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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 대학도서관 통한 ‘논문읽기’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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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논문의 대중화, 논문읽기 운동 주목

강준만 교수, 대학도서관 통한 ‘논문읽기’ 제안

온라인 접근성 좋은 지적콘텐츠로서 논문가치 재조명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가 올해 3월에 출간 된 본인의 저서 “소통의 무기”의 머리말에서 논문읽기를 강조했습니다. 본문 각 장에서 논제와 관련된 최근 논문들을 소개해 논문읽기를 적극 권유한 강 교수는 먼저 학술논문의 뛰어난 온라인 접근성에 주목합니다. “미디어 접근성에 있어 종이책은 ‘너무도 가까이 하기 어려운 당신’ … 전자책의 대중화 속도는 더딜뿐 … 전자책보다 접근성이 훨씬 뛰어난 게 있다. 바로 그게 논문이다.” 국내에서 발표되는 대부분의 학술논문은 온라인으로 이용 가능하기 때문에 책보다 접근성이 월등하다는 설명입니다.

강준만 교수는 대학 도서관이 논문읽기 운동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학도서관을 이용하면 “몇번의 클릭만으로 학술논문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며 논문활용을 앞장서서 안내하고 있습니다. 강 교수는 또 쉽고 재미있는 논문이 많은 만큼 전공 학자만 본다는 선입견을 버릴 것을 주문했습니다. “논문이라고 하면 어려울 것이라고 지레 겁부터 먹기 십상이지만 … 의외로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논문들도 많다.”

나아가 강준만 교수는 대중을 위한 논문읽기 운동이 학술 커뮤니케이션 선순환을 위한 좋은 자극이 될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는 논문 독자가 일반인으로까지 확장되면 연구자의 논문주제도 좀더 풍부한 사회논의가 포괄되는 방향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기대를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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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 인물과 사상사 제공.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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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강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이 펴내는 『사회과학연구』 (55(2), 2016)강준만 교수가 쓴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가 실렸다. 이 논문은 제목과는 달리 세태 비판은 아니다. ‘능력주의 커뮤니케이션의 심리적 기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능력주의 편에 선 자들의 심리 기제를 다양한 담론 속에서 골라내 유형화하고 있다. 능력주의 신화를 벗기고 성토해온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엑기스를 뽑아내듯 핵심을 맵핑하고,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독자적으로 심화시킨 논문이다.

요즘은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해서 세상이 온통 시끄럽다. 인간이 기계에 밀리는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인간들 사이를 이간하고 서열화하는 공장들은 여전히 쌩쌩하게 돌아간다. 그 대열에 최근 ‘능력주의’가 가세한 모양이다. 그것을 매우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부모를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고 한 최순실의 딸 정유라다.

애초에 능력주의는 진보적 개념이었다. 출신과 배경에 따라 보상받는 ‘귀족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등장했다. 그 의미는 지능과 노력의 결실을 의미했다. 능력 없는 귀족들을 풍자했던 이 개념은 차츰 사용되는 맥락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논문에 따르면 4단계를 거쳤다. 귀족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능력주의(1단계), 교육과 시험평가에 의한 능력주의(2단계), ‘교육세습’의 영향을 받는 능력주의(3단계),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4단계) 등이다. 능력주의와 귀족주의가 같아진 아이러니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능력주의가 이런 스펙트럼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볼 때, 각 단계를 추동하는 심리적 기제란 어떤 것일까. 강준만 교수는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1)인정투쟁, 2)사회정체성이론 3) 시장신호이론 4)노력정당화 효과 5)내성 착각이 그것이다. 이 논문은 이 다섯 가지 개념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다.

 

인정투쟁 스모그로 가득한
사회

먼저 인정투쟁을 보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는 맛에 세상을 산다. 삶은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서로 인정해주는 인정의 공존화는 깨지기 쉬운 유리와도 같다. ‘대등 욕망’이 ‘우월 욕망’으로 액셀을 밟고 ‘지배 욕망’이라는 중앙분리대를 넘으면 ‘인정의 통속화’가 일어난다. “상처 입는 삶의 빗나간 인정투쟁”(장은주, 2008) 혹은 “냉소적 속물들의 인정투쟁”(최철웅, 2010)이 시작된다. 그 주요 무대는 학교다. 학생은 성적을 통해서만 인정을 받는다. 성적에 따라 서열화된 대학으로 성적에 맞춰 들어가기 위해 오체투지한다. 학부모들도 자식의 성적에 따라 인정을 받는 ‘인정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재산이 얼마라든지,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든지 등은 확인되기 힘들기 때문에 인정받기 쉽지 않지만, 자식의 대학은 빼도 박도 못 하는 사실이라 확실한 기준점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과잠’ 입고 지하철 타기의
심리학

