처벌 사이를 오갔다. 그녀들은 범죄를 저질렀거나 국가의 규칙을 어겼을 때, 자신을 ‘독녀’라고 내세웠다. 그녀들이 ‘독녀’임을 강조할 때 유교의 정치를 표방한 조선 국가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들은 ‘독녀’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보듬어 인정을 펼치는 유교적 규범 체계와 협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조선시대 혼인장려책과 독신여성: 유교적 가부장제와 주변적 여성의 흔적」
정지영, 2004, 『한국여성학』, 20(3), 5-37.

「조선시대 ‘독녀(獨女)」’의 범주: ‘온전치 못한’ 여자의 위치」
정지영, 2016, 『한국여성학』, 32(3), 1-26.

 

김연정 리뷰어  equ21@hanmail.net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선의 도로교통공단, 역도제

mapai2_1

logofinale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교통로 및 교통수단은 언제나 중요한 변수가 되어왔다. 일반적으로 교통로 및 교통수단은 크게는 문명, 작게는 각 정치세력들 사이의 교류를 설명할 때 핵심 소재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지만, 외부와의 연결뿐만 아니라 내부의 통치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통신기술이 급격히 발달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이전 시기에는 교통의 범위가 통신, 수세收稅, 군사행동 등의 범위, 다시 말해 통치의 영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역사상 존재했던 국가들의 통치 영역은 일반적인 지도에서처럼 경계가 확실한 ‘면’으로 그려지지 않으며, 교통로 및 교통수단에 따라 ‘선’ 혹은 ‘점’의 집합으로 그려지게 된다.

이처럼 통치를 위해서는 해당 지역에 일련의 행정기관이 설치되고, 또 중앙을 비롯해 다른 행정기관들과 연결하는 교통로 및 교통수단이 확보되어야 했다. 조선에서도 건국하자마자 이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고, 태종대에 이르면 현재 남북한 행정구역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8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바탕에는 전국 약 300여 개의 모든 군현에 수령을 직접 파견하는 군현제郡縣制가 있었다. 고려에서는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군현제의 운영 방식은 조선 지방제도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오랫동안 여러 연구에서 주목되어왔다. 반면 각 군현들을 연결하는 교통로 및 교통수단이 어떻게 관리·운영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조선에는 교통을 관리하는 관원과 기관이 따로 있었다. 한 고을을 지나는 길은 많지만 그 길을 그 고을의 수령이 관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군현과 구분되는 교통로 및 교통수단의 관리단위로 驛이라는 기관이 있었고, 여러 군현을 총괄하는 도道와 같이 여러 역을 총괄하는 역도驛道가 있었다. 도의 경계가 바뀌면 소속 군현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도가 어떻게 편제되는가에 따라 각 역의 관리·운영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역도는 어떻게 편제되었을까? 그 동안은 교통로 및 교통수단이 지방제도와는 독립적인 영역이라고 이해되거나, 혹은 지방제도의 보조적인 수단이라고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질문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양정현 연구자의 논문 「조선 초기 驛道制의 정비 과정과 그 성격」(『한국사연구』, 174, 2016)은 역도가 군현과 함께 조선 지방제도를 이루는 두 축이라고 주장한다. 군현제와 마찬가지로 역도제도 지방통치체제의 핵심 요소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 건국 시기 분리되어 있었던 군현제와 역도제가 지방제도 정비 과정을 거쳐 8도의 道制 아래 병렬적으로 위치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밝히고 있다.

 

군현제와 구분된
역도제 운영

고려와 조선에서는 위치와 규모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전국 약 500개의 역을 운영했다. 수령을 모든 군현에 파견했듯이 모든 역에 관원을 파견하는 것이 이상적인 역 관리체계일 수 있었으나, 재정 및 관원 충당에 어려움으로 인해 실제로 시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미 역에는 역마驛馬는 물론, 역리驛吏 및 노비 등 역을 관리하는 인원들도 있었다. 역도는 다수의 관원을 파견하지 않고도 이 수많은 역들을 일정한 단위로 묶어서 역의 관리를 효율적으로 해나가는 방법이었다. 고려에서도 22개의 역도를 편제했지만, 현재 전체 편제 내용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에서는 정종대부터 역도를 통한 역 관리체계가 성립되었다. 양계兩界로 불리는 북방 지역에는 합배合排라는 별도의 역 관리체계가 있었으나, 이 역시 모두 역도로 편제되었다. 고려의 기록이 부족하여 전국의 내용을 비교해볼 수는 없지만, 하삼도의 경우 고려의 역도보다 약 두 배의 역도가 편제되었다. 다시 말해, 고려에 비해 조선 역도의 관할 영역이 줄어들고 숫자도 늘어난 것이었다.

당시 역도는 이전보다 효율적인 관리 범위를 노리고 편제된 것으로 보이지만, 편제 기준과 형태가 일률적이지는 않았다. 서북면 일대의 역도는 역과 역이 이어진 선 형태로,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이른바 하삼도의 역도는 여러 역이 중첩된 방사형 형태로 편제되었다. 전자의 경우 명과의 사행로使行路에 위치한 역들이 고려된 것이었고, 후자의 경우 각 고을 사이의 행정·군사적 연결과 지형적 조건이 고려된 것이었다. 이처럼 역도의 편제 기준과 형태가 달랐으므로 각 역도가 담당하는 업무의 양과 중요성도 같지 않았다.

