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의 사형은 정당했나?

어우동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많은 이에게 어우동은 15세기 후반 많은 남성들을 홀린 요부로 인식되어 있다. 물론 최근 들어 그녀가 조선의 엄격한 분위기에서 성적 자유를 추구한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어우동이라는 개인을 ‘성性’이라는 한정된 범주 안에서만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정해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은 「조선전기 어우동 사건에 대한 재검토」(『역사연구』, 17, 2007)에서 사회의 경계를 넘어선 한 여성이 어떻게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으며, 이 비극이 어떻게 사회로부터 주조되었는지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어우동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어우동은 15세기 중반 무렵 양반 가문인 박윤창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또한 어우동의 남편은 효령대군의 손자 태강수(정4품) ‘이동’이었다. 이동은 아버지 이정이 적자가 없는 상태에서 첩에게서 낳은 서자였다.
그럼 어우동 사건에 대한 정황을 살펴보자. 어느 날 태강수는 자기 집에 젊은 은장이를 불러 은그릇을 만들게 했다. 그런데 어우동이 여종인 척 은장이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태강수는 어우동을 친정으로 쫓아 버렸다. 이때부터 어우동은 신분을 숨긴 채 ‘현비玄非’라는 가명으로 첩이나 기생 또는 여종으로 행세하면서 남성들을 만났다. 그녀는 종친에서부터 관료, 생원, 서리, 남자종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만남을 가졌다. 여기까지가 『성종실록』에 실린 어우동 사건의 전말이다. 저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사항은 어우동이 마치 부나비처럼 자신의 욕망을 맘껏 채우기 위해 상대를 끊임없이 물색했다는 측면이 부각됐다는 점인데, 남자종 지거비만 제외하면 어우동과 연루된 남성들 대부분이 그녀의 적극적인 유혹에 현혹되었다고 기술돼 있다.

한편, 『성종실록』을 이외 또 하나의 자료인 『용재총화』에서는 어우동이 남성들을 적극적으로 유혹한 측면을 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종실록』에서는 어우동이 은장이와 이야기하며 가까이 했다고만 되어 있으나, 『용재총화』에서는 “드디어 내실로 끌어들여 날마다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돌아오면 몰래 숨기곤 하였다”고 기술한다. 또 “꽃피고 달 밝은 저녁엔 정욕을 참지 못해 둘이서(어우동과 여종) 도성 안을 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끌리게 되면 제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랐으며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고 기술되어 있다. 『용재총화』의 기록은 저자가 마치 그녀를 직접 관찰한 듯 적혀있다.
미심쩍은 기술방식이야 어찌됐든 어우동은 사회에서 용납하지 않은 비행을 맘껏 저지른 여성이었던 듯 하다. 그런데 어우동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진짜 원인은 다른 데에 있었다. 바로 남편 태강수가 기생 연경비를 사랑해 어우동을 제멋대로 내쳐버린 것이다. 1476년(성종7) 9월에 종부시宗簿寺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종친으로서 첩을 사랑하다가 아내의 허물을 들추어 제멋대로 쫓아버렸다”고 고발했다. 결국 성종은 종부시의 판단과 건의를 받아들여 태강수에게 어우동과 다시 결합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태강수는 왕명을 듣지 않았다. 어우동 사건에서 남편 태강수의 이러한 행동은 부각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어우동의 행동만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왜 어우동에게
차별적인 판결이 내려졌을까?
어우동 사건이 터졌을 때 의금부에서는 성종에게 그 죄가 간통죄로서 장仗 1백에 유流(리뷰어 주: 유배지에 살게 하는 것) 2천리에 해당한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법에 따르면 간통죄의 경우 신분 남녀를 불문하고 같은 벌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한 양반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반인과 똑 같은 형률을 적용하면 기강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엄하게 처리하는 관행이 있었다. 가령 양반 여성이 간통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장형 仗刑으로 다스린 후 관비로 만들거나 유배를 보내는 것이다. 저자는 어우동에 대한 형량 부과 역시 이러한 사례들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어우동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일반적이지만은 않았다. 단순 간통이 아니라 종친의 처이자 양반가의 딸로서 기생처럼 수많은 남성들과 부도덕한 행위를 했다는 것이 큰 논란이 된 것이다. 게다가 종친과의 간통은 근친상간에 해당하며, 지체 높은 부인이 ‘종놈’과 간통했다는 사실도 양반들로서는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이러한 어우동의 처벌에 대한 논의는 치열했다. 일각에서는 어우동의 죄가 비록 무거우나 사형에 해당하지 않을뿐더러 임금의 덕은 죽일 사람도 살릴 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이므로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쪽에서는 어우동이 강상을 무너뜨렸으며, 음란한 풍속을 확산시킬 수 있기에 본보기 차원에서 최고 형률인 사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 측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 성종은 결국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1480년(성종11) 10월, 어우동은 목매달아 죽이는 형벌인 교형에 처해졌다.
