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정치

한국에 분배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cm08109472
logofinale분배정의,
철학은 시대에 기여할 수 있을까?

분배정의에 관한 오랜 논의가 이어져 오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 분배정의에 대한 구체적인 담론은 아직까지도 선별적 vs 보편적 대립 구도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분배정의에 관한 철학적 담론들이 유수하게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들은 ‘이론’으로서만 다루어질 뿐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실행할만한 지침으로서는 아직도 답보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히려 그간의 정책들 면면을 살펴보면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까지 했다. 더러는 그것은 공허한 이론으로 취급받으며 조롱마저 당하는 듯 하다.

철학은 정말 이 시대에 기여할 수 없을까? 특히, 정치에서 철학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나? 이번에 살펴볼 논문은 정진화 교수의 존 롤즈(John Rawls)의 분배정의론과 한국적 적용에 대한 연구(한국정치학회보 50(2), 2016.6. 75-101)로써 존 롤즈가 주창했던 정의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에 어떻게 분배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살펴보려 한다.

정치는 구체적인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철학은 때로는 현실과 유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 없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되는대로 정치를 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철학이 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찾고자 했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철학이 그것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가 나의 관심사 중 하나라고 하겠다. 필자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진 독자라면 아마 본 논문이 꽤 흥미롭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
분배 내지 조정을 위한 권력의 획득과 행사

분배정의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느냐는 논의를 이루어가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것이 있다.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 그것이다. 정치학도인 필자 입장에서야 ‘정치’ 그 자체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일테지만, 동시에 정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 역시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가장 고전적이고 유명한 정의를 따라가보면,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Social Values)’으로 정의된다(D. Easton 1953). 권위있는 정치학자 중 한 사람인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은 희소한 자원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권력이 분배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를 권력투쟁의 장으로 보았다. 이 때 권력이란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특정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정의들이 있지만 대체로 정치에 대한 정의들을 살펴보면 ‘분배’ 내지 ‘조정’, 그리고 그를 위한 ‘권력’의 획득과 그 행사로 요약 가능하다. 요컨대, 정치는 분배에 있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분배함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인 셈이다(과연 이러한 정의가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일단 대답을 유보하자).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간다.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무지의 베일과 분배정의의 원칙
롤스 정의론의 핵심

“사회가 정의롭다고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예를 들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정의로는 사회는 이러한 재화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분배하며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준다. 하지만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기 시작할 때 어려움이 시작된다”(Sandel 2009, 19).

존 롤즈의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롤즈가 무엇을 규명하고자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롤즈는 “정의에 대한 개념이 갖는 뚜렷한 역할은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구체화하고 적절한 분배의 몫을 결정하는 것”(p.78)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적절한 분배의 몫을 결정할 것이냐는 것이겠다.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때 무지의 베일이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최초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가상적 장치로서,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을 가능케 하는 제한조건이다. 이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위치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지위, 권력, 명성, 지능, 신체적 능력 등이 어떠한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원칙을 설계할 수 없으므로 이 때 세워진 정의의 원칙들은 공정하다고 간주할 수 있다.[1]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선택할 원칙은 다음과 같다고 말하였다.

 

첫 번째 원칙: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유사한 자유체계와 양립하는 가장 광범위하고 동등한 기본적 자유체계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두 번째 원칙: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가지 경우.

  1. 정의의 저축 원칙과 일치하여 최소수혜자들에게 최대 이익이 될 때
  2. 공정한 기회균등 조건 하에 모두에게 직책 및 직위가 개방되어 있는 것과 결부될 때 편성될 수 있다(Rawls 1999, 266)

 

첫번째 원칙은 이른바 ‘자유의 원칙’이라 불리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누리고 향유하는 데 있어 평등함을 강조하는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원칙’으로 분배정의와 관련된 항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a)의 경우 최소수혜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것으로서 ‘차등의 원칙’으로 불리며, (b)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 직위와 직책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무지의 베일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이야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봤을 내용일 것이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현실에서 제도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느냐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롤즈의 정의론에서 핵심적 명제라 할 수 있는 ‘무지의 베일’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상황이며 또 실천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무지의 베일이 가지는 성격에 대해 박효종(1995)은 ‘두터운 베일’과 ‘얇은 베일’을 구분하여 해석하였다. 이것을 잠시 소개하자면 이렇다. 무지의 베일은 공정성과 공평성을 담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사회계약 상황에서 완전무결한 만장일치를 보장한다. 만약 무지의 베일이 개인의 구체적 이해관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두꺼운’ 것이 될 것이지만 베일이 얇아질수록 구체적 이익으로부터 차단되는 정도가 약하고 공정성 또한 담보하기 어려울 것이다(박효종 1995, 432-434)[2]