역도를 관리하는 관원인 찰방察訪과 역승의 명령체계도 처음에는 왕-(중앙기관)-관찰사-수령으로 이어지는 명령체계와 구분되어 있었다. 역승은 관찰사를 통해 명령을 받고 보고를 올렸지만, 역승보다 높은 지위의 찰방은 주요 역도에 파견되었기 때문에 관찰사를 거치지 않고 왕이나 중앙기관에 직접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명령체계는 점차 관찰사가 중심이 되는 명령체계로 일원화되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역도의 관할 영역이 여러 도에 거쳐 있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관찰사와 찰방 및 역승의 관계가 관찰사와 수령의 관계처럼 명료한 것은 아니었다. 역도제가 각 군현을 연결하는 교통로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군현제와 아예 분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도의 관할 영역, 관원, 명령체계는 군현제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군현제와 병렬된
역도제로의 변화 

역도에 대한 본격적인 정비는 세조대에 진행되었다. 세조대에 정비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반영된 역도 편제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 편제가 거의 유지되었다. 세조 3년(1457)과 세조 8년(1462)에 각각 역도 편제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만큼 그 변화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글쓴이의 정리를 참고하여 거칠게 정리하자면, 세조대에도 여전히 역도의 효율적인 관리 범위가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그에 따라 각 역도의 관할 영역 크기를 조정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지형, 교통로의 수요 등 워낙 변수가 많기 때문에 역도의 관할 영역을 절대적인 수치로 정하지는 못했지만, 각 역도의 관할 영역 크기의 편차를 일정한 수준까지 줄이는 것은 성공했다. 결국 『경국대전』에서는 각 도에 소속된 역도의 관할 영역 크기가 전체적으로 균등해지게 되었다.

『경국대전』 역도 편제 논문 52쪽

역도의 편제 기준도 유형을 정리해볼 수 있을 정도로 정리되었다. 역도는 파견되는 관원의 지위에 따라서 5품인 찰방이 파견된 역도는 찰방도, 6품인 역승이 파견된 역도는 역승도라고 불렀다. 찰방의 경우 사행로나 국가에서 大路와 中路로 지정한 주요 교통로가 있는 역도나 목사牧使나 도호부사都護府使와 같이 고위 수령이 파견되는 큰 고을을 중심으로 편제된 역도에 파견되었다. 역승의 경우 해안 방어와 관계된 연해 지역의 역도나 교통의 수요가 크지 않은 小路가 있는 역도에 파견되었다.

세조대부터 성종대까지 이어진 역도 편제 작업의 결과, 역도는 각 도의 경계를 넘지 않도록 편제되었다. 도나 군현의 경계와 상관없이 역도가 편제되었던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것이었다. 이에 따라 관찰사와 찰방 및 역승의 관계도 명료해졌다. 건국부터 이어진 역도제의 정비로 결국 도제 아래 군현제와 역도제가 병렬적으로 위치하는 지방통치체계가 완성된 것이었다.

 

가시화된 분석과 정리
다소 아쉬운 마무리

여기서는 글로 소개하는 데 그쳤지만, 이 연구의 장점 중 하나는 많은 지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조선시대의 역도를 독자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글쓴이가 가공한 지도와 함께 논문을 읽어나간다면 훨씬 독해가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연구는 도제나 군현제뿐만 아니라 역도제도 조선시대 지방제도의 한 축을 이룬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만 역도제와 지방제도가 아니라 역도제와 교통의 관계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아쉽다. 물론 글쓴이가 쓰지 않은 부분을 비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제나 군현제를 다룬 연구와 비교했을 때 지방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역도제가 교통에 미친 영향, 혹은 그 반대를 조금이나마 더 다룰 수 있었다면 역도제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조선 지방제도의 특징이 발견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함께읽으면 좋은 논문

「고려말·조선초 경상도 해안 역로망의 재편성」
한정훈, 2012,『지역과역사』, 30, 77-113.

 

이지훈 리뷰어  pen9uinism@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선 선비를 기겁시킨 동남아 ‘남장국南掌國’의 밀매품은?

laos

logofinale고문서를 읽다보면 “남장南掌”이나 “면전緬甸”과 같은 이상한 단어와 마주치게 된다.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이 단어들의 실체는 고대 국가의 이름이다. 남장南掌은 오늘날의 ‘라오스’이고 면전緬甸은 ‘미얀마’다. 조선시대 문인들도 이들 나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조선이나 동남아나 중국에 조공을 바치긴 마찬가지였는데, 북경에 가면 자연히 이들과도 마주쳤던 것이다. 다만 연행사의 신분이어야만 가능했다.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정내원 씨가 발표한 南掌과 緬甸에 대한 조선 문인의 다면적 인식(『국어국문학』 172, 2015)은 그동안 전혀 다뤄지지 않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라오스·미얀마 인식을 다루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끈다.

