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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는 세월호를 어떻게 다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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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_box title=”세월호 메모리얼” style=”soft” box_color=”#000000″ radius=”5″]DBpia Report R은 세월호 3주기를 추모하며, 학계의 세월호 연구를 논문리뷰 연재기획 “세월호 메모리얼”로 돌아봅니다. 우리 사회는, 우리 개인은 세월호를 어떻게 기억하고 겪어내고 있을까요? 4월 한달, 매주 한편씩 발행되는 논문리뷰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소개되는 논문전문은 리뷰 발행 후 1주일 간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세월호 메모리얼 1 >>> 친구잃은 학생들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세월호 메모리얼 2 >>> ‘사회적 고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세월호 메모리얼 3 >>> 미디어는 세월호를 어떻게 다뤘나?[/su_box]

logofinale세월호를 키워드로 가장 많이 살펴지는 논문은 상처, 고통, 트라우마에 대한 심리학적, 의료적 접근이다. 그다음은 ‘미디어’의 문제다. 초유의 사태였던 만큼 미디어 보도를 이모저모 살피고 분석하는 논문들이 많다. 그 중 세월호, 국가, 미디어(『언론과 사회』, 23(4), 2015)는 유독 눈길을 끈다. 부제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세월호 의견기사에 나타난 ‘국가 담론’ 분석” 때문이다. 단순보도가 아니라 신문사의 시각이 반영된 의견기사를 통해 ‘국가 담론’을 도출해 비교했으니 그렇다.

요즘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올라 있다. 그만큼 ‘국가’가 화두다. 세월호 사건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탄식 섞인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당연히 언론도 이 무능한 임무방기 국가를 다양하게 나무라고 다그쳤다. 보수의 아이콘 조선과 진보의 아이콘 한겨레는 어떻게 달랐을까.

 

[su_quote]이 글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세월호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국가’에 대한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y이라 할 수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단지 세월호 사건의 경과를 지켜본 국민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관념적으로만 떠오른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지식인들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다양한 논평 속에서만 그려진 것이 아니다. 그 질문은 국민들 내면의 탄식어린 추상적 물음이기 이전에, 또 지적·학문적 탐구를 동반한 지식인들의 성찰적 논리이기 이전에 저널리즘 미디어가 실제 사건의 추이에 따라 생산한 담론들의 중심점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세월호 사건이 야기한 정치적 위기 국면에서 집권세력과 대항세력은 격렬한 헤게모니 투쟁을 벌였고, 그 투쟁의 한 가운데 국가에 관한 이질적 담론들이 있었다.(7쪽)[/su_quote]

 

국가에 대한 ‘사회적 상상’의 정치학

사회적 상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생활하면서 그 방식과 결과에 대해 품는 규범적인 기대, 믿음, 이미지 등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사회적 상상은 사회적 실천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사회적 상상은 유물론적 환원론과 대척되는 지점에서 그 쓸모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적인 것’이 사회의 끊임없는 변전 속에서 수행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회적 상상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허위의식’으로 사회적 상상과는 다르다.

사회적 상상은 미디어가 만들어낸다. “예컨대, 미디어가 별것 아닌 노상강도(mugging)를 위협적인 존재로 반복해 보도하면서 사람들은 일상에서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이런 경험은 도덕적인 공황상태를 낳는다. 대중은 아주 현실적이고 비정치적인 듯 보이는 저널리즘 언어가 구성하는 사태 진행의 구체성 속에서 위기를 생생하게 경험하기에 이른다.” (11쪽)

 

도덕적 공황’과 ‘포퓰리즘식 법과 질서 운동’의 앙상블

또한 지배블록이 구사하는 전략의 핵심은 이와 함께 ‘허구적 해결책’에 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대중이 위기를 체감하게 만드는 한편, 특정한 적을 상정해 문제에 대한 허구적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공황 상태의 조성도 필요조건이다. 언젠가 진중권은 “한국 언론은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적을 찾는다”라고 한 적이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 도덕적 공황은 어떤 상황을 불러왔는가를 한번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 옷깃을 여미고 단속하는, 즉 “사회 규범의 강화를 요구하는 여론”으로 자라난다는 걸 우리는 경험한 바 있다. 이는 다시 사회 질서와 권위를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의 요구와 만나 과도한 법 집행과 같은 포퓰리즘식 ‘법과 질서 운동’으로 귀결한다는 게 저자들의 진단이다. 이 과정에서 저널리즘 미디어와 같은 ‘대중적 이데올로기 세력’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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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를 통해 드러난 미디어의 국가관

여당의 재보선 승리를 기점으로 조선일보는 급격한 논조 변화를 드러냈다. 세월호 사건이 여당에 대한 정치적 심판의 계기로 작동하리라는 일반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재보선 결과는 다시 ‘국민의 뜻’으로 해석되었고, 이는 세월호 유족이나 특별법 등에 대한 조선일보의 부정적 입장을 합리화하는 강력한 근거로서 소환되었다. 여기에는 대의민주주의에서의 선거 결과를 ‘민심에 따른 심판’과 등치시키며 무조건적으로 신성시하는 해석의 논리가 근본적인 버팀목으로 깔려 있었다.

반면 한겨레는 ‘재보선 승리, ‘세월호 면죄부’ 아니다’라는 8월 2일자 기사에서 “세월호 참사의 정확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대책 마련은 재보선 결과와는 상관없이 우리 앞에 주어진 절체절명의 과제다. (…) 이 과제는 선거 결과에 흔들릴 수도, 또 흔들려서도 안 된다”며 재보선 결과와 특별법 제정 문제의 분리를 강조했다. 재보선이라는 정치 이벤트가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의 전체적인 역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고, 그것이 다시 신문 담론들의 입장 분화로 나타난 셈이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대항담론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세월호 침몰사고의 발발 후 약 7개월 동안 사고의 성격, 원인, 수습 방안, 관련 특별법, 이후의 사회적 지향점 등을 차별적으로 의미화했다.

[su_quote]흥미로운 것은 조선일보가 내세우는 ‘선진국’으로의 도약 조건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신문은 세월호 사고가 ‘국제 경쟁에 노출되지 못한’ ‘뒤처진 분야’에서 발생했고, 거기 연루된 기업들이 ‘국내 시장에서만 사업을 해온 우물 안 촌뜨기 회사’였으며 관련자들도 ‘나라 밖에서 외국 경쟁자와 싸워본 적이 없는 내수형 인간’(칼럼 5.3)이었다고 지적한다. 기업과 개인이 신자유주의 시대 초국적 자본들의 무한경쟁 체제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세월호 사건의 주원인으로 거론하는 것이다. (38쪽)[/su_quote]

결과적으로 조선일보가 생산한 국가 담론은 “발전주의와 국가주의, 신자유주의를 복잡하게 착종시킨 형태”를 보여준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고 공공 영역을 축소시키면서도, 이념적으로 강력한 국가주의를 고수하는 분열적 양상”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표상하는 이상적 국가는 ‘선진국’을 지향하며 온 국민이 모든 일에 대한 자기 책임 아래 경쟁하고 일로매진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가깝다.

