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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는 필요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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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필리버스터란 의회 안에서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이뤄지는 합법적·고의적 의사진행 방해를 일컫는 것으로 무제한 토론에 나선 의원이 회기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끌어 문제의 법안 통과를 좌절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의 첫 필리버스터 시행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1964년 야당 초선 의원이던 김 전 대통령은 동료 의원인 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의 구속동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발언해 결국 안건 처리를 무산시켰다.

필리버스터는 1973년 국회의원의 발언시간을 최대 45분으로 제한하는 국회법이 시행되면서 사실상 폐기됐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 속에 포함돼 부활했다. 2012년 개정된 국회법 제106조 2항에 따르면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하려는 경우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하고, 의장은 해당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실시할 수 있다. 일단 해당 안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이 시작되면 의원 1인당 1회에 한해 토론할 수 있고, 토론자로 나설 의원이 더 이상 없을 경우 무제한 토론이 끝난다. 또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무제한 토론의 종결을 원하고 무기명 투표로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종결에 찬성할 경우에도 무제한 토론이 마무리된다.

 

필리버스터 제도, 학계는 어떻게 논의하고 있나

현재 필리버스터에 대한 본격적인 논문은 이 분야에서 선도적인 연구를 해온 김준석 동국대 교수의필리버스터의 제도화 과정과 논란: 미국 상원의 사례를 중심으로(『OUGHTOPIA』 25(1), 2010)가 거의 유일하다.(법적인 측면에서 직권상정 제한과 필리버스터의 위헌 여부에 대한 검토는 조한상의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의 위헌여부와 적실성에 관한 고찰(『법학연구』 60, 2015)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만큼 학계의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 않은 주제다. 김 교수는 미국 의회를 분석 대상으로 하여 필리버스터의 개념, 진행절차, 탄생과 제도화 과정, 이를 둘러싼 의회 내부에서의 논란의 역사, 2005년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간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필리버스터가 진행된 최근 사례를 차례로 소개하면서 이것의 도입에 따른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종합적으로 짚어보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가 희박한 만큼 아래에서 내용을 좀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되곤 하는 의 한 장면. 영화에서 스미스는 필리버스터로 자신을 비난하는 집단에 항거하여 힘을 행사하고 결국 해명하는 데 성공한다. 출처: 리뷰 아카이브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되곤 하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의 한 장면. 영화에서 스미스는 필리버스터로 자신을 비난하는 집단에 항거하여 힘을 행사하고 결국 해명하는 데 성공한다. 출처: 리뷰 아카이브
잘 나가던 정치가 에반 바이는 왜 불출마를 선언했나

김 교수는 서두에서 “2009년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당해 주요 법안 중 80퍼센트 가량에 필리버스터(미국 상원의 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제기했다”라며 당시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2010년 전도유망한 젊은 정치가 에반 바이는 60퍼센트가 넘는 지역구 지지율을 뒤로 하고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나라의 미래가 걸린 절박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미국 의회는 정파 간 갈등으로 멈춰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 시기 여론조사에서 “의회가 추구하는 정책 우선순위가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방향과 다르다고 응답한 사람은 무려 80.4퍼센트”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게 ‘필리버스터’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말한다.

[su_quote]필리버스터는 흔히 미국 상원을 다른 정부기구와 구별 짓는 대표적인 의사규칙으로서, 정파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의 경우 다수파로 하여금 소수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유인기제이자, 궁극적으로 정파 간의 타협을 촉진하는 순기능 제도로만 흔히 인식되어 왔다. 또한 급진적 개혁과제가 아무런 검증 없이 의회를 통과하는 것을 방지하는, 그래서 상원을 비롯하여 워싱턴 정치 전체의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망으로 평가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필리버스터가 당파 간 투쟁의 주범이라니? 우리의 경우 한미 FTA, 미디어법 등의 의제를 놓고 대립과 욕설, 폭력국회로 얼룩진 상황에서 여야 할 것 없이 미국식 필리버스터를 중요한 대안으로 고려하였기에 그 괴리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159쪽)[/su_quote]

논문이 발표된 2010년은 국내에서 필리버스터가 부활하기 전이라, 이렇게 말한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필리버스터가 최근 들어 이렇게 부정적 평가 대상이 된 이유는 사실 보수인 공화당이 20세기 후반 내내 소수야당의 위치에 있으면서 필리버스터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영향이 컸다. 공화당에게 필리버스터 제도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연방 상원의원들은 필리버스터 제도를 상원 고유의 전통으로 여기며, 필리버스터 제도가 도마에 오를 때마다 존재 자체를 없애고 싶어 하지 않았다. 공화당도 민주당도 현재의 다수당-소수당의 입장이 선거에 따라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필리버스터 제도를 무력화했을 때 생기는 정치적 변동과 불안정성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필리버스터를 둘러싼 미 의회의 갈등 역사 총정리