일단 논문에서는 베트남이나 류큐(오키나와) 등은 16세기 후반 이수광李睟光 같은 학자들이 그쪽 사신과 나눈 필담을 모아 『안남국사신창화문답록安南國使臣唱和問答錄』 등을 묶어낼 정도로 교류가 있었으나 미얀마와 라오스와는 거의 없었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거리 문제만은 아니었다. 더 먼 나라 서양이나 중동 지역과는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큰 원인은 의사소통이었다. “죽간 열 편을 내어 보이니 검은 종이에 노란 글씨이며 (…) 그 글자의 형체가 가늘고 둥글었는데 마치 새 발자국 같기도 하고 주먹을 쥔 것 같기도 하니 괴상하고 망령됨이 매우 심하다” 이의봉李義鳳의 『북원록北轅錄』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쪽에서 한자를 전혀 모르니 필담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의봉은 1760년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간 인물이었는데 이때 라오스南掌 사신과 첫 만남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라오스 사신의 생김새와 옷차림새에 대해서도 묘사했다.

“눈빛은 겸손하고 치아는 고르니 안남安南 사람과 같다. 청淸 복장을 둘렀는데 황제가 하사했기 때문이다. 종행인의 나이는 모두 서른 이하며, 검푸른 눈썹을 가지고 있어서 외모가 물의 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비교적 우호적으로 묘사했다. 호기심이 일어 이것저것 물어본 뒤에 이의봉은 가져갔던 청심환을 이들에게 선물했다. 반면 얼마 뒤에는 전혀 다르게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양새가 다 짧고 작으며 얼굴색이 검다. 눈빛은 사나우며 발바닥은 나무뿌리처럼 무디고, 온몸에 교룡蛟龍과 호표虎豹의 무늬를 새겼다”며 두려움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들 국가에 대한 조선 사신의 시선은 대체로 이와 같은 쪽으로 흘러간다. 해가 흘러 1790년 유득공柳得恭이 서호수徐浩修와 함께 연행에 갔을 때 라오스南掌 사신을 또 만났는데 “몽고의 왕이 캉 위에 앉아 남장南掌 사람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웃자, 남장 사람은 사나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한 사람에게 鐵馬를 달려 차고 밟는 형상이 있다고 한다면, 또 한 사람에게는 깊은 대나무 숲에서 독화살을 쏘는 뜻이 있었다. 남만과 북적이 서로 만나니 그 모양이 우스웠다”라고 했다. 논문의 저자 정내원 씨는 “조선 사신이 남장 사신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데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개방적인 풍속에 대한 이질감 때문인 듯하며 이러한 균열은 쉽게 메워지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아래의 인용을 보면 왜 그러했는지 알 것 같다.

프랑스 식민지인 1900년대 라오스 지역군.(위키피디아)

“남장南掌 사람은 매우 독하다. 고북구의 남천문 위에서 우리나라의 마두 한 사람이 우연히 성 아래로 침을 뱉었는데 때마침 남장 사람이 그 아래를 지나다가 얼굴에 맞았다. 그 자는 화를 내며 옷을 벗고는 자신의 성기를 흔들어대면서 올려다보고 무어라 무어라 지껄이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또한 음탕하다. 원명원에 있을 때 남장 사신이 역관을 통해 우리들에게 한 물건을 팔고자 했다. 그가 합盒 하나를 꺼내니 매미처럼 찌륵찌륵 우는 것이 청동 기물에 들어 있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더욱 울어댔는데 팔뚝으로 이어지더니 가슴에 와 잦아들었다. 물으니 그것은 이른바 면령緬鈴이란 것이었다. 동그랗고 입구가 없으며, 작은 호두 크기만 한데 겉면에는 금이 입혀 있었다. 금․은․동 세 물질을 녹이고 두드려 81개의 조각으로 만들어 봉합한 것으로 속에 작은 구슬이 있으니, 찌륵찌륵 소리가 났던 것은 그 구슬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용도를 물어보니 매우 외설스러웠다. 남장의 추잡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면령緬鈴은 동으로 만든 종 모양의 성기구다. 유득공은 종처럼 생긴 것이 저절로 소리를 내는 모습에 호기심을 가졌다가 그 용도를 알고 나서는 추잡스럽다고 여긴다. 더군다나 엄숙해야 할 장소인 대성전 내에서 남장 사신이 헐벗은 차림새로 다니는 모습을 목격했으니 경멸감은 더욱 확고히 굳어졌을 것이다. 정 씨는 유득공 이후 조선 사신들이 남장 사신들에게 느낀 인상은 ‘독毒’과 ‘음淫’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고 말한다. “머리에는 관을 착용하지 않고 노란 비단으로 두 상투를 둘렀는데, 긴 상투를 드러내어 매우 우습다. 또 그 이빨에 옻칠을 하고 그 입술을 붉게 칠하고 그 귀를 뚫었으므로, 그 모습이 괴이한 귀신이나 흉악한 짐승 같아서 아주 밉살스럽다”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예의를 중시한 나라로서 당연히 그랬으리라 여겨지면서도 타 문화에 대한 조선의 경직된 인식이 갖는 한계를 두루두루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강성민 리뷰위원  review@bookpot.net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세종 리더십의 3가지 키워드: 공감능력, 감수성, 균형감각

sejong2_1

logofinale세종은 워낙 집대성적인 인물이라 그 업적 관련 논의만 해도 정리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또한 위대한 인물이라는 사실에만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정말 ‘위대한 인물’이라는 박제에만 갇혀, 더 유용한 논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연구 논문은 인간으로서의 세종이 가진 공감능력, 감수성, 정치적인 균형감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21세기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 세종이 보인 공감능력, 감수성, 정치적 균형감각을 통해, 현재의 난국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짚어본다. 최근의 시국을 본다면,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다른 게 아니라 공감능력과 감수성, 균형감각과 같은 부류의 능력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상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공감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세종의 정치적 리더십: 한국정치에서 세종 리더십의 함의」(『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15(2), 2016)에서 그러한 부분들을 어떻게 살펴보고 있는지 알아보자.