현실에서 베일의 두께를 두껍게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면 보다 공정한 의사결정을 위한 원초적 입장을 제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러한 장치를 최대한 구현하는 것은 그것이 없는 것보다 더 높은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서 제헌위원회가 만들어져 헌법과 사회체제가 결정되는 것이 공정한 규칙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국가들은 이미 헌법이 제정돼 있고 또한 국가를 이미 형성한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원초적 입장을 적용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상황이라면 헌법 개정 상황일 것이다. 헌법 제정 당시 사회구성원들의 참여와 동의가 부재했던 역사를 들며 논문 저자는 헌법 개정 시 ‘국민숙의위원회(가칭)’와 같은 단계를 마련하고 운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즉 ‘원초적 입장’을 모의적으로나마 구현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한 가지 상황으로 가정할 경우 “최대한 그 사안에 대해 특정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크게 가시화되지 않고 관련 정보들의 노출이 비교적 적은 시기가 바람직할 것”이라고 논문 저자는 주장한다.[3]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분배정의

현대국가는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복지는 현대국가에서 자원을 재분배하는 주요한 정책적 수단이며, 이러한 정책이 얼마나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느냐가 그 국가의 복지 수준을 결정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복지국가 담론은 선별적 vs 보편적 복지 프레임에 머물러 있을 뿐 이것이 진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복지 담론에 롤즈의 분배정의론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위에서의 고찰이 롤즈의 분배정의론에서 핵심인 ‘무지의 베일’을 구현할 수 있는 모의적 상황에 대한 제안이라면 이번 파트에서는 본격적으로 분배정의 실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롤즈의 복지 개념은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조합으로 이해된다. 그의 두번째 원칙 중 ‘차등의 원칙’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최소수혜자들을 대상으로 하며, 그것은 복지의 수혜대상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선별적 복지 개념과 일치한다. 다른 한편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은 복지 서비스의 대상을 제한하지 않고 경제적 기준으로 서비스 대상자를 구분하지 않으므로 보편적 복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4] 이것을 간단한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정진화(2016)에서 발췌

 

한 편, 롤즈의 정부조직 구성도에 비례한 한국의 정부 조직 현황은 다음과 같다.

 

정진화(2016)에서 발췌

 

한국의 정부조직은 롤즈가 제안한 조직구성과 기능에 부합하는 조직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논문의 저자는 분배처의 역할을 담당하는 국세청이 4대 권력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조직이 아니라 기재부 산하로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복지국가가 실현되고 보다 분배정의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분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처가 힘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논문의 저자는, 따라서, 분배처의 기능을 강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부터 롤즈의 분배정의가 실제 제도상으로 어떻게 관철될 수 있는지까지, 꽤 길고 두꺼운 이야기들을 다루었는데 본 글에서 논문이 함의하는 바를 충분하게 검토하지 못하는 점은 필자의 역량부족이라 하겠다.

필자의 부족한 생각이지만, 롤즈의 정치철학으로부터 이것을 어떻게 현실과 접목시킬 것인지, 그리고 철학적 논의가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고민할 때 비로소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길이 열리리라 본다. 기실 이념과 말은 때로는 공허할 수 있지만 현실의 실천은 대단히 구체적이다. 만약 철학적 담론이 단지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논리적 우열의 다툼이라면 그것이 현실과 가지는 관계성에 대해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롤즈는 ‘이상적인’ 정치체계를 고안하기 위해 노력했던 철학자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롤즈의 논의는,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한계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철학을 바탕으로 보다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는 일을 멈춘다면 어떻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본 논문은, 필자가 보기에, 롤즈의 논의를 기계적으로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이 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접맥될 수 있는 철학의 가능성을 탐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읽어보시길 권한다.


