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성’이라는 클리셰

뛰어난 미술품에는 ‘천재적’, ‘최초의 시도’ 등 ‘독창적’이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이 평가는 상찬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에 대해 조인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독창적’이라는 말에 오랜 역사가 있는 것도 아니며, 모든 문화에 공통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독창성’은 어떻게 미술에 대한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자리 잡았으며, 왜 지금까지 위세를 떨칠 수 있었을까? 조 교수는 「미술사에서의 독창성 – 창조와 모방, 그리고 기묘함」(『미술사학』, 28, 2014)에서 동서양 미술사를 아우르며 독창성의 인식 성립과정을 드러낸다.
서양미술사에서
창조와 모방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딱히 “창조한다”라는 말이 없었다. “만들다”라는 표현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즉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곧 창조하는 것으로 여겼다. 플라톤이 자신의 모방론에서 전개했듯이 화가는 그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모방함으로써 그 역할을 마친다고 보았다. 즉 고대 그리스인에게 예술은 창조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아직 개인의 자유로운 창작 행위는 주목받지 못했다. 한 편 중세에는 ‘창조’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예술가는 단지 신의 창조 행위를 대신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 정도로 그쳤다.
미술가의 역할이 창조가 아닌 모방이라는 관점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지속하였다. 알베르티Alberti는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데 있어서 자연을 모방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보았으며, 고대 그리스 예술은 이미 이것을 성취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 예술을 모방하는 것이 유행되었는데, 이것을 단순 모방하는 것보다는 능동적으로 취사선택하고 상상을 더하는 모방을 올바른 모방으로 여겼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독창적이란 과거의 전통에 기초하면서도 똑같지는 않고 무언가 다른 것을 지칭했다.
창조에 대한 인식의 급격한 변화는 낭만주의가 태동한 19세기에 이루어졌다. 고전주의와 달리 낭만주의는 기계적 모방을 낮게 평가했고, 예술을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는 창조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창조는 자율적 존재의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자연스럽고 독특한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천재’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냈다. 천재는 더 이상 모방하지 않으며, 평범한 사람은 천재를 모방할 수도 없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흥을 기초로 빛과 어우러지는 풍경을 개성적으로 그려냈는데, 그의 <노예선>은 참혹했던 현실을 주제로 삼았지만, 이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강렬한 색채와 뒤엉키는 구도로 극적인 감정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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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터너, 노예선(The Slave Ship, 1840) 출처: 리뷰아카이브 |
저자는 현대 모더니즘도 독창성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낭만주의가 고전주의 규범에서 탈피할 것을 내세웠던 것의 연장 선상으로 본다. 가령 폴 세잔Paul Cezanne은 터너와 달리 빛의 효과보다는 견고한 구조를 드러내는 풍경화를 그렸는데, 다른 화가와 구별되는 그의 거친 표현방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렇게 모더니즘은 낭만주의처럼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방식으로 예술 활동을 전개할 것을 강조했다.
종합하면 서양미술에서 독창성이란 자연, 신, 개인의 자아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인데, 여기에 일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어떤 시대에 왜 독창성을 강조하고 이것을 어떻게 정당화했는가’이다. 자본주의 상업 경제적인 측면에서 미술가는 자신의 개성을 미술 시장에 팔아야만 한다. 독창성은 그 자체로 상품이 되는 것이고, 순수한 독창성이란 결국 신화에 불과한 셈이다. 서양 미술의 사례에서 독창성이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인데, 저자는 앞으로 남은 중요한 과제는 우리 주변에 맴돌고 있는 독창성에 대한 신화를 걷어내는 것으로 보았다.
동양 미술사에서의
창조와 모방’
동양 역시 서양처럼 먼 과거에서 독창성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고대 화론을 살펴보면 독창성과 관련된 논의를 지속해왔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이 “일격逸格”이라는 개념이다. 중국 고대에는 신품神品, 묘품妙品, 능품能品으로 그림의 품격을 나누고, 이것들 외에 통상적인 법에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 ‘일격’을 두었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요소를 별개의 범주로 구분한 것이다.
