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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성’이라는 클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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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뛰어난 미술품에는 ‘천재적’, ‘최초의 시도’ 등 ‘독창적’이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이 평가는 상찬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에 대해 조인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독창적’이라는 말에 오랜 역사가 있는 것도 아니며, 모든 문화에 공통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독창성’은 어떻게 미술에 대한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자리 잡았으며, 왜 지금까지 위세를 떨칠 수 있었을까? 조 교수는 「미술사에서의 독창성 – 창조와 모방, 그리고 기묘함」(『미술사학』, 28, 2014)에서 동서양 미술사를 아우르며 독창성의 인식 성립과정을 드러낸다.

서양미술사에서
창조와 모방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딱히 “창조한다”라는 말이 없었다. “만들다”라는 표현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즉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곧 창조하는 것으로 여겼다. 플라톤이 자신의 모방론에서 전개했듯이 화가는 그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모방함으로써 그 역할을 마친다고 보았다. 즉 고대 그리스인에게 예술은 창조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아직 개인의 자유로운 창작 행위는 주목받지 못했다. 한 편 중세에는 ‘창조’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예술가는 단지 신의 창조 행위를 대신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 정도로 그쳤다.

미술가의 역할이 창조가 아닌 모방이라는 관점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지속하였다. 알베르티Alberti는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데 있어서 자연을 모방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보았으며, 고대 그리스 예술은 이미 이것을 성취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 예술을 모방하는 것이 유행되었는데, 이것을 단순 모방하는 것보다는 능동적으로 취사선택하고 상상을 더하는 모방을 올바른 모방으로 여겼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독창적이란 과거의 전통에 기초하면서도 똑같지는 않고 무언가 다른 것을 지칭했다.

창조에 대한 인식의 급격한 변화는 낭만주의가 태동한 19세기에 이루어졌다. 고전주의와 달리 낭만주의는 기계적 모방을 낮게 평가했고, 예술을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는 창조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창조는 자율적 존재의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자연스럽고 독특한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천재’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냈다. 천재는 더 이상 모방하지 않으며, 평범한 사람은 천재를 모방할 수도 없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흥을 기초로 빛과 어우러지는 풍경을 개성적으로 그려냈는데, 그의 <노예선>은 참혹했던 현실을 주제로 삼았지만, 이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강렬한 색채와 뒤엉키는 구도로 극적인 감정을 표현하였다.

윌리엄 터너, 노예선(The Slave Ship, 1840) 출처: 리뷰아카이브

저자는 현대 모더니즘도 독창성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낭만주의가 고전주의 규범에서 탈피할 것을 내세웠던 것의 연장 선상으로 본다. 가령 폴 세잔Paul Cezanne은 터너와 달리 빛의 효과보다는 견고한 구조를 드러내는 풍경화를 그렸는데, 다른 화가와 구별되는 그의 거친 표현방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렇게 모더니즘은 낭만주의처럼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방식으로 예술 활동을 전개할 것을 강조했다.

종합하면 서양미술에서 독창성이란 자연, 신, 개인의 자아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인데, 여기에 일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어떤 시대에 왜 독창성을 강조하고 이것을 어떻게 정당화했는가’이다. 자본주의 상업 경제적인 측면에서 미술가는 자신의 개성을 미술 시장에 팔아야만 한다. 독창성은 그 자체로 상품이 되는 것이고, 순수한 독창성이란 결국 신화에 불과한 셈이다. 서양 미술의 사례에서 독창성이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인데, 저자는 앞으로 남은 중요한 과제는 우리 주변에 맴돌고 있는 독창성에 대한 신화를 걷어내는 것으로 보았다.

동양 미술사에서의
창조와 모방’

동양 역시 서양처럼 먼 과거에서 독창성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고대 화론을 살펴보면 독창성과 관련된 논의를 지속해왔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이 “일격逸格”이라는 개념이다. 중국 고대에는 신품神品, 묘품妙品, 능품能品으로 그림의 품격을 나누고, 이것들 외에 통상적인 법에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 ‘일격’을 두었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요소를 별개의 범주로 구분한 것이다.