[1] 이러한 원초적 입장에 대한 여러 비판 중 대표적인 것은 샌델의 비판인데, 샌델은 롤즈의 원초적 입장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상황이며 실제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라는 의무론적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정진화 2016.6. 79-80)

[2]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리뷰가 소개하는 논문 p.86을 참조하라.

[3] P.89 참조

[4] P.88 참조

최태준 리뷰어  xowns5186@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의 정치적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ti013a3507

logofinaleSNS는 실제로 정치적 동원력을 얼마나 행사하고 있을까? 지난 번에 필자가 리뷰했던 논문인 「2012년 대선과 대중매체의 정치적 효과」에 이어 실제로 SNS가 정치적 영향력을 얼마나, 어떻게 행사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박창문, 조재욱 교수의 SNS의 정치적 동원 기능에 관한 비판적 고찰: 18대 대선에서 트위터를 중심으로(『한국정당학회보』 12(2), 2013)를 살펴보려 한다.

SNS의 정치적 동원 기능

지난 논문은 TV나 라디오, 신문 등 구 매체(old media)와 SNS, 유튜브 등의 신 매체(new media) 사이에서 투표자들의 정치적 선택에 매체들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한 논문이었다면 이번 논문은 트위터에 한정하여 실제로 SNS가 선거에 어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고찰이다. 18대 대통령 선거는 트위터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던 대선이었으므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SNS는 오늘날 우리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 많은 이들이 관계를 맺고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것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전체 인구비율로 따져보았을 때 SNS로부터 정보를 습득하고 정치적 선택을 위한 통로로 활용하는 인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더욱이, SNS가 정치적 동원에 있어서 긍정적 효과를 미치는지는 파악하기 더욱 어렵다. 많은 논자들이 SNS를 통한 ‘소통의 혁명’을 말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SNS야말로 게토화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공간이라고 본다. 본 논문을 살펴보는 것은 SNS가 가지는 위력이 실제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SNS의 법칙? 트위터의 특성과 정치적 동원 기능

SNS가 긍정적 효과를 가지느냐, 아니면 부정적 효과를 가지느냐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오고갔다. 실제로 SNS가 등장한 이후 SNS는 지속적으로 확대 추세에 있으며 정치인들 역시 이러한 SNS를 유용한 플랫폼으로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정치적 동원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트위터는 어떻게 작동할까? 닐슨은 ‘1:9:90의 법칙’을 주장한다. 이것은 1%의 기여자(heavy Contributor)들만이 컨텐츠와 정보를 생산하고, 이렇게 생산된 정보를 리트윗이나 댓글을 통해 확산시키는 9% 간헐적 참여자(intermittent Contributors)가 있으며, 나머지 90%는 방관자(Lukers)로 1%와 9%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된 정보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관망한다는 것이다(Nielsen 2006).

뉴미디어, 특히 트위터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을 뽑아보자면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1) 먼저 트위터는 개방성을 가진 매체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고 따라서 이것은 정치적 무관심층이 정치인 개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개방해줄 수 있다. (2) 신속한 전파력 역시 트위터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3) 또한 SNS 상의 커뮤니티는 단결된 하나의 공동체라기보다는,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만을 골라 특정 커뮤니티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자기중심적 커뮤니티를 구성할 수 있다. (4) 마지막으로 연결의 편의성은 SNS가 다양한 미디어와의 조합을 통해 손쉽게 연결될 수 있는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만일 SNS가 정치인과 지지자 및 무관심층 사이의 연계성을 높이고 친밀도를 강화시켜 이들의 정치참여를 확대할 수 있다면, SNS는 정치적 효능감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지지자들의 결집과 동원, 투표율 제고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것이 SNS가 가지는 정치적 동원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가지 한계

그렇다면 트위터는 지난 18대 대선에서 이러한 동원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을까. 논문저자들의 결론은 “아니다”이다. 그 이유로 논문 저자들은 다섯 가지의 한계를 지적한다.