그밖에 독창성에 해당하는 용어로 낯설다는 “괴怪”, 다르다는 “이異”, 기묘하다는 “기奇”가 있다. 특히 명말청초에 해당하는 17세기에는 기奇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 뜻은 다른 것과 견줄 바가 없고, 족쇄를 벗어난 듯 자유로우며, 독자적인 길을 열었다는 것으로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다. 중국의 경우 청나라가 들어서고 사회가 다시 안정된 18세기 이후에는 기奇에 대한 용례가 줄어들고 의미도 변해서 다소 부족한 것을 가리키는 뜻으로 바뀌었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을 중심으로 세거했던 여주이씨 성호가문의 사례에서 기奇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성호가문은 연이은 가화家禍로 출사를 포기한 탓에 그들의 문예는 정正보다는 기奇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들과 교유했던 강세황의 경우에도 전통을 거부하는 기奇를 자연스럽게 수용했는데, 그의 오언절구에는 “취하지 않으면 미칠 수 없고, 미쳤을 때에야 바야흐로 시를 짓네. 시가 완성되어 초서로 써내리니, 서법도 기묘함을 회복하네(非醉不能狂 狂時方有詩 詩成作草書 書法復瓌奇)”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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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268쪽 출처: 리뷰아카이브 |
동양의 경우 오히려 독창성이 지속해서 미술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저자는 동양에서 독창성이 미술 작품에 있거나 없다는 시비是非의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것들과 얼마만큼 섞여 있는지를 따지는 정도의 문제였던 것으로 본다.
21세기 미술의
창조와 모방
저자는 우리가 속해 있는 21세기에서 독창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사례를 중국 선전의 다펀유화촌大芬油畵村에서 찾는다. 다펀유화촌은 엄청난 수량의 복제 유화를 제작해 세계로 수출하는 곳이다. 이들 수출용 그림은 단순히 장식적 상품이라고 간주하여 별로 학문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가 최근에 와서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저자는 이곳에서 워낙 많은 양의 그림을 대량 생산하고 제작방식이 마치 조립식 생산라인처럼 과장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것은 중국의 상품생산 방식에서 노동착취를 부각시키고 수출용 회화의 독창성을 무시하려는 서구의 관점에 따른 것으로 본다.
류딩劉鼎은 2005년 제2회 광저우트리엔날레에서 다펀의 화가들이 수출용 그림을 제작하는 퍼포먼스를 하게 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유화는 유럽 수집가에 의해 일괄로 구매되었다. 동일한 작품이 각기 다른 맥락에서 상품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저자는 다만 이를 주도한 화가가 다르고, 이를 수용한 감식안도 달랐으며, 창조와 모방에 대한 인식도 차이가 났다고 본다. 서구 언론에서는 다펀에서 만들어진 유화를 가짜로 취급하고 암시장에서 거래되며 불법적인 위작이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이것은 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바뀌면서, 화가의 재질이 천재성으로부터 보편적 창의성으로 변모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su_quote]미술이란 생산 조건이 사회적으로 갖추어져야 했고, 직업적, 제도적 조건과 작품의 전시와 작품에 대한 담론에 둘러싸여 시장과는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다펀의 경우는 이러한 사회적 완충장치가 없이 곧바로 시장과 대면한 셈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미술과 시장의 관계를 민낯으로 드러냈다. 아직도 독창성의 신화를 쫓고 있는 중국 정부는 계속하여 미술가 협회를 만들고, 경매와 축제의 장을 마련해주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광고하고,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심지어 엑스포를 통해 연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술에서 자본과 노동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오직 새로운 방식의 전유를 통해서 독창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273쪽)[/su_quote]
[su_quote]독창성이란 것은 애초에 도달하기에 불가능한 신기루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자연, 신, 자아가 언제나 희미하듯이, 그리고 창조와 모방이 계속하여 씨름을 하듯이, 독창성은 집착할수록 진부하게 결말이 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에서, 동기창과 김정희의 경우에서, 그리고 다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독창성의 신화는 쉽사리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274쪽)[/su_quote]
논문 안에서 저자는 동서양에서 독창성이 어떻게 시대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미술사적 관점으로 써 내려 간다. 독창성을 객관적인 미술사적으로 바라보는 재미가 있는 한편, 독창성이나 새로운 미술에 대한 기대 자체를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비판적 의견 또한 귀 기울일만 하다. 즉 사적의미와 전복적인 관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논문이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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