사실 미국 의회사에서 필리버스터는 굉장히 오래된 제도다. 1789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1789년부터 1890년까지 필리버스터를 제재하기 위한 시도는 네 번 정도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필리버스터 자체가 상원에 처음 등장한 1834년부터 1889년까지 필리버스터 총 발생 빈도는 10여건에 불과할 정도로 흔하지 않은 사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토머스 월시Thomas Walsh의 ‘헌법적 선택the Constitutional Options’이 상원의 필리버스터 제재에 이론적 밑바탕을 제공하면서 20세기 초반 이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월시의 문제제기는 “과거의 의회가 현재의 의회를 구속할 권한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월시는 헌법의 제1조 5항 ‘각 의회는 자신의 운영규칙을 결정할 수 있다’를 강조하면서, 상원은 2년마다 새로이 구성되기에 전대 의회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현재 다수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규칙을 만들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를 받아들인다면 필리버스터를 포함한 상원의 모든 규칙 또한 불안정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su_quote]상원 규칙이 뿌리 채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의회대표부는 하나의 타협점으로서 토론종결제도를 제시하였다. 1917년 3월 8일 토론종결제도는 76대 8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었다. 의원의 무한 발언권인 필리버스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계속 논란이 되었고 결국 이 논쟁은 1949년 훼리 의원의 수정안Wherry Amendment을 통해 타협점을 찾았다. 훼리 수정안은 반덴버그 선례와 바클리의 주장 간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토론종결제도가 법안, 의안의 상정여부에 대한 동의, 대통령에 의한 공직자의 임명동의, 조약의 인준 등에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고 규정하여 토론종결제도의 폭을 넓힌 반면, 토론종결을 위한 출석과 찬성 모두 상원 전체의 3분의 2인 67명 이상으로 고정했고, 상원의 의사규칙 개혁안에 필리버스터가 제기될 경우 아예 토론 종결을 금지하는 등 사실상 필리버스터를 제한할 수 없게 발을 묶어 버린 내용을 담았다. (173-174쪽)[/su_quote]

그런데 필리버스터는 부시의 재집권 정권이 시작된 2005년 새로운 운명을 맞았다. 공화당은 일치단결하여 민주당의 필리버스터를 막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전에 ‘핵 선택Nuclear Optio’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극약처방이자 엄청난 모험적 결단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리뷰를 할애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부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역사 서술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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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2016년 초 미국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연이어 개봉되었다. 서부 개척시대 이전인 19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디언과 백인간의 무차별 살육을 다룬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슬로우 웨스트>로 19세기 서부개척시대의 현상금 사냥꾼 사일러스가 아버지와 함께 서부로 떠난 여자친구 로즈를 만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부터 온 소년을 보호해주며 결국 현상금 사냥꾼들과의 대결 한판을 벌이는 영화다.

왜  서부영화인가. 여기엔 아직 서부개척이라는 역사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으며, 거기엔 아직도 말못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는 반증 아닐까. 그런 점에서 주목을 끄는 논문이 있다.

1893년 프레데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는 시카고 콜롬비아 박람회에 모인 역사가들 앞에서 “미국 역사에서 프론티어의 중요성(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이라는 제목의 역사적 연설을 남겼다. “이 나라 역사를 바라보는 진정한 지점은 대서양이 아니라 대서부(the Great West)이다”라고 선언하면서 그는 프론티어 논지를 중심으로 건국부터 1890년까지의 미국 역사에서 서부가 가지는 중요성을 설명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프론티어를 정의하지만 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논란과 전유의 대상이 된 개념은 바로 “야만과 문명이 만나는 지점”으로서의 프론티어였다. 터너 이후 미국의 역사가들은 그의 프론티어 논지에서 드러나는 자민족중심주의와 개인주의의 신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했고 서부의 역사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중간지대(middle ground)’, ‘접경지대(borderlands)’ 등과 같은 새로운 개념이 탄생했고 ‘신서부사(new western history)’, ‘접경지대 역사(borderlands history)’라는 새로운 역사서술 경향이 등장했다.

권은혜 동국대 강사의 논문 미국 서부 역사 서술 경향의 변화: 터너의 프론티어 논지에서 신서부사를 거쳐 접경지대 역사까지(『도시연구』 14, 2015)는 터너의 프론티어 논지, 1980년대 중반에 등장한 신서부사의 터너 비판과 대안적 미국 서부사 서술, 1990년대 중반 이후 서부사의 새로운 서술 경향으로서 접경지대 역사의 등장 및 21세기 접경지대 역사의 상황을 차례로 살펴본다. 아래는 그 핵심 내용을 가져왔다.

터너의 서부사에서 프론티어의 열림과 닫힘은 백인 정착과정의 시작과 끝, 더 나아가 미국 역사의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의미했다. 터너는 백인의 정착 과정을 서부의 중심적 특징으로 보고 이를 국민국가로서 미국의 발전과 연결시켰다.

