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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보다 이슬람 금융이 더욱 합리적이다”

islam

logofinale사이드E. Said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나 분석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는 허구적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은 사이드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평등, 정교분리,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후진 사회로 평가되고 있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구분이나 분석 대신 방대한 이슬람 세계를 일원화해 악마화 하던 19세기 오리엔탈리즘이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윤용선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진정한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로 지적되는 타자화를 통한 서구의 자기정당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오리엔트적 대안 모색이 그것이다. 윤 교수는 이러한 전략적 측면을 종교적 경제윤리와 자본주의의 비판적 성찰(『서양사학연구』, 30, 2014)에서 전개해가고 있으며,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는 칼뱅의 경제윤리와 서구에서 낙후와 비효율로 상징되는 이슬람의 경제윤리를 살펴보고, 역으로 자유/자본주의 비판에 있어 이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분석한다.

 

이슬람의 경제윤리

저자는 이제 서구를 비판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안을 제시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즉, 서구와는 다른 합리적 세계가 있다는 주장은 비서구적 가치와 정신을 제시할 때 설득력이 있으며, 그러한 경우에만 옥시덴탈리즘에 매몰되지 않고 생산적인 담론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불합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 저자는 단순한 예를 하나 든다. 은행과 부동산은 대표적인 자본 형태로 대출과 임대를 대가로 이자와 임대료를 취하며, 이는 사업이자 자연스런 이윤추구 행위로 간주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국가가 이익 창출에 반드시 수반되는 손실 위험을 제거해준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해, 은행, 부동산, 사업자는 대출을 매개로 사업에 참여하지만, 이윤은 은행과 부동산에게만 항상 보장되며, 사업자에게는 노력과 행운에 따라 이윤 혹은 손실이 주어진다. 저자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는 자본만을 위한 체제”라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이슬람 금융은 율법에 의거해 이자를 금지하기 때문에 사업에 일정 부분 참여하며 손익 분담을 원칙으로 한다. 사업의 성패와 관계없이 이자 지급을 보장 받는 자본주의 금융과는 대조적이다. 따라서 융자의 기준은 상환능력이 아니라 수익성, 건실성, 경영 능력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자 금지와 리스크 분담을 특성으로 하는 이슬람 채권 수쿠크Sukuk는 현 상태로 보았을 때 자본주의 금융제도에 비해 훨씬 합리적이고 안정적이다. 그런데 수쿠크는 이슬람 율법의 법적 표현인 샤리아에 기초한 것으로, 서구에서 오리엔트의 후진성의 근거로 제시되는 정교일치의 결과물이다.

과거 냉전 시대에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공격할 때 애용한 무기는 계획경제의 비효율성과 저성장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사유재산이나 수익창출을 부정하지 않으며, 다만 수익에 대한 집착이 자본주의에 비해 덜 하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저자는 이슬람 세계의 전반적인 저발전 현상의 원인은 이슬람의 경제윤리나 근본주의가 아니라 국내적으로는 부패한 권위주의적 정권 및 기득권층, 대외적으로는 서구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찾는 게 옳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이슬람의 자선세가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줄인다고 주장한다. 지난한 노동운동과 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한 서유럽 복지국가와 달리, 이슬람은 종교에 기초해 사회복지를 평화적으로 실현했다. 가난한 계층에게 지급될 재원 마련을 위한 자선세 과세는 신의 개입으로 인해 공정하다고 간주된다.

 

자본은 어떻게
등장했나?

그렇다면 자본 중심적인 자본주의 질서는 유럽에서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중세 기독교 역시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이자를 취한다는 이유로 금융업을 금지했다. 이러한 교회가 이데올로기나 정신적 가치에 있어 권위를 상실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등장 이후부터다. 30년 전쟁을 겪은 유럽에게 이제 종교란 갈등만 야기하는 아집에 불과했으며, 계몽 절대군주들은 1648년 종교적 관용과 종교의 자유에 합의했다. 이 사건은 과거 유럽 전체를 하나로 결속시킨 기독교적 가치가 생명을 다했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가치체계가 전면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서 기독교적 경제관도 근본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신분제의 통제적인 규범이나 질서를 타파하고자 했던 새로운 지배계급인 부르주아는 자유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고, 외부의 간섭을 가능한 배제하는 경제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저자의 입장에서 정교분리는 종교의 자유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탐욕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종교적 윤리를 제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측면에서라면 오늘날 샤리아에 근거한 이슬람 경제윤리를 정교일치라는 이유로 후진적이라고 보는 이슬람 비판에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슬람 경제윤리는 비효율적이지만, 합리성이나 윤리적 측면에서는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서구나 오리엔탈리즘이 이슬람 세계에 요구하는 세속화는 일괄적이어서는 안 되고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테면, 여성의 인권이나 동성애의 인정처럼 보편적으로 인정할만한 서구적 가치와, 보편적 현상이기는 하지만 보편적 가치로 인정하기는 곤란한 자본주의적 경제윤리는 엄격히 구분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su_quote]이슬람 금융 하나만으로도 오리엔탈리즘이 고안해 확산시킨 이슬람 이미지를 상당부분 교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서구의 이념과 체제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대안이기를 요구하는 이슬람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의 집요한 이념 공세는 이슬람을 객관화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외부의 시선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의 객관적인 관점을 찾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198쪽)[/su_quote]

저자가 보기에 이슬람은 금융이나 사회보장 제도에서 자유/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기독교의 경제윤리