반면 한겨레는 “신자유주의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을 비판”하면서 대항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한겨레의 국가 담론은 근대적 정상국가, 복지국가의 지향을 드러내는 한편, ‘국가=정부=대통령’을 동일시하면서 국가권력을 의인화, 인격화하는 특징을 보인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많은 이가 말하듯, 세월호 침몰 사건은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국민들의 개탄과 분노를 낳았고, 이는 다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우리가 민주화를 통해 쟁취하고 구축한 국가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또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폭도’로 몰린 ‘국민’이 ‘국토’ 위에서 ‘국민’을 학살하는 ‘국군’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광주항쟁 이후, 국가의 형상과 존재이유에 대해 이토록 절실한 집단적 문제제기를 촉발한 사건은 달리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광주항쟁의 국민들이 상대한 국가가 민주화 이전의 군부 쿠데타 세력이 장악하고 주도한 기구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세월호 사건이 국민에게 남긴 정신적 충격과 상처는 한층 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떻든 형식적으로는 민주화된 ‘정상국가’가 국민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한(혹은 않은) ‘비정상적’ 사태로 인해 빚어진 참극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일관되지도 않고, 아주 정교하다고도 할 수 없는 저널리즘의 국가 담론은 그럼에도 사회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국가에 대한 막연한 상상을 구체적으로 소환하고 매개하는 한편, 그럼으로써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저자들은 세월호 참사가 초래한 지배세력의 위기를 한국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그에 대한 시민대중의 저항이라는 맥락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축적과 이윤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며 이에 근거해 강력한 사유재산권, 법치, 자유로운 시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유무역제도를 추구한다. 신자유주의가 확대되면서 이윤의 최대화를 위한 능률, 생산성, 경쟁의 가치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면서 국가 역시 경제적 효율성을 중시하게 된다. 공익을 위한 국가의 각종 규제는 ‘탈규제’의 교의 아래 해제되고, 공기업과 공적 자산은 사적 부문으로 전환된다. 물, 전기, 통신, 교통과 같은 다양한 공공재, 안전과 사회복지, 심지어 전쟁조차 신자유주의의 프로젝트인 ‘상품화’와 ‘민영화’의 포위망에 갇히게 된다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만약 마르크스가 요즘 드라마를 시청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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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얼마 전의 일이다.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해 느긋이 카페에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일군의 젊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 중이었다. 뭔가를 긴밀히 논의하는 모양새였는데 연예인 이름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한 드라마의 PPL과 관련된 것이었다. 귀가 쫑긋해져서 상황을 주시해보니 한 방송사 드라마 작가들과 국내 대형출판사 편집자들이 드라마 속 책의 노출 방식과 정도를 굉장히 세부적으로 논하고 있었다. 어떤 장면에서, 대화의 어떤 순간에서 어느 정도의 길이로, 어떤 자세 속에서 넣어달라는 식이었다. 양측이 자기 쪽에 유리하도록 끌어당기는 끈이 팽팽하고 치열했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등 PPL 출신
베스트셀러의 시대

드라마나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상품을 노출시켜 광고 효과를 노리는 것을 PPL(드라마 속 프로모션 상품배치, product placement)이라고 한다. 드라마 외주사는 출연료 등 엄청난 제작비를 메꾸기 위해 출판사로부터 노출 조건으로 최소한 억대 이상의 돈을 받아내야 하고, 출판사는 억대 이상의 돈을 들여 광고하는 만큼 반드시 효과를 봐야하기 때문에 시청자를 독자로 변신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드라마 「도깨비」는 PPL이 성공한 가장 최근 사례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들고 나온 책이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올랐고, 판매부수도 엄청났다. 출판사는 모험을 했지만 투자한 것의 열 배, 스무 배 이상의 효과를 보았다. 양측이 모두 행복했다.

그런데 ‘폭망’과 ‘개망’의 사례도 많다. 드라마 시청률은 제법 나왔지만 PPL로 들어간 책의 판매는 지지부진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PPL의 테크놀로지는 점점 첨단을 달리게 된다. 시청자의 몰입도와 감정선이 극대화된 지점에 ‘전혀 이질감 없이’ 흘러들어가 ‘독창적 메시지’를 조합해내야 한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작가, 연출가, 배우, 편집자는 ‘실력자’로 인정받는다.

이제 PPL은 단순히 생산자가 프로모션을 위해 상품을 드라마에 끼워 넣는 수준을 벗어나서 전체적인 드라마 내용과 제작을 지배하고, 나아가서는 프로모션 상품이 정해지고 그에 맞추어 드라마를 제작하는 수준으로까지 진화했다. 최근 이런 PPL의 문제를 작심하고 파헤친 논문이 있다. 김영욱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가 『한국광고홍보학보』 2017년 봄호에 발표한 「PPL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 해석」이 그것이다. “노동으로서 시청 시간과 물신 숭배를 통한 프로모션 사회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 PPL을 근본적인 사회구조적 문제로서 바라보고 있다. 「태양의 후예」 같은 개별 프로그램이 거론되긴 하나, 그보다는 이론적·개념적 요소들을 검토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PPL의 효용만 따지지 말고,
‘착취의 구조’를 보자

PPL을 바라보는 기존 학계의 시선은 프로모션의 전문성, 즉 효과를 따져보는 경우가 많다. 소비자 권리에 대한 해석들은 소수로 비판적 입장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이를 자본주의의 근본적 병폐로 바라보는 논의는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PPL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이를 거부하면 관련 종사자들의 다양한 이익 창출 행위의 중심고리를 허물어뜨려 드라마 제작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모두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간 PPL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나 비판이 제기되어오지 못했다. 김영욱 교수는 “기능주의적인 효과 연구에서 벗어나서 좀더 사회 차원의 문제, 즉 방송 구조의 문제, 커뮤니케이션 수단 소유의 문제, 이윤 착취의 문제, 시청자의 시청 노동 시간 증대 문제 등 좀 더 사회구조적인 입장에서 PPL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프리즘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데 생산관계, 교환가치 등 복잡한 논의들이 있지만 간단히 말해 PPL을 “노동과 노동착취”의 틀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PPL이라지만 기본적으로 쇼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일인데 갑자기 웬 노동착취인가.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래의 주장을 들어보자.

[su_quote]시청자들은 PPL을 시청하는 것이 노동의 과정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착취 구조 속으로 귀속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데올로기와 내용도 이러한 공짜 노동의 제공을 자연스럽게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Jhally & Livant, 1986). 이런 맥락에서 노동의 공간도 작업장에서 벗어나 일상생활 곳곳을 침투하게 된다. (68쪽)[/su_quote]

김 교수의 논문은 수용자 상품론(audience commodity)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방송사들이 시청 시간을 미디어 상품으로 판매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다시 말해 수용자가 아니라 ‘수용자의 시청 시간’을 상품으로 본다는 것이다. 프로그램 주체는 수용자의 시청 시간을 광고주에게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방송사의 수익은 광고주에게 수용자의 광고 시청 시간을 판매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시청자들, 거부감은 느껴도
기만성은 못 느껴

 

 

문제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온종일 일터에서 일하고 돌아와, 텔레비전을 틀면 마땅한 회피 수단이 없기 때문에 휴식 시간에도 끊임없이 광고를 봐줘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임금 노동과 공짜 노동으로 하루를 그물망처럼 짜놓았다. 나도 모르게 노동한다는 이야기다.

최근 한국언론진흥재단(2016)의 PPL에 대한 시청자 인식과 광고 효과 설문 조사에 따르면, PPL이 브랜드 인지도 향상(84.6%)에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PPL에 거부감(55%)을 느끼며, 드라마에 몰입하는 데 방해(58.9%)를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거부감을 이겨내는 데, 몰입하기 위해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PPL의 기만성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응답자(60.8%)가 별로 기만적이 않다거나 전혀 기만적이지 아니라고 응답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공짜노동을 해주면서 노동으로 인한 휴식의 왜곡효과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불가피성’은 이것을 더욱 고착화하고, PPL의 은밀하고 복잡한 메시지 전달 방식은 시청자 자유시간의 식민지화(colonization)를 유도한다.

SNS 사용자들이 사회적 편익을 붙잡으려고 사용을 강제당하는 측면이 있는 것과 같이, 방송 시청 행위도 보지 않게 되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인 관계 훼손이 두려워 강제되는 측면이 있다. “즉, 실질적인 강제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사회관계 속에서 이념적인 강제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su_quote]따라서 미디어 소비 문화의 편재성을 수용한다면 시청자의 시청 시간을 노동으로 보는 시각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의 형태가 다양해졌으며, 노동의 착취가 다층적이고 중첩적이며 새로운 체계하에서 이루어지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여가 시간에서도 원하지 않는 프로모션을 봐야 하는 노동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통용되는 공짜 노동이라는 개념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으며 착취의 강도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육체노동을 벗어난 다양한 유형의 노동을 상정한다면 노동으로서 시청 시간은 유효한 개념이다. (80쪽)[/su_quote]

방송-제작사 이중착취
구조

다음으로 이 논문이 문제삼는 것은 PPL의 이중 착취구조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외주제작사에 제작비를 적게 주고 드라마를 제작함으로써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보통 방송사들은 제작비 원가의 60∼70퍼센트 정도에서 외주 제작사에 제작을 맡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는 PPL을 통해서 제작비를 충당하는 구조다.

