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분배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분배정의,
철학은 시대에 기여할 수 있을까?
분배정의에 관한 오랜 논의가 이어져 오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 분배정의에 대한 구체적인 담론은 아직까지도 선별적 vs 보편적 대립 구도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분배정의에 관한 철학적 담론들이 유수하게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들은 ‘이론’으로서만 다루어질 뿐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실행할만한 지침으로서는 아직도 답보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히려 그간의 정책들 면면을 살펴보면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까지 했다. 더러는 그것은 공허한 이론으로 취급받으며 조롱마저 당하는 듯 하다.
철학은 정말 이 시대에 기여할 수 없을까? 특히, 정치에서 철학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나? 이번에 살펴볼 논문은 정진화 교수의 「존 롤즈(John Rawls)의 분배정의론과 한국적 적용에 대한 연구」(한국정치학회보 50(2), 2016.6. 75-101)로써 존 롤즈가 주창했던 정의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에 어떻게 분배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살펴보려 한다.
정치는 구체적인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철학은 때로는 현실과 유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 없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되는대로 정치를 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철학이 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찾고자 했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철학이 그것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가 나의 관심사 중 하나라고 하겠다. 필자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진 독자라면 아마 본 논문이 꽤 흥미롭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
분배 내지 조정을 위한 권력의 획득과 행사
분배정의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느냐는 논의를 이루어가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것이 있다.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 그것이다. 정치학도인 필자 입장에서야 ‘정치’ 그 자체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일테지만, 동시에 정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 역시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가장 고전적이고 유명한 정의를 따라가보면,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Social Values)’으로 정의된다(D. Easton 1953). 권위있는 정치학자 중 한 사람인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은 희소한 자원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권력이 분배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를 권력투쟁의 장으로 보았다. 이 때 권력이란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특정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정의들이 있지만 대체로 정치에 대한 정의들을 살펴보면 ‘분배’ 내지 ‘조정’, 그리고 그를 위한 ‘권력’의 획득과 그 행사로 요약 가능하다. 요컨대, 정치는 분배에 있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분배함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인 셈이다(과연 이러한 정의가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일단 대답을 유보하자).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간다.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무지의 베일과 분배정의의 원칙
롤스 정의론의 핵심
“사회가 정의롭다고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예를 들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정의로는 사회는 이러한 재화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분배하며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준다. 하지만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기 시작할 때 어려움이 시작된다”(Sandel 2009, 19).
존 롤즈의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롤즈가 무엇을 규명하고자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롤즈는 “정의에 대한 개념이 갖는 뚜렷한 역할은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구체화하고 적절한 분배의 몫을 결정하는 것”(p.78)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적절한 분배의 몫을 결정할 것이냐는 것이겠다.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때 무지의 베일이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최초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가상적 장치로서,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을 가능케 하는 제한조건이다. 이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위치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지위, 권력, 명성, 지능, 신체적 능력 등이 어떠한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원칙을 설계할 수 없으므로 이 때 세워진 정의의 원칙들은 공정하다고 간주할 수 있다.[1]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선택할 원칙은 다음과 같다고 말하였다.
첫 번째 원칙: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유사한 자유체계와 양립하는 가장 광범위하고 동등한 기본적 자유체계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두 번째 원칙: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가지 경우.