터너의 프론티어에 인디언은 가까이 있지만 “[백인] 문명”과 대비되는 “야만”으로 그려진다. 그는 프론티어가 “이 물결[미국의 서부팽창과정을 비유적으로 표현]의 가장 바깥 가장자리”이자 “야만과 문명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믿었다.

1980년대 후반 패트리샤 리메릭 (Patricia Limerick)를 중심으로 신서부사가 집단은 터너의 프론티어 논지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며 서부의 역사에 관한 수정주의적 해석을 제시했다.

신서부사가들은 백인들의 정착 이전에 아메리카 인디언, 히스패닉,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과 유럽인 사이의 혼혈인에 의해 발달된 문명이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백인의 서부 정착을 유도한 것은 연방정부의 지속적 개입과 지원, 서부의 천연자원에 대한 타 지역의 높은 수요, 그리고 19세기 중반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이라는 큰 배경이었다.

연방정부는 정부 보조금으로 철도를 건설하여 서부의 정착민들이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공유지를 불하받은 백인 정착민과 인디언 사이의 갈등은 연방군대가 해결해 주었다. 건조해서 농사짓기에 부적합했던 서부의 땅이 농토가 된 것은 정부가 건설한 운하와 댐으로 관개가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서부의 성공을 보여주는 흔한 예인 광활한 방목장, 부유한 목장, 광산 개발로 인해 번영을 구가하던 도시들의 이면에는 수많은 유령마을과 빈곤한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었다. 연방정부의 역할 이외에 신서부사는 서부의 역사를 형성한 주요한 요인으로서 백인 정착민의 아내와 딸들을 포함한 다양한 인종, 민족, 문화에 속하는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서부사가들은 미국 서부와 북아메리카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유용한 개념으로 접경지대에 주목하고 프론티어 개념의 재구성을 시도했다. 접경지대 역사를 표방하는 일군의 역사가들은 프론티어와 접경지대의 의미와 관계를 재정의함으로써 역사상 프론티어들과 접경지대들에서 일어난 변화를 더 잘 이해해 보려고 시도했다.

애들먼과 아론에 따르면, 19세기 말까지 프론티어들과 접경지대들은 북 아메리카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고 유럽 제국들과 인디언들은 프론티어들과 접경지대들의 역사적 변동에 함께 참여했다. 여기서 역사적 변동이란 프론티어들과 접경지대들이 19세기 초 이래로 1812년 전쟁, 1840년대의 미국-멕시코 전쟁을 거치며 국민국가 경계들(borders)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접경지대들에서 국경들 혹은 경계가 그려진 땅들(bordered lands)로의 전환” 과정은 19세기 초까지 접경지대들에서 유럽 제국 세력들과의 인적·문화적·물질적 교류를 주도하며 자치를 유지하던 인디언들의 힘을 약화시킨 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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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초기의 영토.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United_States_1789-03-1789-08.png

“접경지대들로부터 국경들로: 북아메리카 역사에서 제국들, 국민국가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에세이를 공동 발표한 애들먼과 아론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20세기 말의 신서부사의 터너 비판을 반비판하며 접경지대 역사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들은 시간성과 역사성을 담보하는 개념으로서 프론티어와 접경지대를 강조하며 서부뿐만 아니라 북 아메리카의 과거를 다각도로 파악할 수 있는 틀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접경지대의 역사적 변화과정에서 능동적 행위자로서 인디언의 위치를 조명한 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미국의 정치적 힘이 접경지대를 포섭하면서 인디언의 권리도 후퇴했다는 이들의 결론 자체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이 접경지대의 후퇴를 설명하는 방식은 19세기말 프론티어의 종결과 미국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연결짓는 터너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이다.

접경지대 역사는 미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연구 분과로 자리 잡았고 초기 미국과 근대 미국의 시기를 아우르며 꾸준히 연구 후속세대를 생산하고 있다. 서부사의 전통적 분야이던 인디언 역사는 신서부사에서 접경지대 역사로 이어지는 연구 경향 변화를 잘 설명해 주는 분야이다. 1991년에 신서부사의 대표적 연구자인 리차드 화이트는 『중간지대』에서 오대호 지역의 식민세력들의 갈등관계 속에서 오히려 활발했던 인디언의 역할을 조명했다.

