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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마르크스가 요즘 드라마를 시청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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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얼마 전의 일이다.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해 느긋이 카페에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일군의 젊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 중이었다. 뭔가를 긴밀히 논의하는 모양새였는데 연예인 이름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한 드라마의 PPL과 관련된 것이었다. 귀가 쫑긋해져서 상황을 주시해보니 한 방송사 드라마 작가들과 국내 대형출판사 편집자들이 드라마 속 책의 노출 방식과 정도를 굉장히 세부적으로 논하고 있었다. 어떤 장면에서, 대화의 어떤 순간에서 어느 정도의 길이로, 어떤 자세 속에서 넣어달라는 식이었다. 양측이 자기 쪽에 유리하도록 끌어당기는 끈이 팽팽하고 치열했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등 PPL 출신
베스트셀러의 시대

드라마나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상품을 노출시켜 광고 효과를 노리는 것을 PPL(드라마 속 프로모션 상품배치, product placement)이라고 한다. 드라마 외주사는 출연료 등 엄청난 제작비를 메꾸기 위해 출판사로부터 노출 조건으로 최소한 억대 이상의 돈을 받아내야 하고, 출판사는 억대 이상의 돈을 들여 광고하는 만큼 반드시 효과를 봐야하기 때문에 시청자를 독자로 변신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드라마 「도깨비」는 PPL이 성공한 가장 최근 사례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들고 나온 책이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올랐고, 판매부수도 엄청났다. 출판사는 모험을 했지만 투자한 것의 열 배, 스무 배 이상의 효과를 보았다. 양측이 모두 행복했다.

그런데 ‘폭망’과 ‘개망’의 사례도 많다. 드라마 시청률은 제법 나왔지만 PPL로 들어간 책의 판매는 지지부진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PPL의 테크놀로지는 점점 첨단을 달리게 된다. 시청자의 몰입도와 감정선이 극대화된 지점에 ‘전혀 이질감 없이’ 흘러들어가 ‘독창적 메시지’를 조합해내야 한다. 이것을 할 수 있는 작가, 연출가, 배우, 편집자는 ‘실력자’로 인정받는다.

이제 PPL은 단순히 생산자가 프로모션을 위해 상품을 드라마에 끼워 넣는 수준을 벗어나서 전체적인 드라마 내용과 제작을 지배하고, 나아가서는 프로모션 상품이 정해지고 그에 맞추어 드라마를 제작하는 수준으로까지 진화했다. 최근 이런 PPL의 문제를 작심하고 파헤친 논문이 있다. 김영욱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가 『한국광고홍보학보』 2017년 봄호에 발표한 「PPL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정치경제학 해석」이 그것이다. “노동으로서 시청 시간과 물신 숭배를 통한 프로모션 사회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 PPL을 근본적인 사회구조적 문제로서 바라보고 있다. 「태양의 후예」 같은 개별 프로그램이 거론되긴 하나, 그보다는 이론적·개념적 요소들을 검토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PPL의 효용만 따지지 말고,
‘착취의 구조’를 보자

PPL을 바라보는 기존 학계의 시선은 프로모션의 전문성, 즉 효과를 따져보는 경우가 많다. 소비자 권리에 대한 해석들은 소수로 비판적 입장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이를 자본주의의 근본적 병폐로 바라보는 논의는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PPL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 이를 거부하면 관련 종사자들의 다양한 이익 창출 행위의 중심고리를 허물어뜨려 드라마 제작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모두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간 PPL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이나 비판이 제기되어오지 못했다. 김영욱 교수는 “기능주의적인 효과 연구에서 벗어나서 좀더 사회 차원의 문제, 즉 방송 구조의 문제, 커뮤니케이션 수단 소유의 문제, 이윤 착취의 문제, 시청자의 시청 노동 시간 증대 문제 등 좀 더 사회구조적인 입장에서 PPL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프리즘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데 생산관계, 교환가치 등 복잡한 논의들이 있지만 간단히 말해 PPL을 “노동과 노동착취”의 틀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PPL이라지만 기본적으로 쇼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일인데 갑자기 웬 노동착취인가.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래의 주장을 들어보자.

[su_quote]시청자들은 PPL을 시청하는 것이 노동의 과정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착취 구조 속으로 귀속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데올로기와 내용도 이러한 공짜 노동의 제공을 자연스럽게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Jhally & Livant, 1986). 이런 맥락에서 노동의 공간도 작업장에서 벗어나 일상생활 곳곳을 침투하게 된다. (68쪽)[/su_quote]

김 교수의 논문은 수용자 상품론(audience commodity)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방송사들이 시청 시간을 미디어 상품으로 판매한다고 보는 시각이다. 다시 말해 수용자가 아니라 ‘수용자의 시청 시간’을 상품으로 본다는 것이다. 프로그램 주체는 수용자의 시청 시간을 광고주에게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방송사의 수익은 광고주에게 수용자의 광고 시청 시간을 판매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시청자들, 거부감은 느껴도
기만성은 못 느껴

 

 

문제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온종일 일터에서 일하고 돌아와, 텔레비전을 틀면 마땅한 회피 수단이 없기 때문에 휴식 시간에도 끊임없이 광고를 봐줘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임금 노동과 공짜 노동으로 하루를 그물망처럼 짜놓았다. 나도 모르게 노동한다는 이야기다.