자본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는 칼뱅은 엄격한 직업관과 실천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이 땅에서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부의 축적에 대해서는 자신의 사회적 지지기반인 부르주아와 입장을 달리했다. 그는 축적된 부는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음을 우려해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를 요구했다. 저자는 칼뱅의 입장이 그의 추종자들이 구축한 자유/자본주의보다 이슬람의 경제 윤리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16세기 말부터 해상무역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 시장의 의미를 깨달은 영국은 경제나 부에 관한 이렇다 할만한 원칙이나 윤리관이 정립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부론』은 영국인과 유럽의 경제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나는 사회의 복지를 위해서 사업을 하는 체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진실로 복지가 이루어진 예를 아직 알지 못한다.”라고 말할 만큼 스미스는 부의 축적 행위 자체가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자유란 부르주아가 세속화를 통해 만들어낸 신의 권위의 대체물이었다. 신의 권위와 자유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는데, 전자가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한다면, 후자는 불완전한 존재의 자유의지를 절대시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다고 보는 천부인권설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신의 권위가 아니라 군주나 국가와 같은 절대 권력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데, 그 절대 권력 또한 불완전한 존재에게 맡겨진다. 저자는 신권이 지배한 중세로 회귀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유의 절대성에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su_quote]자유/자본주의는 다수의 희생을 통해 소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며, 계몽주의의 또 다른 자식인 사회주의의 실패는 인간에게는 여전히 욕망이 이성을 압도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동안 부르주아에 의해 예배당에 유폐된 채 망각된 신의 권위에 주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204쪽)[/su_quote]

“자본주의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강해서 그것의 모순이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약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1990년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자본주의 타도의 주체여야 할 노동자 계급 역시 자본주의의 유혹을 극복하는데 실패했다.” (204쪽)

저자는 종교가 여전히 많은 불합리성과 권위적 요소를 내재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폐기해버린 소중한 여러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본다. 물론 다양한 세계를 협소하고 폐쇄적인 종교적 프리즘으로만 보려는 이슬람 및 기독교 근본주의의 위험성은 간과되어서는 안 되며, 국제정치 질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에서 기독교 복음주의는 실제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세속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세계에도 다양성이 존재하며, 이러한 다양성 중에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에게 있어 이슬람은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성찰하는데 유용한 가치체계이자 담론이다. 즉, 겸손하게 계몽의 불완전성을 인정한다면, 이슬람은 오히려 서구가 자신의 우월성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돌아볼 때 많은 영감을 줄 수도 있으며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유럽의 역사 발전이 진보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데, 저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su_quote]이슬람 금융을 포함해 율법에 기초한 경제 체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많은 난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동반 성장보다 이윤 극대화를 우선시하는 서구 금융 제도는 규모나 자금 동원에 있어 이슬람 은행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 하지만 채무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슬람 은행은 이자금융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문제는 자본의 보호를 자신의 임무로 여기는 국가의 존재이다. 또한 종교적 경제윤리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의 독실한 신앙심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종교를 한낮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하는 공화주의에서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기는 쉽지 않다.[/su_quote]

[su_quote]아무튼 종교적 사유는 인류 탄생부터 존재해왔으며,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일부 계몽주의자에 의해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는 해방의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신앙의 토대인 믿음과 이성 간의 대립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이성이 해결하지 못하는 탐욕을 제어하는 신앙의 순기능마저 부정하고 말았다. 창조론과 초자연적 현상을 말하는 성경을 계몽의 시대에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겠지만, 태초부터 존재한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는 메시지마저 거부한 것은 실수였다. (207-208쪽)[/su_quote]