구조라는 얘기가 나와서인데, 이러한 구조에서는 프로그램의 내용은 철저하게 시청자 시청 시간을 가장 효율적인 광고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PPL은 메시지, 즉 프로그램의 내용이 자본주의 구조에 철저하게 귀속되는 그 지점에서 형성된다. 결국 프로그램 내용은 구조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 결국 방송사만이 시청자의 시청 노동 시간과 제작사에 대한 이중 착취 구조를 통해서 잉여 광고 시청 시간과 PPL 시간을 늘리게 되고, 이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게 된다. 방송사는 광고를 통해서도 이윤을 실현하고, 제작비 절감을 통해서도 이윤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모든 소비 대상은 사실상 사용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에 종속된다. 이러한 교환 가치 종속이 물신화를 더욱 자극하게 되고, 사람들은 주체적인 소비보다는 소비 대상이 결부되어 있는 의미와 신화에 탐닉해서 박탈당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상대적인 만족감을 얻게 된다. 우리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드라마 주인공이 입었던 ‘그 옷’과 읽었던 ‘그 책’과 먹었던 ‘그 음식’을 소비한다. 이제 드라마가 가졌던 사랑, 꿈, 청춘의 이상이 PPL의 대상에 투영되고, 대상의 사용 가치는 신화 속에서 의미를 상실한다.” (87쪽)

‘노동’ 개념 지나친 확장 아닌가?

김영욱 교수의 이번 논문을 읽고 드는 느낌은 우선,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는 점이다. 방송사와 외주사의 관계는 늘상 알려져왔던 것이고, PPL을 통한 이윤 추구의 극대화 또한 우리가 매번 일상에서 목도하고 있는 현상이다. 다만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고전적인 논의 구조 속에서 PPL 시스템을 명료하게 분석했다는 점 덕분에 독자로서 이 문제를 매우 짜임새 있게 정리할 수 있다는 미덕이 있다. 이 논문의 핵심이기도 한 ‘시청 노동’이라는 부분이 과연 ‘노동’의 개념적 재인식을 설득력 있게 촉구하고 있는지가 중요하게 토론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이뤄지는 노동의 유연화와는 또 다르게, 이것은 ‘노동의 액체화’라고 해야 할지 ‘노동의 기체화’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찌 보면 그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고전적 틀이 지금도 유용한 지배적 인식도구인 것처럼 합리화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여지도 남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광고자본주의 정치경제학」
김승수, 2011, 『방송통신연구』, 76, 9-35.

「TV 드라마 PPL에 대한 심리적 반발에 관한 연구」
오미영, 2011, 『한국언론학보』, 55(6), 384-409.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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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상상력, 백남준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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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의예술을 바꾸는 기술, 기술을 바꾸는 예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상상력과 기술철학(『인문학논총』, 34, 2014)에서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사례를 분석해 한 예술가가 어떻게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예술을 새롭게 재창조했는지를 보이고 있다. 또한 거꾸로 백남준이 예술을 통해 기술과 기술에 의해 지배 받는 현대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를 드러낸다.

기술과 예술의
이별과 재회

기술과 예술의 공통적인 기원은 art이다. 르네상스 시기와 17세기 과학혁명 시기에 art는 기술과 예술 모두를 지칭했으며, 당시 엔지니어나 예술가는 모두 특수한 숙련기술을 체화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던 art는 과학혁명기를 거치면서 현재의 과학, 기술, 예술의 범주로 분리되었다. 과학과 기술은 인문학과 예술에서 멀어졌으며, 예술 역시 과학기술과 멀어지고 인문학에 더 가까워졌다.

그 후 18~19세기 일부 예술가들이 과학과 기술을 예술의 소재, 대상, 매체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예술과 과학기술이 본격적으로 다시 가까워진 것은 20세기 이후이다. 20세기 예술은 대상을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것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한다는 제약에서도 해방되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적인 실험이 예술활동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과학과 기술이 이 예술적인 실험에 필수 요소로 도입되곤 했던 것이다.

백남준이
TV를 만나기까지
“피카소가 20세기 전반을 지배한 거인이라면 백남준은 20세기 후반 예술의 무게중심이다. 그의 상상력이 세상을 바꿔 놨다.” 2012년 12월에 <백남준 – 글로벌 비저너리>라는 전시를 개최하면서 미국 스미스소니언 아메리칸 아트 미술관의 엘리자베스 브로운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40쪽) ⓒ Cindydag

백남준은 기술을 예술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예술가였다. 저자는 백남준이 엔지니어처럼 기계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도, 기술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훈련 받은 적도 없었기에 엄밀히 말해 엔지니어도 철학자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의 관점도 함께 제시한다. 백남준은 당시 첨단기술인 비디오를 사용했으며, 로봇이나 비디오 이미지 합성기 같은 독창적인 기계의 발명에 기여하며, 비록 체계적이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기술과 예술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번득이는 영감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1932년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 현대음악에 흠뻑 빠졌다. 해방 후 일본유학을 가 음악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1956년 독일로 건너가 전위적인 새로운 음악 세계에 눈을 떴다. 당시 백남준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거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고 관객의 머리를 감기는 기이한 행위예술을 펼침으로써 자신의 예술 세계를 시작했다.

그런 그가 1961년 쾰른의 라디오 방송국을 방문하면서 최초 방송기술에 관심을 가졌고, “TV기술관련 책만 제외하고 모든 책을 창고에 넣어서 잠가버리고 오직 전자에 관한 책만 읽는”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그의 첫 전시인 <음악 전시회 – 전자TV>가 열렸다. 이 전시에서는 13대의 TV 모니터가 설치되었고, 백남준은 이 TV들의 내부회로를 변형해 독특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미리 어떤 이데아를 설정하는 구상 미술이 아닌 그때그때 변하는 ‘방식’에 대한 끊임 없는 실험이었다.

 

사이버네틱스와
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관심

백남준은 1964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문명의 발전사에서 미디어의 역할을 강조한 맥루헌Marshall McLuhan의 생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사이버네틱스는 유기체와 자동기계의 작동에 모두 “피드백에 의한 통제”가 공통적인 요소로 개입해 있음을 강조했다. 백남준은 TV의 음극관에 이미 피드백의 원리가 구현되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여기에 새로운 입력을 접속시켜서 굴곡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또한 관객들이 직접 예술에 참여함으로써 예술가들의 작업에 피드백을 넣는 인터렉티브, 혹은 쌍방향의 참여예술을 발전시켰다.

백남준의 “TV철학”에 영향을 미친 두 번째 요소인 맥루헌의 매체이론은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보다 매체 그 자체가 특정한 영향을 사회에 미친다”는 내용이었다. 백남준은 맥루헌의 이론에서 TV가 가진 예술적 가능성을 감지했으며, 이를 관람객의 참여가 피드백이 되는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연결시켰다. 백남준은 관람객이 자석을 이용해 기하학적인 곡선을 현란하게 춤추게 하는 <참여 TV>라는 작품을 1969년에 선보였는데, 이는 TV라는 매체를 훨씬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매체로 바꾸는 예술적 변형의 실험적 표현이었다.

 

TV에서 비디오로,
비디오에서 비디오 신디사이저로

TV는 방송국에서 제작한 내용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광고방송을 내보냈고, 시청자는 ‘소비자’로서 이런 광고를 소비해야 했기에 인터렉티브 매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중엽 대중용 비디오의 등장은 예술가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진보적인 예술가들은 비디오가 TV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피드백을 가능케 하며,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다. 비디오는 되감기, 빨리 감기 등을 통해 시간을 통제할 수도 있었으며, 과거를 녹화하는 데에도 사진보다 우수했다. 백남준 역시 TV를 비틀고 조롱하는 데 비디오라는 매체를 이용했다.

백남준은 1963년 부퍼탈 전시 직후부터 TV 이미지들을 합성할 수 있는 신디사이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상당한 수준의 엔지니어링 전문 지식을 갖춘 그는 마침내 엔지니어 슈아 아베Shyua Abe와 함께 비디오 합성기를 개발했다. 백남준이 이 합성기로 구현하려 했던 요소는 단순히 영상을 합성하는 것이 아닌 멀티 인풋과 아웃풋의 방식으로 열린 시스템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는 “관객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닫혀있지 않은 전자 환경” 혹은 “일종의 쌍방향 비디오 게임의 원형”이었다.