그밖에 독창성에 해당하는 용어로 낯설다는 “괴怪”, 다르다는 “이異”, 기묘하다는 “기奇”가 있다. 특히 명말청초에 해당하는 17세기에는 기奇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 뜻은 다른 것과 견줄 바가 없고, 족쇄를 벗어난 듯 자유로우며, 독자적인 길을 열었다는 것으로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다. 중국의 경우 청나라가 들어서고 사회가 다시 안정된 18세기 이후에는 기奇에 대한 용례가 줄어들고 의미도 변해서 다소 부족한 것을 가리키는 뜻으로 바뀌었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을 중심으로 세거했던 여주이씨 성호가문의 사례에서 기奇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성호가문은 연이은 가화家禍로 출사를 포기한 탓에 그들의 문예는 정正보다는 기奇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들과 교유했던 강세황의 경우에도 전통을 거부하는 기奇를 자연스럽게 수용했는데, 그의 오언절구에는 “취하지 않으면 미칠 수 없고, 미쳤을 때에야 바야흐로 시를 짓네. 시가 완성되어 초서로 써내리니, 서법도 기묘함을 회복하네(非醉不能狂 狂時方有詩 詩成作草書 書法復奇)”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논문 268쪽 출처: 리뷰아카이브

동양의 경우 오히려 독창성이 지속해서 미술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저자는 동양에서 독창성이 미술 작품에 있거나 없다는 시비是非의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것들과 얼마만큼 섞여 있는지를 따지는 정도의 문제였던 것으로 본다.

 

21세기 미술의
창조와 모방

저자는 우리가 속해 있는 21세기에서 독창성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사례를 중국 선전의 다펀유화촌大芬油畵村에서 찾는다. 다펀유화촌은 엄청난 수량의 복제 유화를 제작해 세계로 수출하는 곳이다. 이들 수출용 그림은 단순히 장식적 상품이라고 간주하여 별로 학문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가 최근에 와서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저자는 이곳에서 워낙 많은 양의 그림을 대량 생산하고 제작방식이 마치 조립식 생산라인처럼 과장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것은 중국의 상품생산 방식에서 노동착취를 부각시키고 수출용 회화의 독창성을 무시하려는 서구의 관점에 따른 것으로 본다.

류딩劉鼎은 2005년 제2회 광저우트리엔날레에서 다펀의 화가들이 수출용 그림을 제작하는 퍼포먼스를 하게 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유화는 유럽 수집가에 의해 일괄로 구매되었다. 동일한 작품이 각기 다른 맥락에서 상품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저자는 다만 이를 주도한 화가가 다르고, 이를 수용한 감식안도 달랐으며, 창조와 모방에 대한 인식도 차이가 났다고 본다. 서구 언론에서는 다펀에서 만들어진 유화를 가짜로 취급하고 암시장에서 거래되며 불법적인 위작이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이것은 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바뀌면서, 화가의 재질이 천재성으로부터 보편적 창의성으로 변모하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su_quote]미술이란 생산 조건이 사회적으로 갖추어져야 했고, 직업적, 제도적 조건과 작품의 전시와 작품에 대한 담론에 둘러싸여 시장과는 일정 정도의 거리를 두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다펀의 경우는 이러한 사회적 완충장치가 없이 곧바로 시장과 대면한 셈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미술과 시장의 관계를 민낯으로 드러냈다. 아직도 독창성의 신화를 쫓고 있는 중국 정부는 계속하여 미술가 협회를 만들고, 경매와 축제의 장을 마련해주고,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광고하고,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심지어 엑스포를 통해 연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술에서 자본과 노동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오직 새로운 방식의 전유를 통해서 독창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273쪽)[/su_quote]

[su_quote]독창성이란 것은 애초에 도달하기에 불가능한 신기루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자연, 신, 자아가 언제나 희미하듯이, 그리고 창조와 모방이 계속하여 씨름을 하듯이, 독창성은 집착할수록 진부하게 결말이 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에서, 동기창과 김정희의 경우에서, 그리고 다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독창성의 신화는 쉽사리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274쪽)[/su_quote]

