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정치/사회

[DBpia 2017 올해의 논문상] 정한범 국방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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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pia 올해의 논문상은 정한범 국방대 교수가 받았습니다. 정 교수는 현역 군인과 국정원 엘리트의 논문쓰기 교육을 위해 이번 논문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이 논문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력 대선후보로 부상하기 전 발표돼, 예언이 적중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트럼프 현상으로 본 미국 고립주의의 본질과 재현 가능성 전망으로 올해의 논문상을 수상한 정한범 교수를 만났습니다. 

 

현역 군, 국정원 엘리트에게 논문쓰기 교육 위해 집필
트럼프 유력 대선후보 부상 전 발표 논문 ‘예언 적중’

DBpia 올해의 논문상을 수상한 정한범 국방대 교수(안보대학원)는 2016년 8월 <한국정치외교사논총>에트럼프 현상으로 본 미국 고립주의의 본질과 재현 가능성 전망」을 발표했다. 트럼프가 당선되기 전은 물론, 유력 대선후보로 떠오르기 전에 발표했다. 정 교수는 “트럼프가 당선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고한다. 그해 11월 거짓말 같이 트럼프가 당선되자 예언을 적중시켰다며 큰 관심을 받았다. 이 논문은 DBpia 이용률 지표에서도 지난 한 해를 통틀어 정상을 차지했다.

초록

이 글은 최근 미국 내 부상하고 있는 고립주의 여론이 국제주의와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그 실현가능성과 우리나라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 정책’은 미국의 국제적 역할 포기를 뜻하는 고립주의 선언과 다름이 없다. 최근,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관은 미국민들의 고립주의 성향이 상당히 높다는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누적된 불평등에 따른 국민적 불만이 폭발한 것이며, 이러한 민심의 변화에 대선후보들이 편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여론은 외교안보적으로는 해외분쟁 불개입을, 경제적으로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불참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추세는 역사적으로 미국 내 고립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1935년~1941년 시기와 비슷하다. 미 대선후보들의 선동적인 행동으로 인해 미국의 고립주의가 부활한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은 패권국가로서의 국제적 역할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보호무역 강화, 방위비 분담강요 등 부분적인 고립주의 성향을 보일 가능성은 있다고 예상된다.

목차

Ⅰ. 서론
Ⅱ. 미국 외교정책에서의 고립주의
Ⅲ. 지정학적 환경과 고립주의의 시대적 변천
Ⅳ. 고립주의와 개입주의의 차이와 연속성: 오늘날의 함의
Ⅴ. 결론: 향후 미국 고립주의의 전망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하지만 논문을 쓰기로 결심한 동기는 의외로 소박했다. 우리 군의 허리 역할인 대위와 소령 장교들, 그리고 국정원의 현역 요원들이 재교육을 받는 국방대에서는 논문보다 보고서에 능한 엘리트들이 학생으로 있다. 정한범 교수는 이들에게 논문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아이디어는 자신이 구상했지만, 이선희 씨(예비역 중령, 국방대 박사과정), 김중완 육군 대위를 공저자로 참여시켜 리서치를 진행하고 작성법을 가르쳤다.

“학생들이 사회 경험이 많다 보니 과제를 잘하고 능숙한데, 정작 논문과 보고서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버릇이 든 것이다. 학생들에게도 학위 받기를 자격증 취득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석사나 박사학위를 받는 순간부터 지식의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사회적 현상에 대해 학자로서 외칠 수 있는 경험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자신보다 학생들이 논문상을 수상한 것을 더 기쁘게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정 교수도 “학자로서 일생에 한 번 있을까한 과분한 업적이고 자랑스럽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운이 좋았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는 학술논문의 의의로 학문적 깊이와 사회적 현상을 적시에 해설‧평가하는 시의성 두 가지를 꼽는다.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고, 사회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적시에 건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학계가 시의성 측면에서 자신을 인정한 것이라서 더욱 값진 수상이라고 말했다.

 

미국 우선주의와 개방성이라는 양면성

그의 논문은 미국 정권 교체기에 한국의 외교 안보 전략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미국 ‘고립주의’의 역사적 맥락을 짚고 트럼프 현상을 분석했다. 지금은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우선주의’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트럼프로 인해 나타난 단발적 현상이 아닌 미국의 본질적 무의식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그는 미국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민자들로부터 시작해 이민에는 어느 나라보다 개방적이지만, 이와 반대되는 미국 우선주의도 심했다는 것이다.

“50~60년전 미국 정가는 고립주의라는 표현을 쓸 필요도 없이, 그게 자연스러운 주류였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제주의가 강해졌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국익에 심대한 위협이 되겠다고 판단해서다. 최근의 현상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30~40년을 거치면서 미국 국민들에게 향수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또 정치인들과 달리, 국민들은 굳이 국제에 눈을 돌리지 않아도 돼 저변에 고립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논문이 나온 지 1년 5개월이 지났다. 트럼프가 방한했고, 정부는 북한 문제에서 평창 올림픽 참가와 군사회담을 끌어내는 데 지지를 끌어냈다. 정한범 교수는 정상회담 전 청와대의 비공개 실무회의에 참석해 분위기를 들여다봤다. 어려운 상황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부가 정말 잘 대처하고 있다며 “A학점을 주겠다”고 했다.

“사실 외교의 70%는 의전이다. 방한 당시에도 비무장지대(DMZ) 방문 대신 평택 미군 기지를 추천했다. 우리가 한미동맹을 위해 얼마나 많이 희생하는지 보여주게 하려 했다. 칭찬해주면 좋아한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우리가 실리를 얻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립서비스’가 중요하다. 정부는 이걸 알고 있고,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잘하는 것이다. 현안만 보고 대 중국 관계가 굴욕외교니 보복이니 비판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동북아 국제정치 전문가인 그에게 북핵문제도 물었다. 대화를 강조하는 현 정부는 비핵화 원칙은 고수하고 있다. 반면 북한의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했다. 정한범 교수는 이미 정보기관이 평창을 계기로 북한이 협상 국면에 나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전했다. 외교는 명분이므로, 말 그 자체보다 행간을 짚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교는 명분 싸움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내 주려면 적어도 양보한 것처럼 명분을 세워야 한다. 내가 줘 놓고 이긴 것처럼 떠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핵 무력 완성 발언은 협상 국면을 선언한 것과 같다. 물론 북한이 핵을 실제 완성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실질 완성단계로 생각한다. 국면전환의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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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위험’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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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에서 촬영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현장.

logofinale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발생 후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성에 대한 관심은 여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강윤재「원자력을 둘러싼 과학기술 시티즌십과 위험커뮤니케이션의 관계에 대한 일고찰」 (『과학기술학연구』 , 15(1), 2015)에서 원자력 발전에 관한 언론의 위험커뮤니케이션 지형이 어떤지를 살펴보고, 시민들의 설문조사 분석을 통해 원자력에 대한 시민 인식을 정리한다.

 

원자력 위험 커뮤니케이션의 지형:
과학자와 시민을 대체하는 정부기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언론에서는 연일 사건의 추이, 한국에 미칠 영향, 원전의 안전성 여부 등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논문의 저자는 언론매체를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들이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전파하고 확산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의사결정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공간이자 통로로서, 사회적 각축장(social arena) 또는 그 일부”라고 하며 언론 분석을 통해 원전을 둘러싼 여러 이해관계 행위자들이 만들어내는 위험커뮤니케이션의 지형을 확인할 수 있다 하였다. (47쪽) 이를 위해 그는 우선 언론에 등장하는 ‘공동출현 핵심어’의 빈도수를 측정하여 분석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언론 텍스트가 단순히 정보의 나열이 아닌, 관련 행위자들이 독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활동 공간으로 이해해 본다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핵심어의 출현 빈도수가 높아지고 낮아지는 추이를 통해 해당 시기 위험 커뮤니케이션의 지형을 이해할 수 있다. 아래 그래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2011년 3월부터 5월까지 ‘방사능’을 포함한 기사수는 급등했다.

