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소송, 폐암의 원인규명 가능할까?

오늘날 사람들은 담배와 질병의 상관 관계를 공공연한 사실로 인지하고 있지만 법정이 이 관계를 인정해 손해배상을 판결한 사례는 여전히 전무하다. 누군가 걸린 폐암의 원인이 흡연으로 인한 결과임을 어떻게 입증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어떤 과학기술적, 법적 도구들이 사용되고 있는가? 박진영, 이두갑은 논문 「한국 담배소송에서의 위험과 책임: 역학과 후기 근대적 인과」 (『과학기술학연구』 , 15(2), 2015)에서 인과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전문지식 중 하나로 역할하는 ‘역학’이 미국에서의 담배 소송에서 어떻게 자리잡는지, 그에 기반하여 한국에서 발생한 담배소송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를 분석하여 법과 과학기술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담배라는 제조물이 어떻게 오랜 기간 동안 법적 책임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후기 근대적 위험 사회에서 법과 과학기술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함의를 줄 수 있다.” (231쪽)
1999년 제기된 한국 담배소송에 대한 평가는 2014년 대법원이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는 원고 측의 패소 사실에만 주목하여 그 의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에 따르면 오늘날의 사회는 거대 기술 시스템들과 신기술이 지닌 잠재적 위험의 규모와 정도를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20세기 후반 이후의 사회는 후기 근대적(late modern) 위험을 관리하고 대응해야 하는 ‘위험사회(risk society)’인 것이다. 논문의 필자에 따르면 담배 소송은 이처럼 여러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후기 근대적 위험 사회 내 과학기술과 법의 영역에서 ‘인과관계’가 재정의되는 맥락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미국 사례와 한국 담배소송의 여러 쟁점들을 분석한 이 논문은 한국에서의 소송이 “후기 근대적 위험에 대응하고자 나타났던 여러 과학기술적, 법적 도구들을 전략적으로 사용해서 흡연과 일부 폐암의 인과관계를 확증한 주요한 법적 판단을 이끌어내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주장한다. (253쪽)
역학적 증거에 대한 법적 인정:
미국의 담배 소송 사례
20세기 초반 이후 법은 원인이 되는 행위자와 이 행위자의 어떤 구체적인 인과관계의 연쇄가 피해를 낳았는지 구체적으로 규명할 것을 요구해왔다. 이는 마치 특정 질병이 발병했을 때 어떤 바이러스가 어떤 구체적인 경로를 통해 환자에게 도달했는지를 추적하고 밝히는 질병의 역학 관계를 밝히는 과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암 또는 공해 문제과 같이 원인이 하나로 환원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인과관계를 한 개인이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수의 피해자들이 확률적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집단 소송이 등장하기도 한다. 1980년대 이르면 역학은 과학기술과 법 영역에서 환경 문제, 대량 제조물과 같은 후기 근대적 위험과 관련한 소송에서 새로운 인과관계를 확립시킬 수 있는 전문적 지식으로 자리잡는다.
“역학은 1990년에 이르면 담배소송에서도 환경, 공해, 다른 제조물 소송에서와 같이 과학기술적 증거와 이를 통한 법적 책임을 묻는 인과관계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적 지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238쪽)
역학의 역사에서 흡연이 폐암의 중요한 원인임을 입증한 연구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역학 연구에 근거하여 “1964년 미국정부는 흡연과 폐암 간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기념비적인 보건총감 흡연과 건강 보고서를 출판”하였고, 1990년에는 최초로 흡연이 원고의 소세포암 발병의 주된 원인임을 인정, 담배회사에 40만 달러의 배상을 판결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 법원과 배심원이 담배 소송에서 역학적 증거를 과학기술적 인과관계의 법적 책임 규명에 사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합의가 형성되는 과정이었다. 미국에서 확립된 법정 모델은 이후 나올 한국의 담배 소송의 전개 과정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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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과 흡연의 상관관계 연구 그래프 (출처: 위키피디아) |
한국 담배 소송의 출발: 흡연과 폐암 간의 역학적 인과관계 인정
개인의 개별적 인과관계 입증을 위한 기반 형성
1999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담배소송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귀국한 배금자 변호사는 한국금연운동협의회와 함께 폐암과 후두암에 걸린 흡연 피해자 6명과 그 가족을 포함한 약 30명을 원고로 선정, 한국담배인삼공사(지금의 KT&G)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필자는 이 소송이 1심에서 3심까지 이어지는 각 판결 과정에서 “어떻게 역학과 질병의 정의, 그리고 법적 책임의 규명에 대한 후기 근대적 이해들이 전략적으로 사용되며 새로운 법적 인과관계에 대한 틀이 마련되었는지를 보”이고, “후기 근대적 위험에 대한 과학기술적 원인 규명과 법적 책임에 대한 새로운 해석틀이 등장했음을 보”이려 한다. (232, 239쪽)
한국 담배소송에서 주목해야 할 주요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첫 번째는 “담배의 결함 또는 흡연과 폐암 발병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가 인정되는지의 여부”, 두 번째 쟁점은 “이 사건의 흡연자들의 폐암 발병이 흡연으로 인한 것임을 ‘개별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 마지막 세 번째 쟁점은 “피고인 한국담배인삼공사와 대한민국이 제조·판매한 담배와 원고 측 흡연피해자의 폐암 발병 간의 인과관계가 인정되는지 여부” 이다. (239쪽)