최근 한국언론진흥재단(2016)의 PPL에 대한 시청자 인식과 광고 효과 설문 조사에 따르면, PPL이 브랜드 인지도 향상(84.6%)에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PPL에 거부감(55%)을 느끼며, 드라마에 몰입하는 데 방해(58.9%)를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거부감을 이겨내는 데, 몰입하기 위해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PPL의 기만성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응답자(60.8%)가 별로 기만적이 않다거나 전혀 기만적이지 아니라고 응답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공짜노동을 해주면서 노동으로 인한 휴식의 왜곡효과를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불가피성’은 이것을 더욱 고착화하고, PPL의 은밀하고 복잡한 메시지 전달 방식은 시청자 자유시간의 식민지화(colonization)를 유도한다.

SNS 사용자들이 사회적 편익을 붙잡으려고 사용을 강제당하는 측면이 있는 것과 같이, 방송 시청 행위도 보지 않게 되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사회적인 관계 훼손이 두려워 강제되는 측면이 있다. “즉, 실질적인 강제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사회관계 속에서 이념적인 강제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su_quote]따라서 미디어 소비 문화의 편재성을 수용한다면 시청자의 시청 시간을 노동으로 보는 시각은 설득력이 있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의 형태가 다양해졌으며, 노동의 착취가 다층적이고 중첩적이며 새로운 체계하에서 이루어지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여가 시간에서도 원하지 않는 프로모션을 봐야 하는 노동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통용되는 공짜 노동이라는 개념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으며 착취의 강도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육체노동을 벗어난 다양한 유형의 노동을 상정한다면 노동으로서 시청 시간은 유효한 개념이다. (80쪽)[/su_quote]

방송-제작사 이중착취
구조

다음으로 이 논문이 문제삼는 것은 PPL의 이중 착취구조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외주제작사에 제작비를 적게 주고 드라마를 제작함으로써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보통 방송사들은 제작비 원가의 60∼70퍼센트 정도에서 외주 제작사에 제작을 맡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는 PPL을 통해서 제작비를 충당하는 구조다.

구조라는 얘기가 나와서인데, 이러한 구조에서는 프로그램의 내용은 철저하게 시청자 시청 시간을 가장 효율적인 광고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PPL은 메시지, 즉 프로그램의 내용이 자본주의 구조에 철저하게 귀속되는 그 지점에서 형성된다. 결국 프로그램 내용은 구조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 결국 방송사만이 시청자의 시청 노동 시간과 제작사에 대한 이중 착취 구조를 통해서 잉여 광고 시청 시간과 PPL 시간을 늘리게 되고, 이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게 된다. 방송사는 광고를 통해서도 이윤을 실현하고, 제작비 절감을 통해서도 이윤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모든 소비 대상은 사실상 사용 가치보다는 교환 가치에 종속된다. 이러한 교환 가치 종속이 물신화를 더욱 자극하게 되고, 사람들은 주체적인 소비보다는 소비 대상이 결부되어 있는 의미와 신화에 탐닉해서 박탈당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상대적인 만족감을 얻게 된다. 우리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드라마 주인공이 입었던 ‘그 옷’과 읽었던 ‘그 책’과 먹었던 ‘그 음식’을 소비한다. 이제 드라마가 가졌던 사랑, 꿈, 청춘의 이상이 PPL의 대상에 투영되고, 대상의 사용 가치는 신화 속에서 의미를 상실한다.” (87쪽)

‘노동’ 개념 지나친 확장 아닌가?

김영욱 교수의 이번 논문을 읽고 드는 느낌은 우선,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는 점이다. 방송사와 외주사의 관계는 늘상 알려져왔던 것이고, PPL을 통한 이윤 추구의 극대화 또한 우리가 매번 일상에서 목도하고 있는 현상이다. 다만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고전적인 논의 구조 속에서 PPL 시스템을 명료하게 분석했다는 점 덕분에 독자로서 이 문제를 매우 짜임새 있게 정리할 수 있다는 미덕이 있다. 이 논문의 핵심이기도 한 ‘시청 노동’이라는 부분이 과연 ‘노동’의 개념적 재인식을 설득력 있게 촉구하고 있는지가 중요하게 토론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이뤄지는 노동의 유연화와는 또 다르게, 이것은 ‘노동의 액체화’라고 해야 할지 ‘노동의 기체화’라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어찌 보면 그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고전적 틀이 지금도 유용한 지배적 인식도구인 것처럼 합리화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여지도 남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광고자본주의 정치경제학」
김승수, 2011, 『방송통신연구』, 76, 9-35.

