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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냉전사에 주목하는 역사학계의 흐름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를 어떻게 탈식민주의 논의와 연결시킬 수 있을지의 문제는 여전히 다루기 쉽지 않다. 권헌익은 그의 논문  「냉전의 다양한 모습」(『역사비평』 , 11, 2013)에서 냉전이 각 지역마다 달리 발현되는 다양한 모습이 있음을 주장하며 “냉전의 역사를 글로벌 역사로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다원주의적 시각이 필요함을 제안한다. 여기서 글로벌 역사란 “지역들의 다양한 경험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세계사,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을 하나의 담론에 구속시키지 않는 세계사를 의미”한다. (222쪽) 즉, 저자는 냉전사가 단일한 성격의 그림일 수 없는, 여러 이질성의 복합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1959년의 냉전 관계 지도 (출처: 위키피디아)
냉전사는
현재 진행형

유럽의 경험에 비추어 냉전은 흔히 전쟁이 아닌 전쟁이란 의미에서 “상상의 전쟁”으로 표상되고, 심지어 “오랜 평화”의 시대로까지 그려졌다. 이에 논문의 저자는 베트남의 ‘쏘이 더우’ 사례를 통해 냉전 시기 폭력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쏘이 더우’는 베트남 전통 음식 중 하나로 검은 콩을 섞어 만든 쌀로 빚은 명절 음식으로 먹을 때 음식의 흰 부분과 검은 부분은 구분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쏘이 더우는 중부 베트남인들이 냉전 시기 약 30년(1945-1975)을 가르키는 표현이다. 무슨 뜻이냐면, 냉전 시기 중부 베트남은 낮에는 남부 정부군의 마을이었다, 밤에는 혁명군 세력을 지원하는 마을로 변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두 세계를 모두 끌어안아만 했기 때문에, 낮과 밤의 이중적 생활이 어느 순간 구분할 수 없게 된  그들의 현실이 흰색과 검은 색을 구분할 수 없는 쏘이 더우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 30년을 쏘이더우라 부르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위험한 동거를 유지하는 동안 각 가정 내 분열과 함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여기서 권헌익은 베트남 내에서 쏘이 더우의 고통은 냉전이 끝났다고 사라진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건 물론, 냉전 이후에도 가족이라 하여 국가가 반혁명분자로 규정한 죽음을 기릴 수 없다는 점에서 “‘쏘이 더우’의 흔적은 많은 공동체에서 아직도 격렬하게 존재하는 현재진행형의 역사 과정이다.” (228쪽) 쏘이 더우와 같은 사례는 한국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 시절 공산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하며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지였던 ‘모스크바’ 마을 사례 역시 냉전의 현재적 역사의 일부라 설명한다. 냉전이 끝나고 모스크바 마을에 사는 한 독립운동가 후손은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자 했지만, 이 후손의 노력은 모스크바 마을에 산다는 이유로 한국전쟁 중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과 갈등을 낳았다. 저자는 지금은 시간이 오래 지나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됐음에도 여전히 그 독립운동가에 대해서는 마을 내부적으로 통일된 평가를 낳지 못하고 있다 설명한다. 이처럼 특정 지역의 공동체 내에서 같은 조상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역사에서 누구는 영웅적으로 인정받거나 누구는 인정받지 못하는 위계 질서가 염연히 존재하고, 냉전시기 만들어진 역사는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냉전은 상상의 전쟁?
냉전은 다양한 폭력의 역사

베트남과 한국의 사례에서는 탈식민화 과정과 맞물린 냉전의 폭력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저자는 냉전의 역사를 적어도 두 가지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는, 유럽과 대서양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상의 전쟁으로서의 냉전”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의 전쟁이라는 구도의 틀에 맞지 않는 탈식민 과정의 양극화 역사”이다. (228-229쪽) 그러나 탈식민 과정 역시 각 나라마다 다양한 모습을 띄었다. 한국전쟁과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그 중에서도 가장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난 탈식민의 냉전 사례로 이런 사례는 아프가니스탄 내전을 포함하여 1990년대 초반까지 확장되며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 잘 알고 있는 일본 냉전의 역사는 실질적 핵전쟁 위험에서 벗어나 있는 서구의 ‘상상의 전쟁’과는 반대로 핵전쟁의 고통을 수반하며 시작하고, 중국의 냉전사는 소련과 미국 간의 긴장구도에서 이해한다. 이처럼 냉전의 경험은 각 나라마다 달랐고, 특히 ‘상상의 전쟁’으로 표상되는 서구의 경험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냉전 경험의 간극은 매우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냉전의 정치가 “선진국과 후진국, 서구와 비서구, 그리고 식민제국과 그들의 식민지 등 모두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 글로벌한 현상”이었음을 설명하는 한편, “냉전의 집단적 기억”이 서구 제국과 탈식민 지역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230쪽) 특히 탈식민 지역에서 벌어진 민족 해방 및 민족 국가 형성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폭력의 역사가 함께했기 때문에 탈식민 냉전의 역사가 서구 중심의 집단적 기억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인문사회 분야에서 탈식민 냉전의 역사가 활발히 논의되지 못하고, 탈식민 역사와 탈식민 문화 이론에서 냉전사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은 점을 비판한다. 냉전의 역사와 탈식민 역사가 분리될 수 없음에도 둘의 논의가 그동안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져 온 연구를 지적한 것이다.

 

탈식민주의와 냉전
역사의 공백 메우기

논문의 저자는 기존의 탈식민주의 연구가 “냉전 체제를 국제 관계에서 힘의 균형으로만 접근”했다 비판한 안 웨스터드(Odd Arne Westad)의 말을 빌어, 그동안 학자들이 “냉전이 개념적, 분석적으로 비서구 제3세계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전제를 갖고 있었다 하였다. (231쪽) 이러한 잘못된 전제의 결과는 세계 냉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제3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변동의 역할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냉전사의 흐름은 상당 부분 “탈식민 지역으로부터 나온 지속적이고 치열한 도전”의 영향을 받았다.

[su_quote]냉전의 역사는 탈식민의 역사 바깥에도 있지만 그 안에도 있다는 초보적인 인식을 거부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런 잘못은 앞으로 인문사회과학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한 사항이다. (231쪽)[/su_quote]

냉전사 학자들은 탈식민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탈식민 연구 학자들은 냉전의 세계사에 대한 인식이 부재했다. 각기 다른 이해의 부족은 각 연구에서 중요한 공백을 만들었지만, 20세기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진정한 의미에서 글로벌 역사를 하기 위해서는 이 공백을 메꿔야만 한다. 탈식민 연구와 냉전 연구 사이에 소통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다양성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는 소통이 쉽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다. 그는 냉전의 역사를 다원화 하는 것이 세계 냉전의 역사를 파편화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냉전의 역사를 공공의 역사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즉, 한 지역에 국한된 우리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남들의 이야기도 함께 들여와 “동등하게 의미 있는 냉전의 유물로서 공공 역사의 장에 재현”하는 과정이 진정한 글로벌한 냉전의 역사로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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