또한 백남준에게 이 신디사이저는 미학적으로도 만족스러운 것이었는데, 컬러영상이 가능해짐에 따라 캔버스에 물감을 통해 구현하는 회화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다이너믹하게 움직이는 영상을 재현할 수 있었다. 그는 1970년대에 자신의 영상합성기를 이용해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바로 이 시점에서 그는 가까운 미래에 비디오 아트가 전통 회화를 대체할 가능성을 목도했다.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가 현대 기술 사회에서 기술의 발전 방향을 뒤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으며, 사회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생각한 예술의 본령이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되어 있는 《다다익선》(1988년) ⓒ 최광모

 

기술시대의
예술의 역할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를 이용해 TV에서 쏟아지는 무의미한 영상을 변형하고 색을 입힌 뒤에, 이를 잘게 쪼개서 수많은 이미지를 쏟아냈다. 이것은 더 많은 정보를 생산함으로써 입력과잉 시대의 문제에 대응하는 전략이었다. 1970년대 이후 백남준 작품에는 아무런 의미도, 철학적 깊이도 없었다. 백남준이 만든 이미지의 소음들은 세상을 날것으로 보여주는 메체이자 메시지였다. 백남준은 TV가 그들의 삶과 가족의 대화를 지배하는지도 모르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 이게 너희가 사는 진짜 세상이야’라고 까발려주려 했던 것이다.

“기술은 그를 낳은 부모를 배반하는 자식이다. (…) 백남준은 이러한 기술의 ‘반역’을 잘 알고 있었다. 비디오 합성기나 비디오 아트 모두 세상에 던져진 순간, 통제할 수 없는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모두는 상업화되고, 탈정치화되고, 일상화되었다. (…) 이렇게 되면서 비디오는 어느새 오래된 기술(예술)의 일부가 되었고, 비디오 예술은 정보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첨단 기업들이 선호하는 장르가 되었다. (…)

예술과 일상의 간극은, 마치 첨단기술과 일상의 간극처럼, 벌어지고 좁아지고를 반복한다. 우리는 초기 비디오 아트의 급진성이 사라진 사실에 대해서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는데, 이러한 요동과 변화는 항상 새로운 세대에 의한 새로운 예술을 잉태하는 태동이 되기 때문이다. 백남준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시작된 비디오 아트는 예술의 일상이 되었고, 지금의 예술가들은 이를 비틀고 전복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듯이.” (62~63쪽)

저자는 백남준의 기술철학과 예술활동의 궤적을 통해 예술과 기술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재설정되고,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로써 독자는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이해함과 동시에 예술과 기술의 다차원적인 상호작용을 목도할 수 있다. 분리된 학문 간 다양한 융합이 시도되고 있는 지금 백남준이 보여준 과학기술적, 예술적 상상력은 중요한 학문적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세월호 참사’를 보도한 그들만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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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지난 2016년 3월 28, 29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진행한 ‘세월호 2차 청문회’는 ‘민관유착’이라는 한국사회의 병폐를 여실히 드러낸 채 마무리되었다. 참사 2주기를 맞아 이처럼 청문회 보도를 비롯한 세월호 관련 보도가 이어지는가 하면, 다른 편에서는 본 이슈의 ‘피로도’를 강조하며 적당한 마무리를 촉구하기도 한다. 뉴스 수용자들의 인식은 언론보도에 영향을 강하게 받고 때로는 그 영향이 정책에 반영되기에 객관적인 학술 연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태원 뉴시스 기자와 정정주 경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의세월호 참사에 대한 시기별 뉴스 프레임 비교 연구(『사회과학연구』, 27(1), 2016)는 ‘세월호 참사’ 후 이어진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두 언론사의 보도양상을 정치하게 분석함으로써 관련 연구의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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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사고 현장에서 탐색구조작전을 펼치고 있는 해군 함정과 헬기 ©촬영: 김태형 기자

 

프레임으로 바라본
세월호 참사

사물 전체를 한꺼번에 파악하거나 조망할 수 없는 인간의 인지적 한계 때문에 언론은 특정한 논리적 틀을 사용해 다양한 사실 중 특정 사실을 더 중요하게 인지하도록 유도하거나 자연스럽게 무시하도록 한다. 이것을 ‘프레임frame’효과라고 하는데, 뉴스 수용자는 담론의 가장 중요한 논리적 영역에 해당하는 프레임을 통해 특정한 사건을 이해하는 경향성이 생기며, 실제로 언론의 프레임을 넘어 대안적인 프레임을 형성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미디어 보도 프레임 연구를 통해 우리는 언론 보도가 사회적 담론화 현상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논문에서 두 저자는 이러한 프레임 연구를 바탕으로 세월호 참사가 어떻게 보도되었는지 분석한다. 다만 ‘재난’ 혹은 ‘참사’라는 하나의 주제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기존 프레임 연구에서 나아가 정치적 성향이 다른 두 언론사 즉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사회적 성격이 강한 참사 보도에서 정치적 담론화에 이르기까지 강조한 이슈와 프레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각 단계의 변화와 차이점을 구분한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보도양상 차이

저자들은 세월호 참사를 시기에 따라 세 단계로 분류하고, 이 기간에 각 신문의 보도 내용을 분석했다. 저자들이 이러한 설계를 한 이유는 시기별로 발생했던 주요 사건이나 수사 방향의 전환점 등을 통해 두 언론사가 각각 중점 보도 프레임을 달리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기 때문이다. 과연 그랬을까?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 세월호 참사에 관한 보도 과정이 연구 논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 본 리뷰에서는 논문의 결론 부분을 요약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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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206쪽
한겨레는 정부책임론
조선일보는 유병언책임론

비판의 대상과 그를 향한 메시지 명시 정도에서도 두 언론사는 차이를 보였다. 조선일보는 1단계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일부 정부에게 물었으나 2단계 들어 유병언과 청해진 해운에 그 책임의 화살을 돌렸고, 세월호 특별법이 부각된 3단계에서는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사건공시성’의 중립적 보도에 초점을 맞추어 논조를 드러내는 것을 지양했다. 반면 한겨레는 1단계에서 정부책임론과 구조수습논란에 대해서도 높은 비중으로 보도를 하긴 했지만, 책임공방 단계인 2단계에서는 조선일보와 달리 유병언/청해진 해운 비리보다 정부책임론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언론의 오보문제를 함께 다룸으로써 언론 스스로의 자기비판 및 성찰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어 3단계에서는 세월호 특별법 관련 보도가 세월호 관련 해석이나 단순사건보도에 비해 상당히 높았는데, 저자들은 세월호 특별법이라는 법적 틀을 통해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정부의 책임이나 구조수습 과정에서의 논란을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았다.

조선일보가  상대적으로 적게 보도

먼저 보도의 양에 대해 살펴보자. 단계별 분석에서 1단계는 기간 대비 상당히 많은 양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는 초기 단계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보도 중요성을 두 언론사 모두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발발과 구급구조 단계에서 벗어난 2단계에서는 진실규명과 책임공방 등에 관한 보도가 함께 이루어졌다. 이 기간에 두 언론사는 모두 종합, 사회, 정치, 문화 등 전 카테고리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보도했는데, 특히 청해진 해운 비리와 유병언 부자父子를 포함해, 구원파 논란 등으로 그 이슈의 스펙트럼이 넓어짐에 따라 다양하고 많은 분야에서 기사가 생산되었다. 두 언론사의 차이는 ‘세월호 특별법’ 논의에 대한 보도가 주로 이루어진 3단계에서 나타났다. 한겨레에 비해 조선일보가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보도를 내보낸 것이다. 저자들은 세월호 특별법과 세월호 관련 이슈를 다방면에서 중요 이슈로 다루고 있는 한겨레와 달리, 조선일보의 경우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를 정치적인 이슈로만 국한시킨 경향 때문인 것으로 판단했다.