 

이제 저자는 방사능과 연관성이 높은 것으로 선별한 200개의 핵심어들의 빈도수를 분석하여 각 단어의 빈도수를 후쿠시마 사건 이후 1)지속적 상승, 2)상승 후 하강, 3)하강 후 상승, 3)지속적 하강 이라는 4가지로 분류하였다. 우선, 원전 사고 이후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핵심어들은 ‘논쟁’, ‘책임성’, ‘소비자’, ‘원자력안전위원회’, ‘그린피스’ 등이 있었는데, 이는 “정부와 일본의 책임성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52쪽)

 

두 번째 분류로, 상승한 후 하강한 단어들로는 ‘우려’, ‘피해’, ‘방사능 공포’, ‘음식’, ‘확산’, ‘편서풍’ 등이, 행위자 측면에서 ‘한국원자력안전위원회(KINS)’, ‘기상청’이 있었다. 기상청을 포함한 관련 단어들은 원전 사고 방사능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이 어떠할지에 대한 논란이 심해진 와중에 출현 빈도수가 높아졌고, KINS 역시 원전과 방사능 피해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한 언론 홍보를 계속했다. 이후 기상청의 노출 빈도수는 정부의 ‘안심 전략’으로 시민들의 우려가 잠잠해지자 감소세에 들어선다.

세 번째인 ‘하강 후 상승’ 유형의 핵심어들은 원전 사고 당시 이슈의 중심에서 밀렸다 다시 회복세를 보인 단어들로 ‘북한’, ‘방사성(능)폐기물’, ‘환경운동’, ‘NGO’ , ‘과학자’ 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원전사고와 긴밀한 연관이 있을 것 같은 ‘환경운동(반핵운동)’, ‘과학자’와 같은 단어가 이슈의 중심에서 밀렸다는 건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저자는 이에 대해 언론이 시민 단체나 과학자보다, 정부의 전문기관인 ‘KINS’나 ‘기상청’의 발표로 문제를 논의하며 정부기관이 과학자의 전문성까지 대체했다 여겼다. 즉, 언론이 더 많은 발언권을 환경단체나 과학자들보다는 정부기관에 주었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 위험커뮤니케이션이 정부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음을, 사실상 정부가 언론의 논조를 주도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시민들의 인식은?:
모순적 태도 또는 합리적 선택

대안이 부재한 상태로 정부로 기울어진 언론의 지형은 친 원자력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그 정보를 어떻게 수용하고 유통시키는가에 따라 그 영향력은 달라질 수 있었다. 저자는 2014년 실시된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의식 조사> 결과를 분석하여 원자력을 둘러싼 과학기술 시티즌십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원자력 거버넌스의 작동방식을 이해하고자 했다.

우선 원자력발전과 핵폐기물의 안전성 여부에 대한 질문에서는 원전이 안전하지 않다고 대답한 시민들이 51.4%였지만, 그 필요성에 동감하는 시민들은 80.6%에 이르렀다. 그들은 필요성은 인정하여 없앨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지금보다 더 늘릴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시민들은 원자력발전의 문제를 인식하지만 소극적인 차원에서 학습하고 소통할 뿐, 적극적인 사회적 참여를 통한 문제해결에는 나서지 않는 것으로 나왔다. 한편, 그들은 전문가에는 높은 신뢰도를 보인 반면 정부정책에 대해서는 신뢰도가 낮았지만, 정부보다는 시민단체의 역할에 대해 더 낮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한편, 정부의 정책을 불신하면서도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민단체보다 정부와 전문가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보고, 정책결정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가 필요하다 하면서 직접 참여할 의향은 보이지 않는 이중적 태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런 모순된 시민의식을 두고 “선택의 여지가 제한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합리적 선택”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62쪽) 그들이 원자력을 전문성의 영역으로 보고 있고, 위험하지만 존속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신뢰도와 상관없이 정부의 역할을 중요하게 보고 있는 셈이다. 이는 또한 시민들이 “원자력 문제의 해결주체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다는 징후”이기도 했다. (62쪽)

원자력이 고도의 과학기술적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라는 사회적 인식이 만연하고 이런 인식은 위험커뮤니케이션의 지형 역시 전문성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시민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으로 대항전문가들과 연대하며 전문가들과 토론-경합하고, 대안지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아래로부터의 과학기술 시티즌십’이 정부 중심이 대안부재 담론 구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거라 제안한다.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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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분배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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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시대에 기여할 수 있을까?

분배정의에 관한 오랜 논의가 이어져 오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 분배정의에 대한 구체적인 담론은 아직까지도 선별적 vs 보편적 대립 구도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분배정의에 관한 철학적 담론들이 유수하게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들은 ‘이론’으로서만 다루어질 뿐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실행할만한 지침으로서는 아직도 답보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오히려 그간의 정책들 면면을 살펴보면 분배정의를 실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까지 했다. 더러는 그것은 공허한 이론으로 취급받으며 조롱마저 당하는 듯 하다.

철학은 정말 이 시대에 기여할 수 없을까? 특히, 정치에서 철학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나? 이번에 살펴볼 논문은 정진화 교수의 존 롤즈(John Rawls)의 분배정의론과 한국적 적용에 대한 연구(한국정치학회보 50(2), 2016.6. 75-101)로써 존 롤즈가 주창했던 정의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에 어떻게 분배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살펴보려 한다.

정치는 구체적인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철학은 때로는 현실과 유리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철학 없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되는대로 정치를 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철학이 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찾고자 했고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철학이 그것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가 나의 관심사 중 하나라고 하겠다. 필자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진 독자라면 아마 본 논문이 꽤 흥미롭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
분배 내지 조정을 위한 권력의 획득과 행사

분배정의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느냐는 논의를 이루어가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것이 있다.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 그것이다. 정치학도인 필자 입장에서야 ‘정치’ 그 자체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일테지만, 동시에 정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 역시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가장 고전적이고 유명한 정의를 따라가보면,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Social Values)’으로 정의된다(D. Easton 1953). 권위있는 정치학자 중 한 사람인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은 희소한 자원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권력이 분배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정치를 권력투쟁의 장으로 보았다. 이 때 권력이란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특정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을 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정의들이 있지만 대체로 정치에 대한 정의들을 살펴보면 ‘분배’ 내지 ‘조정’, 그리고 그를 위한 ‘권력’의 획득과 그 행사로 요약 가능하다. 요컨대, 정치는 분배에 있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분배함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인 셈이다(과연 이러한 정의가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일단 대답을 유보하자).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간다.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무지의 베일과 분배정의의 원칙
롤스 정의론의 핵심

“사회가 정의롭다고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예를 들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정의로는 사회는 이러한 재화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분배하며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준다. 하지만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기 시작할 때 어려움이 시작된다”(Sandel 2009, 19).

존 롤즈의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롤즈가 무엇을 규명하고자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롤즈는 “정의에 대한 개념이 갖는 뚜렷한 역할은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구체화하고 적절한 분배의 몫을 결정하는 것”(p.78)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적절한 분배의 몫을 결정할 것이냐는 것이겠다.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때 무지의 베일이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최초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 가상적 장치로서,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을 가능케 하는 제한조건이다. 이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위치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지위, 권력, 명성, 지능, 신체적 능력 등이 어떠한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원칙을 설계할 수 없으므로 이 때 세워진 정의의 원칙들은 공정하다고 간주할 수 있다.[1]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선택할 원칙은 다음과 같다고 말하였다.

 

첫 번째 원칙: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유사한 자유체계와 양립하는 가장 광범위하고 동등한 기본적 자유체계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두 번째 원칙: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가지 경우.