세종이 꿈꾸던 나라

재위 26년 세종이 내린 권농 교서를 살펴보면, 세종이 생각하는 좋은 정치와 비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

[su_quote]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 윗사람이 성심(誠心)으로 지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 농사에 종사하여 그 생생지락(生生之樂)을 완수하게 할 수 있겠는가. [……]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근본을 견고하게 한다면, 거의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며, 예의를 지켜 서로 겸양하는 풍속이 일어나서, 시대는 평화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함께 태평시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66쪽)[/su_quote]

세종이 생각하는 좋은 정치는 ‘사람들을 살맛나게 하는 것[生生之樂]’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그의 비전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세종이 지향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첫째, 가정마다 풍족하여 근심이 없어야 하며, 둘째, 서로 존중하는 사회 풍토가 조성되어야 하며, 셋째, 평화롭고 풍요로운 태평시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세종 사후, 실록에 등장하는 세종에 대한 평가들을 보면, 세종 치세에 대한 칭송이 국정 운영의 모든 부분을 망라하고 있으며, 이상적인 왕도 정치를 이끌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세종이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에 대해 공감능력과 감수성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발상의 전환
: 세종의 공감능력과 감수성

세종의 유명한 복지제도 중 하나가 노비 출산 휴가인데, 그에 대한 사례를 잠깐 보자.

[su_quote] 옛적 관가의 노비에 대하여 아이를 낳을 때에는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 이후에 복무하게 하였다. 이것은 아이를 버려두고 복무하면 어린 아이가 해롭게 될까봐 염려한 것이다. 일찍 1백 일 간의 휴가를 더 주게 하였다. 그러나 산기에 임박하여 복무하였다가 몸이 지치면 곧 미처 집에까지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다. 만일 산기에 임하여 1개월 간의 복무를 면제하여 주면 어떻겠는가. 가령 그가 속인다 할지라도 1개월까지야 넘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에 대한 법을 제정하게 하라.(68-69쪽) [/su_quote]

세종은 관청의 여자 노비가 임신을 하게 되면 7일의 휴가를 주었던 기존 제도를 개선해, 그 기간을 100일로 늘렸으며 출산 1개월 전부터 휴가를 주었다. 더 나아가 남편 노비에게까지 30일 간의 출산휴가를 주도록 하였다. 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 게다가 왕권 사회였던 당시 사회에서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들 만큼의 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가장 힘이 없고 낮은 존재들의 삶을 헤아리는 배려가 무려 600여 년 전에 한 군주가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각과 공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판단이다.

또한 다음과 같이 죄수들에 대한 배려에서도 세종의 공감능력과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

[su_quote]옥을 맡은 관원이 마음 써서 고찰하지 아니하고 심한 추위와 찌는 더위에 사람을 가두어 두어 질병에 걸리게 하고, 혹은 얼고 주려서 비명에 죽게 하는 일이 없지 아니하니, 진실로 가련하고 민망한 일이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항상 몸소 상고하고 살피며 옥내를 수리하고 쓸어서 늘 청결하게 할 것이요, 질병 있는 죄수에게는 약을 주어 구호하고 치료할 것이며, 옥바라지할 사람이 없는 자에게는 관아에서 옷과 먹을 것을 주어 구호하게 하라. (71쪽)[/su_quote]

역시 왕권 국가의 한 나라의 군주가 일개 백성, 그것도 죄인이 겪을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이는 이러한 발상이 이루어지기 힘들다. 죄인들이 죄를 지었다고 인간답지 않은 처우를 받으며 방치되는 것에 대해 오히려 그들의 안위를 보호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조세 면제와 관련된 대목에서도 그의 공감능력과 감수성이 잘 드러난다.

[su_quote]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성이 주리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짓이다. [……] 더욱이 감찰을 보내어 백성의 굶주리는 상황을 살펴보게 하고서 조세조차 면제를 해주지 않는다면, 백성을 위하여 혜택을 줄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71쪽)[/su_quote]

세종은 국정운영도 중요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놓인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시 백성들의 삶에 대한 공감능력과 감수성, 결단력이 없으면 단행하기 어렵다.

 

세종의 고민: 한글

세종의 특별한 감수성과 공감능력으로 이루어진 여러 일들 중에서도 가장 일대 사건은 한글 창제이다. 유명한 훈민정음의 서문 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su_quote]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73쪽)[/su_quote]

잘 알다시피 당시의 문자는 한자였고, 한자는 교육 받은 지배 계층 양반이 아니면 쉽게 익힐 수 없는, 어려운 문자였다. 따라서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관계에서 많은 불이익과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구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었음을 자각하고,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이다. 더욱이 당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고, ‘중화의 논리’가 흐르는 시대적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역시 그 추진력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추진력이 백성들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과 공감능력에서 기인한 것임은 이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세종의 정치적 균형감

다른 시대에 비해 유난히 세종 대에 훌륭한 위인이 많다. 그것은 그 위인들이 그 시대에 하필 많이 태어나서일까? 그 이유는 세종의 인재 선출 능력, 또한 인재들의 능력을 최선으로 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은 매사에 중국 중심의 세계적 흐름을 눈여겨보고 존중하면서도, 그들과 다른 조선적인 것을 추구했다. 조선 최초의 농서 『농사직설(農事直設)』의 서문 내용에 이러한 입장이 잘 나타나있다.