「TV 드라마 PPL에 대한 심리적 반발에 관한 연구」
오미영, 2011, 『한국언론학보』, 55(6), 384-409.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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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에 대한 또다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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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지난 주 금요일 3월 10일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선고된 날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기나긴 과정이었는데, 지난 3개월 동안의 헌법재판소의 심의도 있었고, 국회에서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하고자 하는 여야의 여러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2016년 10월 29일을 시작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일련의 대규모 집회이기도 했다. 김공회 연구자의 「“촛불정국”의 사회경제적 차원: 분석과 전망」(『마르크스주의 연구』, 14(1), 2017)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기까지 주요한 사회운동의 변수로 작용하였던 촛불시위와 그 정국의 사회경제적 차원을 분석한다. 특히 저자가 ‘촛불정국’이라고 불리는 것이 무엇을 이끌어왔고, 또 무엇을 반영하며, 앞으로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인지를 다룬다.

 

촛불정국의
경과

시작은 종합편성채널 TV조선의 보도였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청와대의 개입이 있었을 수 있다는 보도가 등장하였는데, 이 보도는 작년 7월이었다. 그러나 이 보도는 별다른 여파가 없이 잠잠했다. 이 문제는 조선일보 주필의 개입때문이라는 의혹이 등장했고, 한겨레가 이를 지적하였다. 이후 10월 24일 마찬가지로 종합편성채널인 JTBC가 이른바 ‘태블릿PC’를 입수·보도했고 촛불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들이 입수한 태블릿PC에는 최순실이 청와대 문건을 받아보며 국정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담겨 있었다. 이 보도를 시작으로 촛불시위는 시작되었고, 10월 29일 첫 주말집회였던 제1차 범국민행동에 3만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 다음주말 집회에서는 100만명으로 늘었고, 제6차 범국민행동에서는 232만명이 광화문에 모였다. 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만 계산된 것이었다.

 

촛불정국의
사회경제적’ 배경

하지만 촛불집회의 폭발적인 팽창은 조금 의아한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10월 중순까지도 ‘백남기 추모국면’은 사람들을 광장으로 불러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나 가계부채, 청년실업, 고 백남기 농민과 같은 농민문제 등도 큰 동력이 되지는 못했다. 기존의 여러 지적들에서 불평등 심화나 정경유착 등이 촛불정국을 이끌었다고 제기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200만 명이 넘는 군중을 한꺼번에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든 ‘원인’으로서 분석적으로 자리매김하지는 않는 것 같다. 흔히 진보진영은 이번 촛불정국의 배경으로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 재벌의 독점과 횡포, 비정규직 확산과 고용불안, 치솟는 가계부채, 주거불안정 등을 들고자 하며, 이번 촛불정국에서 터 져 나온 대중의 분노는 그간 누적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불만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매주 열리는 토요집회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과 관련자들의 처벌 이외에 다른 사회경제적 이슈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회경제적 배경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회경제적 원인의 역할을 미미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미미해서라기보다 사회경제이외의 배경이 너무도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 재생산의
위기

촛불시위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범국민적 분노에서 시작된 것이다. 때문에 여기에 1차적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촛불시위의 등장에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문제는 그동안 자본과 국가권력, 언론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통제되었으나, 촛불시위 이후의 이 통제는 느슨해질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대중이 ‘자각’하면서, 나아가 이러한 조건 속에서 촛불정국의 장기화 자체가 모순들을 증폭시키면서, 그 모 순들의 존재가 일거에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저자는 그 모순을 ‘재생산의 위기’라고 표현한다. 이 재생산의 위기는 직접적으로는 ‘자본’ 재생산의 위기(=수익성의 위기)이지만, 노동력의 재생산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재생산까지 포괄하는 총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1997년 이후 한국경제의 문제를 ‘불평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 불평등은 자산불평등과 소득불평등으로 다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후자는 특히 정규직-비정규직과 같은 고용형태의 차이에서 주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존재하는 생산의 문제로 보기 보다는 생산의 결과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의 문제에 주로 초점을 둔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과 달리, ‘재생산의 위기’라고 명명하는 것은 분배차원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불평등이라는 자본축적상의 위기가 표현되는 형태일 뿐임을 명확히 한다.

한편 저자에 따르면, 이번 촛불정국이 한국의 자본에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이를 통해 자본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경제의 다른 두 주체인 노동과 국가에 떠넘기던 그간의 관행에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노동의 경우엔 그 재생산의 위기가 이미 표면화되었으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되고 대중의 분노에 의해 박근혜 대통령이 권좌에서 끌어내려질 상황에 처한 지금, 재벌들은 그 자신이 ‘공범’으로 몰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팎에서 더 이상 국가 의 예전과 같은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정경유착’
문제제기를 넘어서

물론 현재의 국면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사회경제적 질서는 얼마간의 재편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과감한 복지공약과 경제민주화를 기치로 내걸었으나, 이를 실현시키지 못했고, 재생산의 위기는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정경유착의 고약한 말로를 보여주었는데,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정경유착이 문제로 떠오른 데는 크게 두 가지 맥락이 있다. 첫째로 과거 신군부와 같이 정당성이 부족한 정권이 공직사회와 재벌을 통제하려는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둘째로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구제금융 당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정경유착에 대한 문제제기가 ‘공직사회 때리기’나 ‘더 완전한 자본주의 도입’으로 귀결되었던 것은 놀라운 것도 아니다.

