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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근대철학자들은 전쟁을 어떻게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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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것 같다. 현재 우리는 7000억 정도의 미군주둔비를 부담하고 있는데, 이걸 1조 원 정도로 늘리는 수준이 아니다. 이를 훨씬 초월하여, 미국이 그간 아시아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는데 들여온 비용을 분모로 놓고 한국이 감당해야 할 부분을 분자로 요구할 거라는 얘기다. 현재 군사 전문가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전쟁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손자가 말했다. 그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그만큼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한다. 그래서 전쟁은 억제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차츰 세계는 전쟁 억제국면에 도달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쟁을 억제하는 데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힘으로 균형을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오직 군사적 실력만이 상대방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할 수 있다. 그게 현재의 진실이다.

서구 주요 철학자들의 전쟁론을 살펴본 서영식 충남대 교수의 논문 「서양 근대의 전쟁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철학논총』, 86, 2016)은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바로, 철학이 전쟁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이 ‘철학적 유산’이 “오늘날에도 서구사회에서 이른바 정의로운 전쟁론이 강력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배경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진단한다.

본문에서 살펴보는 인물은 다섯 명이다. 마키아벨리, 홉스, 클라우제비츠, 칸트, 헤겔이다. 필자는 이들 각각의 전쟁론을 분석적으로 요약하고 그 한계를 일목요연하게 짚고 있어서 아래에 그 중심 대목을 정리해본다.

백년 전쟁의 주요 장면들. (출처: 위키피디아)
‘정치’를 단순화시킨
마키아벨리의 한계

『군주론』은 전제군주가 정치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차원의 윤리적 고려를 전적으로 배제할 것을 강권하는 정치공학적 논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당시 사분오열되어 있던 그의 조국 이탈리아가 맞닥뜨린 정치적 위기상황을 냉철히 분석하고 대응책을 철저히 군사적 차원에서 마련하도록 촉구함으로써, 탁상공론에 빠져있던 정치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후대의 현실주의 지식인 그룹이나 군사 사상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

『군주론』에서 전개된 마키아벨리의 선군정치사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현실정치 상황에서는 어디서든 적용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의 정치관은 권력지향성 이외에도 정치현실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예컨대 사회경제적인 요소, 종교와 윤리적 측면, 지리적 조건이나 자연환경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들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또한 그는 국가 간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를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해결할 수 있고 따라서 군주는 주로 전쟁의 준비와 실행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힘으로써, 정치현실의 다양하고 복잡한 측면을 자신의 이론 속에 포섭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일보한 사유 보여준 홉스,
안타깝지만 현실적 대안 못돼

홉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달리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거나, 현실 속에서 선악의 구별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원리나 도덕법칙 같은 것을 통해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는 인간의 특성을, 그리고 삶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이해하고 묘사했다. 그렇지만 그는 일부의 오해와 달리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자연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졌다고 봤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Commonwealth)’의 성립과 사회의 존속이 가능함을 강조했다.

또한 홉스는 전쟁을 미화하거나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오히려 계약에 기초하되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국가(군주국)의 등장을 통해 인간사회의 안정과 역사적인 발전이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홉스는 전쟁의 원인과 본성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위한 방안을 심층적으로 논구했다.

그렇지만 그의 국가관과 전쟁의 종식을 위한 논의는 사실상 국내적인 갈등상황의 종식과 관련해서만 실제적인 의미를 지닐 뿐, 개인 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틀에서는 현실적인 대안이나 해결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판단중지’한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은 출간되고 약 170여 년 동안, 수많은 지휘관과 군사 전략가들이 전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군사이론서이자, 정치와 전쟁 양자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정치인들이 탐독한 실용적 정치이론서로 각광받아 왔다. 또한 이 저술은 오늘날 일반인들도 각자의 고단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참고하고 도움을 받는 고전이다.

그런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자체에 대한 가치평가를 시도하거나, 평가에 기초하여 전쟁 방지책을 제시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아마도 평가는 철학자의 몫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쟁의 현상이나 전쟁의 발발을 인간사에서 피할 수 없는 경험칙으로 받아들이고, 직업군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하여 적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고, 승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만 사고와 관심을 집중했다.