[su_quote]세상의 풍토들이 서로 같지 아니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적성이 있어, (중국의-필자) 옛 농서와 같을 수 없다 하시며, 여러 도의 감사에게 명하시어 각 지역의 경험 많은 농민들을 방문하게 하여, 토양에 대한 증명된 자료를 갖추어 아뢰게 하셨다. [……] 농사외의 다른 내용은 섞지 아니하고 간략하고 바른 것에 힘을 써서 산야의 백성에게도 환히 쉽사리 알도록 하였다.(75쪽)[/su_quote]

 

종래에는 중국의 옛 농서에 의존하여 지방의 지도자들이 권농에 종사하였으므로 실제로 풍토에 따른 농사법의 변경이 어려웠다. ≪농사직설≫은 우리 실정과 거리가 있는 중국 농사법에서 탈피하는 좋은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당대의 농서는 농사와 관련된 사람들의 지혜나 지식을 모아서 정리하여 좋은 책으로 만든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당시 세종이 조선의 각 지역의 농사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조선의 농서를 편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조선은 중국과는 토양, 기후 등 다른 것이 많기 때문에, 조선의 생산력, 또 민생의 근간이 되는 농업기술의 지역적으로 축적된 지식과 지혜를 정리하여 생산력을 높이고, 나아가 삶이 보다 안정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한 작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른바 ‘보편과 특수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상황에 맞는 적절한 절충이나 종합하는 뛰어난 능력을 세종이 갖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76쪽) 이러한 세종의 태도는 조선 사람들의 건강을 다루는 의약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세종이 지향했던
중화문명 속의 조선

세종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단지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당시 세계질서 그 자체였던 중화 문명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절묘한 균형감각과 상생적 차원에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경영하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확인된다.

[su_quote](맹사성을 비롯한 신하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세종의 중국에 대한 사대적 태도를 비판하는 데 대하여 임금이 말하기를-필자) 이는 지교(智巧)한 말이나, 정대(正大)한 언론은 아니다. 나의 사대(事大)하는 마음이 지극히 정성스러운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할 만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78쪽)[/su_quote]

[su_quote]내(세종-필자)가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였고, 철이 난 이래로 조금도 거짓된 일을 행함이 없음은 천지신명이 다 아는 바이거늘, 하물며 이 일에 있어서 감히 속이는 마음을 두리오.(78쪽)[/su_quote]

세종은 단지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만 어떤 정책을 시행하고, 나라를 이끌어가지 않았고, 당대 중화문명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명분과 원칙을 충실히 견지해가는 가운데 조선의 안위와 평화를 지켜가기 위해 주력하였다. 이것이 더 현실적으로 이상적인 방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세종의 균형감각은 종묘제례악에도 반영되어 있다. 중국적인 감성을 존중하면서도 그들과 다른 우리만의 감성을 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필자는 세종의 높은 문화적 자존의식과 우리다움에 대한 고려는 단순히 자주론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사안에 따라 중화문명의 기준과 우리다움에 대한 자존감의 적절한 균형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세종은 늘 실용과 실질을 강조하면서도, 원칙과 실용 중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문제의식, 균형감각을 발현해냈으며, 이것이 세종을 오늘날에도 다시 보게 하는 근원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와 세종의 리더십

우리는 앞부분에서 세종이 꿈꾸는 좋은 나라, 좋은 정치에 대해 세 가지를 들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정치는 얼마나 우리들을 살맛나게 이끌고 있는 것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은 세종이 말하는 좋은 나라의 세 가지 요건에 얼마나 긍정적으로 부응하고 있는 것인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는 사회문제, 정치적 갈등 등,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이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

물론 세종의 시대와 21세기 대한민국은 다르다. 직면한 과제도 다르고, 그 과제에 대해서 다른 시각, 다른 시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필자의 주장이 이 글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su_quote]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우리에게 유효한 것은, 세계적 대세와 우리다움의 균형을 만들어 나가고, 국민들의 삶과 일상의 애환을 깊이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지 않고서는 정치가 어떠한 신뢰할 만한 해결책이나 지속 가능한 희망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86~87쪽)[/su_quote]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동아시아의 전환기 경험과 새로운 세기의 시대정신: 과거와 미래의 대화」
강상규, 2010, 『한국학연구』, 32,  221-258.

「세종은 백성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였나」
박현모, 2009, 『정신문화연구』, 32(2), 111-136.