조선일보는 ‘세월호 특별법’의 국회 표류 등에 대해 여야 정치권을 비난하기보다는 여당과 야당 혹은 유족과 정치권의 대립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 데 반해 한겨레는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지지부진한 논의의 진전을 촉구하는 비판적인 보도가 많았다. 또 조선일보가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사안 그 자체만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사건 공시 프레임’으로 다룬 것에 비해 한겨레는 이슈 배경과 발생원인, 그 해결방법 등을 포함한 ‘서사적 프레임’을 중점 보도해 세월호 특별법이 결국 해당 참사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 참사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밝히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su_quote]언론 보도의 정치적, 사회적 담론화와 관련해 주목한 부분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진실규명/책임공방의 의무와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지에 대해 두 언론사가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겨레에서는 단계가 진행돼도 ‘정부책임론’이 ‘유병언/청해진 해운 비리’보다 일관되게 더 높은 비율을 보인 반면, 조선일보에서는 1단계에서 ‘정부책임론’ 이슈가 낮은 비율로나마 언급되었고, 2단계에서 청해진 해운과 유병언 비리에 방점을 두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보도 프레임의 차이는 우리가 다양화, 다원화된 특정 틀을 가지고 공적 영역의 논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즉 미디어를 통해 사회현실을 인지하고 해석을 공유하는 우리 사회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세월호 침몰 사건과 관련한 다양한 의미구성의 준거 틀 속에서 연관된 이슈를 생성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며, 논제의 담론화를 통해 적절한 실천방안을 구상한다는 것이다. (200쪽)[/su_quote]

[su_quote]만약 세월호 참사가 단지 하나의 포괄적인 사회적 이슈로서의 재난보도로 종결되었다면 양 언론사는 뚜렷한 정치색을 보이지 않고 세월호 참사의 원인, 수습 진행 과정, 책임 소재 파악, 향후 위기 대처 방안 논의 등에서 보도하는 데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특별법’이라는 정치적 어젠다를 통해 양 언론사는 보수와 진보 진영의 대표지로서 의견을 함께하는 정당을 중점 보도하고 이견을 보이는 상대방에 대해 재난보도 프레임이 아닌 정치적 투쟁 프레임과 흡사한 모습을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20쪽)[/su_quote]

논문 안에서 두 저자는 그간 이루어진 국내외의 프레임 이론과 연구논문을 문장마다 촘촘히 제시하고, 본격적인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연구의 의의를 충분히 밝힌다. 데이터를 산출하는 과정 역시 자세하게 나와 있기에 신뢰성이 높고, 많은 노력이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는 논문이다. 2년이 지난 지금 세월호 참사가 재난 보도에서 정치적 양상으로 넘어가는 두 언론의 변화 모습을 통해 세월호 참사를 좀 더 냉정하고, 능동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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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카이브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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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정치를 대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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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최초의 이미지 선거라고 일컬어지는 1960년대 케네디와 닉슨의 대통령선거는 정치인에게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포문을 연 선거이자, 정치인은 공약으로만 승부하지 않는다는 첫 사례가 된 선거였다. 케네디의 자신감 넘치는 시선 처리와 활기차고 잘 정돈된 외모, 심지어는 그가 입은 의상까지, 닉슨의 초췌하고 추레한 모습과 비교되면서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후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메이킹은 선거운동의 핵심적인 전략으로 받아들여졌다.

국제대학 조교수 박선영「정치인의 이미지가 유권자의 후보자 선택에 미치는 영향: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과정을 중심으로」(『법학연구』, 16(1), 2016)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정치인의 이미지를 통해 선거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한다.

정치인의 이미지와
적격성의 관계

이 논문에서 필자는 유권자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편견, 즉 ‘후보자의 얼굴’이 그 후보자가 정치적으로 적격한 인물인지 판단하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실험한다. 논문의 필자는 국내의 정치 상황에서 전개되는 논란을 막기 위해 미국의 대통령 예비선거과정을 중심으로 논의를 시도하는데, “무엇보다도 선거 유인물상의 정치인 얼굴에 나타난 이미지로부터 선거 결과를 미리 추론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다.

[su_quote]인간은 모든 대상에 대해 일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인식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대상을 평가하거나 대상에 대한 태도를 형성한다. 심리학은 이를 인지(認知)라고 설명하고 이는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정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후보자 인지는 지지할 후보자를 선택하고 후보자를 평가 및 판단하며, 나아가 지지할 후보자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su_quote]

유권자는 정치인 개인에 대해 알지 못한다. 따라서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정치인 이미지가 정치인의 실체를 대신하게 되며, 이로 인해 실제의 정치인보다 정치인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이다.” 유권자들의 이런 경향을 증명하기 위해 논문의 필자는 “웰링턴(Wellington)의 빅토리아대학, 남(南)호주대학, 웰링턴의 여자대학 그리고 뉴질랜드 고등학교, 마지막으로 미국 오클라호마 중부대학”에서 2007년 5월부터 8월 중순까지 실험참가 학생들에게 후보자들 각자의 사진을 단 한차례만 보여주면서 사전지식이 있는 후보자는 제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사진을 보고 정치인으로서의 적격성 여부를 판단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07년 9월 초 민주당 후보자들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의 인지도를 통한 적격성과 순위 사이에 강력한 연계점”이 발견됐다. 이는 논문의 필자가 참고했던 선행연구에서 유권자들의 적격성에 대한 평가가 선거결과와 정확하게 69퍼센트 일치하는 것으로 예측된 것과 비슷한 결과였다.

이 결과는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기회를 보다 더 증가시키기 위해 적격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후보자를 정당후보자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상업용 물품의 시장지배 전략이나 판매계획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포장이 매출액 달성에 있어서 하나의 변수를 이룬다는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권자들은 신뢰나 믿음을 주는 외모와 차림새로 그의 정치적 적격 능력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좀 더 장기적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 지어버릴 수만도 없다. 유권자들은 분명히 정치인들의 이미지를 통해 적격성 여부를 판단했지만 처음의 판단이 끝까지 지속되지는 않았다. 처음에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던 정치인이라도 유권자들에게 많이 노출되면서 오히려 이미지가 반감되는 경우도 많았고,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선거운동을 계속할 능력, 다시 말해 유권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킬 만한 조직력과 선거자금이 없을 때는 아무리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실제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정치인이라도 유권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선거운동에 더 돈을 많이 쏟아 부은 후보가 자신보다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후보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경우도 있었다.

현혹될 것인가,
통찰할 것인가

결과적으로 선거에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많고, 특정한 기준이 후보자를 당선시킨다고 규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정치인 개인의 이미지가 하나의 공약이며 정당의 얼굴이자 정책이 된다는 점이다. “정치후보자의 이미지는 유권자의 주관적인 평가와 후보자가 전하는 객관적인 메시지(주제, 말씨, 속성, 품질)에 근거하여 유권자가 가지는 후보자에 대한 지각(知覺)이다. 최근 선거에서 당락을 결정짓는 요소는 정책적 이슈가 아니라 유권자에게 비쳐지는 후보자의 이미지”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유권자들이 정치후보자들의 정책이나, 아이디어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이 예측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기준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이때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미디어인데 미디어는 현직 정치인뿐만 아니라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식과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이 미디어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것을 규합하여 한 정치인을 지지하기까지에는 다양한 개인적 이유와 배경이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정치적 속성에서 ‘미디어’와 ‘이미지’는 다소 부정적으로 인식되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통찰하느냐는 유권자들의 몫이다. 정치인의 ‘이미지’는 모두 거짓이며 가식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그 이미지의 전략 안에 이미 정치적 방향성이 제시되어 있다. “이미지 정치는 각 정당이 추구하는 목표와 지향점을 짧은 시간 안에 유권자에게 전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때로는 각 정당이 추구하는 정강 정책의 실상과 동떨어진 이미지로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도구”로 이미지가 활용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정치인의 ‘이미지’를 모두 걷어낼 수도 없고, 그 ‘이미지’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선거 출마 후보자가 선거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미디어 등을 통해 표방하는 ‘이미지 정치’의 실상”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는 이성일 것이다. 정치인의 이미지 안에서 그들의 정치적 방향성을 찾아내느냐, 아니면 그 이미지에 현혹되어 정치인의 실체를 놓치느냐는 너무나 크고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미지에 현혹된 선거의 결과가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으므로.

  •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정치인 이미지 구성 요인과 유권자의 투표 행위」
김재범·최믿음, 2013, 『광고연구』, 98, 154-183.

「유권자의 제3자 효과 지각 연구: 후보자 이미지와 후보 선택에 미치는 미디어 효과를 중심으로」
설진아·김활빈, 2008, 『한국언론정보학보』, 42, 79-106.

최은영 리뷰어  octovemb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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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전략: 무엇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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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미국의 선거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트럼프의 정치적 가능성에 대해 어림도 없다고 코웃음쳤었다. 그러나 지금 제 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의 행보는 그야말로 승승장구 그 자체이다. 언론과 선거전문가들의 모든 예측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 트럼프가 보여준 일련의 이변을 가리켜 ‘트럼프 현상’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어떻게 하여 지금의 지지와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미디어혁명’이 파괴한 ‘위선의 제도화’: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본 ‘트럼프 현상’」(『사회과학 담론과 정책』, 9(2), 2016)에서 직거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미디어 혁명’으로, 기존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위선의 제도화’를 파괴함과 동시에,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게 된 일련의 과정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다.