10년 뒤에 다니엘 릭터(Daniel Richter)는 『인디언나라로부터 동쪽을 대면하다: 초기 아메리카의 원주민 역사(Facing East from Indian Country: A Native History of Early America)』를 출간했다. 여기서 릭터는 인디언의 땅에서 유럽계 아메리카인의 세력이 서쪽으로 확장되는 것은 “필연적 과정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하며 “시선을 돌려 인디언 나라에서 동쪽을 향해 과거를 본다면 역사가 매우 다른 외양을 띠게 된다”고 주장한다. 시선을 돌리면 다음과 같은 장면으로 바뀐다. 즉, “아메리카 원주민이 전면에 나타나고 유럽인은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서 등장”하고 “북 아메리카는 ‘구세계’가 되고 서유럽은 ‘신’세계가 된다.” 릭터는 인디언의 눈으로 유럽인의 도래와 식민세력의 갈등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보다 최근의 아메리카 인디언 역사 서술은 인디언의 세력에 유럽인이 종속됐던 예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며 접경지대들의 형성과 해체에 인디언이 가졌던 권력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줄리아나 바(Juliana Barr)의 2007년 저서 『평화는 여성의 형태로 왔다: 텍사스 접경지대들에서 인디언과 스페인 사람들(Peace Came in the Form of a Woman: Indians and Spaniards in the Texas Borderlands)』은 인디언들과 스페인 사람들의 관계를 지배한 것은 유럽의 인종주의적 개념들이 아니라 인디언들이 권력을 젠더와 친족관계로 표현하는 방식과 용어였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서부사 서술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정리했다.

[su_quote]프론티어와 접경지대라는 개념을 생산하고 비판적으로 재검토 및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서부사가들은 지역으로서의 서부사가 북아메리카 지역의 제국들과 국가들의 역사를 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서부사의 이론적 논쟁과 통찰력은 민족과 국가, 제국 등 큰 정치적 단위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역사서술의 한계를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한다.[/su_quote]

강성민 리뷰위원  review@bookp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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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은 미국 정부의 의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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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한국현대사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를 발표해온 박태균 서울대 교수가  미국의 관점에서 본 한국의 8·15(『군사』, 96, 2015)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의 입장에서 8·15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광복, 국가수립의 기초가 마련된 사건이지만 미국의 입장은 다르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박 교수는 최근 2~3년간 제출된 새로운 자료를 토대로 미국의 대 아시아 및 세계 전략의 바탕 위에서 당시의 사태를 면밀하게 짚어보고 있어 필독할 만하다.

카이로선언에 “위의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이 될 것을 결의한다.”라는 내용을 그동안 한국의 독립에만 초점을 맞춰 이해해온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제외하고  한국만 거명이 되었는지, 그것이 어떤 국가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인지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는 게 박 교수의 지적이다. 박 교수는 이것을 루스벨트의 아시아에 대한 구상과 전략을 이해한 바탕 위에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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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1월 25일, 카이로에서 열린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출처: 리뷰 아카이브

박 교수는 한국인들은 1945년 8월 15일이 해방을 의미하며, 이는 독립국가를 곧 수립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미국이 보는 관점은 달랐다고 말한다. 미국은 한국을 독립적으로 만들지만, 이는 일본 제국을 분할하기 위한 목적에 의해 달성되는 것이며, 더 중요한 목적은 미국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도 어느 일국에 의해서 배타적인 주도권이 한반도에 관철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상황이 다시 동북아시아에서 재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원래 대서양 헌장 제3조에 있는 민족자결권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에 걸쳐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혹은 처칠은 식민지 지역에 민족자결권을 인정하거나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은 유럽의 제국 질서를 와해하려는 미국의 새로운 정책이라고 보고 있었다.(그렇지만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었다.)

장제스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주변국이 유럽제국 내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장제스의 인도차이나 및 태국의 독립 제안에 대해서는 루즈벨트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상과 같은 당시 미국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카이로 선언의 내용은 중국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유럽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었다.

당시 중국을 카이로에 불러낸 것이 미국이었고, 가장 중요한 의제의 하나가 미얀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중국과 영국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중국의 입장을 어느 정도 고려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은 1939년의 할힌골 전투 이후 어떠한 역할도 수행하지 않았다. 특히 1941년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소련은 서부전선에만 집중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어떠한 역할도 수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가침 조약 이후 동부전선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일부 게릴라 부대를 소련 영토 안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일본과의 군사적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불씨를 제거하기도 했다.

따라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진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던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던 호주가 미국과 공동 작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주력은 미군이었다. 독일에게 점령당한 프랑스와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의 폭격에 시달리고 있었던 영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일본군이 진주한 1940년부터 1945년 3월까지 프랑스와 일본이 베트남 지배에 대해 공조했던 것도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1945년 8월 15일의 일본 패망이 곧바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경우 인도에게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시 독립을 약속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인도가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시켜 줄 수밖에 없었지만, 영연방의 틀 안에서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복귀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1945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1949년까지 네덜란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여야 했다. 인도차이나 중 베트남도 1945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프랑스가 복귀하면서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독립전쟁을 치러야 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의 1945년 8월 15일이 갖는 의미는 일반명령 1호에 의해서 잘 표현되었다. 일본 패망 직후인 8월 17일에 승인된 일반명령 1호에는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야 하는 행위자들을 규정하고 있으며, 한국의 분단을 규정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38선 이북 지역의 일본군 사령관은 소련군 극동군사령관에게 항복해야 하며, 38선 이남지역의 일본제국 총사령부는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에 항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명령 1호에는 분할해서 항복을 받는다는 내용은 있지만, 분단을 규정한 내용은 없었다. 편의상 분할을 통해서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도록 규정된 지역은 한반도뿐이 아니라 인도차이나, 만주 등도 그러했다.