때문에 저자에 따르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문제를 단순히 정경유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그것이 가르키는 현상의 거대함을 적절히 환기할 수’ 없다. 요컨대 자본-임노동의 생산관계가 현대경제의 토대를 이룬다는 것, 그리고 자본축적이 체계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 동학이라는 것을 명확히 할 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문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 자영업의 붕괴와 가계부채 문제 등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의 난맥을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러한 저자의 설명은 특히 정경유착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촛불정국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원론적인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촛불정국이 갑작스레 등장한 까닭에 대한 기존의 설명들을 비판하고 있는 부분은 흥미로우나, 그 이상의 대안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여러가지 촛불정국 이후의 동향에 대한 예측은 저널리즘적인 정치비평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고 하겠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재생산의 위기와 재생산의 사회화 전략 모색」
강동진, 2015, 『진보평론』, 65, 86-116.

「재생산의 위기와 성장체제의 전환」
송명관, 2015, 『진보평론』, 65, 17-52.

박알림 리뷰어  allimp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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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학, 자본주의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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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흔히 회계사는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파수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파수꾼이 감시대상과 함께 자신을 위해서 부정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그를 가진 자들의 편이라고 비난한다. 가깝게는 대우조선에서부터 몇 년 전의 저축은행사태, 더 멀게는 분식회계가 횡횡했던 IMF 이전의 기업들까지 물욕에 찌들어 선을 넘어버린 회계사들은 탐욕의 화신이기도 하다. 그들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서 신성한 파수꾼에서 탐욕의 화신이자 지배계급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 선이 허상이었다면 어떨까? 한형성(이하 필자)의 「비판회계학의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본 쌍용자동차(주) 사례연구」(『마르크스주의 연구』, 9(2), 2012)는 회계 자체가 이미 특정 계급을 위한 것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기능하는 것이라는 점을 쌍용자동차(이하 쌍용차))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회계는
계급투쟁의 장이다

회계는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알튀세르가 이론의 영역을 계급투쟁의 장으로 규정했던 것에서 회계 또한 벗어날 수 없다. 회계는 “계급투쟁에 따라 ‘구성된 것’”으로 본질적으로 계급 편향적이지만, 수치라는 외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며 “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성한 언어’가 된”다. 이런 중립적인 외양 덕분에 회계는 계급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지배계급의 이해를 객관적인 것으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주류 회계학은 이윤, 효율성, 비용절감과 같은 용어들로 이뤄진 담론이며, 이는 애초에 자본주의적 소유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대중들은 비용절감과 효율적인 경영을 위해서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 이에 대해서 비판회계학의 관점은 회계를 이데올로기로 규정한다. 회계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이윤을 위해서 생산이 조직된다는 자본주의의 특수한 논리에 포섭된 주체들이 생산된다. 이는 구체적인 수준에서는 “표준원가회계와 같은 회계절차들을 통해 노동자들의 규율과 통제를 위한 관리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역할”로 나타난다.

따라서 회계라는 담론을 실천하는 회계사와 회계법인들 또한 “계급갈등의 중립지대”에 서있을 수 없다.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다른 지식전문가들, 기업들, 정부와의 ‘불분명한’ 관계들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독점적 기업군이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지는 않지만)도 지적하듯이 동시에 이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일정부분은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회계사와 회계법인이 수행하는 회계 감사는 일정부분 국가와 시장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며, 국가 장치의 보완자로서 역할을 한다.

 

신자유주의적 전환
이후의 회계

‘신자유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전의 국가가 수행하던 공적 영역이 사유화-시장화 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자명한다. 이런 공적인 것의 사적인 것으로 해체는 회계에서도 나타났다. 신자유주의로의 전환 이후 회계 서비스가 충족시켜주던 국가적-사회적 필요는 보다 사적인 필요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산업사회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 국면에서, 회계사와 회계법인들은 치열한 상업적 경쟁을 벌이고 상업적 서비스 제공이 이들의 영업의 주축이 되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국가 장치로서의 공공성마저도 상당부분 포기해버렸다. 회계법인은 자본가들의 사적이익을 공적인 것, 중립적인 것으로 포장해내면서, 자본가의 “동맹자 역할”을 해냈다. 치열해진 회계 시장에서의 경쟁에 따라서, 회계 산업은 국제적인 규모의 대형회계법인과 그들과 맴버십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각국의 회계법인들의 독과점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들은 상업적 자문서비스를 통해서 기업의 인수합병을 돕고, 구조조정에 참여하며, 민영화를 부추기는 자본가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만들어진 기업-정부-회계법인 간의 촘촘한 “인적 동맹” 관계는 회계사와 회계법인의 독점적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회계는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전환을 돕는 이데올로기로서도 기능한다.