‘트럼프 현상’
: 트럼프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저자는 기존 트럼프에 대한 여러 시각들보다 다음과 같은 시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su_quote]트럼프에 대한 연구도 트럼프 개인이 혐오할 만한 행태보다는 그런 행태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지와 인기를 누리는 이유에 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2쪽)[/su_quote]

트럼프가 성공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트럼프를 비판하기만 하는 것보다 미국 내의 정치적 냉소를 바탕으로 번성하게 된 ‘트럼프 현상’의 책임을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에만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트럼프 현상’을 커뮤니케이션의 관점, 즉 의제 설정(agenda-setting)과 수사적 스타일(rhetorical style) 중심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가설을 내리고 있다.

[su_quote]‘트럼프 현상’의 근저에는 지난 40년간 미국을 지배한 ‘정치적 올바름’과 그에 따른 ‘위선의 제도화’, 그 토양 위에서 구축된 ‘플랫폼 정치’와 양극화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 그리고 이 문제의식을 행동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게 한 SNS를 중심으로 한 ‘미디어 혁명’이 있으며, 트럼프는 이 조건들을 이용하는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오늘의 위치에 오르게 됐다.(3쪽)[/su_quote]

트럼프와
‘정치적 올바름’

미국 내에서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의 역사는 과잉의 연속이었다. PC 운동은 과격한 경향을 띠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PC’에 진절머리를 낼 지경이었다. 이때 트럼프가 등장했다. 그는 ‘PC’에 대한 영향력 있는 공격수였다. 사람들이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며, 자신이 그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다. 트럼프는 ‘PC’와는 정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는(telling it like it is)’ 것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고, 지지자들은 바로 그 점에 열광했다. 이전에 이러한 캐릭터가 없지는 않았지만, 트럼프는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위선의 제도화

오랜 PC 운동으로 미국은 사회 전 부문에 개개의 규정으로 형식화될 수 있었고, 제도화될 수 있었다. 정치 영역에서도 ‘최소한의 PC’가 정치인들의 담론을 규제해 왔으며, 이는 법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과정과 결과를 위선의 제도화로 볼 수 있겠지만, 위선의 제도화가 순전히 PC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su_quote]위선의 제도화는 사회 전 분야의 작동방식과 거버넌스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이러한 차원에서 “에델먼(Edelman, 1964)이 역설한 ‘정치의 상징적 이용(the symbolic uses of politics)’이야말로 정치가 담론의 세계에만 머무르는 위선의 제도화를 웅변해준 것으로 볼 수 있다.(8쪽)[/su_quote]

트럼프는 그러한 현실을 파고 들었다. 트럼프는 말만 앞세우는 기성 정치인들을 지목했다. 자신과 기성 정치인의 차이점은 자신은 행동을 하는 반면, 기성 정치인들은 행동에 관한 말만 하고, 자신과는 달리 진실을 듣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국민에게 진실을 말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인들은 ‘해가 뜰겁니다. 달이 질 겁니다. 온갖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국민은 그런 감언이설(甘言利說)은 필요 없다. 실천을 원하고, 일자리를 원한다”라고 강조하였다.

트럼프는 사석에서 소위 막말 논란이 많았으나, 그는 다른 정치인과는 달리 내뱉은 말을 철회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까지 한다. 지지자들에게는 이는 되려 ‘담대함’, ‘진정성(authenticity)’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실제 어떤 공직자나 기업이 옳은 소리를 늘어놓다가 실제로 저지르는 언행불일치에는 상대적으로 침묵하는 반면, 실제로 차별적인 발언을 조금이라도 늘어놓거나 하면 분노한다.

[su_quote]부당한 차별이 광범위하게 저질러지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걸 체념해 받아들이다가 어떡하다가 차별의 의도와 증거가 나타나야만 사회적 분노가 폭발하는 현 방식은 트럼프 현상을 다시 볼 것을 요구한다.(9쪽)[/su_quote]

‘플랫폼 정치’와
양극화

미국 내의 정치적 양극화(공화-민주의 당파주의)는 ‘두 개의 미국’, ‘제2의 남북전쟁’ 등의 말까지 나올 정도였고, 미국인 절대다수는 정치적 양극화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트럼프는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누가 트럼프에게 ‘분열주의 정치’를 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으며, 트럼프를 보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 주범이라 할 수 있겠는가? 기성 정치가 곪아 있는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 대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아주 고약한 방법으로 그런 현상을 까발리고 나섰고, 그래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건 물론 광범위한 지지까지 누리게 되었다.

트럼프의 지지층에는 특정 직업, 종교로 묶인 집단을 찾기 어렵다. 도시, 농촌, 지역, 민족 등 특정 계층을 기반으로 하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대단히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지지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기존 우익 포퓰리즘과 트럼프의 차이라 할 수 있는데, 동시에 이것이 트럼프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이 구사되는 배경이다.

트럼프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트럼프의 공약은 역대 공화당 후보,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과 비교해봤을 때 대체로 중도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그가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정면으로, 정직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그의 막말을 비교적 사소한 문제로 간주했다. 그가 제시한 공약의 6대 이슈를 살펴보자.

1. 일자리와 이민
트럼프 자신은 오직 불법 이민에 반대할 뿐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또한 일자리와 관련하여,  트럼프는 중국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관세를 올려 우리의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유명하다. 일자리 문제는 일반 유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이며, 다른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외면하거나 미온적인 정책을 내놓는 반면, 트럼프는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데에 일조하는) 중국을 ‘흡혈’, ‘강간’ 등의 거친 언어로 공격하였다. 이에 후련함을 느낀 유권자들에게 그가 구사한 언어의 품위 결여는 오히려 진정성의 증거로 여겨졌다.

2. 테러 방지
일부 이슬람 사원 폐쇄, 미국내 무슬림들의 의무적 등록과 데이터베이스화 주장 등, “IS 등의 테러리스트를 잡을 때는 그들의 가족을 공격해야 한다”라는 등의 과격한 주장은,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2015-2016년 세계 각지에서 연쇄적으로 이어진 테러의 영향으로 여론조사는 트럼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3. 금권정치 비난
트럼프는 “고액 기부자, 특수이익 관여자, 로비스트들이 국민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며 “이들은 흡혈귀(bloodsuckers)”라고 비난하는 등 금권정치의 종언을 자신의 주요 이슈로 내세웠다. 이는 경쟁자들에 비해 비교우위를 누리면서 그들을 썩은 정치인으로 매도할 수 있는 이슈이기도 했다. 트럼프가 억만장자라는 사실이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부자이기 때문에 부유층의 기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운 것이다.

4. 월가 비난
트럼프는 빈부 양극화의 주범으로 간주된 월가를 집중 비판함으로써, 월가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갖는 민심(60% 이상)에 화답했다. 트럼프의 월가 비난은 부자 증세, 전 국민 건강보험지지 등의 정책으로까지 이어졌다.

5. 강한 미국
트럼프는 글로벌리즘보다 미국 우선의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 미국주의)를 새로운 신조로 삼을 것을 공약했다. 특히 외교적인 부분에서 엄청난 투자를 쏟아부으면서도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등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면모가 사라지고 있다고 개탄한 것이다. 또한 한국, 독일, 일본 등을 경찰처럼 방어해주고 있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미국인의 ‘신 고립주의적’ 시각은 이미 만연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트럼프의 주장이 일정한 호응을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6. 언론 비난
미국 언론은 약 2/3정도의 국민이 반감을 표할 정도로 불신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su_quote]트럼프는 자신의 막말을 중계하게 해 홍보 효과를 누린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언론을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명예훼손에 따른 배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권자들로부터 언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용감한 정치인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20쪽)[/su_quote]

 

 

‘트럼프 현상’과
미디어 혁명

트위터에 700만, 인스타그램에 100만 명이 넘는 팔로어를 거느린 트럼프는 온라인에 자신만의 뉴스룸을 구축했다. 트럼프는 소문난 SNS광이었는데, 하루에도 십수건의 게시물을 올리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보기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한 셈이었다. 분명히 이러한 행보는 기존의 선거 역사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며 여러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선거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su_quote]CNN은 케네디가 ‘TV 대통령’이고 오바마가 ‘인터넷 대통령’이라면 트럼프가 ‘소셜미디어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 했고···(22쪽) [/su_quote]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힐러리는 트럼프에 비해 대중의 흐름을 잘 읽지 못했고,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더 강한 사진 한 장으로 자신의 어필하고자 했던 트럼프는, 대중의 흐름을 잘 꿰뚫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소셜미디어는 트럼프가 누릴 수 있었던 특별한 기회였다. 대중의 정보 획득, 입소문 전파, 신문과 TV 등 전통 미디어가 모바일 SNS에 압도당하는 ‘미디어 혁명’이 트럼프의 대선 도전 시기에 성숙 단계 또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는 분명히 트럼프에게 좋은 타이밍이었다.