일반명령 1호에서 분할해서 항복을 받도록 규정된 인도차이나 지역과 만주는 이후에 ‘분단선’ 또는 ‘분단’으로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으로서는 38선을 중심으로 한 분할 점령은 소련군이 더 이상 한반도의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반도가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 우선순위에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본의 항복을 받는 지역을 구분하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미국이 전 지역에 걸쳐 일본의 항복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그렇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는 분할하거나 다른 나라 사령관에게 항복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명령 1호에 의하면 미군이 온전히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지역은 일본의 주요 4개 섬과 부속도서, 필리핀이었다. 이 지역 외에 미국이 항복을 받도록 되어 있는 지역은 38선 이남의 한반도였고,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소련군의 남진을 멈추기 위한 조치였다.

카이로 선언에서 일반명령 1호로 이어지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삼성조정위원회(SWNCC) 문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지침은 일본의 항복에서부터 신탁통치체제가 수립될 때까지의 한국에서의 민정에 관한 기본방침을 규정한 것으로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근거하여 태평양 미 육군 사령관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도 미국의 전략적 관점에서 한반도가 우선적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이 될 때까지 미군정의 연장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미국 정부로서는 전략적으로 우선 순위가 떨어지는 한반도에 군사정부를 유지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점에서 몇 가지 원칙이 재확인되었다. 첫째로 한국과 같이 과거 식민지 지역에서 독립국가를 세울 때까지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정부를 수립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로 미국 시민들이 군사적 필요에 의해 상정된 기간을 넘어서 한국에서의 군사 점령이 연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탁통치안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방안이었다. 커밍스나 개디스, 그리고 매트레이 등이 모두 동의하듯이 당시 미국의 정책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신탁통치는 전략적으로 가장 적합한 정책이었다.

신탁통치 실시 문제는 또한 당시 미국의 현실적인 고려이기도 했다. 미국으로서는 1945년 이후 패전국의 식민지였던 지역, 승전국의 식민지였지만 승전국이 더 이상 구식민 제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지역을 모두 관리할 수 없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자결주의, 그리고 자유무역 등 미국의 가치관이 반영된 국제질서를 위해서는 구식민지 방식으로 세계를 관리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탁통치 방식은 당시 미국의 다양한 전략적 목표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강성민 리뷰위원  review@bookpot.net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미지, 정치를 대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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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최초의 이미지 선거라고 일컬어지는 1960년대 케네디와 닉슨의 대통령선거는 정치인에게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포문을 연 선거이자, 정치인은 공약으로만 승부하지 않는다는 첫 사례가 된 선거였다. 케네디의 자신감 넘치는 시선 처리와 활기차고 잘 정돈된 외모, 심지어는 그가 입은 의상까지, 닉슨의 초췌하고 추레한 모습과 비교되면서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후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메이킹은 선거운동의 핵심적인 전략으로 받아들여졌다.

국제대학 조교수 박선영「정치인의 이미지가 유권자의 후보자 선택에 미치는 영향: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과정을 중심으로」(『법학연구』, 16(1), 2016)는 정치인의 이미지가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정치인의 이미지를 통해 선거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한다.

정치인의 이미지와
적격성의 관계

이 논문에서 필자는 유권자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편견, 즉 ‘후보자의 얼굴’이 그 후보자가 정치적으로 적격한 인물인지 판단하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실험한다. 논문의 필자는 국내의 정치 상황에서 전개되는 논란을 막기 위해 미국의 대통령 예비선거과정을 중심으로 논의를 시도하는데, “무엇보다도 선거 유인물상의 정치인 얼굴에 나타난 이미지로부터 선거 결과를 미리 추론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다.

[su_quote]인간은 모든 대상에 대해 일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인식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대상을 평가하거나 대상에 대한 태도를 형성한다. 심리학은 이를 인지(認知)라고 설명하고 이는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정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후보자 인지는 지지할 후보자를 선택하고 후보자를 평가 및 판단하며, 나아가 지지할 후보자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su_quote]

유권자는 정치인 개인에 대해 알지 못한다. 따라서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정치인 이미지가 정치인의 실체를 대신하게 되며, 이로 인해 실제의 정치인보다 정치인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간주되는 것이다.” 유권자들의 이런 경향을 증명하기 위해 논문의 필자는 “웰링턴(Wellington)의 빅토리아대학, 남(南)호주대학, 웰링턴의 여자대학 그리고 뉴질랜드 고등학교, 마지막으로 미국 오클라호마 중부대학”에서 2007년 5월부터 8월 중순까지 실험참가 학생들에게 후보자들 각자의 사진을 단 한차례만 보여주면서 사전지식이 있는 후보자는 제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사진을 보고 정치인으로서의 적격성 여부를 판단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07년 9월 초 민주당 후보자들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의 인지도를 통한 적격성과 순위 사이에 강력한 연계점”이 발견됐다. 이는 논문의 필자가 참고했던 선행연구에서 유권자들의 적격성에 대한 평가가 선거결과와 정확하게 69퍼센트 일치하는 것으로 예측된 것과 비슷한 결과였다.