자기정체성은 사회적으로 구분되고 싶은 욕구다. 연구 결과 자신의 사회정체성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열망은 매우 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정투쟁이 나와 너의 문제라면, 사회정체성이론은 우리와 그들 사이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담론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대학생들이 단체로 맞추는 것이 유행이 된 ‘과잠’ 또는 ‘야구잠바’가 그 예다. 중고 과잠 매매가 성행하기도 한다. 한 수험생은 “목표로 하는 대학 선배의 기(氣)를 받으려 중고를 많이 구한다”며 “일종의 부적”이라고 했다. (최은경, 2015)

 

신호에 집착하는 순간
이성은 무너진다

성골, 진골, 6두품 등 어느 대학의 게시판에 올라온 글은 자기네 학교 구성원들을 골품제로 서열화하여 구분하고 있다. 정시를 한방에 붙으면 진골이고, 편입이거나 지방캠퍼스면 6두품이 되는 그런 구조다. 강준만 교수는 속칭 명문대일수록 이런 구별짓기가 발달돼 있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론 마이클 스펜스의 ‘시장신호이론(market signaling theory)’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정보 보유량의 격차가 존재하는 노동시장에서 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신호’로 작용하는 것이 학력과 학벌이다. 기필코 명문대를 들어가겠다는 집념도 자신의 시장신호 효과를 높이겠다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명문대는 ‘신호를 판매하는 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강 교수는 말한다.

[su_quote]신호에 집착하는 순간 그 신호를 기반으로 형성된 능력주의의 옳고 그름을 구별할 마음의 여유는 사라지고, 신호의 ‘후반사 효과(basking in reflected glory)’를 목격한 이들은 좀더 나은 신호를 갖기 위해 애를 쓰는 악순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능력주의는 공고해지기 마련이다. (337쪽)[/su_quote]

출처: https://aaronjelcock.wordpress.com/2015/03/17/the-myth-of-meritocracy-in-britain/
“이게 어떻게 해서 얻은
자격인데……”

자신이 큰 고생을 했거나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은 일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심리적 현상을 ‘노력정당화 효과(effort justification effect)’라고 한다. “이게 어떻게 해서 얻은 자격인데……” 하는 생각이 자신의 소속 집단에 대한 과대평가는 물론 집착에 가까운 애정으로 발전한다. 노력정당화 효과는 매우 광범위하게 빛을 발하는데 심지어 부동산 투기마저 능력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재테크’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으니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오찬호, 엄기호 등의 연구자가 사례를 통해 밝힌 부분이 있다. 오찬호가 강의중 학생들에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한 학생이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답했다. 이 학생은 다른 학생들의 우호 반응에 힘입어 이렇게 주장했다. “처우 개선과 정규직 전환의 문제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학생들이 왜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정규직이 되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면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오찬호가 이 주장에 동의하면 손을 들어보라 했더니 수강생 3분의 2 이상이 적극 지지를 표명했다고 한다. 엄기호는 “학생들이 이 문제를 공정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고 보았다. 죽자 사자 공부해서 서울대 오고, 정규직 됐는데 비정규직으로 온 사람들이 갑자기 데모하면서 정규직해달라 하면 반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엄기호는 “우리는 차별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잖아요. 이들의 경험 세계에서는 차별을 정의롭지 않다고 보는 게 공정하지 않은 거예요.”

갈수록 사회가 팍팍해지고 기회가 줄어들다보니 ‘수능시험의 종교화 현상’이라고 할 만한 것도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학벌이나 실력, 노력의 대가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심리”가 보편적으로 통하려면 “노력에 대한 대가의 규모나 정도를 어느 정도로 하는 게 정의로운가”가 규명되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적 의제로 부상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지적이다. 다들 각자도생에 바쁘기 때문이다.

 

내성 착각, 능력주의의
종교화

“나는 나 자신을 아주 잘 알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상태에 대해 자신이 잘 안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가리켜 ‘내성 착각’이라고 한다. 자기평가를 할 때 자기관찰에 의한 통찰의 비중을 과다하게 높이는 현상을 말한다. 강 교수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특권에 무감각한 채 사회를 향해 엉뚱한 말을 해대는 것도 바로 내성 착각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권에 맹목적인 이러한 ‘내성 착각’ 소유자들에게 소수자 우대 정책은 능력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소수자 우대 정책으로 인한 역차별의 정도가 과도하다면 그건 바로 잡는 것이 꼭 필요하겠지만, 그런 평가의 과정을 건너뛴 채 소수자 우대 자체를 반(反) 능력주의로 여기면서 혐오의 정서로 대한다.

