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보다 이슬람 금융이 더욱 합리적이다”

사이드E. Said는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객관적 서술이나 분석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는 허구적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은 사이드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평등, 정교분리,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후진 사회로 평가되고 있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구분이나 분석 대신 방대한 이슬람 세계를 일원화해 악마화 하던 19세기 오리엔탈리즘이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윤용선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진정한 오리엔탈리즘의 극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로 지적되는 타자화를 통한 서구의 자기정당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오리엔트적 대안 모색이 그것이다. 윤 교수는 이러한 전략적 측면을 「종교적 경제윤리와 자본주의의 비판적 성찰」(『서양사학연구』, 30, 2014)에서 전개해가고 있으며,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는 칼뱅의 경제윤리와 서구에서 낙후와 비효율로 상징되는 이슬람의 경제윤리를 살펴보고, 역으로 자유/자본주의 비판에 있어 이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분석한다.
이슬람의 경제윤리
저자는 이제 서구를 비판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안을 제시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즉, 서구와는 다른 합리적 세계가 있다는 주장은 비서구적 가치와 정신을 제시할 때 설득력이 있으며, 그러한 경우에만 옥시덴탈리즘에 매몰되지 않고 생산적인 담론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불합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 저자는 단순한 예를 하나 든다. 은행과 부동산은 대표적인 자본 형태로 대출과 임대를 대가로 이자와 임대료를 취하며, 이는 사업이자 자연스런 이윤추구 행위로 간주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국가가 이익 창출에 반드시 수반되는 손실 위험을 제거해준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해, 은행, 부동산, 사업자는 대출을 매개로 사업에 참여하지만, 이윤은 은행과 부동산에게만 항상 보장되며, 사업자에게는 노력과 행운에 따라 이윤 혹은 손실이 주어진다. 저자는 이를 두고 “자본주의는 자본만을 위한 체제”라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이슬람 금융은 율법에 의거해 이자를 금지하기 때문에 사업에 일정 부분 참여하며 손익 분담을 원칙으로 한다. 사업의 성패와 관계없이 이자 지급을 보장 받는 자본주의 금융과는 대조적이다. 따라서 융자의 기준은 상환능력이 아니라 수익성, 건실성, 경영 능력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자 금지와 리스크 분담을 특성으로 하는 이슬람 채권 수쿠크Sukuk는 현 상태로 보았을 때 자본주의 금융제도에 비해 훨씬 합리적이고 안정적이다. 그런데 수쿠크는 이슬람 율법의 법적 표현인 샤리아에 기초한 것으로, 서구에서 오리엔트의 후진성의 근거로 제시되는 정교일치의 결과물이다.
과거 냉전 시대에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공격할 때 애용한 무기는 계획경제의 비효율성과 저성장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사유재산이나 수익창출을 부정하지 않으며, 다만 수익에 대한 집착이 자본주의에 비해 덜 하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저자는 이슬람 세계의 전반적인 저발전 현상의 원인은 이슬람의 경제윤리나 근본주의가 아니라 국내적으로는 부패한 권위주의적 정권 및 기득권층, 대외적으로는 서구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찾는 게 옳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이슬람의 자선세가 ‘비효율적’일 수 있지만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줄인다고 주장한다. 지난한 노동운동과 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한 서유럽 복지국가와 달리, 이슬람은 종교에 기초해 사회복지를 평화적으로 실현했다. 가난한 계층에게 지급될 재원 마련을 위한 자선세 과세는 신의 개입으로 인해 공정하다고 간주된다.
자본은 어떻게
등장했나?
그렇다면 자본 중심적인 자본주의 질서는 유럽에서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중세 기독교 역시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이자를 취한다는 이유로 금융업을 금지했다. 이러한 교회가 이데올로기나 정신적 가치에 있어 권위를 상실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등장 이후부터다. 30년 전쟁을 겪은 유럽에게 이제 종교란 갈등만 야기하는 아집에 불과했으며, 계몽 절대군주들은 1648년 종교적 관용과 종교의 자유에 합의했다. 이 사건은 과거 유럽 전체를 하나로 결속시킨 기독교적 가치가 생명을 다했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가치체계가 전면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서 기독교적 경제관도 근본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다.
