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마르크스가 요즘 드라마를 시청한다면?

얼마 전의 일이다.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해 느긋이 카페에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일군의 젊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 중이었다. 뭔가를 긴밀히 논의하는 모양새였는데 연예인 이름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한 드라마의 PPL과 관련된 것이었다. 귀가 쫑긋해져서 상황을 주시해보니 한 방송사 드라마 작가들과 국내 대형출판사 편집자들이 드라마 속 책의 노출 방식과 정도를 굉장히 세부적으로 논하고 있었다. 어떤 장면에서, 대화의 어떤 순간에서 어느 정도의 길이로, 어떤 자세 속에서 넣어달라는 식이었다. 양측이 자기 쪽에 유리하도록 끌어당기는 끈이 팽팽하고 치열했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등 PPL 출신
베스트셀러의 시대
드라마나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상품을 노출시켜 광고 효과를 노리는 것을 PPL(드라마 속 프로모션 상품배치, product placement)이라고 한다. 드라마 외주사는 출연료 등 엄청난 제작비를 메꾸기 위해 출판사로부터 노출 조건으로 최소한 억대 이상의 돈을 받아내야 하고, 출판사는 억대 이상의 돈을 들여 광고하는 만큼 반드시 효과를 봐야하기 때문에 시청자를 독자로 변신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드라마 「도깨비」는 PPL이 성공한 가장 최근 사례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들고 나온 책이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올랐고, 판매부수도 엄청났다. 출판사는 모험을 했지만 투자한 것의 열 배, 스무 배 이상의 효과를 보았다. 양측이 모두 행복했다.
그런데 ‘폭망’과 ‘개망’의 사례도 많다. 드라마 시청률은 제법 나왔지만 PPL로 들어간 책의 판매는 지지부진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PPL의 테크놀로지는 점점 첨단을 달리게 된다. 시청자의 몰입도와 감정선이 극대화된 지점에 ‘전혀 이질감 없이’ 흘러들어가 ‘독창적 메시지’를 조합해내야 한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작가, 연출가, 배우, 편집자는 ‘실력자’로 인정받는다.
이제 PPL은 단순히 생산자가 프로모션을 위해 상품을 드라마에 끼워 넣는 수준을 벗어나서 전체적인 드라마 내용과 제작을 지배하고, 나아가서는 프로모션 상품이 정해지고 그에 맞추어 드라마를 제작하는 수준으로까지 진화했다. 최근 이런 PPL의 문제를 작심하고 파헤친 논문이 있다. 김영욱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가 『한국광고홍보학보』 2017년 봄호에 발표한 「PPL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 해석」이 그것이다. “노동으로서 시청 시간과 물신 숭배를 통한 프로모션 사회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 PPL을 근본적인 사회구조적 문제로서 바라보고 있다. 「태양의 후예」 같은 개별 프로그램이 거론되긴 하나, 그보다는 이론적·개념적 요소들을 검토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PPL의 효용만 따지지 말고,
‘착취의 구조’를 보자
PPL을 바라보는 기존 학계의 시선은 프로모션의 전문성, 즉 효과를 따져보는 경우가 많다. 소비자 권리에 대한 해석들은 소수로 비판적 입장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이를 자본주의의 근본적 병폐로 바라보는 논의는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PPL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이를 거부하면 관련 종사자들의 다양한 이익 창출 행위의 중심고리를 허물어뜨려 드라마 제작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모두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간 PPL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나 비판이 제기되어오지 못했다. 김영욱 교수는 “기능주의적인 효과 연구에서 벗어나서 좀더 사회 차원의 문제, 즉 방송 구조의 문제, 커뮤니케이션 수단 소유의 문제, 이윤 착취의 문제, 시청자의 시청 노동 시간 증대 문제 등 좀 더 사회구조적인 입장에서 PPL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프리즘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데 생산관계, 교환가치 등 복잡한 논의들이 있지만 간단히 말해 PPL을 “노동과 노동착취”의 틀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PPL이라지만 기본적으로 쇼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일인데 갑자기 웬 노동착취인가.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래의 주장을 들어보자.
[su_quote]시청자들은 PPL을 시청하는 것이 노동의 과정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착취 구조 속으로 귀속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데올로기와 내용도 이러한 공짜 노동의 제공을 자연스럽게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Jhally & Livant, 1986). 이런 맥락에서 노동의 공간도 작업장에서 벗어나 일상생활 곳곳을 침투하게 된다. (68쪽)[/su_quote]
김 교수의 논문은 수용자 상품론(audience commodity)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방송사들이 시청 시간을 미디어 상품으로 판매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다시 말해 수용자가 아니라 ‘수용자의 시청 시간’을 상품으로 본다는 것이다. 프로그램 주체는 수용자의 시청 시간을 광고주에게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방송사의 수익은 광고주에게 수용자의 광고 시청 시간을 판매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시청자들, 거부감은 느껴도
기만성은 못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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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온종일 일터에서 일하고 돌아와, 텔레비전을 틀면 마땅한 회피 수단이 없기 때문에 휴식 시간에도 끊임없이 광고를 봐줘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임금 노동과 공짜 노동으로 하루를 그물망처럼 짜놓았다. 나도 모르게 노동한다는 이야기다.