어우동이 기존의 판례와 다르게 중벌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여성의 몸가짐을 둘러싸고 진행된 여러 논쟁이나 정책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은 개국 이후 고려의 몰락을 교훈으로 삼아 국가의 긴급한 사명은 인간의 본성을 순화하고 풍속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때문에 조선의 개혁가들은 고려와 다른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규범도 강화하였다. 즉, 우주론적으로 하늘에 해당하는 남자가 땅이라 할 수 있는 여자에 군림하며, 이 보편성을 인간 사회에 잘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낮은 존재인 여성의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남성 중심의 질서에서 여성은 성적 주체가 아니었다.
그 결과, ‘정(貞: 정조 또는 정절)’을 여성의 타고난 본성으로 여겼고, 이 본성을 어기는 여성에게는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분리라는 형벌이 주어졌다. 그뿐 아니라, 여성의 성은 한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집안 문제로 전화되어 여성의 가족도 부도덕하다는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여성의 ‘성’은 늘 문제의 성으로 규정되어 혼인 전에는 친가에 의해, 혼인 후에는 시가와 친가 양쪽으로부터 감시 받아야 했다.
[su_quote]한 마디로 어우동은 15세기 조선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공공의 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우동 대한 판결에는 15세기 여성에 대한 다양한 ‘규정’을 매개로 하여 조선을 성리학적 사회로 이끌고자 한 남성들의 야망이 숨어있던 것이다. (20쪽)[/su_quote]
사회로 복귀한
남성 연루자들
어우동이 교형을 받고 죽은 뒤 어우동과 관련된 양반 남성들은 한바탕 큰 소동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풀려났다. 뿐만 아니라 다시 관직에 임용되어 출세하는 데도 큰 제약을 받지 않았다. 천한 기생처럼 행동한 어우동 때문에 오히려 ‘뜻있는 선비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식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우동이 중죄를 면하기 위해 거짓으로 죄 없는 많은 남성을 끌어들였다는 기록까지 등장하였다.
논문에 자세히 소개된, 연루된 남성들이 사회에 아무 일 없이 복귀하는 과정은 실로 장관이다. 심지어 어우동을 강간한 사노 지거비는 가벼운 형을 받기도 했다. 물론 신하들이 지거비의 형이 너무 가볍다는 건의로 형이 다소 무거워 졌지만 교형을 받은 양반가의 여성보다 가벼운 형을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끝나지 않은
어우동 이야기
[su_quote]종종 사소한 문제를 놓고도 심각한 차이를 드러내던 국왕과 관료들은 여성의 규범 문제에서는 어느새 동조자가 되었고 갈등을 잘 풀어나가는 협조자로 변해있었다.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회 특권이 이러한 통치방식을 유지할 때에 더 공고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28쪽)[/su_quote]
한국사에서 어우동은 15세기 후반 조선 사회가 아직까지 여성이 자유롭게 생활했다는 증표로 많이 이용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반대의 의견을 제시한다. 어우동에 대한 차별적인 판결과 남성들의 사회 복귀를 통해 이미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서서히 가동되었다고 본 것이다. 성종이 무리하게 어우동을 교형시킨 것은 의도적이었고, 그 의도 속에는 사회가 그어놓은 테두리를 넘어선 여성의 결말이 얼마나 비극적으로 끝나는지를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점차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어우동의 목소리를 통해 15세기 후반 여성의 사유 방식이나 자기 인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그 목소리를 찾지 못했다는 점을 아쉬워한다. 어우동이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옹호 또는 시인했는지 등은 제한된 사료를 다르게 읽는 방식을 통해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이러한 아쉬움이 이후 발표된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에 반영되었는지 차후 기회가 되면 소개하고자 한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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