첫째, 공급자 트위터의 소통이 대단히 부재했다. 쉽게 말해 트위터를 통해 정보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모두 SNS를 중심으로 선거 캠페인을 진행했지만, 이러한 각각의 채널들이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나 그 채널들이 공략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타겟을 설정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자연스레 비슷한 내용만을 여러 차례 반복 게시하는 선전매체로서만 기능할 뿐, 연령, 세대, 직능 등 여러 관심분야에 포진한 다양한 유권자를 공략함으로써 한 곳으로 집결시키지는 못했다.

둘째, 트위터 사용자 규모의 한계로 인해 생산주체가 대단히 한정적이었다. 앞서 말한 1:9:90 법칙을 적용한다면 트위터 가입자를 약 600만 명 정도로 추산할 때 6만여명이 적극적 기여자로서 활동하고 약 54만명 정도가 이에 멘션을 달거나 리트윗을 하지만 나머지 540만은 방관자들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한 트위터의 타임라인은 그 정보의 방대함으로 인해 팔로워의 수가 많다면 단지 몇 분 동안에도 수십개의 트윗이 올라가고 만다. 이 과정에서 이용자들은 정보를 놓치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장덕진과 김기훈(2011)이 분석한 자료를 논문 저자들이 제시한다. 그들에 따르면 한국 트위터리언의 75%가 상위 1%의 유명인을 팔로잉하고 있으며, 유명인의 메시지가 전체 트위터 메시지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요컨대, 트위터 이용자들의 규모와 그 적극성의 정도로 말미암아 트위터가 실제로 정치사회적 연대와 동원을 이끌어낼만한 유의미한 효과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셋째, 파워 트위터리안에 의한 정보와 여론의 독점화와 부정적 이슈의 확산으로 인해 트위터는 실제로 정치적 동원과 연대를 창출해내기보다 정치적 신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일반인들의 트윗보다 파워 트위터리언들의 트윗이 더욱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트위터 안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의혹’, ‘비리’, ‘네거티브’ 등의 이슈어로 부정적 표현어들로 표상되는데, 이것은 트위터 공간 안에서 구체적인 정책과 공약에 대한 후보자 검증 과정이 아니라 상대 후보의 과거 문제와 연결지어 비판적 내용을 반복함으로써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간다고 말할 수 있겠다.

넷째, 친야권 인사의 큰 영향력으로 인한 이념적 편향성이 심화되었다. 트위터 공간 안에서는 보수 인사들보다는 야권 인사들이 더욱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말이다. 다음 표에서 트위터 내 정치인들의 영향력 순위를 살펴보면 트위터 안에서 친야-반여 성향의 인사들이 더욱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박창문, 조재욱(2013)에서 발췌

 

마지막 다섯째, 자발적 캠페인이 침체되어 있는 것 역시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지난 18대 대선은 2030세대의 투표율이 중요한 변수였고 따라서 그들의 투표율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던 선거였다. 그렇다면 야권 인사들이 투표율을 제고하기 위해 적극적은 투표참여 캠페인을 펼쳤으리란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펴본 결과 투표 이슈 자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큰 이슈로 부각되지 못했다.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는 투표 이슈가 그렇게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논문저자들은 트위터에 열심히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투표를 할 의향을 가진 적극적 투표 참여층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투표 독려 캠페인이 정치적 효능감을 유의미하게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투표 독려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논문 저자들은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18대 대선은 높은 투표율을 보이긴 했지만 트위터에서 형성된 투표 독려 캠페인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한 SNS 상에서 전개된 캠페인 역시 세대별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빼놓아서는 안되겠다. 2040세대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투표참여를 독려하지만, 5060세대는 비교적 쉽게 만질 수 있는 카카오톡을 통해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의 투표를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부터