  1. 정의의 저축 원칙과 일치하여 최소수혜자들에게 최대 이익이 될 때
  2. 공정한 기회균등 조건 하에 모두에게 직책 및 직위가 개방되어 있는 것과 결부될 때 편성될 수 있다(Rawls 1999, 266)

 

첫번째 원칙은 이른바 ‘자유의 원칙’이라 불리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누리고 향유하는 데 있어 평등함을 강조하는 원칙이다. 두 번째 원칙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원칙’으로 분배정의와 관련된 항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a)의 경우 최소수혜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것으로서 ‘차등의 원칙’으로 불리며, (b)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 직위와 직책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무지의 베일

롤즈의 정의론의 핵심이야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봤을 내용일 것이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현실에서 제도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느냐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롤즈의 정의론에서 핵심적 명제라 할 수 있는 ‘무지의 베일’은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상황이며 또 실천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무지의 베일이 가지는 성격에 대해 박효종(1995)은 ‘두터운 베일’과 ‘얇은 베일’을 구분하여 해석하였다. 이것을 잠시 소개하자면 이렇다. 무지의 베일은 공정성과 공평성을 담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사회계약 상황에서 완전무결한 만장일치를 보장한다. 만약 무지의 베일이 개인의 구체적 이해관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두꺼운’ 것이 될 것이지만 베일이 얇아질수록 구체적 이익으로부터 차단되는 정도가 약하고 공정성 또한 담보하기 어려울 것이다(박효종 1995, 432-434)[2]

현실에서 베일의 두께를 두껍게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면 보다 공정한 의사결정을 위한 원초적 입장을 제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러한 장치를 최대한 구현하는 것은 그것이 없는 것보다 더 높은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서 제헌위원회가 만들어져 헌법과 사회체제가 결정되는 것이 공정한 규칙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국가들은 이미 헌법이 제정돼 있고 또한 국가를 이미 형성한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원초적 입장을 적용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가장 가까운 상황이라면 헌법 개정 상황일 것이다. 헌법 제정 당시 사회구성원들의 참여와 동의가 부재했던 역사를 들며 논문 저자는 헌법 개정 시 ‘국민숙의위원회(가칭)’와 같은 단계를 마련하고 운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즉 ‘원초적 입장’을 모의적으로나마 구현하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한 가지 상황으로 가정할 경우 “최대한 그 사안에 대해 특정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크게 가시화되지 않고 관련 정보들의 노출이 비교적 적은 시기가 바람직할 것”이라고 논문 저자는 주장한다.[3]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분배정의

현대국가는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복지는 현대국가에서 자원을 재분배하는 주요한 정책적 수단이며, 이러한 정책이 얼마나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느냐가 그 국가의 복지 수준을 결정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복지국가 담론은 선별적 vs 보편적 복지 프레임에 머물러 있을 뿐 이것이 진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복지 담론에 롤즈의 분배정의론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위에서의 고찰이 롤즈의 분배정의론에서 핵심인 ‘무지의 베일’을 구현할 수 있는 모의적 상황에 대한 제안이라면 이번 파트에서는 본격적으로 분배정의 실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롤즈의 복지 개념은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조합으로 이해된다. 그의 두번째 원칙 중 ‘차등의 원칙’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최소수혜자들을 대상으로 하며, 그것은 복지의 수혜대상을 한정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선별적 복지 개념과 일치한다. 다른 한편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은 복지 서비스의 대상을 제한하지 않고 경제적 기준으로 서비스 대상자를 구분하지 않으므로 보편적 복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4] 이것을 간단한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정진화(2016)에서 발췌

 

한 편, 롤즈의 정부조직 구성도에 비례한 한국의 정부 조직 현황은 다음과 같다.

 

정진화(2016)에서 발췌

 

한국의 정부조직은 롤즈가 제안한 조직구성과 기능에 부합하는 조직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논문의 저자는 분배처의 역할을 담당하는 국세청이 4대 권력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조직이 아니라 기재부 산하로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복지국가가 실현되고 보다 분배정의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분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처가 힘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논문의 저자는, 따라서, 분배처의 기능을 강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정치의 역할에 대한 고찰부터 롤즈의 분배정의가 실제 제도상으로 어떻게 관철될 수 있는지까지, 꽤 길고 두꺼운 이야기들을 다루었는데 본 글에서 논문이 함의하는 바를 충분하게 검토하지 못하는 점은 필자의 역량부족이라 하겠다.

필자의 부족한 생각이지만, 롤즈의 정치철학으로부터 이것을 어떻게 현실과 접목시킬 것인지, 그리고 철학적 논의가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고민할 때 비로소 더 나은 사회를 향한 길이 열리리라 본다. 기실 이념과 말은 때로는 공허할 수 있지만 현실의 실천은 대단히 구체적이다. 만약 철학적 담론이 단지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논리적 우열의 다툼이라면 그것이 현실과 가지는 관계성에 대해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롤즈는 ‘이상적인’ 정치체계를 고안하기 위해 노력했던 철학자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롤즈의 논의는,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한계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철학을 바탕으로 보다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는 일을 멈춘다면 어떻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본 논문은, 필자가 보기에, 롤즈의 논의를 기계적으로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이 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접맥될 수 있는 철학의 가능성을 탐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읽어보시길 권한다.


[1] 이러한 원초적 입장에 대한 여러 비판 중 대표적인 것은 샌델의 비판인데, 샌델은 롤즈의 원초적 입장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상황이며 실제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라는 의무론적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정진화 2016.6. 79-80)

[2]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리뷰가 소개하는 논문 p.86을 참조하라.

[3] P.89 참조

[4] P.88 참조

최태준 리뷰어  xowns51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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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시민의 등장?

Teenagers conducting an experiment in a chemistry laboratory

logofinale과학기술만큼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으면서도 시민과 동떨어진 분야도 없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과거 과학기술을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분리하여 일반 시민들은 과학을 잘 알지 못하는 무지한 대상으로 치부하고 과학을 잘 아는 전문가들이 그들을 계몽해야 한다는 역사적 인식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성장함에 따라 사회적으로 계속 불거지는 여러 문제들, 가령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성, 원자력 발전소 등과 같은 과학기술의 문제가 더 이상 전문가들에게만 국한시켜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 또한 증가하고 있다.

이영희「과학기술 시티즌십의 두 유형과 전문성의 정치: 과학기술 대중화 정책과 `차일드세이브`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사회과학연구회』 , 10, 2014)에서 한국에서 과학기술과 시민의 관계가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를 정리하고, 오늘날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차일드세이브’ 라는 사례를 통해 분석한다.

 

시티즌십과 전문성의 정치

최근 들어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연구 주장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지만 여전히 과학기술과 대중의 관계는 대중이 과학기술 지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결핍모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더구나 그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 역시 실제 “지식권력이나 전문성 문제가 어떻게 개입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다. 논문의 저자는 과학기술과 시민의 관계를 보다 동태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과학기술 시티즌십’ 그리고 ‘전문성의 정치’ 라는 두 가지 개념틀을 가져왔다.

우선 시티즌십은 “시민의 지위와 시민적 실천에 관련된 일련의 가치와 규범의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으로 크게 “지배 세력이 위로부터 시민들에게 부과하는 수동적(passive)” 형태와 “아래로부터 종속적 지위에 처해 있는 시민들에 의해 요구되어 사회적 쟁투를 통해 만들어지는 능동적(active) 형태”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77쪽) 다시 말해, “국가가 중심이 되어 위로부터 기회하고 실행해나가는 형태”, 그리고 “사회운동이 중심이 되어 아래로부터 형성해 나가는” 유형이다. (178쪽). 과거에는 이런 시티즌십 개념이 자유주의적 개념, 즉 권리만 다소 강조되는 경향을 보였지만 최근에는 여기에 시민의 의무와 책무, 덕성 등을 포함하여 균형을 맞추고 있는 추세이다. 이에 기반한 과학기술 시티즌십은 “과학기술의 사회적 형성과정에 보다 시민적이고 민주적이며 생태친화적인 가치들을 부여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민주적 거버넌스를 잘 구축하고 그 속에서 시민들이 정당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179쪽) 다시 말해, 과학기술 시티즌십은 과학기술과 시민이 어떻게 관계맺음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두 번째로 저자가 설명하는 “전문성의 정치(politics of expertise)란 과학화, 기술화, 전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연 어떤 집단의 전문성(지식)을 사회적으로 가장 가치 있으며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갈등적 경합 과정”으로 정의된다. (181쪽) 이 역시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가 전문가지식(expert knowledge) 내부에 한정하여 이루어지는 정치이고, 두 번째는 시민들이 일상적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시민지식(lay knowledge)이 맞서는 형태로 전개되는 정치이다. 전자의 예시로는 새만금 개발사업의 환경영향에 대한 주류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 수 있고, 후자의 예시로는 삼성반도체공장 백혈병 산재인정을 요구하는 소송에서 일반 노동자들이 현장 경험에 기반하여 동원한 지식 투쟁의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위로부터의 과학기술 시티즌십과 전문성의 정치:
정부 주도, 계몽과 구분짓기