이런 회계 산업의 동학은 국내 법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회계감사가 국내 회계 법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고, 컨설팅과 같은 상업적 자문 서비스의 비중은 늘어나고 있다. 2007년에 각각 수입 중 41.2%와 37.9%의 비중을 차지했던 회계감사와 상업적 자문 서비스는, 2009년 역전되어 각각 36.2%와 41.5%를 차지하게 되었다. 정부와의 인적 동맹 관계 또한 공고히 나타나는데, 국내 3대 회계법인(삼일, 안진, 삼정)의 공개된 고문들은 대부분 전직 고위 관료들이 차지하고 있다.

 

쌍용차 사태
: 회계는 어떻게 구조조정을 정당화하는가

흔히 ‘쌍용차 사태’라고 불리는 2009년의 파업과 이와 연관된 2005년부터 2011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도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의 회계법인들의 역할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쌍용차의 매각, 법정관리, 파업, 재매각의 일련의 사건들에는 국내 BIG4 회계법인 중 3개가 엮여 있다. 이 과정 중에서 이 논문이 집중하고자 하는 “의문점들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쌍용차의 2008년 매출이 2007년도에 견주어 20% 줄었는데, 이러한 매출하락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둘째, 2008년의 영업손실은 2,274억 원인데, 여기에 영업손실의 2배가 넘는 4,823억 원의 추가 손실이 더해져 당기순손실이 7,097억 원이 된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2,646명의 정리해고안이 포함된 삼정KPMG의 경영자문보고서가 안진회계법인의 2008년 감사보고서에 기초해 작성했다면, 경영자문보고서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다.”

 

ⓒYTN 뉴스

 

회계법인의 감사보고서에는 감사인의 감사의견을 적을 수 있게 되어있다. 이 감사의견은 현재 기업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로 여겨진다. 따라서 쌍용차에 대한 2008년의 감사보고서에 적힌 매출하락에 대한 원인분석은 이듬해 신청된 쌍용차의 법정관리의 원인을 밝히는 중요한 보고서였으며. 이의 내용에 따라서 쌍용차에 대한 앞으로의 조치들이 결정되는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서 안진은 쌍용자동차의 매출하락의 원인이 주주회사인 상하이 기차의 부실한 경영이 아니라 2008년의 금융위기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는 같은 시기 금융위기로 인한 환율상승의 영향으로 가격경쟁력이 높아져서 동종 산업에 종사하는 현대차와 기아차의 매출이 전년 대비 상승했으며, GM대우 또한 매출 하락이 없었다는 점을 무시한다. 즉, 안진의 보고서는 쌍용차 경영진의 경영실패와 대주주인 상하이기차의 계약불이행으로 인한 경쟁력 약화를 외부요인으로 돌려, 쌍용차에서 일어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2008년의 매출액 감소와 함께 노동자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의 근거가 된 당기순손실의 계산 과정 또한 명확치 않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구조조정을 강요하거나 세금회피 등을 이유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회계장부상 이익을 줄이기도 한다. 쌍용차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2008년 쌍용차의 영업손실은 2,274 억 원인데, 당기순손실은 7,079억 원이다. 쌍용차의 당기순손실의 증가는 대부분 회사가 가지고 있는 유형의 자산(토지, 건물, 기계, 설비, 재고 등등)에 대한 평가액이 기존보다 5177억 원 줄어들었기 때문, 즉 유형자산 손상차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유형자산 손상차손은 유형자산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기대수입(미래의 경제적 효익)이 줄어들었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100억을 주고 산 고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이 공장에서 생산한 상품을 통해서 50억 밖에 벌지 못할 것으로 추정되고, 이 공장을 팔아도 50억만 받을 수 있을 때는 사실상 이 공장이 100억원의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50억 원의 가치를 갖기 때문에 50억의 손실을 손상차손으로 장부에 반영해야한다. 쌍용차는 이러한 회계규정을 이용해서, 미래에 자신의 예상 수익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회계장부 상 손실을 부풀렸다. 회계장부에 반영되어야 하는 신차개발의 효과, 한국감정원의 감정평가액 등의 정보는 배제하고, 매출액 하락 경향과 외부의 경제위기 등은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당기순손실의 증가를 근거로 노동자들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을 정당화했다.