SNS가 갈수록 활성화되면서 SNS가 일종의 담론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SNS가 일종의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섞인 주장들을 종종 접하다보면 나는 항상 “정말?”이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물론 그런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것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느냐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 전, 모 교수가 던졌던 농담을 떠올리게 된다. “여러분, 세상은 키보드 밖에 있어요.” 우스갯소리이지만 나는 이 말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라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환상도 부지기수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바로 선거나 선거결과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SNS가 가져온 힘을 그렇게 크지 않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2017년 현재에도 과연 SNS가 영향력을 유의미하게 발휘할 수 있을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 위의 현실은 온라인 속 가상에 펼쳐진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온라인의 세계는 언제든 현실을 왜곡할 위험을 안고 있고, 또 그렇게 왜곡된 현실을 마치 실제의 세계처럼 포장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누군가는 SNS를 통한 전자민주주의(?)를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SNS가 실제로 정치적 동원 효과를 가지려면, 정치적 무관심층으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해야 하고 또 그럴만한 유의미한 캠페인이나 기타 유인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무관심층이 SNS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증거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다. 혹시 아는가, 미래에 정말 휴대기기를 활용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정치참여를 활성화할 수 있는 새롭고 혁신적인 계기가 마련될지. 그러나 그것은 다만 희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희망은 차라리 유보하는 게 낫다. 지금의 현실이 어떤지부터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최태준 리뷰어  xowns5186@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진보정당’ 성패는 무엇으로 결정되나?

cm28004267

logofinale

가장 잔인한 곳이 어떤 곳이냐는 질문이 던져지면, 나는 지옥을 고르기보단 차라리 현실 정치무대를 고른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정치는 언제나 결과로 말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 번 실패하면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한 번의 실수 내지 잘못이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 정치의 영역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들이 정당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충분히 분분한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좌우간 정치의 영역이 대단히 혹독한 평가의 장이라는 데에서는 대부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건강한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건강한 정치가 만들어지기 위한 조건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을 때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떤 대답들이 가장 많이 나올까. 나는 개인적으로 ‘강한 진보정당의 성장’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치에서 정당 구조는 반공 이데올로기 위에서 세워진, 대단히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만을 가지는 지역 정당 체제라고 요약된다. 이러한 정당 체제 안에서 동원될 수 있는 갈등은 매우 제한된다. 최장집 선생의 주장에 따라,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란, ‘노동’ ‘노동조합’ ‘노동3권’ 등 노동과 관련한 모든 의제와 텍스트들이 강고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마치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듯한 연상효과를 가짐으로써 억압되어 온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민주화 이후 지난 3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이런 정당 체제가 오래도록 지속되지 못한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2000년 노동자-서민의 계급적 이해를 대표하겠다고 등장한 민주노동당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그 기대와 희망과는 정반대로, 초반에 성장하다가, 급기야 통합진보당으로 개편한 뒤 헌법재판소의 해산 심판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러한 민주노동당의 성장과 실패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를 통해, 2017년 현재 진보정당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정의당은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번 글에서 함께 살펴볼 논문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 교수가 함께 공동으로 연구한 「틈새정당의 전략과 제도화: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연구」(『한국정치학회보』 50(2), 2016)로써 민주노동당이 왜 실패했는지, 또 어떤 요인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가늠해보고 그를 통해 현재적 의미를 찾아볼 것이다.

 

틈새정당 이론
신생 정당들의 역할과 전략

먼저 간략한 개념부터 살펴보자. 틈새정당(Niche Party)이란 기존 정당체제에서 포괄되지 않는 이슈를 바탕으로 유권자를 동원함으로써 성장을 시도하는 신생 정당들을 일컫는다. 메귀드(Meguid 2007)는 틈새정당들이 성장하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다양한 이유를 정당의 전략적 결정과 정당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틀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메귀드의 이론은 단지 정당이 점유하는 이념적 위치(Position)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기하는 정책의 중요성(Salience)과 그 이슈의 소유권(Ownership)까지 포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메귀드는 본인의 이론을 PSO이론이라고 지칭한다.

이 이론의 핵심은 틈새정당의 성공과 실패는 이념적 스펙트럼 상의 좌우 유권자를 선점하고 있는 기존의 정당들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틈새정당의 성패가 갈린다는 것이다. 기존 정당들은 틈새정당이 출현할 경우 그들의 점유율을 늘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그들이 동원하는 표들을 자신들에게 가져오도록 노력할 것이다.