이 결과는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기회를 보다 더 증가시키기 위해 적격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후보자를 정당후보자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상업용 물품의 시장지배 전략이나 판매계획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포장이 매출액 달성에 있어서 하나의 변수를 이룬다는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권자들은 신뢰나 믿음을 주는 외모와 차림새로 그의 정치적 적격 능력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좀 더 장기적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이렇게 간단하게 결론 지어버릴 수만도 없다. 유권자들은 분명히 정치인들의 이미지를 통해 적격성 여부를 판단했지만 처음의 판단이 끝까지 지속되지는 않았다. 처음에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던 정치인이라도 유권자들에게 많이 노출되면서 오히려 이미지가 반감되는 경우도 많았고,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선거운동을 계속할 능력, 다시 말해 유권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킬 만한 조직력과 선거자금이 없을 때는 아무리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실제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정치인이라도 유권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선거운동에 더 돈을 많이 쏟아 부은 후보가 자신보다 적격성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후보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경우도 있었다.

현혹될 것인가,
통찰할 것인가

결과적으로 선거에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많고, 특정한 기준이 후보자를 당선시킨다고 규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정치인 개인의 이미지가 하나의 공약이며 정당의 얼굴이자 정책이 된다는 점이다. “정치후보자의 이미지는 유권자의 주관적인 평가와 후보자가 전하는 객관적인 메시지(주제, 말씨, 속성, 품질)에 근거하여 유권자가 가지는 후보자에 대한 지각(知覺)이다. 최근 선거에서 당락을 결정짓는 요소는 정책적 이슈가 아니라 유권자에게 비쳐지는 후보자의 이미지”라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유권자들이 정치후보자들의 정책이나, 아이디어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이 예측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기준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이때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미디어인데 미디어는 현직 정치인뿐만 아니라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식과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이 미디어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것을 규합하여 한 정치인을 지지하기까지에는 다양한 개인적 이유와 배경이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정치적 속성에서 ‘미디어’와 ‘이미지’는 다소 부정적으로 인식되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통찰하느냐는 유권자들의 몫이다. 정치인의 ‘이미지’는 모두 거짓이며 가식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그 이미지의 전략 안에 이미 정치적 방향성이 제시되어 있다. “이미지 정치는 각 정당이 추구하는 목표와 지향점을 짧은 시간 안에 유권자에게 전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때로는 각 정당이 추구하는 정강 정책의 실상과 동떨어진 이미지로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도구”로 이미지가 활용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정치인의 ‘이미지’를 모두 걷어낼 수도 없고, 그 ‘이미지’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선거 출마 후보자가 선거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미디어 등을 통해 표방하는 ‘이미지 정치’의 실상”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는 이성일 것이다. 정치인의 이미지 안에서 그들의 정치적 방향성을 찾아내느냐, 아니면 그 이미지에 현혹되어 정치인의 실체를 놓치느냐는 너무나 크고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미지에 현혹된 선거의 결과가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으므로.

  •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정치인 이미지 구성 요인과 유권자의 투표 행위」
김재범·최믿음, 2013, 『광고연구』, 98, 154-183.

「유권자의 제3자 효과 지각 연구: 후보자 이미지와 후보 선택에 미치는 미디어 효과를 중심으로」
설진아·김활빈, 2008, 『한국언론정보학보』, 42, 79-106.

최은영 리뷰어  octovemb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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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전략: 무엇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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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미국의 선거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트럼프의 정치적 가능성에 대해 어림도 없다고 코웃음쳤었다. 그러나 지금 제 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의 행보는 그야말로 승승장구 그 자체이다. 언론과 선거전문가들의 모든 예측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 트럼프가 보여준 일련의 이변을 가리켜 ‘트럼프 현상’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어떻게 하여 지금의 지지와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미디어혁명’이 파괴한 ‘위선의 제도화’: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본 ‘트럼프 현상’」(『사회과학 담론과 정책』, 9(2), 2016)에서 직거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미디어 혁명’으로, 기존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위선의 제도화’를 파괴함과 동시에,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게 된 일련의 과정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다.

‘트럼프 현상’
: 트럼프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저자는 기존 트럼프에 대한 여러 시각들보다 다음과 같은 시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su_quote]트럼프에 대한 연구도 트럼프 개인이 혐오할 만한 행태보다는 그런 행태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지와 인기를 누리는 이유에 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2쪽)[/su_quote]

트럼프가 성공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트럼프를 비판하기만 하는 것보다 미국 내의 정치적 냉소를 바탕으로 번성하게 된 ‘트럼프 현상’의 책임을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에만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트럼프 현상’을 커뮤니케이션의 관점, 즉 의제 설정(agenda-setting)과 수사적 스타일(rhetorical style) 중심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가설을 내리고 있다.