최종원 리뷰어  zwpower@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조선시대 정치에 대한 오래된 바람, 공론(公論)

geunjeongjeon_poomgyeseok1024x768

logofinale국민의 대다수가 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공화국이라는 정치체제가 구축되어 있는 현재의 한국(Republic of Korea)에서, 왕이 홀로 권력의 정점에 서는 조선의 정치체제와 정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단순하고 쉬운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정작 조선시대 정치에 대해 말해보려고 하면 여기저기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처럼 평가를 주저하게 되는 것은 500여 년 가까이 지속된 조선의 정치를 단 몇 마디로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선에는 원죄原罪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원죄는 바로 망국亡國이라는 것, 그것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망해버린 나라라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이 원죄는 조선의 정치체제나 정치 양상 등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을 제한하고 긍정적인 평가를 어렵게 했다. 조선이 망한 뒤 조선의 정치는 조선이 식민지가 된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당파를 나누어 서로 싸우기만 했고 결국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를 일제강점기 일본의 연구자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일본 연구자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당파성黨派性’이라는 개념을 통해 소모적인 분열만을 거듭하는 조선의 정치가 조선 민족의 고유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식민지 지배의 명분을 위해 여러 망국에서 나타났던 일반적인 현상들을 추려내어 조선의 특수성으로 설명해버린 것이다.

해방된 뒤 일제강점기 일본 연구자들의 주장은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조선의 ‘정체성停滯性’ ‘타율성他律性’ 등에 대한 비판이 곧바로 시작된 것과 달리 ‘당파성’에 대한 비판은 얼마간 유보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당시 남한과 북한의 연구자들도 원죄 때문에 여전히 조선의 정치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파성’에 대한 비판은 6·25전쟁 뒤 남한과 북한이 각각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 국가 전체를 총동원하고 그 결과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나타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조선의 정치에 대한 시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남한에서는 ‘근대화’ 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정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등장했다. 이것은 조선의 경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현재 한국 ‘근대성’의 맹아萌芽를 발견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이른바 일제강점기의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시도이기도 했다. 결국 그 동안 여러 연구들의 축적으로 조선의 정치를 대표하는 개념은, ‘당파성’에서 ‘붕당정치朋黨政治’ ‘공론정치公論政治’ 등으로 대체되었다. 예전에는 조선의 ‘당쟁黨爭’을 부정적인 정치 현상으로만 단순하게 파악했다면, 지금은 당쟁을 현대의 정당정치에 빗대어 보다 복잡하게 이해하려고 한다.

이번에 다룰 송웅섭의 「조선 초기 ‘공론’의 개념에 대한 검토」(『한국학연구』, 39, 2015)는 공론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의 정치사를 서술해나가는 연구 중 하나이다. 이 연구는 그러한 정치사 서술의 바탕이 되는 공론과 공론정치의 개념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조선 정치사 연구의 방향과 진행 상황을 확인해볼 수 있는 연구이다.

론정치公論政治의 내용

공론정치는 공론이 핵심이 되는 정치이다. 공론은 모든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정당한 의론, 공명정대한 의견이나 입장, 그리고 그 같은 평가 등의 맥락으로 통용되고 있다(357쪽). 공론은 조선시대 사료에도 직접 등장하는 개념이지만, 당시 공公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함께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의 공론 개념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현재 조선의 공론에 관심이 있는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은 ‘근대적 공공성’ ‘공론장’ 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공론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웅섭의 연구는 공론 개념의 의미 그 자체에 바로 접근하기보다는, 공론 개념이 통용되고 있었던 조선 당시의 맥락과 공론으로서의 위상이 부여되는 방식을 확인함으로써 공론 개념을 검토하려고 한다.

조선에는 언론言論을 담당하는 관원, 대간臺諫이 있었다. 대간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원들을 함께 가리키는 용어로, 이들에게는 여러 업무가 있었지만 왕에게 직언直言하고 여론의 상황을 전달하는 업무가 핵심이었다. 물론 대간이 아닌 다른 관원들도 일시적으로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대간은 왕의 눈과 귀로 비유될 정도로 언론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왕은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바탕이 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위해서는 언론을 무시할 수 없다고 여겼고, 대간 역시 언론을 왕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여겼다.

대간이 여론을 모아 왕에게 전달하면서 자신들의 정리된 의견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 바로 공론이었다. 실제로 모든 관원들의 의견을 모으지 않았고 대간의 모든 의견이 공론으로 이해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으로 대간의 의견은 공론으로 이해되었다. 송웅섭은 당시 왕도정치와 같은 유교적 가치에 기초한 도덕적 정치문화가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간의 의견이 대체로 공론으로 이해되었다고 보았다. 왕이 유교적 가치들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 한 공론은 왕도 함부로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송웅섭에 따르면, 공론을 중시하는 조선의 도덕적 정치문화는 태종대와 세조대를 지나 성종대에 정착했다. 조선 왕의 권력은 도덕적 권위와 공적 제도 테두리 안으로 정리되었고, 대간은 공론을 자신의 입장에서 전유하면서 왕, 재상 등과 함께 점차 주요 정치 주체로 성장해나갔다. 이러한 흐름이 16세기에 이르면 이른바 ‘사림(士林)’의 등장으로 이어졌다고 이해되면서, 공론과 공론정치는 조선시대 정치사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