 

반(反) 능력주의 포퓰리즘이
온다

우리는 일상적 삶에서 능력주의를 긍정하는 말, 즉 ‘능력주의 커뮤니이션’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간 커뮤니케이션 학계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는데, 필자는 이것을 ‘의도적 눈감기’라고 비판한다. 능력주의의 의롭지 못함을 알고 있음에도 다루지 않는 것은 마주하기엔 너무 고통스럽고 두려운 진실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를 놓고 마지노선이라고 하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도 그 맥락이다.

공공성의 부재 위에 버티고 선 이 능력주의 시스템은 ‘학습된 무력감’과 ‘자기효능감 상실’을 낳는다. 개인으로선 순응할 수밖에 없지만 정치적 해결책은 존재한다. 바로 포퓰리즘이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이 거울이 돼주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허울로 위선을 제도화시킨 기성 정치 세력이 엘리트주의로 지탄받고 극우 포퓰리즘의 공격에 무너진 미국의 사례는 한국 역시 그 길을 뒤따를 가능성을 충분히 시사한다. 능력주의가 가진 자들의 세습권력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마당에, 이 모든 것을 포퓰리즘 선거를 통해 응징할 수는 있겠지만, 뒤집기는 그대로 다시 뒤집힐 가능성을 증폭시킨다는 걸 이미 목도한 우리로서는 그 엄청난 후폭풍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강준만 교수는 논문의 마지막에서 “모든 사람이 능력의 우연성에 대한 인식을 확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자신과 타인의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고 그 차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정당화하는 심리에 대한 성찰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능력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해체: 능력·공과·필요의 복합평등론」
김미영, 2009, 『경제와사회』, 84, 256-277.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위기: 탈조선의 사회심리학」
류동민, 2016, 『황해문화』, 90, 45-58.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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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전략: 무엇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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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미국의 선거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트럼프의 정치적 가능성에 대해 어림도 없다고 코웃음쳤었다. 그러나 지금 제 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의 행보는 그야말로 승승장구 그 자체이다. 언론과 선거전문가들의 모든 예측을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 트럼프가 보여준 일련의 이변을 가리켜 ‘트럼프 현상’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어떻게 하여 지금의 지지와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미디어혁명’이 파괴한 ‘위선의 제도화’: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본 ‘트럼프 현상’」(『사회과학 담론과 정책』, 9(2), 2016)에서 직거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미디어 혁명’으로, 기존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위선의 제도화’를 파괴함과 동시에, 대중의 지지와 인기를 얻게 된 일련의 과정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다.

‘트럼프 현상’
: 트럼프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저자는 기존 트럼프에 대한 여러 시각들보다 다음과 같은 시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su_quote]트럼프에 대한 연구도 트럼프 개인이 혐오할 만한 행태보다는 그런 행태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지와 인기를 누리는 이유에 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2쪽)[/su_quote]

트럼프가 성공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트럼프를 비판하기만 하는 것보다 미국 내의 정치적 냉소를 바탕으로 번성하게 된 ‘트럼프 현상’의 책임을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에만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트럼프 현상’을 커뮤니케이션의 관점, 즉 의제 설정(agenda-setting)과 수사적 스타일(rhetorical style) 중심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가설을 내리고 있다.

[su_quote]‘트럼프 현상’의 근저에는 지난 40년간 미국을 지배한 ‘정치적 올바름’과 그에 따른 ‘위선의 제도화’, 그 토양 위에서 구축된 ‘플랫폼 정치’와 양극화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 그리고 이 문제의식을 행동으로 현실화시킬 수 있게 한 SNS를 중심으로 한 ‘미디어 혁명’이 있으며, 트럼프는 이 조건들을 이용하는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오늘의 위치에 오르게 됐다.(3쪽)[/su_quote]

트럼프와
‘정치적 올바름’

미국 내에서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의 역사는 과잉의 연속이었다. PC 운동은 과격한 경향을 띠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람들은 ‘PC’에 진절머리를 낼 지경이었다. 이때 트럼프가 등장했다. 그는 ‘PC’에 대한 영향력 있는 공격수였다. 사람들이 감히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며, 자신이 그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다. 트럼프는 ‘PC’와는 정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는(telling it like it is)’ 것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고, 지지자들은 바로 그 점에 열광했다. 이전에 이러한 캐릭터가 없지는 않았지만, 트럼프는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위선의 제도화

오랜 PC 운동으로 미국은 사회 전 부문에 개개의 규정으로 형식화될 수 있었고, 제도화될 수 있었다. 정치 영역에서도 ‘최소한의 PC’가 정치인들의 담론을 규제해 왔으며, 이는 법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 과정과 결과를 위선의 제도화로 볼 수 있겠지만, 위선의 제도화가 순전히 PC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다.