[su_quote]‘트럼프 현상’의 근저에는 지난 40년간 미국을 지배한 ‘정치적 올바름’과 그에 따른 ‘위선의 제도화’, 그 토양 위에서 구축된 ‘플랫폼 정치’와 양극화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 그리고 이 문제의식을 행동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게 한 SNS를 중심으로 한 ‘미디어 혁명’이 있으며, 트럼프는 이 조건들을 이용하는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오늘의 위치에 오르게 됐다.(3쪽)[/su_quote]

트럼프와
‘정치적 올바름’

미국 내에서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의 역사는 과잉의 연속이었다. PC 운동은 과격한 경향을 띠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PC’에 진절머리를 낼 지경이었다. 이때 트럼프가 등장했다. 그는 ‘PC’에 대한 영향력 있는 공격수였다. 사람들이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며, 자신이 그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다. 트럼프는 ‘PC’와는 정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는(telling it like it is)’ 것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고, 지지자들은 바로 그 점에 열광했다. 이전에 이러한 캐릭터가 없지는 않았지만, 트럼프는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위선의 제도화

오랜 PC 운동으로 미국은 사회 전 부문에 개개의 규정으로 형식화될 수 있었고, 제도화될 수 있었다. 정치 영역에서도 ‘최소한의 PC’가 정치인들의 담론을 규제해 왔으며, 이는 법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과정과 결과를 위선의 제도화로 볼 수 있겠지만, 위선의 제도화가 순전히 PC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su_quote]위선의 제도화는 사회 전 분야의 작동방식과 거버넌스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이러한 차원에서 “에델먼(Edelman, 1964)이 역설한 ‘정치의 상징적 이용(the symbolic uses of politics)’이야말로 정치가 담론의 세계에만 머무르는 위선의 제도화를 웅변해준 것으로 볼 수 있다.(8쪽)[/su_quote]

트럼프는 그러한 현실을 파고 들었다. 트럼프는 말만 앞세우는 기성 정치인들을 지목했다. 자신과 기성 정치인의 차이점은 자신은 행동을 하는 반면, 기성 정치인들은 행동에 관한 말만 하고, 자신과는 달리 진실을 듣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국민에게 진실을 말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인들은 ‘해가 뜰겁니다. 달이 질 겁니다. 온갖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국민은 그런 감언이설(甘言利說)은 필요 없다. 실천을 원하고, 일자리를 원한다”라고 강조하였다.

트럼프는 사석에서 소위 막말 논란이 많았으나, 그는 다른 정치인과는 달리 내뱉은 말을 철회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까지 한다. 지지자들에게는 이는 되려 ‘담대함’, ‘진정성(authenticity)’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실제 어떤 공직자나 기업이 옳은 소리를 늘어놓다가 실제로 저지르는 언행불일치에는 상대적으로 침묵하는 반면, 실제로 차별적인 발언을 조금이라도 늘어놓거나 하면 분노한다.

[su_quote]부당한 차별이 광범위하게 저질러지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걸 체념해 받아들이다가 어떡하다가 차별의 의도와 증거가 나타나야만 사회적 분노가 폭발하는 현 방식은 트럼프 현상을 다시 볼 것을 요구한다.(9쪽)[/su_quote]

‘플랫폼 정치’와
양극화

미국 내의 정치적 양극화(공화-민주의 당파주의)는 ‘두 개의 미국’, ‘제2의 남북전쟁’ 등의 말까지 나올 정도였고, 미국인 절대다수는 정치적 양극화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트럼프는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누가 트럼프에게 ‘분열주의 정치’를 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으며, 트럼프를 보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 주범이라 할 수 있겠는가? 기성 정치가 곪아 있는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 대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아주 고약한 방법으로 그런 현상을 까발리고 나섰고, 그래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건 물론 광범위한 지지까지 누리게 되었다.

트럼프의 지지층에는 특정 직업, 종교로 묶인 집단을 찾기 어렵다. 도시, 농촌, 지역, 민족 등 특정 계층을 기반으로 하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대단히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지지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기존 우익 포퓰리즘과 트럼프의 차이라 할 수 있는데, 동시에 이것이 트럼프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이 구사되는 배경이다.

트럼프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트럼프의 공약은 역대 공화당 후보,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과 비교해봤을 때 대체로 중도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그가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정면으로, 정직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그의 막말을 비교적 사소한 문제로 간주했다. 그가 제시한 공약의 6대 이슈를 살펴보자.