기존 정당들이 틈새정당의 등장에 대응하여 취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틈새정당이 제시하는 이슈를 무시함으로써 그 이슈의 중요성을 떨어뜨려버리는 ‘무시전략(dismissive strategy)’이고, 둘째는 틈새정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념적 위치에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적응전략(accommodative strategy)’과 ‘적대전략(adversarial strategy)’을 취하는 것이다. 적응전략은 틈새정당과 이념적 거리가 가까운 기성정당이 틈새정당이 제시한 이슈를 흡수하면서 이슈의 소유권을 기성정당 쪽으로 가져오는 전략을 말하고, 적대전략은 틈새정당과 반대편에 있는 정당이 최대한 틈새정당의 이슈를 각인시킴으로서 유권자로 하여금 이슈의 소유권이 틈새정당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를 통해 상대편에 있는 기성정당의 지지자들이 틈새정당 쪽으로 이탈하도록 부추기는 전략을 말한다. (논문 132-133 쪽)

이러한 PSO이론은 분명히 틈새정당의 성장과 성공 및 실패에 대해 일관된 분석틀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점은 분명히 있으나 논문의 저자들은 이러한 이론이 틈새정당의 능동적 활동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노동당을 틈새정당이라 할 때, 그들의 성공과 성장에는 분명히 민주노동당 자체의 능동적인 전략과 선택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의 성장은 적극적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건설 운동이 결합된 결과물이며, PSO 이론을 통해 설명하기 어려운 난점이 존재한다. (논문 134쪽)

논문 저자들은 메귀드의 틈새정당 이론은 비판적으로 보며 틈새정당을 수동적 행위자가 아닌 능동적 행위자로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틈새정당이 성공할 수 있는, 즉 득표를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은 중화(Neutralization) 전략과 유인(Inducement) 전략이다.

중화전략이란 틈새정당이 제기하는 이슈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정책적 차별성을 강화함으로써 기성정당이 이슈를 선점하려는 것을 막고 기성정당 지지 유권자들을 틈새정당 지지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반면 유인 전략이란 이념적 지형 반대편에 위치한 기성정당이, 틈새정당이 제기하는 이슈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도록 만듦으로서 이념과 정책상 대비를 선명하게 하도록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요컨대, 중화-유인 전략이란 이슈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그를 통해 정책적 차별성을 드러내는 전략을 말한다.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전략을 제대로 수행했는가? 다음에서 살펴볼 정당의 제도화 수준이 심각하게 낮았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할 수 없었고 또 집행할 수도 없었다.

 

정당의 제도화, 그리고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이 실패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정당의 제도화 수준이 대단히 낮았다는 데 있다. 파네비앙코(Panebianco 1988) 및 랜달과 스바샌드(Randall and Svasand 2002)가 제안한 정당 제도화 수준을 평가하는 네 가지 지표는 다음과 같다. ① 당내 조직적 체계성의 정도 ② 당 지도부의 의사결정 자율성 정도 ③ 구성원 사이에 지향하는 가치의 동질화 정도 ④ 유권자들로부터 얻는 지속적 실체성의 정도가 그것이다.

“높은 제도화 수준을 보이는 틈새정당일수록 선거경쟁에 참여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고 논문저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 정당의 제도화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그 정당의 성패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정당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언제나 선거로 결정지어지기 때문이다.

논문 저자들은 민주노동당의 제도화 수준을 앞서 제시한 네 가지 기준에 따라 비판한다. (1) 당내 조직적 체계성의 정도는 당내 계파 및 정파 갈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2) 당 지도부의 의사결정 자율성 역시 집단지도체제로 변화하면서 극히 취약해졌고 (3)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가치적 동질성이 대단히 극심했으며 (4) 마지막으로 이러한 경향으로 말미암아 유권자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대중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비판의 요점이다.

논문 저자들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상세한 지표들을 제시한다. 일례로 민주노동당이 조직으로서 체계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단지 당내 분열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능력 있는 정당으로서 신뢰를 보일 수 있는지의 여부 역시 중요한 요인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책 개발비는 아래 표에서 보다시피 대단히 낮은 비율을 보이는데, 이는 2005년 당시 한나라당의 정책개발비 비율이 20.6%에 이르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단히 낮은 수치이다.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2016)에서 발췌

또 하나,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민주노동당이 과연 정당으로서 제기한 이슈들을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물은 아래 표에서 보다시피 지지율 하락으로 드러났다.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2016)에서 발췌

 

진보정당의 현재와 미래?
우리 안에 던져졌다는 조건, 거기서부터

민주노동당의 실패는 우리에게 여전히 큰 시사점을 안겨준다. 그것은 단지 한국의 정당 구조 안에서 진보정당이 살아남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충분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어야 함을 말한다. 논문 저자들은 브라질 노동당의 사례를 들며 결론을 짓는다.