‘트럼프 현상’이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

트럼프 현상은 한국 사회에 주는 핵심적인 교훈은 무엇일까? 바로 ‘엘리트층이 몰랐거나 외면했던 미국사회’처럼, ‘엘리트층이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처음 트럼프를 두고 미국의 엘리트층이 그를 조롱거리로 치부했다는 것은, 40%에 육박하는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분노, 불안, 좌절을 몰랐거나 외면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점에 대해 성찰하기보다 트럼프를 비난하고 개탄하는 데에만 열을 올렸다.
한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su_quote]엘리트층의 정확한 사회 인식을 가로막는 위선의 제도화에 대해 그 어떤 판단을 내리고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그 어떤 출구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떤 지도자나 책임자가 입으로는 차별에 반대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자신의 책임 하에 있는 조직이 엄청난 차별을 저지르는 것을 방관하는 기존 의식과 행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25쪽)[/su_quote]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최근 한국에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트럼프 현상으로 본 미국 고립주의의 본질과 재현 가능성 전망」
이선희·김중완·정한범, 2016,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8(1), 281-314.

「미국과 한국의 뉴미디어민주주의에 대한 비교연구 : 한국 선거에서의 인터넷·SNS 활용과 변천을 중심으로」
이처문, 2016, 『사회과학연구』32(2), 167-187.

최종원 리뷰어  zwpow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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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매체가 성매매를 바라보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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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성매매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논란이 일 때마다 우리는 늘 남성의 성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이중성과 성매매 여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치열한 논쟁을 접할 수 있었다. 성매매특별법에 관련한 지난 리뷰,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의「성판매자 비범죄화를 위한 시론」에서는 젠더폭력과 페미니스트 정의의 관점에서 성매매 비범죄화라는 현실적 제안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성매매 비범죄화를 주장하지만 한 측에서는 성노동권이 인정되면 성매매 여성의 인권도 신장될 것이라는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성매매를 바라본다. 이렇듯 성매매와 관련해서는 첨예하고 다양한 의견이 교차되고 있다. 이러한 충돌이 단순히 대립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대안모색과 현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실증적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홍지아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미디어를 통한 성매매의 의미구성」(『한국여성학』, 31(3), 2015)에서 2004년 9월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10년 동안 보도된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네 언론사의 성매매 관련 기사의 내용분석을 시도한다. 그 분석을 통해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에 대해 각 언론사가 되풀이하는 의미 구성 전략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신문매체는 어떻게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을 재현하는가?

미디어의 영향력을 설명하는 근거로 저자는 버거와 루크만Berger & Luckmann의 고전적인 지식사회학을 언급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언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외부와 소통(외재화)하고 인간에 의해 일정한 질서와 형태를 갖춘 사회는 객관화된 실재로 권위를 획득하며 개인은 다시 이러한 사회적 질서를 학습하고 내재화한다. 즉 타인과 공유되는 사회적 지식은 단순한 정보의 차원을 넘어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 행동규범,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행위와 그렇지 못한 행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구체화되어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훈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근거를 토대로 저자는 본 논문이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 개인이나 집단을 향한 사회적 인식이 가치중립적인 사실이 아닌 사회문화적인 구성물이라는 주장과 이러한 구성의 과정에 미디어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구성주의적 시각의 이론과 선행연구들의 사례를 통해 설명할 것이라고 밝힌다. 또한 성매매와 성매매여성에 대한 사회적 지식형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각 언론사의 의미구성 노력이 어떠한 이론적 토대에 근거하는가를 보다 거시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론적 평가가 아닌 차이의 소개 및 설명에 주력하겠다고 말한다.

성매매의 의미구성과
미디어의 역할

저자는 “현대의 개인이 교류하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타인은 미디어”라고 설명한다. 짜인 일상대로 24시간을 소비하기에 바쁜 개인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가상의 실재를 통해 지금, 여기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는 객관적 실재로서의 사회를 접한다. 그러므로 단발적 혹은 지속적 재현을 통해 일상의 현실을 걸러내고 틀 지우며 우리의 상식을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근거를 제시하는 미디어의 영향력은 미디어 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다. 이런 맥락에서 특정한 사건이나 사안에 대한 주류매체의 의미구성 전략, 보수매체와 진보매체의 서로 다른 의미구성 전략의 비교 분석은 미디어 문화연구의 대표 연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저자는 성매매특별법의 등장 이후 성매매에 대한 미디어의 의미구성 전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본다. 기사의, 주제, 인용하는 취재원의 출처와 유형, 기사에 사용되는 구체적인 용어의 특성 등을 살피며 질적 분석과 함께 유형별 기사의 양을 파악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저자를 포함, 두 명의 코더가 같은 기사를 번갈아 읽어가며 합의에 따라 유형을 분류했으며 유형별 분석이 끝난 후에는 저자 단독의 추가 논의가 진행되었다.

성매매특별법 기사에 대한
유형별 분석

저자가 분석한 대상은 성매매특별법이 제정, 실행된 2004년 9월 1일부터 2014년 9월 30일까지 총 10년의 기간 동안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4개 신문의 성매매 관련 기사이다. 분석 결과, 저자는 전체 기사의 내용을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논문 231쪽, 기사 수가 적은 노인성매매는 따로 분석에 포함하지 않았다.

 

1) 성매매 사건사고

이 유형으로 분류된 것은 성매매특별법에 의한 성매매 단속, 성매수자의 처벌, 포주 등 성매매 사업주의 구속 및 처벌, 집중적 단속 지역인 성매매집결지에서 벌어지는 폭행, 납치, 방화, 사기 등의 범죄 기사이다. 기사는 각종 범죄의 직간접적인 배경으로 성매매를 다루는데 특히 포주와 경찰의 유착, 미성년자 강제 성매매 및 여성 인신매매 등의 기사가 주를 이룬다.

저자가 흥미롭게 여기는 부분은 성매매 사건사고 기사의 경우 네 언론사가 공통의 사건을 다루기보다 기사 선택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가령 다른 신문사에 비해 권력형 비리에 무게를 두는 경향신문은 경찰청장 가족의 성매매 유흥업소 관여, 청와대 행정관 성매매 사건 등 타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거나 단신보도에 그치는 사건을 정치적 비리 고발 기사로 추적 보도한다.

어느 사건을 보도할 것인가는 언론사 나름의 편집원칙에 따른 것이지만 전체적인 공통 사항은 성매매여성이 어리거나 신체적 학대의 정도가 심할수록, 성매매 행위가 변태적일수록, 성매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범죄의 정도가 엽기적이고 잔인할수록 기사화되는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미성년 성매매의 경우에는 여성이 성매매를 강요당한 기간과 성매매 횟수, 벌어들인 액수를 구체적으로 나열하거나 성매수 남성의 나이와 직업을 보도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2) 성매매 특별법 실행에 따른 세부정책 소개

이 유형의 기사는 성매매특별법이라는 특정 법의 실행에 따른 성매매 현장의 변화, 법의 후속조치를 보도하는데 비중을 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분류하자면 성매매특별법의 실행 이후 실시된 성매매에 관한 통계 및 설문조사, 성매매 여성에 대한 보호 및 자활지원책, 성매매특별법이 실행된 이후 성매매근절 및 단속을 위해 이루어지는 추가대책, 존스쿨 제도나 군대 성교육 등 남성에 대한 반성매매 교육제도의 소개가 그 내용이다.