논문 안에서 저자는 동서양에서 독창성이 어떻게 시대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미술사적 관점으로 써 내려 간다. 독창성을 객관적인 미술사적으로 바라보는 재미가 있는 한편, 독창성이나 새로운 미술에 대한 기대 자체를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비판적 의견 또한 귀 기울일만 하다. 즉 사적의미와 전복적인 관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논문이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랑시에르, 순수문학과 현실참여문학 사이의 좁은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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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문학은 정치적일 수 있는가?’ ‘현실참여적이어야만 하는가?” 등의 질문은 몇 십 년에 걸쳐 정치 현실이 바뀜에도 꾸준히 제출되는 논쟁거리이다. 이와 관련해 랑시에르는 ‘문학이 윤리에 대립함으로써 감각적 자율성을 지닌 미학의 정치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문학과 정치’담론의 중요한 쟁점을 제공했다.

이에 진은영 시인은 시와 정치: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비평문학』, 2011 3)에서 랑시에르의 미학을 경유해 문학적 실험과 현실참여가 반드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랑시에르의
윤리비판

저자에 따르면, 랑시에르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2000)에서 미학의 세가지 체제(윤리적 체제, 시학적 체제, 미학적 체제)를 분류하면서 윤리적 체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할 뿐만 아니라, 『미학 안의 불편함』(2004)에서 문학의 윤리화에 대한 거부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한다. 그는 기존의 숭고의 윤리학을 넘어 문학이 ‘미학의 정치’로 넘어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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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는 숭고의 미학에서 드러나는 예술의 윤리화 경향을 ‘숭고의 윤리학’으로 규정하면서 숭고의 윤리학을 넘어‘미학의 정치’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출처: Universidad Internacional de Andalucía

 

그러나 저자는 랑시에르의 ‘문학이 정치적이되 윤리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미학이 윤리의 영역과 엄격하게 구분되고 무엇으로도 결코 침범 당하지 않는 예술의 자율성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인데, 이렇게 이해될 경우, 미학과 친화적인 정치란 미학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강화하는 데에만 기여하는 정치로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정치라고 간주하는 구체적 활동들과는 관계 맺을 수 없는 특수한 활동으로 여겨진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순수 모더니즘의 관점이 아닌 다른 방식이다. 랑시에르는 우선 윤리와 모럴을 구분한 후 ‘윤리’의 의미를 “평가하고 선택하는 행동 원리를 이미 존재하는 삶의 양식에 용해시켜 버리는 체류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사용한다. 가령 사회적으로 승인된 소박한 소시민적 윤리의식을 담지하는 데 만족하는 예술작품은 오히려 사회의 불합리를 은폐하고 부분적으로 보수하여 현존하는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뿐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러한 작품들 보다는 오히려 벤야민이 초현실주의에 대해 표현한 바대로 ‘악에 대한 숭배’가 느껴질 만큼 기존의 도덕과 감각에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 진정으로 정치적이다.

[su_quote]윤리에 대한 랑시에르의 이런 관점에 공감하는 비평적 입장들은 발산과 분열의 상상력을 가지고 감각적 실험을 수행하는 미학적 아방가르드 시인들을 옹호하면서 당연히 랑시에르의 미학의 정치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478쪽)[/su_quote]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란?

그렇다면 문학이 습속으로서의 윤리를 넘어선 문학의 ‘모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간 문학이 단지 윤리적인 감성적 충격을 넘어 삶의 형식이 되려 할 경우 자본주의적 상품 유통의 전체주의나 소비에트적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 양자 중 하나에 포섭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바로 이러한 전체화의 두려움이 문학의 윤리성을 ‘단지’ 감각적 증언의 영역에만 머물게 하고 실제로 삶의 왜곡된 장벽들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것이다.