- 정의의 저축 원칙과 일치하여 최소수혜자들에게 최대 이익이 될 때
- 공정한 기회균등 조건 하에 모두에게 직책 및 직위가 개방되어 있는 것과 결부될 때 편성될 수 있다(Rawls 1999, 266)
첫번째 원칙은 이른바 ‘자유의 원칙’이라 불리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누리고 향유하는 데 있어 평등함을 강조하는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원칙’으로 분배정의와 관련된 항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a)의 경우 최소수혜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것으로서 ‘차등의 원칙’으로 불리며, (b)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 직위와 직책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무지의 베일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이야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봤을 내용일 것이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현실에서 제도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느냐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롤즈의 정의론에서 핵심적 명제라 할 수 있는 ‘무지의 베일’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상황이며 또 실천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무지의 베일이 가지는 성격에 대해 박효종(1995)은 ‘두터운 베일’과 ‘얇은 베일’을 구분하여 해석하였다. 이것을 잠시 소개하자면 이렇다. 무지의 베일은 공정성과 공평성을 담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사회계약 상황에서 완전무결한 만장일치를 보장한다. 만약 무지의 베일이 개인의 구체적 이해관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두꺼운’ 것이 될 것이지만 베일이 얇아질수록 구체적 이익으로부터 차단되는 정도가 약하고 공정성 또한 담보하기 어려울 것이다(박효종 1995, 432-434)[2]
현실에서 베일의 두께를 두껍게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면 보다 공정한 의사결정을 위한 원초적 입장을 제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러한 장치를 최대한 구현하는 것은 그것이 없는 것보다 더 높은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서 제헌위원회가 만들어져 헌법과 사회체제가 결정되는 것이 공정한 규칙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국가들은 이미 헌법이 제정돼 있고 또한 국가를 이미 형성한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원초적 입장을 적용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상황이라면 헌법 개정 상황일 것이다. 헌법 제정 당시 사회구성원들의 참여와 동의가 부재했던 역사를 들며 논문 저자는 헌법 개정 시 ‘국민숙의위원회(가칭)’와 같은 단계를 마련하고 운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즉 ‘원초적 입장’을 모의적으로나마 구현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한 가지 상황으로 가정할 경우 “최대한 그 사안에 대해 특정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크게 가시화되지 않고 관련 정보들의 노출이 비교적 적은 시기가 바람직할 것”이라고 논문 저자는 주장한다.[3]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분배정의
현대국가는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복지는 현대국가에서 자원을 재분배하는 주요한 정책적 수단이며, 이러한 정책이 얼마나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느냐가 그 국가의 복지 수준을 결정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복지국가 담론은 선별적 vs 보편적 복지 프레임에 머물러 있을 뿐 이것이 진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복지 담론에 롤즈의 분배정의론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위에서의 고찰이 롤즈의 분배정의론에서 핵심인 ‘무지의 베일’을 구현할 수 있는 모의적 상황에 대한 제안이라면 이번 파트에서는 본격적으로 분배정의 실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롤즈의 복지 개념은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조합으로 이해된다. 그의 두번째 원칙 중 ‘차등의 원칙’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최소수혜자들을 대상으로 하며, 그것은 복지의 수혜대상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선별적 복지 개념과 일치한다. 다른 한편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은 복지 서비스의 대상을 제한하지 않고 경제적 기준으로 서비스 대상자를 구분하지 않으므로 보편적 복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4] 이것을 간단한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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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화(2016)에서 발췌 |
한 편, 롤즈의 정부조직 구성도에 비례한 한국의 정부 조직 현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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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화(2016)에서 발췌 |
한국의 정부조직은 롤즈가 제안한 조직구성과 기능에 부합하는 조직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논문의 저자는 분배처의 역할을 담당하는 국세청이 4대 권력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조직이 아니라 기재부 산하로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복지국가가 실현되고 보다 분배정의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분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처가 힘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논문의 저자는, 따라서, 분배처의 기능을 강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부터 롤즈의 분배정의가 실제 제도상으로 어떻게 관철될 수 있는지까지, 꽤 길고 두꺼운 이야기들을 다루었는데 본 글에서 논문이 함의하는 바를 충분하게 검토하지 못하는 점은 필자의 역량부족이라 하겠다.
필자의 부족한 생각이지만, 롤즈의 정치철학으로부터 이것을 어떻게 현실과 접목시킬 것인지, 그리고 철학적 논의가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고민할 때 비로소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길이 열리리라 본다. 기실 이념과 말은 때로는 공허할 수 있지만 현실의 실천은 대단히 구체적이다. 만약 철학적 담론이 단지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논리적 우열의 다툼이라면 그것이 현실과 가지는 관계성에 대해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롤즈는 ‘이상적인’ 정치체계를 고안하기 위해 노력했던 철학자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롤즈의 논의는,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한계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철학을 바탕으로 보다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는 일을 멈춘다면 어떻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본 논문은, 필자가 보기에, 롤즈의 논의를 기계적으로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이 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접맥될 수 있는 철학의 가능성을 탐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읽어보시길 권한다.
[1] 이러한 원초적 입장에 대한 여러 비판 중 대표적인 것은 샌델의 비판인데, 샌델은 롤즈의 원초적 입장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상황이며 실제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라는 의무론적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정진화 2016.6. 79-80)
[2]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리뷰가 소개하는 논문 p.86을 참조하라.
[3] P.89 참조
[4] P.88 참조
최태준 리뷰어 xowns51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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