쌍용차 구조조정의 실질적인 근거가 된 삼정의 ‘경영정상화방안 검토보고서’에는 2,646명의 정리해고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위에서 말한 안진의 회계보고서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철저히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작성되었으며, 회계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한 보고서를 통해서 경영정상화 방안을 마련하고, 노동자들의 대량해고의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 회계보고서의 분석 안에는 자본가의 이해관계는 반영되어 있을지 몰라도 그 이해관계가 의미하는 사회적 의미-노동자들의 삶, 가족과 지역공동체에 미치는 영향, 사회적 비용 등-는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 삼정의 회계보고서가 아무리 형식적으로 공정한 회계 기법에 근거한 것이더라도 이는 애초에 자본의 편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명확히 드러내지 않은 채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고 있지만 회계학은 그 자체로 자본가의 의식이 체계적으로 드러나는 담론이기도 하다. 사회적 관계가 그 자체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복잡하고 중층적인 기제들에 의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이 발생할 때, 우리는 이면의 사회적 관계 자체를 볼 수 없기에 표층의 사건들 간의 관계만을 생각한다. 회계에서 사회적으로 가치가 어떻게 생산되며 그를 실제로 생산해내는 관계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지 않고, 오로지 이윤과 비용만을 고려하는 것은 회계 자체가 우리의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회계가 고도로 체계화된 물신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가의 의식을 반영하는 물신주의. 그리고 이는 노동자의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투명하지 않은 사회적 사실들 사이 너머의 사회적 관계는 회계장부의 이면에서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마르크스주의 회계학의 방법론을 통해 본 한국의 회계제도」
한형성, 2017, 『마르크스주의 연구』, 14(1), 120-163.

「회계학연구에서 비판의 의미」
김성웅, 2013, 『국제회계연구』, 51, 449-474.

나성채 리뷰어  ists191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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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시오정리는 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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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분석함에 있어서 특히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즉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이윤율이 하락할 수 있다는 것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있어서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신기술을 도입하는 자본가가 이윤율을 하락하는 기술을 도입할 리 없을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실제로 오키시오에 의해 수리적으로 논의되어,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이는 이른바 오키시오 정리라고 불리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된다.

[su_quote]구 균형가격으로 계산할 때 높은 이윤율을 얻는 신기술의 도입은, 실질임금바스켓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한, 새로운 균형가격 하에서 이윤율을 상승시킨다. (Nakatani and Hagiwara, 1997)[/su_quote]

그러나 이러한 오키시오정리는 오키시오의 마지막 논문(Okishio, 2000)에서 두가지 제한적인 가정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1) 실질임금률이 일정하다는 것, (2) 새로운 생산가격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마지막 논문은 오키시오정리를 오키시오 자신이 제한적으로만 성립될 뿐이라며 비판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류동민은  「오키시오정리에 관한 연구」(『경영경제연구』, 29(2), 2006)에서 오키시오의 마지막 논문(Okishio, 2000)에서 밝히고 있는 오키시오정리의 가정에 주목한다. 이에 따라 오키시오 정리가 무엇인지 확인하며, 오키시오의 연구가 정합적임을 밝힌다.

 

반사실적 명제로서의
오키시오정리

앞서 지적하였듯이 오키시오정리는 흔히 마르크스의 이윤율저하설을 비판하는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오키시오정리에서 이윤율 저하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간과하는 것이다. 오키시오정리에 따르면 실질임금률의 상승은 이윤율을 저하시킬 수 있다. 앞선 논의는 실질임금이 고정일 때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임금률이 일정하다는 전제는 오히려 반사실적(counterfactual) 상황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키시오정리에서 말하고 있는 대우명제는 “만약 장기적으로 이윤율이 저하한다면, 그것은 실질임금률의 상승 때문일 수밖에 없다”이다.

그렇다면 실질임금률이 어떠한 동태적 관계를 가지고 변화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Laibman(1996)은 실질임금률의 변화율이 노동수요의 변화율과 노동공급의 변화율 간의 차이와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즉 이들의 부호는 같다. 노동수요변화율이 노동공급변화율 보다 크면 실질임금률이 상승하는 구조인 것이다. 한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증가시키는 편향적 기술변화는 노동수요를 줄일 것이므로 실질임금률의 변화율은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즉 기술이 진보가 진행되는데 실질임금률이 일정하다는 가정은 그 자체로 반사실적 상황인 것이다.

 

오키시오정리에 관한
가지 상이한 기준

Roemer(1981), Foley(1986), Laibman(1997)은 실질임금률이 일정하다는 가정을 임금몫이 일정하다는 가정으로 대체하여, 비용절감적인 기술의 도입이 필연적으로 이윤율을 경향적으로 저하시킨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이러한 결과를 단일재 모형을 기초로 표현하면 <표1>처럼 나타낼 수 있다.

K, W, P, Y는 각각 실물자본스톡, 임금, 이윤, 순생산물이다. 단 여기서 K/Y는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대리변수이다. ‘OT’는 오키시오 정리(Okishio Theorem; OT)의 상황을 나타내며, ‘Roemer 등’은 가정을 수정한 Roemer(1981), Foley(1986), Laibman(1997)에서의 상황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실질임금일정을 가정하는 오키시오의 기준과 임금몫일정을 가정하는 Roemer(1981), Foley(1986), Laibman(1997)의 기준, 두 가지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다. Foley(1986)는 기술변화가 이윤율을 하락할지 아닐지는 선험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제기한다. 또한 ‘신해석’의 맥락에서 화폐임금과 “화폐가치”의 곱으로 정의되는 노동력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기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화폐가치가 일정하다는 주장도 제한적이거나 자의적일 수 있다. 먼저 오키시오학파는 실질임금률이 일정하다는 가정을 “노동자들의 효용수준이 저하하지 않는 한”이라는 것으로 보다 완화한다. 또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 화폐임금이 일정할지라도, 화폐가치는 변동하게 된다. 즉, 혁신의 결과로 화폐가치가 감소한다면, 화폐임금이 일정하더라도 노동력가치는 감소할 것이고, 따라서 이윤율은 상승한다.