랑시에르는 문학과 예술의 역량에 대한 강력한 긍정 속에서 문학의 ‘삶에 저항하기’(미학적 자율성)와 문학의 ‘삶-되기’(미학적 타율성)가 모두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이쯤에서 저자는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을 재확인한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란 합의 또는 일치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간주되는 공동체에 매 순간 불일치를 가져오는 활동이다. 그의 이러한 정치 개념은 정치를 의회민주주의의 선거 절차와 같은 특정 절차와 국가 법질서로 환원시켜 몇 가지 승인된 합법 활동으로 국한하려는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다.

이렇게 랑시에르의 이론을 경유한 저자는 문학이 기존의 정치 영역에서 의제화되지 못한 목소리들을 듣고 비명을 지르는 존재들을 기억하고 가시화함으로써 불일치를 창조하는 광범위한 활동으로 나아가야 한고 주장한다. 그것은 의회주의의 한계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넘어서고 정치와 삶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환기시키는 재현 방식을 발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모럴’을 지닌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적 실험과 현실참여는
공존할 수 있는가?

저자는 랑시에르의 미학적 모럴을 살핀 이후에도 여전히 남는 물음이 있다고 말한다. 문학적 실험과 현실참여 사이에는 거리가 있으므로 모럴을 이야기하더라도 문학적 실험의 모럴과 현실참여의 모럴은 구별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두 가지 작업을 사례로 든다. 바로 6명의 시인들이 두 명씩 조를 이루어 상대 시인의 시에서 나온 단어 30~40여개를 활용하여 시를 쓰는 작업과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그와 관련해서 인터넷 언론에 글을 쓰는 작업이다.

저자에게 있어 이 두 작업은 구분되지 않는다. 순수하게 문학적인 시는 이렇게 써야만 하고, 현실참여적 시는 저렇게 써야만 한다는 ‘선험적’태도로 편의주의적인 감성과 형식으로 작업에 임하지 않는 한 시인은 항상 곤경을 예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30~40여개 단어와 용산참사라는 현실의 제한/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창작의 위기와 실패의 심연과 마주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그렇지만 그 심연을 두려워하지 않고 익숙한 길에서조차 헤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시인의 모럴인 것이다.

 

[su_quote]이것을 상기하는 순간 문학적 실험과 현실참여는 분류의 일반적 경계를 침입하며 만나게 되고 양자 모두가 일종의 문학적 실험의 지평에서 공존하게 된다. (485쪽)[/su_quote]

 

또한 저자에게 있어 문학적 실험과 현실참여는 참여의 지평에서 공존할 수 있다. 다른 시인의 시어들이 주어지는 문학적 실험 속에서 시인은 타자의 언어가 주는 질료적 저항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언어의 형식을 만들어간다. 이 과정에는 저항적이며 갈등을 지닌 대화가 있다. “타자의 질료와 교감한다는 점에서 이 과정은 참여이기도 하다.” 용산참사에 대한 시를 쓸 때도 시 속에 타자의 언어를 들여와야 한다. 이때 시인에게는 낯선 시어들이 불쑥 던져지는데, 그 시어들은 그간 사회과학적인 방식으로 전유되어 왔고 그래서 많은 젊은 시인들에게 문학의 외부에 있는 언어로 간주되어 온 것들이다. “이러한 참여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시인의 모럴인 것이다.”

 

[su_quote]그것은 일종의시민적모럴을 포괄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다. ‘시인적모럴이란 참여의 과정을 미학적 실험으로 재창안하려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것이며, 시인은 이러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순간을 살아가는 자이다. 시인은 먹을 때도 슬퍼할 때도 사랑할 때도 시인이듯, 싸울 때도 분노할 때도 언제나 시인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심지어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시가 쓰여질 있다. (…) 이러한 시인적 모럴을 견지할 시인은 일종의 침입자로서 문학적 참여와 현실의 정치적 참여라는 감각적인 영역의 분배 방식을 파열시키게 된다(486)[/su_quote]

 