본 논문은 이슬람에 갖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서 이슬람 경제가 지닌 합리적 측면을 서구의 자유/자본주의의 제어할 수 없는 탐욕과 대비해 설명한다. 또한 칼뱅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윤리가 갖고 있던 나눔과 복지의 요소를 재발견해 현재 무너져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과 영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일단 논문에서 다소 생소한 이슬람의 금융체제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 수 있으며, 이슬람의 믿음이 통념과 다르게 어떻게 논리적이고 끈질긴 지적 사유를 통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슬람이 어째서 서구 기독교와 달리 정교분리 과정을 겪지 않았는지에 관한 역사적 과정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사실 확인을 넘어 서구 유럽이 말하는 진보가 진정 진보인지 또한 자유가 과연 무한긍정 되어야 하는지를 회의하고, 이슬람의 낙후된 여성인권이나 동성애 금지 같은 비합리적 요소를 제외한 금융과 같은 분야에서 종교적 경제가 가진 합리성을 취하는 방식까지 논의를 전개한다. 그러나 저자가 본문에서 몇 차례 말했듯 종교를 다시 공적 영역으로 가져오지 않는 이상 이는 정교가 분리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는 힘든 체계로 보인다. 또한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부분만을 따로 떼어낼 수 없듯 종교 윤리의 긍정적인 부분만 일부 차용이 가능한지 또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저자의 주장이 단순히 종교가 추구하는 공공선과 윤리에 대한 사유를 회복하자는 것인지, 혹은 신의 권위 회복이나 공적 영역으로의 종교진출이라는 적극적인 체제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판단이 모호한 지점이 있다. 후자라면 그에 따른 방법론에 대한 궁금함이 남는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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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경제는 이미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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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아프리카 대륙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에는 대규모 기아나 대학살, 종족이나 종교 분쟁의 어두운 뉴스가 아니다. 아프리카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 밝은 뉴스다. 최근 아프리카 경제는 2000년 이후 경제규모 면에서 무려 3배 이상 성장했다. IMF는 2017년에 세계 20개 고도성장국가 중 아프리카 11개 국가가 포함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2008년 이후 지속된 세계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연 5퍼센트 대의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호영 창원대 교수의 아프리카 경제성장의 특성과 과제(『국제정치연구』, 18(1), 2015)에 따르면 “이것은 아프리카 경제가 경기 불황과 같은 외부 충격에 대한 구조적 탄력성이 과거와 달리 강화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아프리카 국가 중 앙골라, 가나,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모잠비크, 나이지리아, 잠비아 등 많은 국가들의 경제 성장률은 7퍼센트 이상을 기록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세계 경제 성장률 상위 10개국 중 7개국이 아프리카 국가다(에티오피아, 모잠비크, 탄자니아, 가나, 잠비아, DRC9 및 나이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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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아프리카 지역 경제 전망치는 5~6퍼센트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000년 이후 대외 무역규모도 200% 이상 급속도로 증대되었다. 외채규모와 재정적자의 대폭 감소 그리고 1990년대 무려 22%였던 인플레이션률이 지난 10년 동안 약 8%대로 안정화 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고속성장을 이루고 있는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지역은 ‘희망이 없는 대륙’에서 ‘미래의 전망이 가장 밝은 대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그러나 2015년 상반기 이후 아프리카 경제엔 먹구름이 드리웠다. 경제성장치도 형편없이 낮아졌고, 마이너스를 기록한 곳도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일시적 주춤세라는 시각이 많다. 경제 강국들의 경쟁적 진출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 대하여 세계가 주목하는 점은 아프리카 경제성장의 양상이 과거와 달리 폭넓고 다양한 경제적 토대위에서 이루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석유와 광물 및 농산물 등 1차 산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아프리카 경제가 다양한 분야의 아프리카 역내 수요의 증가로 인한 성장이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경제가 높은 성장세를 나타내었던 2000년대의 세계경제는 불황이었던 시기로서 역외 수요 증가에 의한 발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프리카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세를 기록한 2013년에는 아프리카 역내 시장의 급속한 소비증가와 투자환경의 개선 및 민간 투자의 증가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에 대한 해외직접투자FDI의 증가로 인한 민간투자의 활성화는 아프리카 경제성장의 다양성과 포괄적 성장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동인이었다. 대부분의 해외직접투자는 석유 및 광물자원에 집중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서비스와 제조업분야 등 3차 산업에 대한 투자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아프리카 시장에 대한 투자의 증가추세는 단순히 단기 수요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경제의 중장기적 성장 잠재력을 증대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2003~2007년 동안 24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던 석유 및 가스 등 광물자원에 대한 투자 비율이 2013년에는 겨우 5퍼센트에 불과해졌다. 오히려 기술 및 미디어 등 정보통신분야에 대한 투자비율이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것은 2013년에 들어 20퍼센트로 증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동통신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이동통신 보급률이 100퍼센트에 이르는 곳도 있으며 2016년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이동통신 보급률은 전체 인구대비 75퍼센트에 이를 전망이다. 아프리카의 정보통신기술의 보급과 확산은 경제적 파급효과가 매우 커 아프리카 경제구조의 다변화로 인한 경제 성장의 구조적 안정성을 배가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또한 소매 및 소비재 등 유통분야 투자율도 증가하여 2013년에 17퍼센트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금융 분야와 비즈니스 분야에 대한 투자도 각각 15퍼센트와 12퍼센트로 증가하여 아프리카 경제의 다양성과 포괄적 성장이 가능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경제발전이 계속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더 크게 다가온다고 논문은 지적한다. 먼저 민주화를 통한 정치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이 시급하다.

프리덤하우스 민주화비율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49개 국가들 중 20퍼센트에 달하는 10개 국가만이 ‘자유로운Free’ 국가이며 37퍼센트에 달하는 18개 국가들이 ‘부분적으로 자유로운Partly Free’ 국가들이며 무려 43퍼센트에 달하는 21개 국가들은 ‘자유롭지 않은Not Free’ 국가로 평가되었다. 세계투명성기구의 2014년 보고서에 의하면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2014년 부패인지지수CPI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부패인지지수는 33으로 세계평균 43에 비하여 현저히 낮게 나타났다. 이에 비하여 중동 및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보다 조금 높은 38로 나타났으며, 아시아 태평양국가들은 43, 미주대륙 국가들은 45로 평가되었다. EU 및 서유럽국가들은 66으로 가장 높게 나타나 세계에서 가장 청렴한 지역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부패인지지수 50이하 부패한 국가들이 차지하는 비율을 살펴보면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들은 전체 49개 국가 중 92퍼센트에 달하는 45개 국가가 50이하 부패한 국가에 속한다. 단지 보츠와나(63), 카보르데(57), 세이셸(55), 모리셔스(54)만이 50 이상으로 어느 정도 덜 부패한 국가에 속할 정도로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부패지수는 높다.

그 외에도 논문은 효율적 산업정책 수립과 재정 및 부채감소, 아프리카식 새로운 발전모델 개발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아프리카식 발전모델의 필요성은 이미 2011년부터 아프리카 내에서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아프리카식 발전모델로 ‘아프리카자본주의Africapitalism’가 부상하고 있다. 아프리카자본주의는 경제철학의 하나로서 “민간섹터가 주도권을 쥐고 장기 투자를 통하여 경제번영과 사회적 부를 창조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변화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특히 아프리카자본주의는 신자본주의neo-capitalism philosophy와 매우 비슷한 개념으로 자본주의의 창조적 가치분배이론이다.