논문 리뷰를 끝마치며, 나의 사견을 잠깐 덧붙여보겠다. 나는 거의 습관처럼 ‘능력 있는 정당’에 대해 말하곤 한다. 민주주의는 유능한 정당, 유능한 정부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해결해줄 마법사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해결해줄 유능한 정부와 정당을 우리 손으로 고르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의미가 다소 희석되어 오늘날에는 마치 ‘당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완성이자 실현인 것처럼 주장되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나는 진보정당이 보다 강하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충분히 수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또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민주노동당의 실패에서 우리는 한국 정당 체제의 악랄함(?)과 경직성을 규탄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을 갖춰가도록 역량을 키우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본다. 다양한 정당이 있고, 또 그럴 때에라야 민주주의는 비로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틈새정당이 유의미한 경쟁자로 성장하는 것은 꽤나 가치있고 고무적인 일이다. 거대한 반공보수주의가 비록 여전히 가로막고 있지만, 지난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이러한 정당 구조는 또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상황에서 정의당이 처한 상황이 대단히 유리하고 또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정의당은 그 어떤 때보다 성장의 적기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정의당 내부에서의 잡음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내부의 상황이야 알 길이 없으니 공식적인 언론 보도만을 신뢰할 뿐인데, 여러 가치 의제들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잡음인 것 같다.

대중성을 가지지 못한 정당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앞서 제시했던 정당 제도화의 네 가지 수준 중 마지막, 유권자들 사이에서의 지속적인 실체성은 유권자들이 그 정당을 얼마나 지지하느냐의 여부이다. 대중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은 선거에서 질 수 밖에 없고 또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나는 여전히 아주 미약하나마 희망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 희망이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조금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으로 눈을 돌리자면, 그 희망이 보다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틈새정당의 성장이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희망은 항상 ‘유보적’이다. 진보정당이 성장하여 당당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그 때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최태준 리뷰어  xowns5186@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미지, 정치를 대신하다

image_politics

 

r최초의 이미지 선거라고 일컬어지는 1960년대 케네디와 닉슨의 대통령선거는 정치인에게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포문을 연 선거이자, 정치인은 공약으로만 승부하지 않는다는 첫 사례가 된 선거였다. 케네디의 자신감 넘치는 시선 처리와 활기차고 잘 정돈된 외모, 심지어는 그가 입은 의상까지, 닉슨의 초췌하고 추레한 모습과 비교되면서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후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메이킹은 선거운동의 핵심적인 전략으로 받아들여졌다.

국제대학 조교수 박선영「정치인의 이미지가 유권자의 후보자 선택에 미치는 영향: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과정을 중심으로」(『법학연구』, 16(1), 2016)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정치인의 이미지를 통해 선거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한다.

정치인의 이미지와
적격성의 관계

이 논문에서 필자는 유권자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편견, 즉 ‘후보자의 얼굴’이 그 후보자가 정치적으로 적격한 인물인지 판단하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실험한다. 논문의 필자는 국내의 정치 상황에서 전개되는 논란을 막기 위해 미국의 대통령 예비선거과정을 중심으로 논의를 시도하는데, “무엇보다도 선거 유인물상의 정치인 얼굴에 나타난 이미지로부터 선거 결과를 미리 추론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다.