조선일보의 성매매 여성 자활지원책에 대한 보도가 4건으로 타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특징이며, 성매매특별법이 실행된 이후 성매매근절 및 단속을 위해 이루어지는 추가대책에 대한 보도는 사실을 나열하는 단신형 기사가 대부분이고, 언론사별 특정한 차이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3) 성매매 피해여성의 자활과 갱생

성매매 관련 기사에서 언론의 관심은 성을 판매하는 여성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 (1)에서 범죄나 사건사고에 개입된 범죄자, 혹은 피해자의 모습으로, (2)에서는 성매매특별법에 따른 보호 및 자활지원정책의 대상자로 등장하는 것에 비해 (3)유형에 해당하는 성매매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가진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가명이긴 하나 17살 은영이, 대학에 합격한 소영씨 등으로 등장하며 그들의 구체적인 인생이야기가 기사의 주요 소재로 다루어진다. 가정환경, 성매매를 하게 된 이유 등은 다르지만 이들 서사의 공통점은 성매매를 그만둔 이후 달라진 삶의 가능성이다.

저마다의 불행한 이유로 성매매의 길에 들어선 이들의 서사는 탈성매매 이후 대학에 진학하거나 피부관리숍 사장이 되거나 도자기나 퀼트를 배우며 쇼핑몰 개업을 준비하거나 혹은 평범한 회사원과 결혼해 아기엄마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탈성매매 이전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것만큼 탈성매매 이후 이들은 ‘밝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아침에 눈뜨면 설레는 삶을 사는’,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변화한다.

이러한 유형과 대비되는 기사는 2005년 3월 22일 한겨레 기사가 유일한데 이날의 기사를 통해 한겨레는 탈성매매에 성공한 여성의 증언을 소개하는 같은 지면에 ‘몸이 약한 30대 중반 여성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거의 없어 아직도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김씨’와 ‘100만원도 못 버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한달에 적어도 200만원은 버는 룸살롱으로 되돌아간 안씨’의 탈성매매 예외 사례를 함께 소개한다.

4)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평가 및 논쟁

이 유형에 해당하는 기사의 내용은 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성매매특별법을 비판하기, 법의 취지에 찬성하며 지지하기, 찬반의견을 소개하기, 성매매특별법에 대응하는 성매매여성에 대한 보도이다. 저자는 앞의 유형들과 비교해 (4) 유형의 기사는 언론사마다 분명한 노선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저자가 조선일보 기사 59건을 분석한 결과 성매매집결지를 대신한 퇴폐업소의 등장, 이른바 풍선효과와 성매매특별법이 피해자로 호명한 성매매여성이 성매매를 그만두지 않는 모순에 대한 반복된 보도는 성매매특별법의 실효성과 나아가 성매매특별법이 지향하는 여성주의적 가치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이에 더해 성매매특별법의 실행을 주관하는 여성가족부의 행정능력에 대한 비판은 성매매특별법의 권위를 축소하고 희화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중앙일보는 성매매특별법의 실효성을 부정하는 풍선효과와 성매매여성들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점, 여성가족부와 성매매여성의 갈등을 보도하며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기사는 총 61건 가운데 41건으로 분류된다. 이와 대비되는 성매매특별법의 취지에 찬성하는 기사는 외부인 칼럼 형태의 기고문 2건이며 나머지 기사는 성매매특별법 실행초기에 법에 대한 소개와 취지 설명과 2013년 위헌심판 제청에 대한 기사이다.

경향신문은 총 53개 기사 가운데 33개 기사의 내용이 성매매특별법의 실효성과 취지에 부정적인 내용으로 분류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매매특별법의 취지와 가치에 대한 찬성입장을 담은 기사는 6건이다. 경향신문이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성매매특별법이 실행된 9월을 즈음으로 실리는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9건의 평가 기사이다. 이 유형의 기사는 풍선효과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공권력의 지속적 개입과 관련법 정비 등의 대안을 함께 보도하며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찬반양론을 동시에 소개한다.

한겨레의 경우 69건의 기사 가운데 신종성매매 업소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기사는 1건이며 풍선효과를 언급하는 다른 기사에서는 풍선효과에 대한 소개보다는 풍선효과를 억제하기 위한 대책으로 더욱 강력한 단속의 필요성을 일관성 있게 제시한다. 성매매특별법의 취지를 지지하고 성과를 소개하거나 법이 의도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더욱 강력한 실행과 단속을 격려하는 기사가 21건이다.

성매매특별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가지 논쟁들을 다양한 외부필진의 칼럼으로 다루고 있는 점도 한겨레의 특징으로 성매매운동가, 진보성향의 여성학자들에게 고루 지면이 배분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현재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에 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가부장제의 폭력, 섹슈얼리티의 위계 재생산, 남성 성욕 본질론에 대한 의문, 성매매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 등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진다.

성매매특별법에 대한 보수와 진보언론의
의미구성 방식의 차이

위 분석을 보면 한겨레를 제외한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이 성매매특별법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각 언론들이 보이는 논점의 차이와 혼란은 성매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사회의 현재진행형인 논쟁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필요하다면 성매매를 통해서라도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남성의 성욕임을 전제로 한 성매매특별법 필패론, 파는 성은 천한 성, 남성의 가계를 잇는 부인의 성은 순결한 성으로 규정하는 가부장제의 가치관이 한쪽에서 재생산된다면, 한겨레로 대표되는 반대편에서는 자신의 노동을 화폐로 교환하는 다른 노동과 마찬가지로 성행위로 돈을 버는 것도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노동의 한가지라는 새로운 주장을 편다.

저자는 또한 한겨레가 보수언론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노동과 계급이라는 프레임으로 성매매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꼽는다. 다른 젠더이슈에 비해 성매매는 계급에 따른 섹슈얼리티의 위계질서와 경제적 약자들에게 주어진 노동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논쟁의 여지가 열려있으며 이는 노동 이슈에 있어 사회적 약자의 편임을 분명히 하는 한겨레의 입장과 일치한다. 결국, 젠더 이슈가 노동과 계급 등의 분야와 접목될 때 보다 진지한 의제설정이 가능하다고 설명할 수 있는데 저자는 이를 뒤집어 말하면 여성주의 진영에서 요구하는 구조적인 젠더폭력으로서의 성매매에 대한 접근이 노동과 계급의 관점에 밀려 축소되거나 소홀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고 말한다.

[su_quote]성매매특별법이 실시된 2004년, 25일간의 방송모니터링을 통해 방송보도가 법의 취지와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책임 있는 의제설정에 실패했다고 비판한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는 성매매 관련 보도에 있어 필수적인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이중에는 언론이 별다른 고민 없이 사용하는 홍등가, 윤락 등의 표현을 성매매 집결지, 성매매로 교체할 것, 성매매 업주와 성매매 여성들의 생존권 문제를 분리해 바라볼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 연구를 포함해 이후의 논의들이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 나아가 성/젠더 이슈에 관한 보도 지침을 고민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53쪽)[/su_quote]

저자는 논문을 통해 성매매라는 특정한 이슈의 의미구성이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탐구한다. 10년간의 기사를 분석한 결과 반드시 진보언론이라고 해서 성매매특별법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며, 성매매 여성의 편에 서 성매매특별법에 찬성하더라도 그것이 구조적인 젠더폭력보다는 계급과 노동을 경유해야 의제로서 더욱 파급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저자가 말미에 언급한 성매수 남성의 존재나 주장은 축소되거나 감추어져 있다는 분석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성노동자의 노동권을 긍정적으로 재현하는 한겨레의 지면에도 성구매 남성의 ‘구매의 권리’나 성매매 여성에게 행사하는 착취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고 한다. 천여개의 기사에서 남성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논쟁은 남성의 성욕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일부 사회 인사들의 발언이나 존스쿨을 소개하는 소수의 기사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다고. 성매매 여성은 타자의 모습으로 언론의 입맛에 맞게 다양한 모습으로 재현되는 것과는 대조되는 양상이다.

이와 같은 사회 인식이 보편적이라면 자발적 성매매 여성을 처벌하는 현행 법이 합헌이라는 얼마 전 헌재의 결정이 이상하지 않다. 지식사회학에서의 주장대로 이러한 언론의 창을 통해 우리가 사회를 인식하고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판단한다면 절망적인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저자의 언급처럼 본 논문과 같은 연구를 토대로 성/젠더 이슈에 관한 보도 지침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미디어 영향력 지각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 ‘제삼자 효과 가설’과 ‘추정된 영향의 영향 가설’에 대한 비판과 대안 모형의 제시」
정성은∙노희윤∙변상호, 2014, 『한국방송학보』, 28(4), 198-239.

「텔레비전 뉴스와 젠더 질서: 성매매방지법 보도의 프레이밍 분석」
양정혜∙이현주, 2005,『한국방송학보』, 19(2), 378-418.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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