[su_quote]위선의 제도화는 사회 전 분야의 작동방식과 거버넌스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이러한 차원에서 “에델먼(Edelman, 1964)이 역설한 ‘정치의 상징적 이용(the symbolic uses of politics)’이야말로 정치가 담론의 세계에만 머무르는 위선의 제도화를 웅변해준 것으로 볼 수 있다.(8쪽)[/su_quote]

트럼프는 그러한 현실을 파고 들었다. 트럼프는 말만 앞세우는 기성 정치인들을 지목했다. 자신과 기성 정치인의 차이점은 자신은 행동을 하는 반면, 기성 정치인들은 행동에 관한 말만 하고, 자신과는 달리 진실을 듣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국민에게 진실을 말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인들은 ‘해가 뜰겁니다. 달이 질 겁니다. 온갖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국민은 그런 감언이설(甘言利說)은 필요 없다. 실천을 원하고, 일자리를 원한다”라고 강조하였다.

트럼프는 사석에서 소위 막말 논란이 많았으나, 그는 다른 정치인과는 달리 내뱉은 말을 철회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까지 한다. 지지자들에게는 이는 되려 ‘담대함’, ‘진정성(authenticity)’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실제 어떤 공직자나 기업이 옳은 소리를 늘어놓다가 실제로 저지르는 언행불일치에는 상대적으로 침묵하는 반면, 실제로 차별적인 발언을 조금이라도 늘어놓거나 하면 분노한다.

[su_quote]부당한 차별이 광범위하게 저질러지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걸 체념해 받아들이다가 어떡하다가 차별의 의도와 증거가 나타나야만 사회적 분노가 폭발하는 현 방식은 트럼프 현상을 다시 볼 것을 요구한다.(9쪽)[/su_quote]

‘플랫폼 정치’와
양극화

미국 내의 정치적 양극화(공화-민주의 당파주의)는 ‘두 개의 미국’, ‘제2의 남북전쟁’ 등의 말까지 나올 정도였고, 미국인 절대다수는 정치적 양극화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트럼프는 미국 정치의 양극화를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누가 트럼프에게 ‘분열주의 정치’를 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으며, 트럼프를 보고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킨 주범이라 할 수 있겠는가? 기성 정치가 곪아 있는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 대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아주 고약한 방법으로 그런 현상을 까발리고 나섰고, 그래서 세상의 주목을 받은 건 물론 광범위한 지지까지 누리게 되었다.

트럼프의 지지층에는 특정 직업, 종교로 묶인 집단을 찾기 어렵다. 도시, 농촌, 지역, 민족 등 특정 계층을 기반으로 하지도 않는다. 한 마디로 대단히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지지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기존 우익 포퓰리즘과 트럼프의 차이라 할 수 있는데, 동시에 이것이 트럼프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이 구사되는 배경이다.

트럼프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트럼프의 공약은 역대 공화당 후보,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과 비교해봤을 때 대체로 중도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그가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정면으로, 정직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그의 막말을 비교적 사소한 문제로 간주했다. 그가 제시한 공약의 6대 이슈를 살펴보자.

1. 일자리와 이민
트럼프 자신은 오직 불법 이민에 반대할 뿐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또한 일자리와 관련하여,  트럼프는 중국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관세를 올려 우리의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유명하다. 일자리 문제는 일반 유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이며, 다른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외면하거나 미온적인 정책을 내놓는 반면, 트럼프는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데에 일조하는) 중국을 ‘흡혈’, ‘강간’ 등의 거친 언어로 공격하였다. 이에 후련함을 느낀 유권자들에게 그가 구사한 언어의 품위 결여는 오히려 진정성의 증거로 여겨졌다.