아프리카자본주의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아프리카의 발전은 아프리카인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기본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자본주의 핵심역할은 민간섹터가 담당한다. 아프리카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아프리카 기업들은 아프리카 지역과 주민들이 원하는 경제적 사회적 요구를 잘 이해하고 이에 적합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이를통하여 사회적 부를 창출하고 경제적 발전을 이끌어 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민간투자의 활성화로 도로, 항만 및 발전소와 같은 핵심 인프라 건설과 고용창출을 도모하고 나아가 아프리카 중산층을 확대하여 선순환적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국제기구의 개발원조 등 아프리카 지원프로그램은 아프리카 민간섹터를 활성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집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주요 핵심섹터에 대하여 국제사회의 장기적 투자가 필수적이다.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경제발전을 통한 아프리카의 사회적 부의 창출은 민간섹터의 핵심적 역할을 통한 경제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아프리카자본주의는 핵심가치인 민간섹터의 주도적 역할을 통한 ‘영리추구’와 ‘사회적 기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이상적인 생각으로 비현실적 순진한 발상으로 평가 절하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자본주의의 실제적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금융 산업에 대한 과감한 규제철폐를 통한 금융 산업 지원정책으로 나이지리아 출신 억만장자 은행가인 토니 엘루멜루Tony Elumelu가 설립한 ‘United Bank for Africa’ 은행 지점이 나이지리아 전역뿐만 아니라 전 아프리카 지역으로 확장하여 수백만의 아프리카인들에게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수단의 모 이브라힘Mo Ibrahim이 설립한 모바일 통신회사 셀텔Celtel은 아직 유선 통신망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수단 국민들에게 모바일 폰과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

결론적으로 아프리카자본주의의 성공여부는 얼마나 많은 민간섹터의 기업이 정부의 지원과 국민적 참여를 통하여 적절한 이윤을 추구하고 또한 사회적 기여를 통한 경제 발전과 사회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느냐에 좌우된다. 즉 아프리카자본주의의 핵심 가치인 ‘아프리카인들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아프리카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의식을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공유하고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논문은 결론짓는다.

강성민 리뷰위원  review@bookp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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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학, 자본주의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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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흔히 회계사는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파수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파수꾼이 감시대상과 함께 자신을 위해서 부정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그를 가진 자들의 편이라고 비난한다. 가깝게는 대우조선에서부터 몇 년 전의 저축은행사태, 더 멀게는 분식회계가 횡횡했던 IMF 이전의 기업들까지 물욕에 찌들어 선을 넘어버린 회계사들은 탐욕의 화신이기도 하다. 그들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서 신성한 파수꾼에서 탐욕의 화신이자 지배계급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 선이 허상이었다면 어떨까? 한형성(이하 필자)의 「비판회계학의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본 쌍용자동차(주) 사례연구」(『마르크스주의 연구』, 9(2), 2012)는 회계 자체가 이미 특정 계급을 위한 것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기능하는 것이라는 점을 쌍용자동차(이하 쌍용차))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회계는
계급투쟁의 장이다

회계는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가 이론의 영역을 계급투쟁의 장으로 규정했던 것에서 회계 또한 벗어날 수 없다. 회계는 “계급투쟁에 따라 ‘구성된 것’”으로 본질적으로 계급 편향적이지만, 수치라는 외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며 “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성한 언어’가 된”다. 이런 중립적인 외양 덕분에 회계는 계급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지배계급의 이해를 객관적인 것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주류 회계학은 이윤, 효율성, 비용절감과 같은 용어들로 이뤄진 담론이며, 이는 애초에 자본주의적 소유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대중들은 비용절감과 효율적인 경영을 위해서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 이에 대해서 비판회계학의 관점은 회계를 이데올로기로 규정한다. 회계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이윤을 위해서 생산이 조직된다는 자본주의의 특수한 논리에 포섭된 주체들이 생산된다. 이는 구체적인 수준에서는 “표준원가회계와 같은 회계절차들을 통해 노동자들의 규율과 통제를 위한 관리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역할”로 나타난다.

따라서 회계라는 담론을 실천하는 회계사와 회계법인들 또한 “계급갈등의 중립지대”에 서있을 수 없다.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다른 지식전문가들, 기업들, 정부와의 ‘불분명한’ 관계들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독점적 기업군이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지는 않지만)도 지적하듯이 동시에 이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일정부분은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회계사와 회계법인이 수행하는 회계 감사는 일정부분 국가와 시장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며, 국가 장치의 보완자로서 역할을 한다.

 

신자유주의적 전환
이후의 회계

‘신자유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전의 국가가 수행하던 공적 영역이 사유화-시장화 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자명한다. 이런 공적인 것의 사적인 것으로 해체는 회계에서도 나타났다. 신자유주의로의 전환 이후 회계 서비스가 충족시켜주던 국가적-사회적 필요는 보다 사적인 필요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산업사회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 국면에서, 회계사와 회계법인들은 치열한 상업적 경쟁을 벌이고 상업적 서비스 제공이 이들의 영업의 주축이 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국가 장치로서의 공공성마저도 상당부분 포기해버렸다. 회계법인은 자본가들의 사적이익을 공적인 것, 중립적인 것으로 포장해내면서, 자본가의 “동맹자 역할”을 해냈다. 치열해진 회계 시장에서의 경쟁에 따라서, 회계 산업은 국제적인 규모의 대형회계법인과 그들과 맴버십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각국의 회계법인들의 독과점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들은 상업적 자문서비스를 통해서 기업의 인수합병을 돕고, 구조조정에 참여하며, 민영화를 부추기는 자본가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만들어진 기업-정부-회계법인 간의 촘촘한 “인적 동맹” 관계는 회계사와 회계법인의 독점적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회계는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전환을 돕는 이데올로기로서도 기능한다.