이러한 태도는 『전쟁론』의 저술 목적을 말하는 부분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필자는 아쉬운 점이 남는다고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참혹함을 당대의 누구보다도 잘 알고 경험한 사람으로서, 참혹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나아가 화해와 평화의 길을 얼마간이라도 모색했다면, 그의 사유와 발언은 어떤 사상가의 그것보다 공명감이 컸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유일한 존재,
전쟁의 제도적 억지 고안한 칸트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이해 대립으로 발생하는 전쟁을 제도적 차원에서 방지함으로써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자는 명제를 제시했다. 그는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이성과 합치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나아가 모든 국가가 그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국제연맹을 창설할 것을 주창했는데, 평화는 오직 국가 간의 합리적인 연대의 방식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국가의 모든 구성원에게 세계시민권이라는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할 것과 국제기구에 속한 국가의 헌법이 공화주의에 입각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가 구상한 ‘세계시민권’은 현대의 인권 개념과 유사하며, 공화주의 이념은 내용상 현대의 민주주의 제도와 대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평화라는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를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 최초의 공식기구인 국제연맹은 1920년 창설과 더불어 민족 간 평화적인 연대를 핵심 이념으로 내세웠는데, 이 이념은 바로 세계의 영구평화에 관한 칸트의 구상과 내용상 일치했다.

또한 민주적인 정치질서가 범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된 이후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료들에 대한 분석은, 칸트의 민주적 평화명제가 1980년대 들어서 단계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평화 연구자들은 칸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화사상가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헤겔의 전쟁론에 대한
비판

헤겔의 전쟁관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필자는 말한다. 그는 낙관적 전쟁관으로 전쟁의 참상을 애써 무시하고 전쟁을 규칙 준수가 몸에 밴 신사들 간의 결투의 장이나 된다는 듯이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으로 묘사했다. 또 20세기 전체주의의 등장에서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더불어 중요한 사상적 배경을 형성함으로써 이후 제국주의와 열강들의 침략전쟁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사실 헤겔은 전쟁 상황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 금지나 초토화 작전 금지 등과 같이 국제법의 존중을 강조했으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의 전쟁관이나 전쟁윤리에 대한 언급은 모두 그의 철학적 관점과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총체적인 차원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지만, 대부분의 전쟁은 제한전쟁이 아니라 총력전의 양상을 띠며,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기존의 국제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필자는 대부분의 서양 근대철학자들은 전쟁 현상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 운영과 정치활동에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하나의 필요악으로 간주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전쟁이 발생하면 인간과 사회뿐만 아니라 전쟁의 영향권 안에 있는 자연 세계 전체가 거의 회복 불가능한 수준의 타격을 받는다. 이라크 전쟁 중에 자행된 유전 파괴로 인한 자원낭비는 아쉬워하지만 그와 동시에 발생한 해양 오염사태나 어류와 조류의 떼죽음은 그저 언론의 기사거리로 취급될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 사회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인명의 손실이나 물질적 피해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생태계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인간 역시 생태계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전언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서양 중세의 정의로운 전쟁: 11세기의 평화론과 전쟁론을 중심으로」
차용구, 2012, 『역사학보』, 216, 165-189.

「헤겔의 전쟁론과 영구평화의 문제」
최동민, 2010, 『동서사상』, 9, 231-256.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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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선, 公과 共 사이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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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공공선’이란 단어는 그 쓰임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예컨대 ‘국익’ 앞에서는 개인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공동체를 지켜내야 한다는 수사로 쓰이는가 하면,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선’을 조명해야 한다는 개별성의 강조로 쓰이기도 한다. 한국에서 전자는 국가주도의 개발 독재, 후자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 후자 모두 한 쪽으로만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전체주의나 개인의 파편화로 흐를 수 있다.

김경희 성신여대 교수는 「국가와 공공선/공동선: 절대선과 개별선 사이의 마키아벨리」(『정치사상연구』, 18(1), 2012)에서 공공선을 분석하는데, 여기에는 공(公)의 절대화와 사(私)의 개별화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대답이 포함되어 있다.

마키아벨리에게
공공선이란 무엇인가?

서양정치사상사에서 ‘공공선’을 말할 때는 주로 그리스 아테네까지 거슬러 올라가곤 한다. 전체를 부분에 우선시하는 유기체론적 사고와 궁극적 선을 추구하는 목적론적 사고방식 안에서 공공선은 아테네인들이 정치를 사고하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개념이었다. 이후 고대 로마인들 역시 그리스 시대의 생각을 이어받아 정치에 임함에 있어 사적인 것을 배제하고,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을 ‘선’으로 인식했다. 르네상스 시대 역시 토마스 아퀴나스, 스콜라 철학자들이 군주의 귀감서라 불리는 저서들을 편찬해 공공선을 추구할 것을 종용했던 것을 보면 공공선의 추구는 서양정치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전까지 공공선을 실현하는 주체가 주로 인민이 아닌 군주였다면, 도시와 상업경제의 발달로 시민계층의 성장이 이루어진 르네상스는 질서의 전환기로, 군주제와 공화제가 공존하며 경합을 벌이던 시기였다. 공화국의 사상가들 특히 피렌체인들은 자유와 공공선 그리고 공화정의 관계에 각별히 주목했다. 그들에게 공공선이란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하나는 국가의 생존이나 위기 앞에서는 대외적 자유 즉 자립을 지키기 위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행위자로 사고하는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공화정을 혼합정 개념으로 파악해 아래로부터 그리고 부분으로부터 각계각층의 정치참여가 시작된다는 관점이다. 이 두 관점은 마키아벨리가 사유하는 공공선 개념과도 일치한다.