geunjeongjeon_poomgyeseok1024x768
경복궁 근정전 앞 품계석
공론과 공론정치의 가능성

공론과 공론정치라는 개념은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과 한국 ‘근대성’의 맹아 발견이라는, 해방 이후 한국사의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하다. 먼저 공론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조선 정치사에서는 당쟁이 기본적으로 유교적 가치체계, 도덕적 정치문화 등을 기초한 공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론정치가 진행되는 양상에서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유사한 형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론과 공론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조선의 정치사가 이전보다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널리 활용되는 다른 유용한 학문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공론과 공론정치 역시 굉장히 모호한 개념이다. 공론이 중심이 되는 정치 형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 공론정치가 아닌 정치와는 어떻게 다른가? 공론정치는 단순히 독재와 대응되는 정치 형태인가? 왕조국가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등 지금의 연구 성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가능하다. 게다가 조선 정치사의 긍정적인 부분, 특히 도덕적인 우위나 정당성, 과학적 합리성 등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식민사학’의 주장을 완전히 대체하는 이론적 성취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며, ‘근대성’ 자체에 대한 비판이 이미 수없이 진행된 상황에서, ‘근대적 공공성’에 비견되는 무엇을 찾으려는 시도의 효과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공론公論에 대한 논의는
공론空論일까

해방 이후 조선의 정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고, 거기에서 민주주의나 공화주의의 ‘기원’을 발견하고 싶은 바람도 이어졌다. 하지만 ‘당파성’을 의식한 채 진행되는 역사적 평가는 단순하게 선과 악을 나누는 것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연구자들의 문제는 500여 년 동안 지속된 조선의 정치사 전체를 선과 악으로 분명히 나누어 서술해버리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선은 일본 제국주의가 이해하는 ‘근대성’이었다. 이러한 방식은 공론이나 공론정치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을 활용해 조선 정치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의 원죄로 가려진 조선 정치의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은 여전히 검토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치에서 전근대적인 어떤 것, 혹은 근대적인 어떤 것이 발견되기를 원하는 것은 오래된 바람일 뿐이다.

20세기 후반 거대서사가 중심이 되는 근대 역사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뒤, 역사학의 역할은 인간의 역사가 단순하게 정리될 수 없고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밝히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공론과 공론정치라는 개념은 당대에도 사용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연구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오히려 역사를 단순하게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고 있다. 현재로선 공론公論에 대한 논의는 공론空論에 가깝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조선 공론정치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제안」
김경래, 2012, 『사학연구』, 105, 107-147.

「18세기 ‘공론’ 정치 구조에 관한 시론」
이근호, 2014, 『조선시대사학보』, 71, 67-98.

이지훈 리뷰어  pen9uinism@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대事大의 역사, 조선과 한국

map2

logofinale조선시대를 가리키는 용어로 절대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대事大다. 사대는 『맹자孟子』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사대의 자세를, 조선은 중국 왕조에 대해 500여 년 동안 지독하고도 철저하게 유지했다. 이러한 조선의 사대를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또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연구자에 따라 사대는 조선의 정체성停滯性과 타율성他律性을 강조하는 근거로, 혹은 조선의 주체적인 실리외교의 근거로 해석되어 왔다. 조선의 사대를 어떻게 분석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대외관계’는 물론, 조선시대의 성격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2011년에 이처럼 축적된 연구의 성과와 방향을 한 발짝 떨어져서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정다함의 「’사대事大’와 ‘교린交隣’과 ‘소중화小中華’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락」 (『한국사학보』, 42, 2011)는 사학사적인 접근을 통해 그 동안 진행되었던 연구들이 살펴보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글쓴이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성격을 ‘어떤 것’으로 만들고 싶은 근대 국민국가 한국의 욕망이 조선의 ‘대외관계’를 이해하는 개념들을 제공했다. 사대, 교린交隣, 소중화小中華라는 개념은 조선시대 당시에도 사용되었던 개념들이지만, 기존 연구들의 진행 과정에서 개념들의 의미는 조선시대와 전혀 달라졌다. 이 개념들은 한국의 필요에 의해 다시 발명된 것이었고, 따라서 사실상 기존 연구들은 한국에서 다시 발명된 개념들에 투영된 조선시대 상像에 따라 연구를 진행했던 것이다.

기존 연구와 달리 글쓴이가 이 문제를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적 보편普遍, 이른바 ‘서구적 근대성西歐的 近代性’으로의 편입을 갈구해왔던 한국의 욕망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세계적 보편에 편입하겠다는 한국의 열망은 일제강점기에도, 해방 이후에도, 심지어 지금까지도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추구되어 왔다. 그 동안 조선시대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러한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조선과 명明
한국과 미국

한국의 역사학에서 조선시대를 다룰 때 사대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일제가 식민지의 명분으로 내세운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이었다.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의 내용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조선은 스스로의 힘으로 역사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논리였다.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 왕조를 비롯한 외세에 사대하느라 주체적이지 못했고, 결국 일본의 도움 없이는 ‘근대화’도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해방 전후의 한국 역사학은 방어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조선을 철저히 피해자로 설정했다. 명明과 청淸에 대한 사대는 조선이 원해서 지속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일시적인 형식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50년대 이후에는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등장했다. 조선의 사대는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해석이었다. 글쓴이는 바로 이 급격한 변화를 포착하면서, 이 변화의 배경에 있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 주목한다. 당시 미국은 서구적 근대성을 대표하면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국가였고, 마치 명明·청淸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방어적 민족주의의 입장에 있었던 한국 지식인들은 그러한 미국의 영향력을 애써 부정했지만 현실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다. 글쓴이는 이 딜레마의 결과가 사대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 다시 말해, 조선의 유교적 전통에 대한 급격한 긍정일변도의 재조명으로 이어졌다고 판단한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서구적 근대성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의 영향력을 인정해주고, 수용한 선진문물을 한국적 특수성과 융화하여 보편에 가장 가깝게 구현해낸다. 이 문장에서 한국을 조선, 미국을 명明·청淸으로 바꾸어도 문제가 없다. 한국의 현실과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과 논리는 기본적으로 같았던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조선의 유교적 전통에서 서구적 근대성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조선시대사는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한국사의 내용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대는 조선시대 당시 개념을 귀납적으로 연구해 도출한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한·미 관계로부터 영향을 받아 다시 발명된 개념이다. 사대는 조선에 머무르지 않고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용되는 개념인 것이다.