Laibman(1997)은 이 새로운 조건이 “계급투쟁의 중립성” 조건으로 해석한다. 즉, 기술변화과정에서 계급 간 역관계에 변화가 없다면 임금분배몫도 일정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불합리한 측면이 존재한다. 이 문제는 일정한 임금몫과 경쟁적 노동시장의 가정이 양립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즉, 특정 부문의 임금몫이 다른 부문에 비해 하락한다면, 해당 부문의 노동자들은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노력수준을 줄이거나 다른 부문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착취율이 하락하고, 이는 자본가의 반대작용을 이끌어낼 것이다.

 

오키시오정리에의
경쟁균형과정 도입

오키시오정리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은 Fine(1982)이다. Fine(1982)는 기술변화를 낳는 과정이 균형의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균형이 결코 달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술변화의 전후를 비교하는 비교정학분석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오키시오의 마지막 논문(Okishio, 2000)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오키시오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특정한 파라미터 값과 초기조건 하에서는 자본간의 경쟁이 이윤을 소멸시킬 수도 있음을 보인다. 그의 시뮬레이션모형의 핵심은, 기술변화가 없는 경우에조차, 자본이동과 노동시장 사이의 상호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시뮬레이션은 전통적인 Nikaido(1985)의 안정성 조건이 만족하는지를 살펴본다. Nikaido의 안정성 조건은 소비재부문의 유기적 구성이 자본재부문의 유기적 구성보다 크다는 것인데, 시뮬레이션 결과 두 부문의 이윤율이 0으로 수렴하는 것으로 보아, 자본의 유기적 구성 간 격차가 해소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부문별 이윤율이 0에 수렴한다는 사실은 Nikaido의 조건이 생산가격의 성립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래의 시뮬레이션은 동일한 가정 하에서 화폐임금과 실질임금이 수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앞서 살펴본 실질임금률의 불변 가정과 화폐임금몫의 불변 가정이 동태적 관계 속에서 서로 수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기술변화와 노동시장 간의 상호작용에 경쟁과정이 도입된다면, 오키시오의 분석틀이 일관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키시오의 결론과
동태적 함의

오키시오정리는 흔히 마르크스의 이윤율저하설을 비판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되어왔다. 그러나 이 정리는 반사실적 상황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실질임금이 일정하다고 가정하는 정태적 상황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노동시장과 기술변화의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동태적 관계를 도입해야만 한다. 한편, 실질임금률이 일정해야 한다는 반사실적 가정은 임금몫의 불변이라는 수정된 가정과 상충되는데, 서로 상충되는 여러가지 기준들도 역시 동태적 관계를 고려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것이었다. 류동민(2006)에 따르면, 오키시오의 마지막 논문(Okishio, 2000)은 오키시오정리라고 불리는 그의 초창기 작업을 일부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이와 같은 동태적 관계를 고려함으로써 일관적임을 지적한다.

또한 한편으로 여기서 살펴본 오키시오의 연구는 Dumenil-Levy(1993)의 교차이원적 동학(cross-dual dynamics) 개념과 유사하다는 점 또한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점은 오키시오정리가 가정하고 있는 두 가지 제한적인 가정이 오키시오정리가 가지는 의미를 반사실적 명제로 축소시켜버리지만, 또 동시에 경쟁동학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Dumenil-Levy(1993)의 교차이원적 동학과 같이 마르크스경제학의 동학적 이론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현대자본주의의 동학과 오키시오 정리: 브레너 논쟁을 중심으로」
류동민, 2004, 『마르크스주의 연구』, 1(2), 244-265.

「한국의 잉여가치율 추이: 1993~2010」
유철수, 2012, 『마르크스주의 연구』, 9(4), 134-172.

박알림 리뷰어  allimp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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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학의 탈신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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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경제위기 이후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논의들은 부단히 이어지고 있다. 경제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경제학의 외부 – 경우에 따라서는 경제학 내부의 비주류경제학을 포함한다 – 에서는 경제학이 활용하는 수학적 논의들이 복잡하기만 할 뿐 현실경제를 적절히 설명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지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 의견들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수학이 과학적 논의에 있어서 핵심적인 설명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도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수학을 진지하게 경제학의 방법으로 활용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당대의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자를 자임했던 마르크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의 경제학자 모리시마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일반균형이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왈라스와 함께 최초의 수리경제학자였다. 심지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왈라스의 <순수경제학 요론> 보다 불과 몇 년이지만 더 빨랐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에게 수학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을까. 류동민의 「마르크스와 수학」(『마르크스주의 연구』, 12(2), 2015)에서는 마르크스의 <수학초고>를 통해서 마르크스가 수학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였는지를 분석한다. 특히 마르크스가 수학에 관해서 핵심적인 주제로 다루었던 ‘미분적분학의 탈신비화’에 대해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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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마르크스와 수학

1858년 1월 11일,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쓴다.