마키아벨리는 절대선으로서의 공공선 즉, 위기 시 국가의 질서 회복을 위해 군주의 절대적 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지만, 『군주론』에서조차 절대화된 권력의 필요성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꼭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다. 반대로 공화주의자로서 마키아벨리를 바라보는 이론가들의 주장처럼 그에게서 일반 시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공동선의 관점만을 발견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이 애매모호함 속에서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그가 말하는 공공선이란 한 마디로 공(公)과 공(共) 사이의 조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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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 © 리뷰 아카이브

그럼 조화가 필요한 공(公)과 공(共) 두 가지 요소를 차례대로 살펴보자. 먼저 공(公)의 공공선에 관하여. 『군주론』에서 사적인 것과 대비되며 동시에 공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로 ‘국가’로 번역될 수 있는 ‘stato’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8장에서 stato의 공적인 측면을 일반인들의 개별적인 측면들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public의 관점과 일반인들의 사고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군주론』의 유명한 장들 15장에서 18장까지의 논의다.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즉, 전체를 유지하기 위한 논리는 부분의 논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군주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반대로 군주의 권력은 인민과 귀족 등 국가 구성 세력들과의 관계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공(公)의
공공선에 관하여

또한 저자는 마지막 26장을 통해 군주가 추구해야 할 공공선에 대한 단초를 발견한다. 마키아벨리는 이 장에서 이탈리아인들 제 각각은 힘, 능력 및 재주가 뛰어나지만 군대라는 형태로 싸우면 그 힘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이탈리아가 타국의 약탈에 취약하고 자신을 지킬 수 없는 것은 이 뛰어난 개별인들을 규합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국가라는 공적인 전체를 생각하면서 그것이 개개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군주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쟁을 떠나서도 “새로운 법과 제도를 창안하여” 국가 구성원들의 역량을 모아낼 수 있는 군주가 바로 공공선을 수행할 수 있는 주체라고 보는 것이다.

공(共)의
공공선에 관하여

그 다음 저자가 분석한 공(共)의 공공선을 살펴보자.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 1권 9장에서 공화국의 신중한 건설자는 사적 이익이 아니라 일반적인 선을 위해 권위를 자기 수중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공공선은 사적 이익과 대비되는 것과 동시에 권력의 분산과 관련되어 있다. 다만 마키아벨리는 이 권력의 분산을 위해서는 단기적인 권력의 집중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즉 公이 선 후 共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국의 몰락 원인을 권력의 집중과 파당화에서 찾는다. 제국의 확장과 더불어 로마는 장군의 지휘기간을 연장했는데, 이는 사병화를 촉진했고, 공공선을 염두에 두지 않는 장군의 사병들로 인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공선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마키아벨리는 역시 공적인 인물에 의한 공적인 방법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그는 구체적으로 로마의 공화정인 혼합정을 예로 든다. 로마의 혼합정은 군주정,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이 서로의 몫을 가지고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형태였다.

특히 귀족과 인민들은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와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구를 각각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긴장관계를 정치체제로 공식화함으로써 한 쪽의 전일적 지배가 불가능하게끔 제도화를 이루어냈다. 덕분에 구성원들 간의 합의와 의지에 의해 공동체가 움직이며 자발적으로 공동선에 참여하는 시스템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이러한 공동선이 잘 추구되는 국가에서는 무엇보다도 인구가 증가하게 된다. “결혼이 사람들에게 보다 자유롭고 매력적인 것이 되고 각자 자신의 가산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어 아이들을 기꺼이 낳아 키우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아이들이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통해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공적 질서는 일반 시민들의 연대와 협동 그리고 공감을 생산 가능하게 한다. 불편부당한 공정한 질서 속에서 시민들은 공동의 이익에 대해 공감하고 공공선을 위해 연대하는 것이다. 公은 共이 구성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반면 후자의 공은 전자를 강화시켜 준다. (…) 반면 정치권력의 사사화와 파당화는 한 국가의 공적 질서를 파괴하고 그 구성원들을 분열시킨다. 公과 共이 공히 무너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공선 논의가 설 자리도 없어지게 된다. 불공정한 질서에서 사는 시민들은 분열과 반목에 익숙해지며, 공공선보다는 사익의 추구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47~48쪽)