교린交隣
피해자 코스프레

사대와 짝을 이루는 것이 교린이다. 명明이나 청淸과 같이 조선의 이른바 ‘상국上國’이 아니었던 국가 혹은 정치세력과의 관계망은 교린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대표적인 교린의 대상으로는 일본과 여진이 있다. 기존 연구의 교린 개념에서 조선은 선진문화의 전파자로서의 우월한 위치에 설정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본, 여진과는 호혜적互惠的, 수평적 관계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국가 혹은 정치세력 사이의 힘의 격차는 엄연히 있을 수밖에 없고, 실제로 위계질서도 명明·청淸과 조선의 관계만큼 뚜렷했다. 조선이 일본이나 여진을 대상으로 일으킨 정벌 전쟁들이 그 근거다.

글쓴이가 주목한 것은 그 관계망을 굳이 교린이라는 개념을 통해 수평적인 것으로만 설명하려했던 의도다. 글쓴이는 사대 개념을 다시 발명하는 과정에서 이미 조선의 유교적 전통에 대한 과도한 해석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미 세종과 성종으로 대표되는 15세기 조선을 영광의 시기, 다시 말해, 선진문물의 수용으로 서구적 근대성의 일부를 획득한 황금기로 평가해버렸기 때문에, 정작 식민지로 귀결되는 조선 후기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빈약해졌다는 것이다. 이 빈약한 부분을 채우는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다. 이에 따르면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침략에 의해 그것이 좌절된 셈이다.

조선은 언제나 ‘근대화’의 피해자여야만 했다. 그래서 조선은 여러 차례의 정벌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교린의 개념을 둘러싼 문화적 영향력만 강조될 수 있었다. 이처럼 교린 역시 사대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다시 발명된,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개념인 것이다.

소중화小中華
조선과 한국의 현재

글쓴이는 청淸이 건국된 뒤 중화中華를 전유하여 스스로를 소중화로 자리매김한 조선과 그것의 인식론과 논리를 비판 없이 그대로 다시 전유하고 있는 한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소중화 개념도 한국에서 다시 발명된 것이다. 다만 사대와 교린, 소중화로 설명되는 역사적 사실들이 결코 동아시아에만 국한되는 특수한 사례는 아니었다. 다양한 역사적 주체들 사이의 관계망 속에서 지식·가치의 패러다임에 따라 질서가 광범위하게 재편되는 것은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다만 동아시아에서는 그것을 사대와 교린으로 불렀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시 발명된 개념인 사대와 교린은 동아시아의 특수한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인식되었고,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인 맥락에서 활용되면서 조선시대 당시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여러 역사적 주체들의 관계망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애초에 의도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논리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강화시키고 있으며,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상상력의 가능성까지 제한하고 있다. 글쓴이가 제목에 썼던 것처럼 사대, 교린, 소중화 개념이 시·공간에 상관없이 초시간적, 초공간적인 맥락에 존재하는 개념으로 다시 발명되면서, 사대와 교린, 소중화는 조선시대 당대의 개념으로만 머물지 않게 된 것이다.

글쓴이에 따르면, 조선시대 당시 여러 역사적 주체들로 구성된 관계망의 역동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결국 서구적 근대성의 보편에 입각한 한국사의 상像을 깨뜨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서구적 근대성을 추구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은폐된 것은 무엇인지, 사대, 교린, 소중화의 개념과 같은 경우들을 통해 밝혀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글쓴이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한국의 현재와 ‘근대화’ 과정에 대한 재검토로도 이어지게 될 것이다.

탁월한 문제제기
쉽지 않은 독해

정다함의 연구는 ‘근대’ 및 근대 역사학에 대한 비판을 한국사에 적용시켜 문제제기를 구체적으로 진행시켰다는 점, 그리고 가끔은 단절된 것처럼 느껴지는 조선시대 연구의 현재적 의미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게다가 이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연구를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기도 하다. 다만 이 연구는 복합적인 논리 구조에 대한 내용을 짧은 지면에 담고 있고 문장 자체도 긴 편이라 오해 없이 읽어내기가 쉬운 논문은 아니다. 그러나 천천히 정독해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함께 읽으면 좋을 논문

 「조공체제의 변동과 조선시대 중화-사대 관념의 굴절: 변화 속의 지속」
최연식, 2007, 『한국정치학회보』, 41(1), 101-121.

「한국에서 대중국관념의 변화: 중화주의, 소중화주의, 탈중화주의」
장현근, 2011, 『아태연구』, 18(2), 97-123.
이지훈 리뷰어  pen9uinism@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