[su_quote]경제적 원칙들을 다듬는 동안 나는 계산상의 실수 때문에 지긋지긋한 지체를 겪었고 절망한 나머지 대수학을 빨리 훑어보았네. 나는 늘 산수에는 서툴렀다네. 그러나 대수학적 우회를 통해 나는 빠르게 따라 잡을 수 있었다네. (114쪽)[/su_quote]

단순한 편지글이지만 이 글에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수학을 공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su_quote]여가 시간에 나는 미분과 적분을 공부하고 있어. 마침 내게는 미적분학에 관한 책이 엄청나게 많은데, 만약 자네가 이 분야에 달려들고 싶다면 그 중의 한 권을 보내주겠네. 그것은 (순수하게 기술적 측면에 관한 한) 예컨대 대수학의 다 른 고급 분야들보다 수학에서는 훨씬 쉬운 부분이라네. 공통 대수나 삼각함수를 제쳐 놓으면, 원뿔곡선에 대한 일반적 이해 이외의 어떠한 예비적 연구도 필요하지 않아. (114쪽)[/su_quote]

그 밖에도 몇가지 간접적인 내용들을 통해서 마르크스가 수학 공부에 매진하였으며, 특히 미분적분학에 관심을 가졌었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가 수학을 얼마나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견이 있다. 마르크스는 수학젬병이었다는 주장에서부터 상당한 성취를 했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엥겔스는 물론 마르크스가 수학에 독창적인 기여를 했다고 주장한다. 한편 마르크스는 미분적분학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자본론>이나 여타의 이론적 작업에 반영하지 않았다. 때문에 마르크스의 미분적분학에 대한 수학적 기여가 마르크스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대신에 <자본론>에는 이른바 ‘재생산표식’에서 2×3형태의 표를 통해서 조야한 방식으로 수학적 작업을 시도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미분적분학을 경제학에 적용하다가 실패하고 중도에 포기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실제로 그는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의 수학적 논의”라는 초고에서 이를 시도하지만 중간에 포기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수학에 얼마나 능숙하게 잘했고, 또 수학적 재능에 얼마나 소질이 있었는지는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수학, 특히 미분적분학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고자 하였는가,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수학초고
: “미분적분학의 탈신비화”

마르크스가 써서 당대에 출판되지 않은 다양한 원고 중에는 <수학초고>라는 문헌이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논하는 핵심적인 주제는 “미적분학을 탈신비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수학초고> 중에서 “도함수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말하자면 미적분학에서 나타나는 수학자들의 ‘무지몽매’에 대한 폭로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논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미분과정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러한 미분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dx가 마지막 단계에서 갑자기 사라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수학자들이 (5)의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상태에서 (4)식으로부터 임시변통식의 가정을 추가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dx와 dy가 무한소이며, 0/0으로 무한히 접근하지만 같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당대의 수학자들이 이를 같게 본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수학자들의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미분적분학에서 수학자들의 환상을 폭로하고 이른바 ‘탈신비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현대의 수학적 논의에서는 문제가 많은 주장이지만 말이다.

마르크스의 수학

수학초고에서 보여준 마르크스의 미적분학에 대한 주장은 오늘날 현대의 수학적 논의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주장은 그가 가진 철학적 견해를 견지한 것이었다. 즉 그에 따르면 수학적 개념은 현실의 실재를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평소에 수학을 경제학에 도입하고자 노력한 바를 떠올리면, 적어도 마르크스는 수학은 실재를 재현하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었으며, 경제라는 현실적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서 수학을 사용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마르크스주의자인 루치오(1988)은 수학이 재현의 도구가 아니며 은유나 예시로만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수학초고에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주장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su_quote]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버리고 일상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일상 언어로부터 추상된 것이며, 현실 세계를 왜곡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독립적인 존재를 획득하는 순간 진부한 문구로 변한다. (127쪽)[/su_quote]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수학이든 철학이든 현실적인 대상으로서의 실재를 충분히 재현하고자 했던것이다. 따라서 수학을 거부하고 철학을 도입한다고 해도 현실을 적절히 설명하지 않는다면 폐기해야 하는 방법일 뿐이다. 결국 마르크스는 수학적 방법이 실재를 재현하고, 이를 통해서 경제학적 논의를 개진하고자 했던 점은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주류경제학에서 터져나오는 문제의식과도 사실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똑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폴 로머의 “경제성장이론에서의 수학스러움”은 바로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수학이 실재와 멀어진다면 내적 정합성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과학적 방법으로서의 수학이 아니라 ‘수학스러움’일 뿐이었다.
 
박알림 리뷰어  allimp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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