‘과학기술 시티즌십’과 ‘전문성의 정치’ 개념을 정리했다면 이제 과학기술과 시민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1960년대부터 추진해온 과학기술 대중화 정책은 대표적인 위로부터의 과학기술 시티즌십으로 19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73년 박정희 군사정부는 위로부터 조직된 일종의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추진했고, 과학기술 대중화를 위해 과학기술풍토조성사업과 국립과학관 건립,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의 설립 등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1970-80년대 정책의 특징이 ‘국민 대중’을 계몽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상정한 데 반해,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과학기술(정책)의 국민적 수용성(public acceptance)을 강화시키기 위한 사업들에 강조점”을 보였다. (188쪽) 운동 대상의 주체와 범위가 확대된 ‘과학기술 국민 이해 증진사업’, ‘과학기술문화 확산사업’ 등이 시행되었고, 더불어 환경이나 원자력 문제와 같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들은 정부가 직접 나서거나 특정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화를 전담하는 기관을 설립하여 대국민 홍보사업을 추진하였다. 원자력이 안전하고 원자력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메세지를 홍보하는 원자력문화재단이 그 대표적인 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진 과학기술 대중화 정책을 과학기술 시티즌십의 시각에서 평가, 즉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면 1980년대 중반까지 시행된 정책에서 시민들은 “근대화의 역군이자 산업전사”로 호명되었고, 국가 개발의 미명 하에 과학기술을 부지런히 익혀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요청 받았다. 반면 1980년대 후반 이후 민주화 사회가 시작한 이래 시민들은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지지할 줄 아는 ‘과학화된’ 국민’이 될 것을 요구 받았다. (187-188쪽) 그러나 두 시기 모두 시민들이 전문가들 또는 정부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피동체로 호명되는 점에서 과학과 시민의 관계는 여전히 “위로부터 동원되는 하향적 과학기술 시티즌십”을 전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성의 정치 역시 과학에 대한 전문성은 과학자들과 같은 특정 전문가 집단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만 존재했고, 전문가들이 내린 결정을 시민들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했다.

“… 오로지 과학기술 전문가들과 기술 관료들만이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비전문가로 인식되는 일반 시민들이 그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 이처럼 전문성 및 전문가를 문제화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오로지 전문성에 대한 숭배만이 장려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전문성 정치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190쪽)

요컨대 ‘위로부터의 과학기술 시티즌십’과 ‘전문성에 대한 경합이 사실상 부재한 정치 구조’에서 시민들의 능동적 참여는 찾아보기 힘들고, 과학과 전문성의 권력은 더 공고화 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 논문이 분석하는 ‘차일드세이브’는 기존의 구조에 저항하여 새로운 형태의 능동적인 시민과학 활동의 대표적 사례라 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과학기술 시티즌십과 전문성의 정치:
전문가와 경합하는 “차일드 세이브”

2011년 동일본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원전 사고는 시민들로 하여금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금 일깨우는 사건이었다. 특히 일본과 근접한 지리적 요건을 갖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원전 사고로 인한 피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일드세이브는 방사능 위험 문제를 심각히 여긴 주부들이 조직한 시민과학 활동으로 여기에 소속된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과학 활동의 주체로 내세우며 정부와 공공기관의 방사능 전문가들과 방사능 위험 문제를 둘러싸고 격돌”했다. (191쪽)

아래로부터 상향적으로 과학기술 시티즌십을 형성한 대표적인 사례인 차일드세이브 단체의 초기 주요 멤버들은 좋은 식재료에 관심이 많았던 한 요리 커뮤니티의 주부 멤버들이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건 이후 일본산 먹거리 등을 포함하여 원전 피해를 염려한 일부 멤버들은 그들이 키우는 아이들을 방사능 위험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의무 때문에 적극적인 자세로 문제에 임했다. 그러나 정부와 원전 전문가들은 ‘안전하다’는 답변만 반복할 뿐이었고, 회원들은 결국 직접 방사능 위험 문제를 학습하고 문제를 진단하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온라인 자료 공유와 오프라인 강연을 통해 관련 지식을 습득한 이후 방사능 수치를 측정하는 기구를 구입하여 스스로 방사능 오염 측정에 나섰다. 노원구에서 한 회원이 측정한 아스팔트 길에서 기준치 이상의 방사능 수치가 나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됐던 ‘방사능 아스팔트’ 사건은 차일드세이브 회원이 주도한 ‘시민과학(citizen science)’ 활동 중 하나이다. 처음에 위험성을 부정했던 관련 구청과 서울시는 이 민원을 받아들여 오염된 아스팔트를 제거했다. 또한 차일드세이브 회원들은 2012년 분유에 있는 방사능 수치를 측정하여 일동후디스 분유에서 미량의 세슘이 검출된 결과를 외부에 공개하는 등 특정 먹거리에 대한 방사능 위험 수치를 지속적으로 조사하였다. 더 나아가 이들은 정책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다른 환경 시민단체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의견을 개진하고, 국회 정책토론회에서 시민 패널로 참여하기도 했다. 방사능 안전급식 조례안이 통과되고, 후쿠시마 주변의 8개 현에 대한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 등은 모두 이런 활동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차일드세이브 회원들이 학교 급식을 방사능 위험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노력으로 발간한 개정 제안서
차일드세이브 활동은 앞서 위로부터의 과학기술 시티즌십에서 나타난 정부 주도의 과학 대중화 활동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시민들 스스로가 지식을 습득하고 자체적으로 문제를 평가, 시민운동을 통해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과정들은 과거 정부가 정책을 조직하여 시민들을 과학 시민으로 호명하고 가르쳤던 모습과는 상반된다.

“이처럼 차일드 세이브가 자녀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가 방사능 위험이라는 문제 상황을 공유하고 학습하고 측정하는 시민 과학 활동을 수행하게 된 것은, 방사능의 측정과 위험도 해석이라는 주류 전문가들의 과학활동에 대한 신뢰성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시민들 스스로 수행한 시민적 책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차일드세이브가 급식조례 개정 요구 운동이나 탈핵을 주장하는 시민운동에까지 참여하게 된 것은 바람직한 과학 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시민적 권리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사하는 행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196쪽)

차일드세이브 회원들의 활동은 기존에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나누어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를 전문가들의 영역에서만 논의하고 그 결과를 비전문가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전문성의 정치와 다르게 시민들이 전문가들의 지식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갈등을 빚는 과정이었다. 이들은 전문가들의 판단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기 보다 의심하거나 스스로 확인하려 했고, 전문가들이 공표한 전문지식을 탈신비화하고 문제시했다. 전문성을 둘러싸고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경합,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또한 대항 전문가들과 연대하여 주류 전문가 집단에 맞섰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형성한 아래로부터의 과학기술 시티즌십과 이 과정에서 시민들이 전문가들과 경합하는 차일드세이브 사례는 “바야흐로 동원되고 계몽되는 과학기술 시민이 아니라 도전적이고 급진화된 과학기술 시민이 등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6쪽)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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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왜 권위주의 국가로 회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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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법치주의 지수(2005). 녹색에 가까울수록 법치주의를 높게 실현하고, 적색에 가까울수록 그러하지 아니하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logofinale푸틴 지배체제와
현대 러시아의 문제

구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기를 겪는 듯 하다가 푸틴의 집권으로 인해 오늘날에는 거의 공고한 권위주의 국가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 무엇 때문에 실패하였는가? 민주주의를 공고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꿔 질문하면, 무엇 때문에 러시아는 권위주의로 퇴행하였는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평등을 한 축으로 하고, 그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또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법의 지배’를 또다른 한 축으로 해야만 한다. 법의 지배가 곧 민주주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법의 지배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어렵다. 정치적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라 할지라도 규율과 규칙은 필수적으로 필요하며 또 그러한 규칙에 복종하는 시민이 있어야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법의 지배(rule of law)’란 법 그 자체의 신성성과 불변성, 혹은 절대성 따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행사를 위한 요건과 근거들을 마련하고 그럼으로써 권력이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집행되도록 강제하기 위한 장치다. 법의 지배는 달리 말하면 ‘지배(rule)’의 편의성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전횡과 독단을 방지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근대국가의 견제장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본 고에서 살펴볼 논문은 이선우 교수의 민주주의 공고화에 있어 ‘법의 지배’의 우선성: 탈공산 러시아의 사례(『한국정치학회보』 51(1), 2017.3, 49-72)로써, 탈공산 러시아의 사례를 통해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기 위해 법의 지배가 왜 필요한지를 고찰하고, 또 그를 통해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사이의 관계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려 한다.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
충돌의 양상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미묘해서, 양자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사법의 정치화(politicization of justice)’라 불리는 현상을 야기하며 종종 충돌하곤 한다. 종종 법의 지배는 민주주의의 수호신을 묘사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훼손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법은 어떻게 작동하나?

