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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인간’을 본위로 하는 모든 휴머니즘 이론은 데카르트의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인식’의 영역을 물질과 구분하는 가운데 전자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통하여, ‘사유하는’ 인간은 무엇보다 그 고유의 가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모든 “가치 판단의 준거나 기준을 인간에 두”며, “도덕 공동체의 범위를 인간으로 국한”하는 인간중심주의는 과연 옳은가. 신상규인공지능, 새로운 타자의 출현인가(『철학과 현실』, 112, 2017)에서 인간이 아닌 로봇의 ‘타자성’을 재조명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안겨주고 있다.

동물,
윤리적 피동자

휴머니즘의 역사는 노예해방이나 여성 권리 회복 등,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을 승리로 이끈 성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듯 인간 보편에 대한 가치가 회복됨에 따라, 인간은 또 다른 차별의 ‘대상’을 만들어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오늘날까지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언급되고 있는 동물학대가 바로 그것이다.

근대의 윤리학은 도덕적 ‘행위자’를 중심에 두고 있다. 도덕적 행위자란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 행동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도덕적 책임능력을 갖춘 존재, 즉 ‘인간’을 일컫는다.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갖는 합법적 도덕주체”로서의 인간만이 행위자인 동시에 피동자로 인정되며, 이로 인해 근대 윤리학의 범주는 인간중심적인 틀을 벗어날 수 없게 기획된 셈이다. 그렇기에, “그들(동물)이 고통을 겪을 수 있는가?(Can they suffer)”라는 벤담의 질문은 “피동자의 피동성에 초점을 맞춘 도덕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데이비드 군켈(David Gunkel))으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싱어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동물은 최소한 도덕적 피동자의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동물에 대한 피동자적 권리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기술이나 인공물, 추상적인 지적 대상들도 도덕적 피동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제기되고 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급증하고 대선을 준비하는 여러 후보들이 반려동물관련 정책을 공약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동물의 권리는 자연스럽게 인정되는 추세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AI의 도덕적 지위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 시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과 기계 즉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는 상황적 변화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군켈은 오늘 날 AI의 등장과 더불어 지능적 기계가 ‘도덕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주목한다.

 

인공지능의
타자성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의 경우, ‘딥러닝’을 통하여 일련의 법칙들을 ‘학습’하고 이를 토대로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알파고가 ‘상황’이라는 변수에 대응하여 자율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개발자도 알파고의 ‘결정’을 예측할 수 없다. 즉, 알파고는 “인간이나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가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존재”인 셈이다. 그리고 바로 이 자율적 속성이 인공지능에게 단순히 인간이 부리는 ‘기술적 도구’로서의 지위가 아닌, 인간의 삶에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타자’로 전환될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지난 2015년 2월 일본에서는, SONY사에서 출시된 애완용 로봇강아지 ‘아이보(Aibo)’에 대한 합동 장례식이 있었다. 1999년 출시되어 20만 엔 이라는 고가의 금액 대에도 불구하고 총 100만대 이상이 팔려나갔으나, 2014년 관련 A/S를 전면 중단하게 되면서 로봇강아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주인들이 모여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이와 같은 예만 보더라도, AI는 인간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타자’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 SONY사에서 1999년 출시된 애완용 로봇 강아지 아이보(aibo)

이에 필자는, 로봇이 “실제로 감정을 갖느냐”에 대한 문제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감정 로봇이 인간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보여주는 AI의 타자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거기에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로봇의 ‘타자성’은 그것이 도덕적 피동자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인간적인 ‘판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로봇과 생활환경 속에서 맺고 있는 일련의 관계성을 통해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다. 코겔버그는, 어떤 존재의 지위는 “선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그 존재를 ‘어떻게’ 보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와 같은 질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미 인간 삶의 환경이 ‘자연’이 아닌 ‘기술적 생태 공간’으로 변화함에 따라, 우리의 생활 방식은 여러 기술들과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공지능’의 ‘타자성’을 점검하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닌 듯싶다. 물론 로봇(기술)과의 상호작용이 역으로 사회적 개인들을 고립시키는 등의 부작용에 대해선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며 이것이 우리의 모든 인식구조를 지배하는 ‘틀’로 ‘학습’되고 있는 가운데, 이원론적 세계관에 일종의 ‘균열’을 내고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재고(再考)시킨다는 점에서 로봇의 타자성’에 대한 물음은 충분히 가치 있는 질문이 아닐까.

이단비 리뷰어  ddanddanb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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