[su_quote]인간은 모든 대상에 대해 일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인식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대상을 평가하거나 대상에 대한 태도를 형성한다. 심리학은 이를 인지(認知)라고 설명하고 이는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정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후보자 인지는 지지할 후보자를 선택하고 후보자를 평가 및 판단하며, 나아가 지지할 후보자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su_quote]

유권자는 정치인 개인에 대해 알지 못한다. 따라서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정치인 이미지가 정치인의 실체를 대신하게 되며, 이로 인해 실제의 정치인보다 정치인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이다.” 유권자들의 이런 경향을 증명하기 위해 논문의 필자는 “웰링턴(Wellington)의 빅토리아대학, 남(南)호주대학, 웰링턴의 여자대학 그리고 뉴질랜드 고등학교, 마지막으로 미국 오클라호마 중부대학”에서 2007년 5월부터 8월 중순까지 실험참가 학생들에게 후보자들 각자의 사진을 단 한차례만 보여주면서 사전지식이 있는 후보자는 제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사진을 보고 정치인으로서의 적격성 여부를 판단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07년 9월 초 민주당 후보자들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의 인지도를 통한 적격성과 순위 사이에 강력한 연계점”이 발견됐다. 이는 논문의 필자가 참고했던 선행연구에서 유권자들의 적격성에 대한 평가가 선거결과와 정확하게 69퍼센트 일치하는 것으로 예측된 것과 비슷한 결과였다.

이 결과는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기회를 보다 더 증가시키기 위해 적격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후보자를 정당후보자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상업용 물품의 시장지배 전략이나 판매계획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포장이 매출액 달성에 있어서 하나의 변수를 이룬다는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권자들은 신뢰나 믿음을 주는 외모와 차림새로 그의 정치적 적격 능력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좀 더 장기적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 지어버릴 수만도 없다. 유권자들은 분명히 정치인들의 이미지를 통해 적격성 여부를 판단했지만 처음의 판단이 끝까지 지속되지는 않았다. 처음에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던 정치인이라도 유권자들에게 많이 노출되면서 오히려 이미지가 반감되는 경우도 많았고,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선거운동을 계속할 능력, 다시 말해 유권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킬 만한 조직력과 선거자금이 없을 때는 아무리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실제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정치인이라도 유권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선거운동에 더 돈을 많이 쏟아 부은 후보가 자신보다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후보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경우도 있었다.

현혹될 것인가,
통찰할 것인가

결과적으로 선거에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많고, 특정한 기준이 후보자를 당선시킨다고 규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정치인 개인의 이미지가 하나의 공약이며 정당의 얼굴이자 정책이 된다는 점이다. “정치후보자의 이미지는 유권자의 주관적인 평가와 후보자가 전하는 객관적인 메시지(주제, 말씨, 속성, 품질)에 근거하여 유권자가 가지는 후보자에 대한 지각(知覺)이다. 최근 선거에서 당락을 결정짓는 요소는 정책적 이슈가 아니라 유권자에게 비쳐지는 후보자의 이미지”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유권자들이 정치후보자들의 정책이나, 아이디어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이 예측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기준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이때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미디어인데 미디어는 현직 정치인뿐만 아니라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식과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이 미디어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것을 규합하여 한 정치인을 지지하기까지에는 다양한 개인적 이유와 배경이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정치적 속성에서 ‘미디어’와 ‘이미지’는 다소 부정적으로 인식되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통찰하느냐는 유권자들의 몫이다. 정치인의 ‘이미지’는 모두 거짓이며 가식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그 이미지의 전략 안에 이미 정치적 방향성이 제시되어 있다. “이미지 정치는 각 정당이 추구하는 목표와 지향점을 짧은 시간 안에 유권자에게 전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때로는 각 정당이 추구하는 정강 정책의 실상과 동떨어진 이미지로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도구”로 이미지가 활용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정치인의 ‘이미지’를 모두 걷어낼 수도 없고, 그 ‘이미지’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선거 출마 후보자가 선거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미디어 등을 통해 표방하는 ‘이미지 정치’의 실상”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는 이성일 것이다. 정치인의 이미지 안에서 그들의 정치적 방향성을 찾아내느냐, 아니면 그 이미지에 현혹되어 정치인의 실체를 놓치느냐는 너무나 크고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미지에 현혹된 선거의 결과가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으므로.

  •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정치인 이미지 구성 요인과 유권자의 투표 행위」
김재범·최믿음, 2013, 『광고연구』, 98, 154-183.

「유권자의 제3자 효과 지각 연구: 후보자 이미지와 후보 선택에 미치는 미디어 효과를 중심으로」
설진아·김활빈, 2008, 『한국언론정보학보』, 42, 79-106.

최은영 리뷰어  octovember@hanmail.net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