‘법’은 지배할 수 없다. 법은 종이 위에 쓰여진 글자에 불과하며 글자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이다. 쉐보르스키(2008)는 ‘법의 지배’라는 용어를 두고 “사실에 대한 기술로서도 설득력이 없으며, 더욱이 설명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라고 말한다.[1] 물론 이에 비판하는 이들도 역시 있기는 하나, ‘법의 지배’ 개념은 여전히 논쟁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만 요약해두도록 하자.

그렇다면 법은 실제로 공정한가? ‘법’이 그 자체로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오히려 법은 수많은 권력이 개입하는 공간이며, 다원적 이익들이 충돌하는 회랑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였던 트라시마코스가 지적하듯, “법은 강자의 도구”이며, 나아가 그것은 사회 세력 간의 힘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세력 간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이 유용한 것으로 인식될 때, 비로소 제도적 균형이 이루어지며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2]

다른 한편, 현대 민주주의는 대단히 복합적인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오랜 전통(?)은 정치적 평등 위에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인민의 지배’를 뜻하지만 사실 이러한 정의는 인민이 어떻게, 왜 지배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공허한 정의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분한 논의가 있을 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통일된 정의를 내리기보다 각 정치체제 사이의 특징을 비교함으로써 귀납적으로 공통된 몇 가지 특질을 찾아냈을 뿐이다(Rose 2009, 12).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한 고전적인 논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보자면 최소주의적 정의와 최대강령적 정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쉐보르스키 등(Przeworski et al. 2000)은 사회적 안정이나 경제적 번영 등이 민주주의의 전제로 고려될 때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 추구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의회 및 행정부 수장을 선출하는 정기적인 선거시스템의 존재 유무로서 민주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최소주의적 민주주의, 다시 말해 선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권력자가 선거 이외의 기간에 독단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와 유인이 있다면 민주주의는 위협받게 된다. 따라서 민주적 과정들이 안정적으로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법의 지배는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사례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퇴행의 대표 사례

법의 지배를 먼저 확립한 후에라야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느냐, 혹은 ‘민주주의의 습관화’를 통해 시민사회를 성장시킴으로서 민주주의를 공고화시킬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선적인 경로가 없다는 답변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선거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고 하더라도 해당 국가가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로 나아가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미 정당이 존재하고, 정당 간 경쟁이 존재하며, 또 시민사회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 3의 민주화 물결 때 민주주의로 나아갔던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 중 많은 수가 권위주의로 퇴행한 것은 시민사회나 혹은 정당체계의 미발전이 신생민주주의 국가의 권위주의적 퇴행을 낳은 결정적 요건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3]

러시아는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다가 권위주의로 퇴행한 대표적인 사례다. 옐친 대통령 시기(1993-1999)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꽤 양호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4] 또한 집권 후반기에는 정당의 발전 가능성 역시 있었고 시민사회 역시 꽤 발전한 상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논문 저자는 옐친 대통령 시기에 ‘법의 지배’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한다. 일차적으로 헌법과 법률상 대통령이 사법부에 대해 과도한 통제력과 제도적 우위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를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사법부의 독립인데, 만약 대통령이 제도적으로 사법부보다 우위를 점한다면 법은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러시아의 경우 사법부를 둘러싼 각각의 이해관계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또 다원화되어 있었으므로 이것을 일종의 과도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법의 지배가 확립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항상적으로 권력에 대해 견제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때라야 법의 지배가 확립된 것이지, 만약 지지율이나 임기 등의 변수에 의해 유의한 영향을 받는 상황이라면 법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이는, 만일 사법부에 대한 강하 장악력을 가진 권력이 등장할 경우 국가 내 정치적 경쟁을 허물고 정례적 선거마저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5]

결과적으로 푸틴 정부가 출범하면서 허약한 법의 지배는 사실상 무너졌다. 푸틴은 새로운 법을 제정하면서 정당 등록 요건을 대폭 강화하고, 언론과 시민단체들에 대한 재정적, 행정적 검열과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사법기관을 적극적으로 동원했고, 통제된 언론들은 급속도로 푸틴에 대해 압도적인 보도 시간을 할애하는 등 불공정한 정치적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2007년 12월 치러진 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단합러시아당은 315석을 획득하여 개헌선을 돌파하였고, 이것은 더 이상 러시아의 선거제도가 집권당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 경쟁의 장으로 기능하지 않음을 뜻했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법의 지배의 중요성
준법정신보다는 사법의 독립성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대단히 복잡한 관계이며 어떤 것이 더 우선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사실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논문 저자는 “정당체계와 시민사회가 사법권력의 공정성과 투명성, 책임성을 제도화시킬만큼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 국가의 시민적 자유와 권리는 언제든지 위축될 수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하며 글을 끝맺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도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권력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장치가 없을 때, 권력은 언제든지 자신을 견제하려는 세력에 대해 적대적인 칼날을 세우고 달려들 것이며 또 그것은 많은 경우 좋은 결과보다는 재앙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법의 지배를 두고 단순한 준법 정신이나 법 그 자체를 지켜야만 한다는 의무적 당위성만을 설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정치체제를 이루는 요소로서의 법의 지배는 시민들의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가 얼마나 잘 독립되어 있는가, 또 그들이 얼마나 사회적 책임성 하에 노출되어 있는가, 그들이 효과적으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논문 저자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그 공고화에 있어서 정당체계나 시민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을 수정하여 법의 지배를 먼저 확립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전략이 신생민주주의 국가들에게 긍정적일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1] 애덤 쉐보르스키(2008), p.47

[2] 스티븐 홈즈의 주장이다. 자세한 것은 애덤 쉐보르스키(2008), p.51 참조.

[3] 이선우(2017), pp.55-56

[4] 프리덤하우스의 평가에서 대부분 3점대를 기록하였다.

[5] 이선우(2017), p.59

최태준  xowns51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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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소송, 폐암의 원인규명 가능할까?

Man smoking a cigarette against a black background

logofinale

오늘날 사람들은 담배와 질병의 상관 관계를 공공연한 사실로 인지하고 있지만 법정이 이 관계를 인정해 손해배상을 판결한 사례는 여전히 전무하다. 누군가 걸린 폐암의 원인이 흡연으로 인한 결과임을 어떻게 입증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어떤 과학기술적, 법적 도구들이 사용되고 있는가? 박진영, 이두갑은 논문 한국 담배소송에서의 위험과 책임: 역학과 후기 근대적 인과 (『과학기술학연구』 , 15(2), 2015)에서 인과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전문지식 중 하나로 역할하는 ‘역학’이 미국에서의 담배 소송에서 어떻게 자리잡는지, 그에 기반하여 한국에서 발생한 담배소송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를 분석하여 법과 과학기술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담배라는 제조물이 어떻게 오랜 기간 동안 법적 책임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후기 근대적 위험 사회에서 법과 과학기술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함의를 줄 수 있다.” (231쪽)

1999년 제기된 한국 담배소송에 대한 평가는 2014년 대법원이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는 원고 측의 패소 사실에만 주목하여 그 의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에 따르면 오늘날의 사회는 거대 기술 시스템들과 신기술이 지닌 잠재적 위험의 규모와 정도를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20세기 후반 이후의 사회는 후기 근대적(late modern) 위험을 관리하고 대응해야 하는 ‘위험사회(risk society)’인 것이다. 논문의 필자에 따르면 담배 소송은 이처럼 여러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후기 근대적 위험 사회 내 과학기술과 법의 영역에서 ‘인과관계’가 재정의되는 맥락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미국 사례와 한국 담배소송의 여러 쟁점들을 분석한 이 논문은 한국에서의 소송이 “후기 근대적 위험에 대응하고자 나타났던 여러 과학기술적, 법적 도구들을 전략적으로 사용해서 흡연과 일부 폐암의 인과관계를 확증한 주요한 법적 판단을 이끌어내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주장한다. (253쪽)

역학적 증거에 대한 법적 인정:
미국의 담배 소송 사례 

20세기 초반 이후 법은 원인이 되는 행위자와 이 행위자의 어떤 구체적인 인과관계의 연쇄가 피해를 낳았는지 구체적으로 규명할 것을 요구해왔다. 이는 마치 특정 질병이 발병했을 때 어떤 바이러스가 어떤 구체적인 경로를 통해 환자에게 도달했는지를 추적하고 밝히는 질병의 역학 관계를 밝히는 과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암 또는 공해 문제과 같이 원인이 하나로 환원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인과관계를 한 개인이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수의 피해자들이 확률적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집단 소송이 등장하기도 한다. 1980년대 이르면 역학은 과학기술과 법 영역에서 환경 문제, 대량 제조물과 같은 후기 근대적 위험과 관련한 소송에서 새로운 인과관계를 확립시킬 수 있는 전문적 지식으로 자리잡는다.