마키아벨리가 분석한 ‘쇠퇴하는 국가’의 징후가 가히 낯설지만은 않다. 지도자는 권력을 사사화하고, 정부는 출산율 저하의 원인을 여성에게 전가하며 ‘낙태금지’, ‘가임기 여성 출산지도’ 등으로 몰지각함을 드러내고 있다. 공(公)과 공(共)의 자리 어느 하나 마련되지 않아 불안하기만 한 지금 우리에겐 마키아벨리가 말한 단기간 권력의 집중을 해내되, 규합된 권력을 사사화하지 않는 지극히 공적인 인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 마련된 公의 자리는 다시 共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마키아벨리의 국가전략: ‘저변이 넓은 정체’에 기반한 힘과 유연성의 전략」
김경희, 2005, 『정치사상연구』11(1), 133-151.

「비르투 로마나(Virtù romana)를 중심으로 본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김경희, 2005, 『한국정치학회보』39(1), 25-44.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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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갈망하는 정치적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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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정치가 소멸된 자리에서 핀 뜨거운 정치적 난장 안에 우리는 서 있다. 당연하게 기능하고 있다고 믿었던 정치적 시스템과, 방향 설정이 잘못되었더라도 최소한의 역할이라도 하고 있으리라 여겼던 정치적 리더십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절망했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가져야 할 정치적 감시와 자정능력조차 마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또 그만큼 반성했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정치적 사건 앞에서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김동하「‘덕’의 정치와 ‘프로네시스’의 리더십-마키아벨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리더십 이해에 대한 정치철학적 고찰」(『한국정치학회보』, 48(2), 2014) 은 한국 정치에서 가장 유효하고 효율적이고 의미 있는 정치적 행위와 리더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작은 해답의 실마리를 던진다.

좋은 정치적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논문의 필자는 국내 정치학계가 “권력이나 권위관계 혹은 공식적인 제도적 절차를 중심으로 한 정치과정에 관한 연구에 치중”해 왔기에, 정치를 리더십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은 소홀히 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와 같은 간접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여전히 정치엘리트들이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들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어쩌면 시민의 정치 참여라는 화두보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할지 모른다”고 논문의 필자는 역설한다.