이런 회계 산업의 동학은 국내 법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회계감사가 국내 회계 법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고, 컨설팅과 같은 상업적 자문 서비스의 비중은 늘어나고 있다. 2007년에 각각 수입 중 41.2%와 37.9%의 비중을 차지했던 회계감사와 상업적 자문 서비스는, 2009년 역전되어 각각 36.2%와 41.5%를 차지하게 되었다. 정부와의 인적 동맹 관계 또한 공고히 나타나는데, 국내 3대 회계법인(삼일, 안진, 삼정)의 공개된 고문들은 대부분 전직 고위 관료들이 차지하고 있다.

 

쌍용차 사태
: 회계는 어떻게 구조조정을 정당화하는가

흔히 ‘쌍용차 사태’라고 불리는 2009년의 파업과 이와 연관된 2005년부터 2011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도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의 회계법인들의 역할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쌍용차의 매각, 법정관리, 파업, 재매각의 일련의 사건들에는 국내 BIG4 회계법인 중 3개가 엮여 있다. 이 과정 중에서 이 논문이 집중하고자 하는 “의문점들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쌍용차의 2008년 매출이 2007년도에 견주어 20% 줄었는데, 이러한 매출하락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둘째, 2008년의 영업손실은 2,274억 원인데, 여기에 영업손실의 2배가 넘는 4,823억 원의 추가 손실이 더해져 당기순손실이 7,097억 원이 된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2,646명의 정리해고안이 포함된 삼정KPMG의 경영자문보고서가 안진회계법인의 2008년 감사보고서에 기초해 작성했다면, 경영자문보고서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다.”

 

ⓒYTN 뉴스

 

회계법인의 감사보고서에는 감사인의 감사의견을 적을 수 있게 되어있다. 이 감사의견은 현재 기업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로 여겨진다. 따라서 쌍용차에 대한 2008년의 감사보고서에 적힌 매출하락에 대한 원인분석은 이듬해 신청된 쌍용차의 법정관리의 원인을 밝히는 중요한 보고서였으며. 이의 내용에 따라서 쌍용차에 대한 앞으로의 조치들이 결정되는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서 안진은 쌍용자동차의 매출하락의 원인이 주주회사인 상하이 기차의 부실한 경영이 아니라 2008년의 금융위기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는 같은 시기 금융위기로 인한 환율상승의 영향으로 가격경쟁력이 높아져서 동종 산업에 종사하는 현대차와 기아차의 매출이 전년 대비 상승했으며, GM대우 또한 매출 하락이 없었다는 점을 무시한다. 즉, 안진의 보고서는 쌍용차 경영진의 경영실패와 대주주인 상하이기차의 계약불이행으로 인한 경쟁력 약화를 외부요인으로 돌려, 쌍용차에서 일어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2008년의 매출액 감소와 함께 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의 근거가 된 당기순손실의 계산 과정 또한 명확치 않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을 강요하거나 세금회피 등을 이유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회계장부상 이익을 줄이기도 한다. 쌍용차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2008년 쌍용차의 영업손실은 2,274 억 원인데, 당기순손실은 7,079억 원이다. 쌍용차의 당기순손실의 증가는 대부분 회사가 가지고 있는 유형의 자산(토지, 건물, 기계, 설비, 재고 등등)에 대한 평가액이 기존보다 5177억 원 줄어들었기 때문, 즉 유형자산 손상차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유형자산 손상차손은 유형자산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기대수입(미래의 경제적 효익)이 줄어들었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100억을 주고 산 고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이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을 통해서 50억 밖에 벌지 못할 것으로 추정되고, 이 공장을 팔아도 50억만 받을 수 있을 때는 사실상 이 공장이 100억원의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50억 원의 가치를 갖기 때문에 50억의 손실을 손상차손으로 장부에 반영해야한다. 쌍용차는 이러한 회계규정을 이용해서, 미래에 자신의 예상 수익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회계장부 상 손실을 부풀렸다. 회계장부에 반영되어야 하는 신차개발의 효과, 한국감정원의 감정평가액 등의 정보는 배제하고, 매출액 하락 경향과 외부의 경제위기 등은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당기순손실의 증가를 근거로 노동자들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을 정당화했다.

쌍용차 구조조정의 실질적인 근거가 된 삼정의 ‘경영정상화방안 검토보고서’에는 2,646명의 정리해고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위에서 말한 안진의 회계보고서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철저히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작성되었으며, 회계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한 보고서를 통해서 경영정상화 방안을 마련하고, 노동자들의 대량해고의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 회계보고서의 분석 안에는 자본가의 이해관계는 반영되어 있을지 몰라도 그 이해관계가 의미하는 사회적 의미-노동자들의 삶, 가족과 지역공동체에 미치는 영향, 사회적 비용 등-는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 삼정의 회계보고서가 아무리 형식적으로 공정한 회계 기법에 근거한 것이더라도 이는 애초에 자본의 편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명확히 드러내지 않은 채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있지만 회계학은 그 자체로 자본가의 의식이 체계적으로 드러나는 담론이기도 하다. 사회적 관계가 그 자체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복잡하고 중층적인 기제들에 의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이 발생할 때, 우리는 이면의 사회적 관계 자체를 볼 수 없기에 표층의 사건들 간의 관계만을 생각한다. 회계에서 사회적으로 가치가 어떻게 생산되며 그를 실제로 생산해내는 관계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지 않고, 오로지 이윤과 비용만을 고려하는 것은 회계 자체가 우리의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회계가 고도로 체계화된 물신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가의 의식을 반영하는 물신주의. 그리고 이는 노동자의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투명하지 않은 사회적 사실들 사이 너머의 사회적 관계는 회계장부의 이면에서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마르크스주의 회계학의 방법론을 통해 본 한국의 회계제도」
한형성, 2017, 『마르크스주의 연구』, 14(1), 120-163.

