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 성패는 무엇으로 결정되나?

가장 잔인한 곳이 어떤 곳이냐는 질문이 던져지면, 나는 지옥을 고르기보단 차라리 현실 정치무대를 고른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정치는 언제나 결과로 말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 번 실패하면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한 번의 실수 내지 잘못이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 정치의 영역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들이 정당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충분히 분분한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좌우간 정치의 영역이 대단히 혹독한 평가의 장이라는 데에서는 대부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건강한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건강한 정치가 만들어지기 위한 조건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을 때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떤 대답들이 가장 많이 나올까. 나는 개인적으로 ‘강한 진보정당의 성장’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치에서 정당 구조는 반공 이데올로기 위에서 세워진, 대단히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만을 가지는 지역 정당 체제라고 요약된다. 이러한 정당 체제 안에서 동원될 수 있는 갈등은 매우 제한된다. 최장집 선생의 주장에 따라,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란, ‘노동’ ‘노동조합’ ‘노동3권’ 등 노동과 관련한 모든 의제와 텍스트들이 강고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마치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듯한 연상효과를 가짐으로써 억압되어 온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민주화 이후 지난 3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이런 정당 체제가 오래도록 지속되지 못한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2000년 노동자-서민의 계급적 이해를 대표하겠다고 등장한 민주노동당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그 기대와 희망과는 정반대로, 초반에 성장하다가, 급기야 통합진보당으로 개편한 뒤 헌법재판소의 해산 심판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러한 민주노동당의 성장과 실패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를 통해, 2017년 현재 진보정당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정의당은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번 글에서 함께 살펴볼 논문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 교수가 함께 공동으로 연구한 「틈새정당의 전략과 제도화: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연구」(『한국정치학회보』 50(2), 2016)로써 민주노동당이 왜 실패했는지, 또 어떤 요인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가늠해보고 그를 통해 현재적 의미를 찾아볼 것이다.
틈새정당 이론
신생 정당들의 역할과 전략
먼저 간략한 개념부터 살펴보자. 틈새정당(Niche Party)이란 기존 정당체제에서 포괄되지 않는 이슈를 바탕으로 유권자를 동원함으로써 성장을 시도하는 신생 정당들을 일컫는다. 메귀드(Meguid 2007)는 틈새정당들이 성장하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다양한 이유를 정당의 전략적 결정과 정당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틀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메귀드의 이론은 단지 정당이 점유하는 이념적 위치(Position)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기하는 정책의 중요성(Salience)과 그 이슈의 소유권(Ownership)까지 포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메귀드는 본인의 이론을 PSO이론이라고 지칭한다.
이 이론의 핵심은 틈새정당의 성공과 실패는 이념적 스펙트럼 상의 좌우 유권자를 선점하고 있는 기존의 정당들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틈새정당의 성패가 갈린다는 것이다. 기존 정당들은 틈새정당이 출현할 경우 그들의 점유율을 늘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그들이 동원하는 표들을 자신들에게 가져오도록 노력할 것이다.
기존 정당들이 틈새정당의 등장에 대응하여 취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틈새정당이 제시하는 이슈를 무시함으로써 그 이슈의 중요성을 떨어뜨려버리는 ‘무시전략(dismissive strategy)’이고, 둘째는 틈새정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념적 위치에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적응전략(accommodative strategy)’과 ‘적대전략(adversarial strategy)’을 취하는 것이다. 적응전략은 틈새정당과 이념적 거리가 가까운 기성정당이 틈새정당이 제시한 이슈를 흡수하면서 이슈의 소유권을 기성정당 쪽으로 가져오는 전략을 말하고, 적대전략은 틈새정당과 반대편에 있는 정당이 최대한 틈새정당의 이슈를 각인시킴으로서 유권자로 하여금 이슈의 소유권이 틈새정당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를 통해 상대편에 있는 기성정당의 지지자들이 틈새정당 쪽으로 이탈하도록 부추기는 전략을 말한다. (논문 132-133 쪽)
이러한 PSO이론은 분명히 틈새정당의 성장과 성공 및 실패에 대해 일관된 분석틀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점은 분명히 있으나 논문의 저자들은 이러한 이론이 틈새정당의 능동적 활동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노동당을 틈새정당이라 할 때, 그들의 성공과 성장에는 분명히 민주노동당 자체의 능동적인 전략과 선택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의 성장은 적극적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건설 운동이 결합된 결과물이며, PSO 이론을 통해 설명하기 어려운 난점이 존재한다. (논문 134쪽)
논문 저자들은 메귀드의 틈새정당 이론은 비판적으로 보며 틈새정당을 수동적 행위자가 아닌 능동적 행위자로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틈새정당이 성공할 수 있는, 즉 득표를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은 중화(Neutralization) 전략과 유인(Inducement) 전략이다.