시와 예술이 미학적이거나 정치적인 길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할 것만 같은 현실에서 저자는 논문을 통해 두 가지 모두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간 세월호를 비롯한 여러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저자가 어떤 고민과 시학을 갖고 있는지 논문으로 유추할 수 있다. “기존 정치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듣고 가시화함으로써 불일치를 창조하는 문학의 정치”를 끊임없이 발명하고 발견하려는 저자의 노력에 ‘문학이 힘을 잃었다’ 말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흄, 미적 취향을 넘어 미학적 소통 가능성을 탐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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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취향존중’, 줄임말로 ‘취존’이라는 말이 있다. 미적감각이나 취향은 주관적 요소이기에 서로의 취향에 간섭하지 말자는 뜻이다. 특히 자신의 일반적이지 않은 취향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방어할 때 쓰이곤 한다. 과연 취향, 그 중에 미적 판단은 주관적이기만 한 걸까? 그렇다면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고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근대미학의 큰 질문이기도 한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맹주만 중앙대 철학과 교수와 김다솜 연구자는 「흄의 감성 미학과 공감의 원리」(『철학탐구』, 2015년 5월)에서 답을 구한다. 흄의 미학을 통해 우리는 미적 판단이 주관적이면서도 보편 판단을 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미적판단은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

전통적인 이성주의 미학에서 미적 판단은 이성 판단이며, 이는 객관적 존재에 대한 사실 판단과 마찬가지로 인식판단이다. 인식판단이라는 것은 아름다움과 추함 즉 미추 판단에 객관적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러한 입장은 오히려 미적 판단의 불일치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미적 경험이 감정적 느낌과 관계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미를 사실 혹은 그것이 갖는 성질이 아니라 쾌락의 감정으로 보는 경험주의는 미적 판단은 객관적인 진위 판정이 가능한 판단이 아니라 쾌와 불쾌의 감각적 느낌과 관계하는 주관적인 감정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입장이라면 쾌/불쾌의 만족에 있어서 ‘맞다 틀리다’ 혹은 ‘옳다 그르다’와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이러한 18세기 경험주의 미학과 달리 칸트는 미적 판단은 감정 판단이지만 그것이 주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선험적인 보편적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칸트가 이 문제를 공통감 개념으로 해결했다면, 흄은 공감 개념으로 해결했다.

우리는 무엇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나?

흄에게 ‘미’는 기본적으로 대상에 대해 우리가 갖는 호의적이거나 비호의적인 쾌의 느낌이며, 이런 느낌을 갖게 하는 근원은 일차적으로 대상이 아닌 우리 마음에, 다시 말해 감정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적 반응은 단순한 감각적 만족이나 느낌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즉, 미는 단적으로 사물 자체에 있는 성질이 아니며, 그렇다고 오로지 마음이 단독으로 만들어내는 감정도 아닌 감각과 대상이 상호 호응한 결과다.

이처럼 흄은 미추의 감정을 대상에 발견되는 성질과 인간 본성의 구조로부터 생기는 반응에서 성립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관계적 속성에 대한 판단으로서의 미는 인상과 정념에서 성립하는 주관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정념이나 인상과 구분되는 특성도 갖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즉, 모든 대상이 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적 대상에는 그렇지 않은 대상과 구분되면서 우리에게 미적 쾌락을 일으키는 특성 또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흄에게 있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특성은 무엇일까? 바로 유용성utility과 편의성convenience이다. 그러나 유용성 역시 미적 판단에서만 발견되는 속성이 아니므로 좀 더 엄밀한 성질이 미적 속성 또는 미의 관계적 속성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단순히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면서도 아름다운 대상의 구분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엄밀한 성질이 감각과 결부된 정연함, 편의성, 구성 규칙, 안정성, 합목적성 등이다. 이 성질이 비록 어떤 실용적 편의성을 도모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보여주는 유용한 성질은 그런 목적과는 거리가 있는 속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미적 무관심과도 닮아 있다.