“역학은 1990년에 이르면 담배소송에서도 환경, 공해, 다른 제조물 소송에서와 같이 과학기술적 증거와 이를 통한 법적 책임을 묻는 인과관계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적 지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238쪽)

역학의 역사에서 흡연이 폐암의 중요한 원인임을 입증한 연구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역학 연구에 근거하여 “1964년 미국정부는 흡연과 폐암 간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기념비적인 보건총감 흡연과 건강 보고서를 출판”하였고, 1990년에는 최초로 흡연이 원고의 소세포암 발병의 주된 원인임을 인정, 담배회사에 40만 달러의 배상을 판결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 법원과 배심원이 담배 소송에서 역학적 증거를 과학기술적 인과관계의 법적 책임 규명에 사용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합의가 형성되는 과정이었다. 미국에서 확립된 법정 모델은 이후 나올 한국의 담배 소송의 전개 과정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폐암과 흡연의 상관관계 연구 그래프 (출처: 위키피디아)

 

한국 담배 소송의 출발: 흡연과 폐암 간의 역학적 인과관계 인정
개인의 개별적 인과관계 입증을 위한 기반 형성

1999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담배소송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귀국한 배금자 변호사는 한국금연운동협의회와 함께 폐암과 후두암에 걸린 흡연 피해자 6명과 그 가족을 포함한 약 30명을 원고로 선정, 한국담배인삼공사(지금의 KT&G)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필자는 이 소송이 1심에서 3심까지 이어지는 각 판결 과정에서 “어떻게 역학과 질병의 정의, 그리고 법적 책임의 규명에 대한 후기 근대적 이해들이 전략적으로 사용되며 새로운 법적 인과관계에 대한 틀이 마련되었는지를 보”이고, “후기 근대적 위험에 대한 과학기술적 원인 규명과 법적 책임에 대한 새로운 해석틀이 등장했음을 보”이려 한다. (232, 239쪽)

한국 담배소송에서 주목해야 할 주요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첫 번째는 “담배의 결함 또는 흡연과 폐암 발병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가 인정되는지의 여부”, 두 번째 쟁점은 “이 사건의 흡연자들의 폐암 발병이 흡연으로 인한 것임을 ‘개별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 마지막 세 번째 쟁점은 “피고인 한국담배인삼공사와 대한민국이 제조·판매한 담배와 원고 측 흡연피해자의 폐암 발병 간의 인과관계가 인정되는지 여부” 이다. (239쪽)

우선, 첫 번째 쟁점인 흡연과 폐암 발병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는 2004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전문 의료 감정인단의 감정서를 받아 그 관련성을 인정했다. 이 과정에서 앞서 미국 사례에서 등장한 1982년 미국 보건총감보고서가 인용되었고, 흡연이 폐암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가설의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여기서 재판부가 발표한 역학적 인과관계란 “대상 인구집단 수준에서의 질병과 해당 요인과의 일반적 관련성의 정도ʼʼ를 입증하는 것을 의미하여, 과거 구체적인 수준에서 엄격한 인과관계만을 인정했던 사례와 다르게, “집단 수준의 피해에 대한 역학적 인과관계가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였다. (242쪽) 이 판결은 서울고등법원 재판부의 2심 판결에서 역시 동일하게 인정되었다. 필자에 따르면 흡연과 폐암 간의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한 판결로 인해 이제 “기존의 불법행위책임소송에서 요구되어왔던 흡연자 개인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법적으로 다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입증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위험물에 대한 사회적 의무와 법적 책임

담배 소송에서 중요한 핵심 중 하나는 흡연과 폐암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입증을 누가 책임지고 담당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보통 불법행위책임 소송에서는 피해자 측인 원고가 이를 입증해야만 했으나, 점차 원인 규명에 대한 과학기술적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이에 소요되는 많은 비용 등이 증가함에 따라 최근 이러한 입증의 부담을 원고와 피고 측이 적절한 비율로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입증책임 완화”는 1980년대 이후 환경, 공해소송 또는 대량 제조물로 인한 피해로 발생하는 소송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즉, 원고 측이 피해 원인과 결과를 규명해야 하는 것과 더불어 피고 측 역시 그 둘의 상관관계가 없음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1984년 자동차의 매연, 폐수, 쓰레기 등의 공해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최초로 입증책임 완화를 인정한 바 있다.

한국 담배 소송에서 원고측은 입증책임 완화를 위해 공해소송과 담배소송의 유사점들을 지적하며 흡연 피해를 유발한 유해 성분이 담배를 제조하는 회사의 배타적 영역 하에 있기 때문에 피해자인 원고 측이 규명 조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피고 측이 원고 측의 폐암 원인이 흡연이 아닌 다른 요인 때문임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흡연과 폐암 간의 인과관계를 법원이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피고 측은 다른 제조물과 달리 담배 제조는 매우 간단한 과정으로 고도의 기술이 적용되지 않는 제조품이고, 여러 불완전한 지식이 많은 공해소송과 달리 담배의 유해성 연구와 지식은 이미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입증책임 완화의 원칙을 적용시킬 수 없다 반박하였다.

입증책임 완화 쟁점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부는 원고들이 흡연과 폐암 발병 간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게 어려움은 인정하였으나, 피고 측 역시 원고 측의 폐암 발병 원인 조사를 하는 게 쉽지 않고 흡연이 원고 측의 자발적인 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입증책임 완화의 법리를 담배소송에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반면, 서울고등법원은 공해소송에서 사용되는 입증책임 완화 법리를 담배소송에 적용할 수 있다고 판결하며, 담배의 구체적인 제조 과정이 공개 되어있지 않은 현실에서 피고 측이 입증 책임을 어느 정도 부담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2심에서의 판결은 “한국의 담배소송에서도 후기 근대적 위험으로 인한 피해의 원인을 법적으로 규명할 때 나타났던 불확실성을 인식하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물질을 제조하고 판매한 제조사에게 사회적 의무를 지우는 차원에서 도입된 입증책임 완화라는 법리가 인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47쪽)

 

흡연 외 다른 요인은?
개별적 인과관계의 인정 여부

두 번째 쟁점으로, 흡연과 폐암 발병 간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흡연을 폐암 발병의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는가? 다른 요인, 즉 유전적 요인, 식이습관, 병력, 직업적 노출, 대기오염 등이 원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역학적 인과관계를 개별적 인과관계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 원고 측 흡연자들이 장기간 흡연했다는 사실만으로 폐암 발병이 흡연 때문임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원고측 6명에 대한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2심은, 1심 재판부와 같이 폐암이 복합적 작용에 의해 발병할 수 있어 다른 외부 요인을 배제할 수 없는 점을 인정하였지만, 원고 측 흡연자들이 장기간 흡연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암물질에 노출, 흡연으로 인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특정 종류의 암이 발견된 점 등을 근거로 6명 중 4명에 대한 흡연 피해를 인정하였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의 판결은 “법정에서 비특이성 질환의 특징을 고려하며 인과관계 정립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였으며, 이와 함께 입증책임 완화와 법리를 적극 도입하여 한국 담배소송 최초로 개별적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볼 수 있다. (252쪽) 이는 암과 같은 비특이성 질환에 대한 법적 구제의 가능성을 열어준 기반을 마련하고, 담배회사 등과 같은 업체들에게 도덕적 경각심을 알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사회가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울리히 벡이 주장한 이 위험사회에서 앞으로 공해소송 또는 제조물과 관련한 여러 위험 물질과 질병에 대한 소송은 더 늘어날 것이다. 한국 담배소송은 “위험사회에서의 피해와 법적 정의에 대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기반”을 찾을 수 있는 통로를 제시한 셈이다. (254쪽)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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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청년세대를 생존주의 담론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Female college student sitting at desk

logofinale힘든 청춘들을 위한 담론이 산발적으로, 또 연속적으로 제기되어 오고 있다. 청년세대들을 위한 여러 자기계발서나, 혹은 힐링서적이라든지, 이런 현실을 불러일으켜 온 여러 원인들에 대한 분석서도 여러 형태로 접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청년세대에 대한 일련의 담론은 같은 속성 내지 성향을 가진 청년집단들을 향한 메시지로 보인다. 그러나 과연 모든 청년집단에 대해 같은 논리로 접근할 수 있을까?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최종렬 교수는 「‘복학왕’의 사회학: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분석」(『한국사회학』, 51(1), 2017)에서 김홍중의 생존주의 청년세대 담론을 논의하면서, 자신이 겪어온 지방대생들도 그러한 담론에 포함될 수 있는지, 그럴 수 없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며, 해결책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파악하고자 하였다.