「회계학연구에서 비판의 의미」
김성웅, 2013, 『국제회계연구』, 51, 449-474.

나성채 리뷰어  ists19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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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시오정리는 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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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분석함에 있어서 특히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즉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이윤율이 하락할 수 있다는 것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있어서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신기술을 도입하는 자본가가 이윤율을 하락하는 기술을 도입할 리 없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실제로 오키시오에 의해 수리적으로 논의되어,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이는 이른바 오키시오 정리라고 불리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su_quote]구 균형가격으로 계산할 때 높은 이윤율을 얻는 신기술의 도입은, 실질임금바스켓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한, 새로운 균형가격 하에서 이윤율을 상승시킨다. (Nakatani and Hagiwara, 1997)[/su_quote]

그러나 이러한 오키시오정리는 오키시오의 마지막 논문(Okishio, 2000)에서 두가지 제한적인 가정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1) 실질임금률이 일정하다는 것, (2) 새로운 생산가격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마지막 논문은 오키시오정리를 오키시오 자신이 제한적으로만 성립될 뿐이라며 비판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류동민은  「오키시오정리에 관한 연구」(『경영경제연구』, 29(2), 2006)에서 오키시오의 마지막 논문(Okishio, 2000)에서 밝히고 있는 오키시오정리의 가정에 주목한다. 이에 따라 오키시오 정리가 무엇인지 확인하며, 오키시오의 연구가 정합적임을 밝힌다.

 

반사실적 명제로서의
오키시오정리

앞서 지적하였듯이 오키시오정리는 흔히 마르크스의 이윤율저하설을 비판하는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오키시오정리에서 이윤율 저하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간과하는 것이다. 오키시오정리에 따르면 실질임금률의 상승은 이윤율을 저하시킬 수 있다. 앞선 논의는 실질임금이 고정일 때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임금률이 일정하다는 전제는 오히려 반사실적(counterfactual) 상황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키시오정리에서 말하고 있는 대우명제는 “만약 장기적으로 이윤율이 저하한다면, 그것은 실질임금률의 상승 때문일 수밖에 없다”이다.

그렇다면 실질임금률이 어떠한 동태적 관계를 가지고 변화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Laibman(1996)은 실질임금률의 변화율이 노동수요의 변화율과 노동공급의 변화율 간의 차이와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즉 이들의 부호는 같다. 노동수요변화율이 노동공급변화율 보다 크면 실질임금률이 상승하는 구조인 것이다. 한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증가시키는 편향적 기술변화는 노동수요를 줄일 것이므로 실질임금률의 변화율은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즉 기술이 진보가 진행되는데 실질임금률이 일정하다는 가정은 그 자체로 반사실적 상황인 것이다.

 

오키시오정리에 관한
가지 상이한 기준

Roemer(1981), Foley(1986), Laibman(1997)은 실질임금률이 일정하다는 가정을 임금몫이 일정하다는 가정으로 대체하여, 비용절감적인 기술의 도입이 필연적으로 이윤율을 경향적으로 저하시킨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단일재 모형을 기초로 표현하면 <표1>처럼 나타낼 수 있다.

K, W, P, Y는 각각 실물자본스톡, 임금, 이윤, 순생산물이다. 단 여기서 K/Y는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대리변수이다. ‘OT’는 오키시오 정리(Okishio Theorem; OT)의 상황을 나타내며, ‘Roemer 등’은 가정을 수정한 Roemer(1981), Foley(1986), Laibman(1997)에서의 상황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실질임금일정을 가정하는 오키시오의 기준과 임금몫일정을 가정하는 Roemer(1981), Foley(1986), Laibman(1997)의 기준, 두 가지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다. Foley(1986)는 기술변화가 이윤율을 하락할지 아닐지는 선험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제기한다. 또한 ‘신해석’의 맥락에서 화폐임금과 “화폐가치”의 곱으로 정의되는 노동력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기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화폐가치가 일정하다는 주장도 제한적이거나 자의적일 수 있다. 먼저 오키시오학파는 실질임금률이 일정하다는 가정을 “노동자들의 효용수준이 저하하지 않는 한”이라는 것으로 보다 완화한다. 또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 화폐임금이 일정할지라도, 화폐가치는 변동하게 된다. 즉, 혁신의 결과로 화폐가치가 감소한다면, 화폐임금이 일정하더라도 노동력가치는 감소할 것이고, 따라서 이윤율은 상승한다.

Laibman(1997)은 이 새로운 조건이 “계급투쟁의 중립성” 조건으로 해석한다. 즉, 기술변화과정에서 계급 간 역관계에 변화가 없다면 임금분배몫도 일정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불합리한 측면이 존재한다. 이 문제는 일정한 임금몫과 경쟁적 노동시장의 가정이 양립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즉, 특정 부문의 임금몫이 다른 부문에 비해 하락한다면, 해당 부문의 노동자들은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노력수준을 줄이거나 다른 부문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착취율이 하락하고, 이는 자본가의 반대작용을 이끌어낼 것이다.