상상력을 통해
공감이 가능해진다

앞서 말했듯 흄에게 ‘미’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자의 반응적 교감을 가능하게 하는 고유한 상호 관계적 속성에서 성립하는 유용성의 감정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경험주의가 가지는 난점 가운데 하나는 비록 미적 판단의 대상이 최종적으로는 관계적 속성이라 하더라도 각 개인의 본성적 성향의 차이와 주관적 반응의 상이함에 따라서 한 개인이 내리는 판단도 상대적이며, 따라서 보편 판단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흄은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이런 흄의 태도는 미적 판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흄은 미적 판단에서도 취미의 기준에 기초한 보편 판단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흄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미적 판단을 공감 개념과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흄은 도덕의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미적 판단의 경우에도 편파성에 주목한다. 편파성이란 일반적으로 우리가 자신과 관계가 있는 대상, 그리고 보다 가까운 관계에 있는 대상에 대해 그렇지 않은 대상보다 더 관심을 갖는 성향을 말하는데, 미적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미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편파적인 성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는 인간 본성의 또 다른 능력이 있는데,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든 중요하고 눈에 띄는 것에 대해서는 가리지 않고 그것을 향하게 만든다. 한 정념의 대상이 다른 정념의 대상과 관련되어 있을 때 우리는 한 정념에서 다른 정념으로 전이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관념들의 경우에는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는다면 그 관념이 정념에 발휘하는 영향력도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극장 안에서 관객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겪는 일이 아님에도 공연에서의 사건이 마치 실제의 일인 것처럼 감정에 사로잡힌다. 관념일 뿐인 배우의 대사와 감정표현에 관객의 상상력이 개입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이 때문에 공감이 가능해진다. 관념의 형식으로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은 인상이다.

관객의 마음에서 인상은 곧바로 2차 인상 혹은 반성인상으로 바뀐다. 『비극에 관하여』에서 흄은 공감을 통해 감정을 교정하는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비극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곧 실제 상황에서 그에 적합한 감정으로 반응하도록 극을 통해 훈련하고 교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공감은 정서적 인상을 교정하도록 허락한다.

[su_quote]이처럼 미적 판단에 적용되는 흄의 공감의 원리는 그의 감성 미학 및 관계 미학을 넘어서 미적 판단의 보편성과 상호주관적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공감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는 토대가 된다. 흄에게 미적 판단은 보편 판단인데, 그의 공감이론의 하나의 예술작품에 대한 미적 판단의 보편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혹은 미적 감상이 개인마다 다를 수 있는 취미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적 비평의 대상인지에 대해서 잘 보여준다. (79쪽)[/su_quote]

이처럼 흄은 비록 미적 판단이 참과 거짓의 대상은 아니지만 공감의 능력과 함께 취미의 객관적 기준은 존재한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기준을 제시하고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하는 조건을 제시하는데, 바로 1) 대상을 예리하게 지각하고 식별할 수 있는 섬세함, 2) 비평의 감각을 키울 수 있는 부단한 연습, 3) 다양한 종류의 미를 올바로 평가할 수 있는 폭넓은 경험을 통한 비교 능력의 계발, 4) 작품 외적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생길 수 있는 편견의 제거, 5) 전체와 부분의 비교와 이해 등에 필요한 지적 능력으로서의 양식이다. 흄은 이런 미를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이 연습과 학습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다고 본다.

논문에서 저자들은 흄의 미학 이론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상호 관계적 속성으로서 넓은 의미에서의 미적 유용성, 인간 본성의 보편적 원리로서 공감의 능력, 그리고 다양한 비평적 취미의 계발 가능성에 기초해 예술 작품에 대한 해석과 보편적 소통의 원천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렇게 취미의 ‘기준’이 있다는 것은 곧 이성적 논의가 가능하다는 의미이므로, 미적 판단의 보편적 일치 가능성은 작품에 대한 유의미한 미학적 논쟁을 허용하며, 이를 통해 더욱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들은 공감 미학과 취미 비평에 기초한 객관적 해석학이 구체적인 모습이 된다면 흄이 그 모든 것의 원천이 될 것이라며 흄의 미학에 대한 높은 평가를 내린다.

*함께 읽으면 좋을 논문

「취미에 관한 흄의 견해: 미학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최희봉, 2012, 『인문과학연구』, 34, 393-415.

「미적 감정과 상호주관성: 칸트와 후설의 비교를 중심으로」
박인철, 2012, 『철학』, 111, 121-157.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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