최근 한국언론진흥재단(2016)의 PPL에 대한 시청자 인식과 광고 효과 설문 조사에 따르면, PPL이 브랜드 인지도 향상(84.6%)에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PPL에 거부감(55%)을 느끼며, 드라마에 몰입하는 데 방해(58.9%)를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거부감을 이겨내는 데, 몰입하기 위해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PPL의 기만성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응답자(60.8%)가 별로 기만적이 않다거나 전혀 기만적이지 아니라고 응답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공짜노동을 해주면서 노동으로 인한 휴식의 왜곡효과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불가피성’은 이것을 더욱 고착화하고, PPL의 은밀하고 복잡한 메시지 전달 방식은 시청자 자유시간의 식민지화(colonization)를 유도한다.
SNS 사용자들이 사회적 편익을 붙잡으려고 사용을 강제당하는 측면이 있는 것과 같이, 방송 시청 행위도 보지 않게 되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인 관계 훼손이 두려워 강제되는 측면이 있다. “즉, 실질적인 강제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사회관계 속에서 이념적인 강제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su_quote]따라서 미디어 소비 문화의 편재성을 수용한다면 시청자의 시청 시간을 노동으로 보는 시각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의 형태가 다양해졌으며, 노동의 착취가 다층적이고 중첩적이며 새로운 체계하에서 이루어지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여가 시간에서도 원하지 않는 프로모션을 봐야 하는 노동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통용되는 공짜 노동이라는 개념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으며 착취의 강도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육체노동을 벗어난 다양한 유형의 노동을 상정한다면 노동으로서 시청 시간은 유효한 개념이다. (80쪽)[/su_quote]
방송-제작사 이중착취
구조
다음으로 이 논문이 문제삼는 것은 PPL의 이중 착취구조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외주제작사에 제작비를 적게 주고 드라마를 제작함으로써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보통 방송사들은 제작비 원가의 60∼70퍼센트 정도에서 외주 제작사에 제작을 맡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는 PPL을 통해서 제작비를 충당하는 구조다.
구조라는 얘기가 나와서인데, 이러한 구조에서는 프로그램의 내용은 철저하게 시청자 시청 시간을 가장 효율적인 광고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PPL은 메시지, 즉 프로그램의 내용이 자본주의 구조에 철저하게 귀속되는 그 지점에서 형성된다. 결국 프로그램 내용은 구조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 결국 방송사만이 시청자의 시청 노동 시간과 제작사에 대한 이중 착취 구조를 통해서 잉여 광고 시청 시간과 PPL 시간을 늘리게 되고, 이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게 된다. 방송사는 광고를 통해서도 이윤을 실현하고, 제작비 절감을 통해서도 이윤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모든 소비 대상은 사실상 사용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에 종속된다. 이러한 교환 가치 종속이 물신화를 더욱 자극하게 되고, 사람들은 주체적인 소비보다는 소비 대상이 결부되어 있는 의미와 신화에 탐닉해서 박탈당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상대적인 만족감을 얻게 된다. 우리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드라마 주인공이 입었던 ‘그 옷’과 읽었던 ‘그 책’과 먹었던 ‘그 음식’을 소비한다. 이제 드라마가 가졌던 사랑, 꿈, 청춘의 이상이 PPL의 대상에 투영되고, 대상의 사용 가치는 신화 속에서 의미를 상실한다.” (87쪽)
‘노동’ 개념 지나친 확장 아닌가?
김영욱 교수의 이번 논문을 읽고 드는 느낌은 우선,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는 점이다. 방송사와 외주사의 관계는 늘상 알려져왔던 것이고, PPL을 통한 이윤 추구의 극대화 또한 우리가 매번 일상에서 목도하고 있는 현상이다. 다만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고전적인 논의 구조 속에서 PPL 시스템을 명료하게 분석했다는 점 덕분에 독자로서 이 문제를 매우 짜임새 있게 정리할 수 있다는 미덕이 있다. 이 논문의 핵심이기도 한 ‘시청 노동’이라는 부분이 과연 ‘노동’의 개념적 재인식을 설득력 있게 촉구하고 있는지가 중요하게 토론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이뤄지는 노동의 유연화와는 또 다르게, 이것은 ‘노동의 액체화’라고 해야 할지 ‘노동의 기체화’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찌 보면 그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고전적 틀이 지금도 유용한 지배적 인식도구인 것처럼 합리화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여지도 남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광고자본주의 정치경제학」
김승수, 2011, 『방송통신연구』, 76, 9-35.
「TV 드라마 PPL에 대한 심리적 반발에 관한 연구」
오미영, 2011, 『한국언론학보』, 55(6), 384-409.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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