중화전략이란 틈새정당이 제기하는 이슈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정책적 차별성을 강화함으로써 기성정당이 이슈를 선점하려는 것을 막고 기성정당 지지 유권자들을 틈새정당 지지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반면 유인 전략이란 이념적 지형 반대편에 위치한 기성정당이, 틈새정당이 제기하는 이슈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도록 만듦으로서 이념과 정책상 대비를 선명하게 하도록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요컨대, 중화-유인 전략이란 이슈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그를 통해 정책적 차별성을 드러내는 전략을 말한다.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전략을 제대로 수행했는가? 다음에서 살펴볼 정당의 제도화 수준이 심각하게 낮았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할 수 없었고 또 집행할 수도 없었다.
정당의 제도화, 그리고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이 실패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정당의 제도화 수준이 대단히 낮았다는 데 있다. 파네비앙코(Panebianco 1988) 및 랜달과 스바샌드(Randall and Svasand 2002)가 제안한 정당 제도화 수준을 평가하는 네 가지 지표는 다음과 같다. ① 당내 조직적 체계성의 정도 ② 당 지도부의 의사결정 자율성 정도 ③ 구성원 사이에 지향하는 가치의 동질화 정도 ④ 유권자들로부터 얻는 지속적 실체성의 정도가 그것이다.
“높은 제도화 수준을 보이는 틈새정당일수록 선거경쟁에 참여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고 논문저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 정당의 제도화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그 정당의 성패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정당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언제나 선거로 결정지어지기 때문이다.
논문 저자들은 민주노동당의 제도화 수준을 앞서 제시한 네 가지 기준에 따라 비판한다. (1) 당내 조직적 체계성의 정도는 당내 계파 및 정파 갈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2) 당 지도부의 의사결정 자율성 역시 집단지도체제로 변화하면서 극히 취약해졌고 (3)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가치적 동질성이 대단히 극심했으며 (4) 마지막으로 이러한 경향으로 말미암아 유권자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대중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비판의 요점이다.
논문 저자들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상세한 지표들을 제시한다. 일례로 민주노동당이 조직으로서 체계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단지 당내 분열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능력 있는 정당으로서 신뢰를 보일 수 있는지의 여부 역시 중요한 요인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책 개발비는 아래 표에서 보다시피 대단히 낮은 비율을 보이는데, 이는 2005년 당시 한나라당의 정책개발비 비율이 20.6%에 이르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단히 낮은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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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관, 김인원, 정은아(2016)에서 발췌 |
또 하나,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민주노동당이 과연 정당으로서 제기한 이슈들을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물은 아래 표에서 보다시피 지지율 하락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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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관, 김인원, 정은아(2016)에서 발췌 |
진보정당의 현재와 미래?
우리 안에 던져졌다는 조건, 거기서부터
민주노동당의 실패는 우리에게 여전히 큰 시사점을 안겨준다. 그것은 단지 한국의 정당 구조 안에서 진보정당이 살아남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충분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어야 함을 말한다. 논문 저자들은 브라질 노동당의 사례를 들며 결론을 짓는다.
논문 리뷰를 끝마치며, 나의 사견을 잠깐 덧붙여보겠다. 나는 거의 습관처럼 ‘능력 있는 정당’에 대해 말하곤 한다. 민주주의는 유능한 정당, 유능한 정부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해결해줄 마법사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해결해줄 유능한 정부와 정당을 우리 손으로 고르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의미가 다소 희석되어 오늘날에는 마치 ‘당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완성이자 실현인 것처럼 주장되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나는 진보정당이 보다 강하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충분히 수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또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민주노동당의 실패에서 우리는 한국 정당 체제의 악랄함(?)과 경직성을 규탄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을 갖춰가도록 역량을 키우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본다. 다양한 정당이 있고, 또 그럴 때에라야 민주주의는 비로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틈새정당이 유의미한 경쟁자로 성장하는 것은 꽤나 가치있고 고무적인 일이다. 거대한 반공보수주의가 비록 여전히 가로막고 있지만, 지난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이러한 정당 구조는 또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상황에서 정의당이 처한 상황이 대단히 유리하고 또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정의당은 그 어떤 때보다 성장의 적기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정의당 내부에서의 잡음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내부의 상황이야 알 길이 없으니 공식적인 언론 보도만을 신뢰할 뿐인데, 여러 가치 의제들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잡음인 것 같다.
대중성을 가지지 못한 정당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앞서 제시했던 정당 제도화의 네 가지 수준 중 마지막, 유권자들 사이에서의 지속적인 실체성은 유권자들이 그 정당을 얼마나 지지하느냐의 여부이다. 대중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은 선거에서 질 수 밖에 없고 또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나는 여전히 아주 미약하나마 희망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 희망이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조금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으로 눈을 돌리자면, 그 희망이 보다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틈새정당의 성장이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희망은 항상 ‘유보적’이다. 진보정당이 성장하여 당당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그 때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최태준 리뷰어 xowns51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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