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근대철학자들은 전쟁을 어떻게 보았나?

미국이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것 같다. 현재 우리는 7000억 정도의 미군주둔비를 부담하고 있는데, 이걸 1조 원 정도로 늘리는 수준이 아니다. 이를 훨씬 초월하여, 미국이 그간 아시아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는데 들여온 비용을 분모로 놓고 한국이 감당해야 할 부분을 분자로 요구할 거라는 얘기다. 현재 군사 전문가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전쟁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손자가 말했다. 그게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그만큼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한다. 그래서 전쟁은 억제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차츰 세계는 전쟁 억제국면에 도달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쟁을 억제하는 데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힘으로 균형을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오직 군사적 실력만이 상대방의 군사적 도발을 억제할 수 있다. 그게 현재의 진실이다.
서구 주요 철학자들의 전쟁론을 살펴본 서영식 충남대 교수의 논문 「서양 근대의 전쟁담론에 관한 비판적 고찰」(『철학논총』, 86, 2016)은 그런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바로, 철학이 전쟁을 불가피한 것이라고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이 ‘철학적 유산’이 “오늘날에도 서구사회에서 이른바 정의로운 전쟁론이 강력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배경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진단한다.
본문에서 살펴보는 인물은 다섯 명이다. 마키아벨리, 홉스, 클라우제비츠, 칸트, 헤겔이다. 필자는 이들 각각의 전쟁론을 분석적으로 요약하고 그 한계를 일목요연하게 짚고 있어서 아래에 그 중심 대목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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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쟁의 주요 장면들. (출처: 위키피디아) |
‘정치’를 단순화시킨
마키아벨리의 한계
『군주론』은 전제군주가 정치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확대시키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차원의 윤리적 고려를 전적으로 배제할 것을 강권하는 정치공학적 논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당시 사분오열되어 있던 그의 조국 이탈리아가 맞닥뜨린 정치적 위기상황을 냉철히 분석하고 대응책을 철저히 군사적 차원에서 마련하도록 촉구함으로써, 탁상공론에 빠져있던 정치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후대의 현실주의 지식인 그룹이나 군사 사상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군주론』에서 전개된 마키아벨리의 선군정치사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현실정치 상황에서는 어디서든 적용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의 정치관은 권력지향성 이외에도 정치현실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예컨대 사회경제적인 요소, 종교와 윤리적 측면, 지리적 조건이나 자연환경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들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또한 그는 국가 간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를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해결할 수 있고 따라서 군주는 주로 전쟁의 준비와 실행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힘으로써, 정치현실의 다양하고 복잡한 측면을 자신의 이론 속에 포섭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일보한 사유 보여준 홉스,
안타깝지만 현실적 대안 못돼
홉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달리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거나, 현실 속에서 선악의 구별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원리나 도덕법칙 같은 것을 통해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을 거부했다. 그는 인간의 특성을, 그리고 삶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이해하고 묘사했다. 그렇지만 그는 일부의 오해와 달리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자연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졌다고 봤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Commonwealth)’의 성립과 사회의 존속이 가능함을 강조했다.
또한 홉스는 전쟁을 미화하거나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오히려 계약에 기초하되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국가(군주국)의 등장을 통해 인간사회의 안정과 역사적인 발전이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홉스는 전쟁의 원인과 본성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위한 방안을 심층적으로 논구했다.
그렇지만 그의 국가관과 전쟁의 종식을 위한 논의는 사실상 국내적인 갈등상황의 종식과 관련해서만 실제적인 의미를 지닐 뿐, 개인 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틀에서는 현실적인 대안이나 해결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판단중지’한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은 출간되고 약 170여 년 동안, 수많은 지휘관과 군사 전략가들이 전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군사이론서이자, 정치와 전쟁 양자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정치인들이 탐독한 실용적 정치이론서로 각광받아 왔다. 또한 이 저술은 오늘날 일반인들도 각자의 고단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참고하고 도움을 받는 고전이다.
그런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자체에 대한 가치평가를 시도하거나, 평가에 기초하여 전쟁 방지책을 제시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아마도 평가는 철학자의 몫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쟁의 현상이나 전쟁의 발발을 인간사에서 피할 수 없는 경험칙으로 받아들이고, 직업군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하여 적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고, 승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만 사고와 관심을 집중했다.
이러한 태도는 『전쟁론』의 저술 목적을 말하는 부분에서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필자는 아쉬운 점이 남는다고 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참혹함을 당대의 누구보다도 잘 알고 경험한 사람으로서, 참혹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나아가 화해와 평화의 길을 얼마간이라도 모색했다면, 그의 사유와 발언은 어떤 사상가의 그것보다 공명감이 컸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유일한 존재,
전쟁의 제도적 억지 고안한 칸트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이해 대립으로 발생하는 전쟁을 제도적 차원에서 방지함으로써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자는 명제를 제시했다. 그는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이성과 합치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나아가 모든 국가가 그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국제연맹을 창설할 것을 주창했는데, 평화는 오직 국가 간의 합리적인 연대의 방식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국가의 모든 구성원에게 세계시민권이라는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할 것과 국제기구에 속한 국가의 헌법이 공화주의에 입각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가 구상한 ‘세계시민권’은 현대의 인권 개념과 유사하며, 공화주의 이념은 내용상 현대의 민주주의 제도와 대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평화라는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를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 최초의 공식기구인 국제연맹은 1920년 창설과 더불어 민족 간 평화적인 연대를 핵심 이념으로 내세웠는데, 이 이념은 바로 세계의 영구평화에 관한 칸트의 구상과 내용상 일치했다.
또한 민주적인 정치질서가 범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된 이후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료들에 대한 분석은, 칸트의 민주적 평화명제가 1980년대 들어서 단계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평화 연구자들은 칸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화사상가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헤겔의 전쟁론에 대한
비판
헤겔의 전쟁관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필자는 말한다. 그는 낙관적 전쟁관으로 전쟁의 참상을 애써 무시하고 전쟁을 규칙 준수가 몸에 밴 신사들 간의 결투의 장이나 된다는 듯이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으로 묘사했다. 또 20세기 전체주의의 등장에서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더불어 중요한 사상적 배경을 형성함으로써 이후 제국주의와 열강들의 침략전쟁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사실 헤겔은 전쟁 상황에서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 금지나 초토화 작전 금지 등과 같이 국제법의 존중을 강조했으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헤겔의 전쟁관이나 전쟁윤리에 대한 언급은 모두 그의 철학적 관점과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총체적인 차원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지만, 대부분의 전쟁은 제한전쟁이 아니라 총력전의 양상을 띠며,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기존의 국제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필자는 대부분의 서양 근대철학자들은 전쟁 현상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 운영과 정치활동에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하는 하나의 필요악으로 간주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전쟁이 발생하면 인간과 사회뿐만 아니라 전쟁의 영향권 안에 있는 자연 세계 전체가 거의 회복 불가능한 수준의 타격을 받는다. 이라크 전쟁 중에 자행된 유전 파괴로 인한 자원낭비는 아쉬워하지만 그와 동시에 발생한 해양 오염사태나 어류와 조류의 떼죽음은 그저 언론의 기사거리로 취급될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 사회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인명의 손실이나 물질적 피해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생태계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인간 역시 생태계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필자의 전언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서양 중세의 정의로운 전쟁: 11세기의 평화론과 전쟁론을 중심으로」
차용구, 2012, 『역사학보』, 216, 165-189.
「헤겔의 전쟁론과 영구평화의 문제」
최동민, 2010, 『동서사상』, 9, 231-256.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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