 

오키시오정리에의
경쟁균형과정 도입

오키시오정리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은 Fine(1982)이다. Fine(1982)는 기술변화를 낳는 과정이 균형의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균형이 결코 달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술변화의 전후를 비교하는 비교정학분석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오키시오의 마지막 논문(Okishio, 2000)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오키시오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특정한 파라미터 값과 초기조건 하에서는 자본간의 경쟁이 이윤을 소멸시킬 수도 있음을 보인다. 그의 시뮬레이션모형의 핵심은, 기술변화가 없는 경우에조차, 자본이동과 노동시장 사이의 상호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시뮬레이션은 전통적인 Nikaido(1985)의 안정성 조건이 만족하는지를 살펴본다. Nikaido의 안정성 조건은 소비재부문의 유기적 구성이 자본재부문의 유기적 구성보다 크다는 것인데, 시뮬레이션 결과 두 부문의 이윤율이 0으로 수렴하는 것으로 보아, 자본의 유기적 구성 간 격차가 해소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부문별 이윤율이 0에 수렴한다는 사실은 Nikaido의 조건이 생산가격의 성립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래의 시뮬레이션은 동일한 가정 하에서 화폐임금과 실질임금이 수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앞서 살펴본 실질임금률의 불변 가정과 화폐임금몫의 불변 가정이 동태적 관계 속에서 서로 수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기술변화와 노동시장 간의 상호작용에 경쟁과정이 도입된다면, 오키시오의 분석틀이 일관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키시오의 결론과
동태적 함의

오키시오정리는 흔히 마르크스의 이윤율저하설을 비판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되어왔다. 그러나 이 정리는 반사실적 상황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실질임금이 일정하다고 가정하는 정태적 상황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노동시장과 기술변화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동태적 관계를 도입해야만 한다. 한편, 실질임금률이 일정해야 한다는 반사실적 가정은 임금몫의 불변이라는 수정된 가정과 상충되는데, 서로 상충되는 여러가지 기준들도 역시 동태적 관계를 고려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것이었다. 류동민(2006)에 따르면, 오키시오의 마지막 논문(Okishio, 2000)은 오키시오정리라고 불리는 그의 초창기 작업을 일부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이와 같은 동태적 관계를 고려함으로써 일관적임을 지적한다.

또한 한편으로 여기서 살펴본 오키시오의 연구는 Dumenil-Levy(1993)의 교차이원적 동학(cross-dual dynamics) 개념과 유사하다는 점 또한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점은 오키시오정리가 가정하고 있는 두 가지 제한적인 가정이 오키시오정리가 가지는 의미를 반사실적 명제로 축소시켜버리지만, 또 동시에 경쟁동학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Dumenil-Levy(1993)의 교차이원적 동학과 같이 마르크스경제학의 동학적 이론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현대자본주의의 동학과 오키시오 정리: 브레너 논쟁을 중심으로」
류동민, 2004, 『마르크스주의 연구』, 1(2), 244-265.

「한국의 잉여가치율 추이: 1993~2010」
유철수, 2012, 『마르크스주의 연구』, 9(4), 134-172.

박알림 리뷰어  allimp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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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주체로서의 ‘대중’의 출현과 자본주의

madame-liberta

logofinale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대중’은 어떻게 의미규정 되어야 할까. 교육수준의 향상으로 소위 인텔리로 분류되는 지식인 집단이 더 이상 대중을 계몽시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어주는 기능을 전담할 수 없게 된 지금, ‘대중’을 어느 곳에 위치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계속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대중성’이라는 개념이 처음 담론의 장으로 나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이다. 대중성 담론은 대개 한국 전쟁 이후 시장경제의 유입에 따른 소비현상이 문화자본을 향유하는 ‘대중’의 출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는데, 이에 따라 대중성에 대한 논의는 거의 언제나 자본주의 체제나 새로운 매체의 등장에 따른 집단적인 ‘반응’으로 읽혀왔다.

손혜민의 「자본의 순환, 문학의 교환」(『상허학보』, 45, 2015)는 50년대에 출현한 “대중적 감수성”을 ‘정치적’인 맥락에서 읽을 것을 제안한 글이다. 필자는 50년대 대중성 담론의 새로운 면―특히 정치성―을 지적하며, “새로운 주체로서 ‘대중’의 표상, 그리고 실재하는 대중의 경험과 욕망이 놓인 지형도”를 그리고자 한다.