현대의 정치적 “리더십 연구에서 관건이 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정치적 리더십과 윤리적 덕성의 문제이다. 이것은 현대의 정치지형이 변화함에 따라 도덕성의 문제를 리더십의 중요한 본질 중의 하나로 인식하게 되면서 윤리에 기초한 덕성이 리더십 연구의 주요한 주제로 등장한 까닭이다.” 그러나 “윤리적 덕성 하나만을 정치적 리더십의 기초로 삼기에는 부족하다는 인식 속에서 윤리적 덕성과 함께 정치적 리더십의 중요한 기초로 정치적 실천을 위한 지혜라 할 수 있는 ʻ프로네시스ʼ(phronesis/prudenza)[고대 그리스 철학 개념으로 실천적 지혜라고 한다. 이 실천적 지혜란 스스로에게 좋은 것과 유익한 것들을 잘 고를 수 있는 지혜, 특정한 목적과 관련된 것이 아닌 좋은 삶을 위한 지혜를 말한다] 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논문은 “현실주의적인 정치적 리더십과 윤리적인 정치적 리더십으로 대립하고 있는 현대의 이론적 지형을 그 기원이 되는 마키아벨리와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좋은 정치적 리더십이란 무엇인지를 정치철학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정치적 리더십을 언급할 때 우리는 곧잘 이에 대한 현실주의적 이론이 마키아벨리이며, 윤리적 덕성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적 이론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입각한 것이라 규정한다. 물론 마키아벨리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논지한 정치적 리더십은 “공식적인 권력이나 권위의 파생물이 아니라 정치지도자의 ʻ정치적 덕성ʼ에 달린 문제”였으며 “정치공동체의 공동이익을 현실의 실천세계에서 실현할 수 있는 ʻ정치적 지혜ʼ가 필요”하다는 공통된 관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형식상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윤리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상의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정치적 리더십의 유형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논문의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이해 방식을 각각 윤리정치적 패러다임, 자기보존을 위한 생존정치적 패러다임”으로 유형화한다. 그러면서 이들의 정치적 리더십의 특성을 이해하려면 이들이 설정하거나 추구한 정치적 프레임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은 삶’과 ‘행복’이라는 지극히 윤리적인 관점에서 정치를 이해하고 있었다면,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있어 윤리를 필요에 따라 배제할 수 있는 외부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자기보존과 생존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을 기초하고 있었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정치공동체는 생존과 관련하여 냉혹한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자기생존과 관련된 현실은 윤리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 없는 독자성이 있다”고 여겼다. 이는 “자기보존과 국가이익이라는 새로운 개념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무를 찾고 정당화하”는, “근대 초기에 국가를 건국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나 방책을 제공한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논문 의 필자는 “현대사회는 마키아벨리가 윤리와의 혁명적 단절을 이야기하던 근대와는 다른 시대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으며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듯이 일반사회의 보편적 윤리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정치영역 고유의 ʻ정치윤리ʼ라는 것이 용인이 되지 않는 세계가 현대사회”라고 말한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생존정치적 리더십 패러다임이 서 있는 전제가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윤리적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는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논의의 초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정치적 패러다임으로 옮겨 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의 기본 프레임을 “‘좋은 삶’과 ‘행복’이라는 지극히 윤리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 공동의 이익을 전제한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의 목적을 시민들에게 자신의 윤리적 덕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 조건을 마련하고 나아가 공적인 영역에서 자기를 경험할 수 있도록 시민의 정치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점에서 공적인 정치의 영역에 시민참여의 기회를 제도적으로 잘 디자인하는 탁월함”을 정치적 리더십으로 보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적 리더십이란 정치공동체가 궁극적이고 이상적으로 추구해야 할 공동의 가치나 목적을 설정하는 능력이며, 이러한 윤리적 덕성은 정치현실에서 구체적인 실천행위를 유도하는 지적이고 실천적인 덕성인 프로네시스를 통해 온전히 실현된다고 믿은 것이다.

한국 정치에 필요한
정치적 리더십

내면화되고 습관화된 윤리적 덕성을 기반으로 정치공동체가 추구하는 공동의 선과 목적을 위해 가는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목적과 목적에 적합한 인적·물적 자원들을 이성적으로 고려하고 배치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윤리정치적 리더십의 내용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소통의 리더십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전형적으로 설명해준다. 윤리적 덕성에 기초한 프로네시스의 행위는 주어진 목적이나 정치적 필요에 맞는 수단을 강구하는 정치적 지혜가 아니라 정치과정 자체를 중요시하는 정치적 지혜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소통은 고정된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함께 구성하는 정치과정 자체가 목적이 될 때 가능한 것인데 프로네시스의 리더십은 바로 윤리적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정치과정상의 행위양식들 자체를 중시하고 그 행위양식의 결과로 목적을 정의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내면화된 윤리적 덕성도 부재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자기보존과 생존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다. 그러니 정치적 과정의 중요성이라든가 행위의 방식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복지라든가 경제민주화 같은 한국정치가 지향하는 기본 프레임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고, 정치적 행위가 정치권력의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자리싸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정치지도자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바로 이 노골적인 권력정치적 행위에서 온다. 무너질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인 민주적 질서와 체제를 가지고 있다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지금 이 완벽한 배신과 패배는 바로 ‘소통의 정치’가 정치적 목적 그 자체여야 한다는 개념의 부재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과정에서의 합의, 그 합의의 과정에서 오는 다양한 계층과 그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시선의 확장과 인식의 재고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번거롭고 지난한 과정일 뿐이라고 치부되곤 한다. 불통의 정치, 독단의 정치가 국익과 공익을 위한 결단으로 포장되는 사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윤리적 덕성을 기초로 한 프로네스시의 리더십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su_quote]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정치사회의 미래 비전만 행복하게 짤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 자체의 성격도 행복이라는 윤리정치적 프레임 속에 놓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정치적 리더십에서 ʻ좋은 삶ʼ을 위한 목적의 설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목적에 부합하는 정치적 행위의 양식이기 때문이다.(294-295쪽)[/su_quote]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정치리더십과 마키아벨리의 네체시타(necessità)」
갈상돈, 2011, 『정치사상연구』, 17(1), 105-132.

「‘비지배적’ 리더십: 마키아벨리의 『군주』에 내재된 교육적 수사」
곽준혁, 2013, 『한국정치학회보』, 47(5), 27-49.

최은영 리뷰어  octovemb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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