1. 일자리와 이민
트럼프 자신은 오직 불법 이민에 반대할 뿐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또한 일자리와 관련하여,  트럼프는 중국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관세를 올려 우리의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유명하다. 일자리 문제는 일반 유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이며, 다른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외면하거나 미온적인 정책을 내놓는 반면, 트럼프는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데에 일조하는) 중국을 ‘흡혈’, ‘강간’ 등의 거친 언어로 공격하였다. 이에 후련함을 느낀 유권자들에게 그가 구사한 언어의 품위 결여는 오히려 진정성의 증거로 여겨졌다.

2. 테러 방지
일부 이슬람 사원 폐쇄, 미국내 무슬림들의 의무적 등록과 데이터베이스화 주장 등, “IS 등의 테러리스트를 잡을 때는 그들의 가족을 공격해야 한다”라는 등의 과격한 주장은,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2015-2016년 세계 각지에서 연쇄적으로 이어진 테러의 영향으로 여론조사는 트럼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3. 금권정치 비난
트럼프는 “고액 기부자, 특수이익 관여자, 로비스트들이 국민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며 “이들은 흡혈귀(bloodsuckers)”라고 비난하는 등 금권정치의 종언을 자신의 주요 이슈로 내세웠다. 이는 경쟁자들에 비해 비교우위를 누리면서 그들을 썩은 정치인으로 매도할 수 있는 이슈이기도 했다. 트럼프가 억만장자라는 사실이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부자이기 때문에 부유층의 기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운 것이다.

4. 월가 비난
트럼프는 빈부 양극화의 주범으로 간주된 월가를 집중 비판함으로써, 월가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갖는 민심(60% 이상)에 화답했다. 트럼프의 월가 비난은 부자 증세, 전 국민 건강보험지지 등의 정책으로까지 이어졌다.

5. 강한 미국
트럼프는 글로벌리즘보다 미국 우선의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 미국주의)를 새로운 신조로 삼을 것을 공약했다. 특히 외교적인 부분에서 엄청난 투자를 쏟아부으면서도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등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면모가 사라지고 있다고 개탄한 것이다. 또한 한국, 독일, 일본 등을 경찰처럼 방어해주고 있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미국인의 ‘신 고립주의적’ 시각은 이미 만연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트럼프의 주장이 일정한 호응을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6. 언론 비난
미국 언론은 약 2/3정도의 국민이 반감을 표할 정도로 불신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su_quote]트럼프는 자신의 막말을 중계하게 해 홍보 효과를 누린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언론을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명예훼손에 따른 배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권자들로부터 언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용감한 정치인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20쪽)[/su_quote]

 

 

‘트럼프 현상’과
미디어 혁명

트위터에 700만, 인스타그램에 100만 명이 넘는 팔로어를 거느린 트럼프는 온라인에 자신만의 뉴스룸을 구축했다. 트럼프는 소문난 SNS광이었는데, 하루에도 십수건의 게시물을 올리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보기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한 셈이었다. 분명히 이러한 행보는 기존의 선거 역사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며 여러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선거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su_quote]CNN은 케네디가 ‘TV 대통령’이고 오바마가 ‘인터넷 대통령’이라면 트럼프가 ‘소셜미디어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 했고···(22쪽) [/su_quote]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힐러리는 트럼프에 비해 대중의 흐름을 잘 읽지 못했고,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더 강한 사진 한 장으로 자신의 어필하고자 했던 트럼프는, 대중의 흐름을 잘 꿰뚫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소셜미디어는 트럼프가 누릴 수 있었던 특별한 기회였다. 대중의 정보 획득, 입소문 전파, 신문과 TV 등 전통 미디어가 모바일 SNS에 압도당하는 ‘미디어 혁명’이 트럼프의 대선 도전 시기에 성숙 단계 또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는 분명히 트럼프에게 좋은 타이밍이었다.

‘트럼프 현상’이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

트럼프 현상은 한국 사회에 주는 핵심적인 교훈은 무엇일까? 바로 ‘엘리트층이 몰랐거나 외면했던 미국사회’처럼, ‘엘리트층이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처음 트럼프를 두고 미국의 엘리트층이 그를 조롱거리로 치부했다는 것은, 40%에 육박하는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분노, 불안, 좌절을 몰랐거나 외면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점에 대해 성찰하기보다 트럼프를 비난하고 개탄하는 데에만 열을 올렸다.
한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su_quote]엘리트층의 정확한 사회 인식을 가로막는 위선의 제도화에 대해 그 어떤 판단을 내리고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그 어떤 출구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떤 지도자나 책임자가 입으로는 차별에 반대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자신의 책임 하에 있는 조직이 엄청난 차별을 저지르는 것을 방관하는 기존 의식과 행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25쪽)[/su_quote]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최근 한국에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트럼프 현상으로 본 미국 고립주의의 본질과 재현 가능성 전망」
이선희·김중완·정한범, 2016,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8(1), 281-314.

「미국과 한국의 뉴미디어민주주의에 대한 비교연구 : 한국 선거에서의 인터넷·SNS 활용과 변천을 중심으로」
이처문, 2016, 『사회과학연구』32(2), 167-187.

최종원 리뷰어  zwpow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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