‘도시대중’의 출현과
‘민족성’ 탐색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이라는 시대적 격변을 경험한 이후 농지개혁이라는 제도의 도입에 따라 “대규모의 인구이동”, “신분제 유제의 해체”가 이루어지며, 같은 시기 ‘전후 헌법’을 통한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으로 ‘신흥 자본가’가 등장한 격변의 시기를 맞이한다. 또한 전쟁이라는 실존에의 체험은 “‘죽음’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평등주의’를 확산시키는데 일조하였으며, 이 두 가지는 서로를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즉, “‘수평성’과 ‘평등주의’에 대한 믿음은 계급/계층 상승에 대한 치열한 경쟁으로 이어지면서, 시장자본주의적 발전의 잠재력으로 발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대중성’이 출현하게 된다. 소위 대중적 풍속을 가져온 것은 ‘문화’를 소비하는 도시거주민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시에 살며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고, 따라서 이 시기 ‘대중성’은 자본주의와 매우 유착된 양상을 보인다. 임화는 일찍이 1940년에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로서 대중소설의 의의”를 밝힌 바 있는데, 이처럼 임화를 위시한 KAPF진영들에게 ‘본격소설’과 구분되는 ‘대중소설’의 출현은 ‘자본’이라는 측면에서 일련의 “패배감”과 “위기의식”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5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대중성’이 보다 적극적으로 ‘문학에 대한 위기’로 읽히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있는 작품이 바로 신문소설이며 그 중에서도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들 수 있다. 백철은 이에 대해 “지적 비판수준의 저하성”, “아메리카니즘에의 경박한 모방적 유행성”이라는 말로 폄하하기도 하였다. ‘신문’이 당시 “문단을 재편하는 새로운 매체 권력으로 부상”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신문’에 연재되는 소설을 흥미본위의 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은 몹시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김말봉이나 조흔파 등 소위 ‘대중작가’들이 ‘대중성’을 문학의 한 요소로 주장하는 논의들을 펼쳤고, 이에 대중소설의 의의가 수면위로 부상하기도 했다.

자유부인, 1956

 

이 시기 김동리는 ‘대중소설론’이라는 글을 통해 대중성의 ‘재미’라는 요소가 본격소설에도 필요한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여전히 ‘통속소설’에 대한 ‘본격소설’의 우위성을 전제하며 ‘엘리트주의적 예술론’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동리를 비롯한 문단에서의 ‘대중성’ 논의는 ‘문학’의 본질은 무엇이며 또한 ‘문학자’의 자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 속에서 ‘본격소설’과 구분되는 ‘대중소설’은 “타자화도 동일화도 불가능한 무정형의 타자”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동시에 문학에서의 (대중성과 구분되는)예술성 역시 “선험적인 당위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빈 기표”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문학에서 이러한 “빈 기표”는 언제나 ‘민족성’의 이념으로 부축되는 것이었다.

[su_quote]대중성과 예술성을 마주 세우고, 예술성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거듭 실패한다. 주지하다시피, 대중성에 기입된 자본주의 체제와 예술의 상품화는 이미 예술이 존재하는 근본 조건으로서 예술성의 내부에 틈입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논의의 문제의식을 충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정 수립 이후 시행된 무차별적 전향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상 검증의 공포가 야기한 담론 공간의 협애화를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자본주의적 상상 및 기획불가능한 곳에서, ‘대중성’이 불러온 위기의식은, 곧 자본주의 체제 아래 예술의 불가능성을 고민하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다. (60페이지)[/su_quote]

정치 주체로서의
‘대중’

50년대 ‘대중성’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은 이를테면, ‘신세대’, ‘현세에 사는 대중’, ‘범위가 넓어진 문학 독자’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공유하고 있는 지점은, 그것이 “현대문학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문단은 “독자층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독자의 확보가 어려워진 기묘한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식은 영화의 등장과 더불어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외국영화”라는 새로운 문화자본은 대중들을 시공간적 제약을 벗어난 ‘보편’의 장으로 이끌었는데, 이로 인해 ‘대중’들이 “근대의 시차도, 지리적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 보편에 살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즈음 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논의 그리고 번역을 통한 국제시장 진출에 대한 논의가 들끓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세계주의 아래 ‘국민문학’을 고민하는 보편-특수에 대한 감각”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발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특별히 백철의 논의에 주목하며 ‘문학성’과 ‘예술성’이 배제된 ‘대중성’에 대한 논의의 흐름을 환기시킨다. 백철은 문학계 내부의 주장과 같이 새로운 매체(영상)에 따른 문학의 위기를 진단하였지만, 그는 엘리트주의의 이분법(‘제한된 유식층’과 ‘지식수준이 높지 않은 다수의 독자’)을 해체하며, “다수의 지적인 독자 대중의 존재”를 읽어낸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는 ‘대중’을 “민주주의적인 역사에 계열하고 있는” “역사적 주체”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대중’의 조건에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민주주의’를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며, 이를 1960년대 4.19혁명이 보여준 “대중의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흐름과의 연결고리에 주목한다.

[su_quote]물론 이것은 소비대중에서 ‘청년세대’의 ‘저항성’ 또는 ‘전복성’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대중’이라는 무형질의 관념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가지 체제의 교섭을 통해 정치적 상상력을 얻게 되는 일련의 흐름들을 살펴야, 1960년대의 대중과 청년세대의 등장을 연속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정치적 자유를 상상케 했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거대한 문화자본으로 이루어진 시장 아래 운집하는 무형질의 ‘소비대중’을 상상케 했던 것이다. (66-67페이지)[/su_quote]

본문은 비록 50년대의 소비대중과 60년대의 정치 주체로서의 청년세대를 연속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만, 이는 50년대 자본주의 체제 속 ‘대중성’이 세계화 그리고 민족성이라는 이념과 맥락이 닿아있는 지점을 더욱 세세하게 독해할 수 있는 작업의 밑그림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50년대 문학의 장에서 ‘이미’ 소비대중의 정치적 가능성이 ‘예고’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60년대의 ‘시민성’과 ‘민주주의’를 독해함에 있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지점임에 틀림없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1960~70년대 한국의 대중사회화와 대중문화의 정치적 의미」
송은영, 2011, 『상허학보』, 32, 187-226.

「한국사회의 대중과 새로운 정치주체의 형성」
김정한, 2014, 『황해문화』, 85, 86-100.

이단비 리뷰어  ddanddanbi6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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