신분제의 통제적인 규범이나 질서를 타파하고자 했던 새로운 지배계급인 부르주아는 자유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고, 외부의 간섭을 가능한 배제하는 경제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저자의 입장에서 정교분리는 종교의 자유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탐욕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종교적 윤리를 제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측면에서라면 오늘날 샤리아에 근거한 이슬람 경제윤리를 정교일치라는 이유로 후진적이라고 보는 이슬람 비판에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슬람 경제윤리는 비효율적이지만, 합리성이나 윤리적 측면에서는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서구나 오리엔탈리즘이 이슬람 세계에 요구하는 세속화는 일괄적이어서는 안 되고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테면, 여성의 인권이나 동성애의 인정처럼 보편적으로 인정할만한 서구적 가치와, 보편적 현상이기는 하지만 보편적 가치로 인정하기는 곤란한 자본주의적 경제윤리는 엄격히 구분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su_quote]이슬람 금융 하나만으로도 오리엔탈리즘이 고안해 확산시킨 이슬람 이미지를 상당부분 교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서구의 이념과 체제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대안이기를 요구하는 이슬람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의 집요한 이념 공세는 이슬람을 객관화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외부의 시선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의 객관적인 관점을 찾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198쪽)[/su_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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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보기에 이슬람은 금융이나 사회보장 제도에서 자유/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
기독교의 경제윤리
자본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는 칼뱅은 엄격한 직업관과 실천이 하나님의 위대함을 이 땅에서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부의 축적에 대해서는 자신의 사회적 지지기반인 부르주아와 입장을 달리했다. 그는 축적된 부는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음을 우려해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를 요구했다. 저자는 칼뱅의 입장이 그의 추종자들이 구축한 자유/자본주의보다 이슬람의 경제 윤리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16세기 말부터 해상무역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 시장의 의미를 깨달은 영국은 경제나 부에 관한 이렇다 할만한 원칙이나 윤리관이 정립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부론』은 영국인과 유럽의 경제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나는 사회의 복지를 위해서 사업을 하는 체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진실로 복지가 이루어진 예를 아직 알지 못한다.”라고 말할 만큼 스미스는 부의 축적 행위 자체가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자유란 부르주아가 세속화를 통해 만들어낸 신의 권위의 대체물이었다. 신의 권위와 자유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는데, 전자가 인간의 불완전성을 전제한다면, 후자는 불완전한 존재의 자유의지를 절대시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다고 보는 천부인권설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신의 권위가 아니라 군주나 국가와 같은 절대 권력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데, 그 절대 권력 또한 불완전한 존재에게 맡겨진다. 저자는 신권이 지배한 중세로 회귀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자유의 절대성에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su_quote]자유/자본주의는 다수의 희생을 통해 소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며, 계몽주의의 또 다른 자식인 사회주의의 실패는 인간에게는 여전히 욕망이 이성을 압도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동안 부르주아에 의해 예배당에 유폐된 채 망각된 신의 권위에 주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204쪽)[/su_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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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생명력은 생각보다 강해서 그것의 모순이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약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1990년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자본주의 타도의 주체여야 할 노동자 계급 역시 자본주의의 유혹을 극복하는데 실패했다.” (204쪽) |
저자는 종교가 여전히 많은 불합리성과 권위적 요소를 내재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폐기해버린 소중한 여러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본다. 물론 다양한 세계를 협소하고 폐쇄적인 종교적 프리즘으로만 보려는 이슬람 및 기독교 근본주의의 위험성은 간과되어서는 안 되며, 국제정치 질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에서 기독교 복음주의는 실제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세속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세계에도 다양성이 존재하며, 이러한 다양성 중에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에게 있어 이슬람은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성찰하는데 유용한 가치체계이자 담론이다. 즉, 겸손하게 계몽의 불완전성을 인정한다면, 이슬람은 오히려 서구가 자신의 우월성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돌아볼 때 많은 영감을 줄 수도 있으며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유럽의 역사 발전이 진보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데, 저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su_quote]이슬람 금융을 포함해 율법에 기초한 경제 체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많은 난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동반 성장보다 이윤 극대화를 우선시하는 서구 금융 제도는 규모나 자금 동원에 있어 이슬람 은행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 하지만 채무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슬람 은행은 이자금융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문제는 자본의 보호를 자신의 임무로 여기는 국가의 존재이다. 또한 종교적 경제윤리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의 독실한 신앙심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종교를 한낮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하는 공화주의에서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기는 쉽지 않다.[/su_quote]
[su_quote]아무튼 종교적 사유는 인류 탄생부터 존재해왔으며,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일부 계몽주의자에 의해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계몽주의는 해방의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신앙의 토대인 믿음과 이성 간의 대립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이성이 해결하지 못하는 탐욕을 제어하는 신앙의 순기능마저 부정하고 말았다. 창조론과 초자연적 현상을 말하는 성경을 계몽의 시대에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겠지만, 태초부터 존재한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는 메시지마저 거부한 것은 실수였다. (207-208쪽)[/su_quote]
본 논문은 이슬람에 갖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서 이슬람 경제가 지닌 합리적 측면을 서구의 자유/자본주의의 제어할 수 없는 탐욕과 대비해 설명한다. 또한 칼뱅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윤리가 갖고 있던 나눔과 복지의 요소를 재발견해 현재 무너져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과 영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일단 논문에서 다소 생소한 이슬람의 금융체제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 수 있으며, 이슬람의 믿음이 통념과 다르게 어떻게 논리적이고 끈질긴 지적 사유를 통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슬람이 어째서 서구 기독교와 달리 정교분리 과정을 겪지 않았는지에 관한 역사적 과정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사실 확인을 넘어 서구 유럽이 말하는 진보가 진정 진보인지 또한 자유가 과연 무한긍정 되어야 하는지를 회의하고, 이슬람의 낙후된 여성인권이나 동성애 금지 같은 비합리적 요소를 제외한 금융과 같은 분야에서 종교적 경제가 가진 합리성을 취하는 방식까지 논의를 전개한다. 그러나 저자가 본문에서 몇 차례 말했듯 종교를 다시 공적 영역으로 가져오지 않는 이상 이는 정교가 분리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는 힘든 체계로 보인다. 또한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부분만을 따로 떼어낼 수 없듯 종교 윤리의 긍정적인 부분만 일부 차용이 가능한지 또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저자의 주장이 단순히 종교가 추구하는 공공선과 윤리에 대한 사유를 회복하자는 것인지, 혹은 신의 권위 회복이나 공적 영역으로의 종교진출이라는 적극적인 체제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판단이 모호한 지점이 있다. 후자라면 그에 따른 방법론에 대한 궁금함이 남는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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