우선, 첫 번째 쟁점인 흡연과 폐암 발병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는 2004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전문 의료 감정인단의 감정서를 받아 그 관련성을 인정했다. 이 과정에서 앞서 미국 사례에서 등장한 1982년 미국 보건총감보고서가 인용되었고, 흡연이 폐암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가설의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여기서 재판부가 발표한 역학적 인과관계란 “대상 인구집단 수준에서의 질병과 해당 요인과의 일반적 관련성의 정도ʼʼ를 입증하는 것을 의미하여, 과거 구체적인 수준에서 엄격한 인과관계만을 인정했던 사례와 다르게, “집단 수준의 피해에 대한 역학적 인과관계가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였다. (242쪽) 이 판결은 서울고등법원 재판부의 2심 판결에서 역시 동일하게 인정되었다. 필자에 따르면 흡연과 폐암 간의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한 판결로 인해 이제 “기존의 불법행위책임소송에서 요구되어왔던 흡연자 개인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법적으로 다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입증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위험물에 대한 사회적 의무와 법적 책임
담배 소송에서 중요한 핵심 중 하나는 흡연과 폐암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입증을 누가 책임지고 담당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보통 불법행위책임 소송에서는 피해자 측인 원고가 이를 입증해야만 했으나, 점차 원인 규명에 대한 과학기술적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이에 소요되는 많은 비용 등이 증가함에 따라 최근 이러한 입증의 부담을 원고와 피고 측이 적절한 비율로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입증책임 완화”는 1980년대 이후 환경, 공해소송 또는 대량 제조물로 인한 피해로 발생하는 소송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즉, 원고 측이 피해 원인과 결과를 규명해야 하는 것과 더불어 피고 측 역시 그 둘의 상관관계가 없음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1984년 자동차의 매연, 폐수, 쓰레기 등의 공해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최초로 입증책임 완화를 인정한 바 있다.
한국 담배 소송에서 원고측은 입증책임 완화를 위해 공해소송과 담배소송의 유사점들을 지적하며 흡연 피해를 유발한 유해 성분이 담배를 제조하는 회사의 배타적 영역 하에 있기 때문에 피해자인 원고 측이 규명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피고 측이 원고 측의 폐암 원인이 흡연이 아닌 다른 요인 때문임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흡연과 폐암 간의 인과관계를 법원이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피고 측은 다른 제조물과 달리 담배 제조는 매우 간단한 과정으로 고도의 기술이 적용되지 않는 제조품이고, 여러 불완전한 지식이 많은 공해소송과 달리 담배의 유해성 연구와 지식은 이미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입증책임 완화의 원칙을 적용시킬 수 없다 반박하였다.
입증책임 완화 쟁점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부는 원고들이 흡연과 폐암 발병 간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게 어려움은 인정하였으나, 피고 측 역시 원고 측의 폐암 발병 원인 조사를 하는 게 쉽지 않고 흡연이 원고 측의 자발적인 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입증책임 완화의 법리를 담배소송에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반면, 서울고등법원은 공해소송에서 사용되는 입증책임 완화 법리를 담배소송에 적용할 수 있다고 판결하며, 담배의 구체적인 제조 과정이 공개 되어있지 않은 현실에서 피고 측이 입증 책임을 어느 정도 부담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2심에서의 판결은 “한국의 담배소송에서도 후기 근대적 위험으로 인한 피해의 원인을 법적으로 규명할 때 나타났던 불확실성을 인식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물질을 제조하고 판매한 제조사에게 사회적 의무를 지우는 차원에서 도입된 입증책임 완화라는 법리가 인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47쪽)
흡연 외 다른 요인은?
개별적 인과관계의 인정 여부
두 번째 쟁점으로, 흡연과 폐암 발병 간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흡연을 폐암 발병의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는가? 다른 요인, 즉 유전적 요인, 식이습관, 병력, 직업적 노출, 대기오염 등이 원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역학적 인과관계를 개별적 인과관계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 원고 측 흡연자들이 장기간 흡연했다는 사실만으로 폐암 발병이 흡연 때문임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원고측 6명에 대한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2심은, 1심 재판부와 같이 폐암이 복합적 작용에 의해 발병할 수 있어 다른 외부 요인을 배제할 수 없는 점을 인정하였지만, 원고 측 흡연자들이 장기간 흡연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암물질에 노출, 흡연으로 인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특정 종류의 암이 발견된 점 등을 근거로 6명 중 4명에 대한 흡연 피해를 인정하였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의 판결은 “법정에서 비특이성 질환의 특징을 고려하며 인과관계 정립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였으며, 이와 함께 입증책임 완화와 법리를 적극 도입하여 한국 담배소송 최초로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볼 수 있다. (252쪽) 이는 암과 같은 비특이성 질환에 대한 법적 구제의 가능성을 열어준 기반을 마련하고, 담배회사 등과 같은 업체들에게 도덕적 경각심을 알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사회가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울리히 벡이 주장한 이 위험사회에서 앞으로 공해소송 또는 제조물과 관련한 여러 위험 물질과 질병에 대한 소송은 더 늘어날 것이다. 한국 담배소송은 “위험사회에서의 피해와 법적 정의에 대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기반”을 찾을 수 있는 통로를 제시한 셈이다. (254쪽)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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