2. 테러 방지
일부 이슬람 사원 폐쇄, 미국내 무슬림들의 의무적 등록과 데이터베이스화 주장 등, “IS 등의 테러리스트를 잡을 때는 그들의 가족을 공격해야 한다”라는 등의 과격한 주장은,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2015-2016년 세계 각지에서 연쇄적으로 이어진 테러의 영향으로 여론조사는 트럼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3. 금권정치 비난
트럼프는 “고액 기부자, 특수이익 관여자, 로비스트들이 국민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며 “이들은 흡혈귀(bloodsuckers)”라고 비난하는 등 금권정치의 종언을 자신의 주요 이슈로 내세웠다. 이는 경쟁자들에 비해 비교우위를 누리면서 그들을 썩은 정치인으로 매도할 수 있는 이슈이기도 했다. 트럼프가 억만장자라는 사실이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부자이기 때문에 부유층의 기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운 것이다.

4. 월가 비난
트럼프는 빈부 양극화의 주범으로 간주된 월가를 집중 비판함으로써, 월가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갖는 민심(60% 이상)에 화답했다. 트럼프의 월가 비난은 부자 증세, 전 국민 건강보험지지 등의 정책으로까지 이어졌다.

5. 강한 미국
트럼프는 글로벌리즘보다 미국 우선의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 미국주의)를 새로운 신조로 삼을 것을 공약했다. 특히 외교적인 부분에서 엄청난 투자를 쏟아부으면서도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등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면모가 사라지고 있다고 개탄한 것이다. 또한 한국, 독일, 일본 등을 경찰처럼 방어해주고 있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미국인의 ‘신 고립주의적’ 시각은 이미 만연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트럼프의 주장이 일정한 호응을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6. 언론 비난
미국 언론은 약 2/3정도의 국민이 반감을 표할 정도로 불신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su_quote]트럼프는 자신의 막말을 중계하게 해 홍보 효과를 누린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언론을 무시하고 경멸하면서, 명예훼손에 따른 배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권자들로부터 언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용감한 정치인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20쪽)[/su_quote]

 

 

‘트럼프 현상’과
미디어 혁명

트위터에 700만, 인스타그램에 100만 명이 넘는 팔로어를 거느린 트럼프는 온라인에 자신만의 뉴스룸을 구축했다. 트럼프는 소문난 SNS광이었는데, 하루에도 십수건의 게시물을 올리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보기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한 셈이었다. 분명히 이러한 행보는 기존의 선거 역사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며 여러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선거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su_quote]CNN은 케네디가 ‘TV 대통령’이고 오바마가 ‘인터넷 대통령’이라면 트럼프가 ‘소셜미디어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 했고···(22쪽) [/su_quote]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힐러리는 트럼프에 비해 대중의 흐름을 잘 읽지 못했고,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더 강한 사진 한 장으로 자신의 어필하고자 했던 트럼프는, 대중의 흐름을 잘 꿰뚫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소셜미디어는 트럼프가 누릴 수 있었던 특별한 기회였다. 대중의 정보 획득, 입소문 전파, 신문과 TV 등 전통 미디어가 모바일 SNS에 압도당하는 ‘미디어 혁명’이 트럼프의 대선 도전 시기에 성숙 단계 또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는 분명히 트럼프에게 좋은 타이밍이었다.

‘트럼프 현상’이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

트럼프 현상은 한국 사회에 주는 핵심적인 교훈은 무엇일까? 바로 ‘엘리트층이 몰랐거나 외면했던 미국사회’처럼, ‘엘리트층이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처음 트럼프를 두고 미국의 엘리트층이 그를 조롱거리로 치부했다는 것은, 40%에 육박하는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분노, 불안, 좌절을 몰랐거나 외면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점에 대해 성찰하기보다 트럼프를 비난하고 개탄하는 데에만 열을 올렸다.
한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su_quote]엘리트층의 정확한 사회 인식을 가로막는 위선의 제도화에 대해 그 어떤 판단을 내리고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그 어떤 출구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떤 지도자나 책임자가 입으로는 차별에 반대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자신의 책임 하에 있는 조직이 엄청난 차별을 저지르는 것을 방관하는 기존 의식과 행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25쪽)[/su_quote]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최근 한국에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트럼프 현상으로 본 미국 고립주의의 본질과 재현 가능성 전망」
이선희·김중완·정한범, 2016,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8(1), 281-314.

「미국과 한국의 뉴미디어민주주의에 대한 비교연구 : 한국 선거에서의 인터넷·SNS 활용과 변천을 중심으로」
이처문, 2016, 『사회과학연구』32(2), 167-187.

최종원 리뷰어  zwpow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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