생존주의 마음의
레짐

논문은 김홍중(2007, 2009b, 2015)의 청년세대의 전환 담론에 의지하며 논의를 전개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80년대의 진정성 세대는 내면의 참된 자아와 대화하며 삶을 이끌어 가는 태도를 지닌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 세대는 97년 IMF 사태 이후로 생존주의 세대가 된다. 이 생존주의 세대는 초기에는 ‘동물+속물’ 세대로서 진정성 세대와는 달리 내적 관계를 맺을 자아가 아예 없고(동물적), 자신의 자아와 도구적, 기만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속물적). 쉽게 얘기해서, 이들은 자신의 능력, 가치, 사유 등을 모두 도구화해서 성공을 향한 열망에 쏟는다. 그리고 문제는 이러한 동물+속물의 청년세대가 자기계발을 기만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되게 추구하면서 생존하기 위하여 전력 투구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청년세대=생존주의라 할 수 있겠는데, 김홍중이 도출한 생존주의의 다섯 가지 태제는 다음과 같다.
1. 소극적 목적 태제’. 경쟁의 목적은 승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태되지 않는 것임.

2. ‘영원한 연장 태제’. 경쟁은 종착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계속 연장됨.

3. ‘자기통치 태제’. 생존을 위하여 개인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가시적 자원으로 전환하는 자기통치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함.

4. ‘평범한 안정 태제’. 생존이란, 야심찬 시도로 인한 특별한 성공 따위가 아닌 평범한 안정임.

5. ‘진정성-기능성 태제’. 생존 추구 과정은 사회적 통제에의 순응이며 자아를 실현하여 자기 정체를 표현하는 과정임.

웹툰 <복학왕> 중에서. 저자는 김홍중의 생존주의 청년세대 담론을 10여 년간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지방대생의 현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웹툰 <복학왕>을 접하고, 그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고 언급한다.
생존주의 마음의
코드

김홍중의 마음의 레짐은 인지적·정서적·도덕적 코드의 복합체로 정의된다. 이 코드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적 상징체계라기보다는 몸과 마음에 육화된 아비투스의 기계적 발현으로 축소된다. 인지적·정서적·도덕적 코드는 전통적인 사회학적 용어로 풀어 말하면 가치·규범·목표의 성속 코드라 할 수 있다.

도덕적 코드로서 ‘가치’는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를 규정하는 가치평가적 코드이다. 생존주의 마음의 가치 코드는 생존 대 낙오의 이항으로 구성된다. 이전의 생존 개념과는 달리 경쟁적 삶에서 배제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서적 코드로서 ‘규범’은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 방식을 조절하는데, 대개 관례, 습속, 법을 지칭한다. 생존주의 세대의 규범은 진정성 대 비진정성의 이항코드로 이루어져 있다. 생존주의 세대는 생존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고 그에 대한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신념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신념을 기반으로 행위를 성찰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인지적 코드로서 ‘목표’는 가치를 추구하는 수단의 인지적 효율성, 즉 수단목적 합리성과 관련된다. 자기계발 대 비자기계발의 이항 코드로 구성된다. 생존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요행이나 운이 아니라 개인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생존을 위해 관리하고 계발하는 데 있다. “청년세대의 생존주의 마음의 핵심은 “자기계발을 진정되게 추구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말로 요약된다. 아래는 김홍중이 제시한 생존주의 마음의 이항 코드를 가치·규범·목표의 성속 코드로 재구성한 것이다.”(251쪽)

 

김홍중은 80년대의 진정성 세대가 소멸하고 그 자리에 동물과 속물이 출현하였다가, 이내 생존을 위해 각자도생을 열렬히 추구하는 청년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김홍중이 현재 한국의 청년세대를 동물과 속물로 비유한 것은 사회학자로서 한국 청년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한 메타포로 썼다고 보고 있다. 이는 김홍중 본인과의 사적인 대화에서 이미 털어놓았던 사실이라고 한다.

“생존주의자는 언뜻 보면 동물인 것처럼 보인다. 생존 가치에 따라 게임을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생존 가치는 자기 자신의 생존에만 가치를 두기 때문에 자신을 초월한 더 큰 존재와 관련 속에서 자신의 삶의 행로를 위치지우지 못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생존주의자는 생존을 내면의 가치이념으로 설정하고, 이러한 가치 이념에 비추어 스스로 목적을 선택하고 이 목적을 가치 추구하듯이 한다. 그런 점에서 베버가 말한 문화인간의 한 유형처럼 보인다. 다만 생존주의자의 가치이념은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맺고 있는 연관관계와 당대의 현실이 구성되게 된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그의 가치이념은 유아론적이다.”(256쪽)

공적 상징체계와
문화화용론

논문에서는 자기계발 담론은 매우 다양한 층위를 지닌 이질적인 재고 지식이며, 사용자에 따라 이러한 층위들이 뒤바뀔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무리 담론의 질서와 마음의 레짐의 통치가 강고하고 집요하다 해도 행위자가 자기계발 담론을 사용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으며, 사용한다 해도 이를 사용한 자신의 행위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효과가 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계발 담론을 청년 세대가 실제로 활용해서 문제적 상황을 정의하고 해소하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이를 경험적 연구를 통해서만 답할 수 있는 문제라 보고 있다.

논문에서는 문화화용론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문화화용론은 행위자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지적으로 분류하고, 도덕적으로 가치평가하며, 정서적으로 느끼기 위해 그에게 가용한 공적 상징체계를 활용하여 말과 행위를 구성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행위자는 반드시 또 다른 행위자를 전제로 할 때에만 공적 상징체계를 활용하여 말과 행위를 구성할 수 있다.”(259쪽)

청년 세대에 대한 저자의 접근 관점은 다음과 같다. 청년은 어떤 자아를 가지고 있는가? 전략적 손익계산가인가? 동물인가? 속물인가? 생존주의자인가? 아니면 테일러가 말하는 자아를 지니고 있는가?(선에 대한 지향을 추구하고 찾는 한에서 나타나는 대상) 그렇다면 청년들이 어쩐 자아를 지니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청년들과 대화의 망을 형성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자가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 학생들이 좋은 삶에 대한 가치이념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 가치이념을 가지고 있다면, 자아, 집단, 사회, 민족, 세계 등과 관련하여 가치연관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함.

2. 좋은 삶을 추구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 학생들이 좋은 삶을 추구하는 자신의 자아와 진정성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래서 자기통치의 길로 나아가는지 파악하고자 함.

3.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일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 좋은 삶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계발을 선택하여 활용하는지 알아보기 위함.

가치
: 가족의 행복

그들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그들에게는 아직 자신이 믿을 가치이념이 없다. 그래도 테일러가 어떤 인간도 좋은 삶에 대한 지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듯, 지방대생들에도 좋은 삶에 대한 개념이 존재했다. 그들에게 좋은 삶이란 경제적 성공도 생존도 아닌, ‘행복’이다. 이 행복은 무엇보다 평범한 가족의 삶으로부터 나온다. 자신을 초월한 집합적 단위와 관련해서 자신의 삶을 구성한다면, 오로지 가족뿐인 것이다. 김홍중의 생존주의자에게 생존은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는 것이다. 지방대생에게 있어서 생존은 가족을 형성, 또는 가족 안에 머물자는 것이다. 이렇듯 평범한 일상의 삶을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이념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사회는 녹록치 않을 것이다. 생존주의자는 생존을 자신의 내면 깊숙이 받아 들여 가치이념으로 삼는다. 하지만 지방대생에게 생존은 가치이념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주어진 목적이다.

