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는 필요악인가?

필리버스터란 의회 안에서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이뤄지는 합법적·고의적 의사진행 방해를 일컫는 것으로 무제한 토론에 나선 의원이 회기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끌어 문제의 법안 통과를 좌절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의 첫 필리버스터 시행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1964년 야당 초선 의원이던 김 전 대통령은 동료 의원인 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의 구속동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발언해 결국 안건 처리를 무산시켰다.
필리버스터는 1973년 국회의원의 발언시간을 최대 45분으로 제한하는 국회법이 시행되면서 사실상 폐기됐다가 2012년 국회선진화법 속에 포함돼 부활했다. 2012년 개정된 국회법 제106조 2항에 따르면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하려는 경우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서를 의장에게 제출하고, 의장은 해당 안건에 대하여 무제한 토론을 실시할 수 있다. 일단 해당 안건에 대한 무제한 토론이 시작되면 의원 1인당 1회에 한해 토론할 수 있고, 토론자로 나설 의원이 더 이상 없을 경우 무제한 토론이 끝난다. 또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이 무제한 토론의 종결을 원하고 무기명 투표로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종결에 찬성할 경우에도 무제한 토론이 마무리된다.
필리버스터 제도, 학계는 어떻게 논의하고 있나
현재 필리버스터에 대한 본격적인 논문은 이 분야에서 선도적인 연구를 해온 김준석 동국대 교수의 「필리버스터의 제도화 과정과 논란: 미국 상원의 사례를 중심으로」(『OUGHTOPIA』 25(1), 2010)가 거의 유일하다.(법적인 측면에서 직권상정 제한과 필리버스터의 위헌 여부에 대한 검토는 조한상의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의 위헌여부와 적실성에 관한 고찰」(『법학연구』 60, 2015)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만큼 학계의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 않은 주제다. 김 교수는 미국 의회를 분석 대상으로 하여 필리버스터의 개념, 진행절차, 탄생과 제도화 과정, 이를 둘러싼 의회 내부에서의 논란의 역사, 2005년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간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 필리버스터가 진행된 최근 사례를 차례로 소개하면서 이것의 도입에 따른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종합적으로 짚어보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가 희박한 만큼 아래에서 내용을 좀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잘 나가던 정치가 에반 바이는 왜 불출마를 선언했나
김 교수는 서두에서 “2009년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당해 주요 법안 중 80퍼센트 가량에 필리버스터(미국 상원의 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제기했다”라며 당시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2010년 전도유망한 젊은 정치가 에반 바이는 60퍼센트가 넘는 지역구 지지율을 뒤로 하고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나라의 미래가 걸린 절박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미국 의회는 정파 간 갈등으로 멈춰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 시기 여론조사에서 “의회가 추구하는 정책 우선순위가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방향과 다르다고 응답한 사람은 무려 80.4퍼센트”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게 ‘필리버스터’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말한다.
[su_quote]필리버스터는 흔히 미국 상원을 다른 정부기구와 구별 짓는 대표적인 의사규칙으로서, 정파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의 경우 다수파로 하여금 소수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유인기제이자, 궁극적으로 정파 간의 타협을 촉진하는 순기능 제도로만 흔히 인식되어 왔다. 또한 급진적 개혁과제가 아무런 검증 없이 의회를 통과하는 것을 방지하는, 그래서 상원을 비롯하여 워싱턴 정치 전체의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망으로 평가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필리버스터가 당파 간 투쟁의 주범이라니? 우리의 경우 한미 FTA, 미디어법 등의 의제를 놓고 대립과 욕설, 폭력국회로 얼룩진 상황에서 여야 할 것 없이 미국식 필리버스터를 중요한 대안으로 고려하였기에 그 괴리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159쪽)[/su_quote]
논문이 발표된 2010년은 국내에서 필리버스터가 부활하기 전이라, 이렇게 말한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필리버스터가 최근 들어 이렇게 부정적 평가 대상이 된 이유는 사실 보수인 공화당이 20세기 후반 내내 소수야당의 위치에 있으면서 필리버스터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영향이 컸다. 공화당에게 필리버스터 제도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연방 상원의원들은 필리버스터 제도를 상원 고유의 전통으로 여기며, 필리버스터 제도가 도마에 오를 때마다 존재 자체를 없애고 싶어 하지 않았다. 공화당도 민주당도 현재의 다수당-소수당의 입장이 선거에 따라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필리버스터 제도를 무력화했을 때 생기는 정치적 변동과 불안정성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필리버스터를 둘러싼 미 의회의 갈등 역사 총정리
사실 미국 의회사에서 필리버스터는 굉장히 오래된 제도다. 1789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1789년부터 1890년까지 필리버스터를 제재하기 위한 시도는 네 번 정도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필리버스터 자체가 상원에 처음 등장한 1834년부터 1889년까지 필리버스터 총 발생 빈도는 10여건에 불과할 정도로 흔하지 않은 사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토머스 월시Thomas Walsh의 ‘헌법적 선택the Constitutional Options’이 상원의 필리버스터 제재에 이론적 밑바탕을 제공하면서 20세기 초반 이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월시의 문제제기는 “과거의 의회가 현재의 의회를 구속할 권한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월시는 헌법의 제1조 5항 ‘각 의회는 자신의 운영규칙을 결정할 수 있다’를 강조하면서, 상원은 2년마다 새로이 구성되기에 전대 의회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현재 다수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 규칙을 만들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를 받아들인다면 필리버스터를 포함한 상원의 모든 규칙 또한 불안정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su_quote]상원 규칙이 뿌리 채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의회대표부는 하나의 타협점으로서 토론종결제도를 제시하였다. 1917년 3월 8일 토론종결제도는 76대 8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되었다. 의원의 무한 발언권인 필리버스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계속 논란이 되었고 결국 이 논쟁은 1949년 훼리 의원의 수정안Wherry Amendment을 통해 타협점을 찾았다. 훼리 수정안은 반덴버그 선례와 바클리의 주장 간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토론종결제도가 법안, 의안의 상정여부에 대한 동의, 대통령에 의한 공직자의 임명동의, 조약의 인준 등에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고 규정하여 토론종결제도의 폭을 넓힌 반면, 토론종결을 위한 출석과 찬성 모두 상원 전체의 3분의 2인 67명 이상으로 고정했고, 상원의 의사규칙 개혁안에 필리버스터가 제기될 경우 아예 토론 종결을 금지하는 등 사실상 필리버스터를 제한할 수 없게 발을 묶어 버린 내용을 담았다. (173-174쪽)[/su_quote]
그런데 필리버스터는 부시의 재집권 정권이 시작된 2005년 새로운 운명을 맞았다. 공화당은 일치단결하여 민주당의 필리버스터를 막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전에 ‘핵 선택Nuclear Optio’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극약처방이자 엄청난 모험적 결단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리뷰를 할애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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