규범
: 성찰적 겸연쩍음

지방대생은 스스로 생각하는 좋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추구하는가? 이는 전술하였듯이 자신의 자아와 진정성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래서 자기통치의 길로 나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의 자아와 어떤 실천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어떻게 자신의 자아를 대상화하고, 어떤 관계를 맺는지, 자아는 대화의 망 안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지방대생이 어떤 대화의 망을 상상하느냐가 자아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지방대생은 기업을 대화의 망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자아를 기업가로 대상화하지 않고, 생존주의자로 대상화하지도 않는다. 소비시장 역시 대화의 망이 아니다. 대신 그들이 상정하는 대화의 망은 가족, 친구, 대학 동료 및 선후배 등의 집단이다. 가족 내에서는 공부는 못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아이로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며, 친구에 대해서는 의리 있는 친구로 자아를 표출하며, 대학 동료와 선후배들 사이에서는 학과 일에 잘 협조하는 동료로 자아를 드러낸다. 이런 자아에 대해서 결코 도구적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또한 그러한 자아에 대해 진정한 관계를 맺고 활용하여 인간 관계를 맺는다.

그렇다면 이들은 다른 생존주의자처럼 사회로 나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가? 이들은 학교 밖을 넘어서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다. 특히 공부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공부를 통해 인정받아 본 적은 거의 없다. 십수년 입시 공부의 결과로 지방대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이들을 더욱 위축시킨다. 해도 안 되는 것을 시도하는 것은 주변인들에게 희망고문을 시키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저자가 대화한 지방대생 6명은 모두 가족적 자아를 가지고 있어, 가족을 넘지 못하는, 혹은 넘으려고 하지도 않는 성찰적 겸연쩍음의 에토스에 빠져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목표
: 습속의 왕국

대화대상인 지방대생 6명 모두 자기계발에 대한 압력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목적-수단 범주를 통해 합리적으로 자기계발을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한 방식으로 삶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지방대생의 일상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기계발을 통하여 자신을 단련하고 업그레이드시켜 성공을 추구하는 행위는 독하고 영악하고 고집있고 계산적인 그런 행위들이다. 그들은 자기계발을 해 봐야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또한 알며, 놀기만 해서는 인생이 망가진다는 것도 알기에 그 어떤 것도 몰두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목적과 수단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의 관계이다. 지방대생은 주변의 관계를 먼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우선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라 보고 이를 싫어한다. 그러다보니 주변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한다. 그와 같은 이른바 습속의 왕국에서 그들은 살아간다. 계속 해왔던 대로, 혹은 주변사람들이 하던 대로, 습속을 따라 살아가면 세상이 너무나 자명한 사회적 사실로 다가온다.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지방대생은 자기계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 자기계발 담론을 공적 상징체계로서 잘 사용하지 않는다. 사용한다 하여도 지방대에서 작동하는 적당주의 집단 습속이 자기 계발이라는 집합표상을 걸러낸다. 그 결과 지방대생은 경쟁 밖에 자신을 위치 지운다. 설사 경쟁에 뛰어든다 해도 느슨하게 한다. 그리고 성찰적 겸연쩍음으로 경쟁 과정과 결과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결론은 저자가 단지 6명의 지방대생과의 대화를 통하여 도출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가 10년 이상 지방대에서 학생들과 어울리며 매일같이 깨달은 인지적 실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속해 있는 문화적 구조는 매우 단단하며, 저자는 이를 깨보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저자가 제시하는 하나의 방법은, 다른 집단과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령 저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학자이므로 공부 잠재력이 있는 대학생들을 학술대회가 있을 때마다 데리고 다녀, 보다 넓은 세계를 보여주며, 일부 학생의 경우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고. 본 논문은 학술지 논문치고는 50여쪽의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본 리뷰에 싣지 못한 사회학 개념들이 논문에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들은 참조하기 바란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김홍중, 2015, 『한국사회학』, 49 (1), 1–29.

진정성의 수행과 창조적 자아에의 꿈: 시문학동인 P에 대한 사례연구
김홍중, 2016, 『한국사회학』, 50 (2), 199–229.

최종원 리뷰어  zwpow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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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우드 펀딩, 새로운 소통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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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후원, 기부, 대출, 투자 등을 목적으로 웹이나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다수의 개인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행위인 크라우드 펀딩(crowdfunding)은 은행 중심이었던 금융시장의 변화와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가 중첩되며 구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자본을 확보하는 금융적 펀딩인 동시에, 특정 메시지 혹은 아이디어에 대한 사회문화적 참여를 이끄는 온라인 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 세대의 정체성이 반영되어 있는 크라우드 펀딩은 크라우드 소싱(crowdsourcing)에서 파생된 것으로 SNS를 통해 알려지고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 소셜 펀딩이라고도 불린다. 크라우드 펀딩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대표적 업체로는 후원형 펀딩 사이트로 가장 유명한 미국의 킥스타터(Kickstarter)와 인디고고(Indiegogo), 영국의 비영리 펀딩 사이트인 저스트기빙(Just Giving), P2P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영국의 조파(Zopa)와 미국의 프로스퍼(Prosper) 등이 있다. 이러한 크라우드 펀딩 시장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 늘어나는 추세를 통해 그 확대성을 확인할 수 있다.
크라우드 펀딩은 크게 기부형, 대출형, 자산투자형, 후원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기부형은 자선 사업의 디지털 형태로 기부자는 세금공제 혜택을 받는다. 그리고 대출형은 소액대출 혹은 P2P대출 형태로 기업가가 크라우드에 대출을 요청하고 그 대출액에 이자를 붙여서 갚아나가는 방식이다. 자산투자형은 기업가가 회사 지분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팔면서 투자자에게 투자를 요청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후원형은 제품이나 서비스가 완성되도록 후원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상품이나 서비스로 받는 방식이다. 이 후원형은 주로 창작활동, 문화예술상품, 사회공익활동 분야에서 많이 진행되고 있으며, 대중들이 가장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형태이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시점에 오소정과 임대근의 논문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과 그 효용성: 한국 텀블벅(Tumblbug)과 대만 플라잉브이(Flying V) 사례를 중심으로(『글로벌문화콘텐츠』 26, 2017)은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을 공동체 의식 제고와 문화적 기억의 장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했다.

독립적 문화 창작자를 위한 텀블벅
창의성을 우선시하는 플라잉브이

미술·만화·무용·디자인·패션·영화 및 비디오·요리·게임·음악·사진·출판·테크놀로지·연극, 총 13개 분야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텀블벅은 독립적인 문화창작자를 위한 크라우드 펀딩을 제공하고자 하는 목표로 설립되었다. 2011년 설립된 텀블벅은 홈페이지를 기본으로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를 병행하여 대중과의 접촉을 다양화하며 운영하고 있다. 2015년 텀블벅은 42,709명의 후원을 받아 980개의 프로젝트를 성공했다. 총 후원금은 29억 563만 4774원으로 집계된다. 텀블벅은 성공한 프로젝트에 한하여 후원금의 5%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받는다. 텀블벅을 통해 노바1492 게임이 제작되었고, 정동진독립영화제가 개최되기도 했으며, 룩앳램프 프로젝트(8000% 펀딩 달성)도 진행되었으며, 다양한 책과 잡지가 출판되었다.
“Deal with idea! Do what defines you!”를 모토로 하는 플라잉브이(FlyingV)는 소규모 회사 혹은 개인이 진행하고자 하는 사업에 재정적 도움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자 대만에 처음으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을 만들었다. 플라잉브이는 디자인·음악·영상·과학기술·예술·여가·공공·지역·운동·게임·출판·여행 총 12가지 분야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플라잉브이 역시 프로젝트 검토시 창의성에 중점을 둔다. 그리고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플릭커(Flickr), 브이스토리(VStory)를 함께 운영한다. 2015년 플라잉브이는 282개의 프로젝트를 성공했고, 총 모금액은 133,330,082대만달러(TWD)(한화 약 4,822,549,065원)에 달한다. 후원에 참여한 총 인원은 76,488명 이며, 한 회 평균 모금액은 1,795.45대만달러이다. 플라잉브이도 프로젝트 업로드 비용은 무료이며, 성공한 프로젝트에 한하여 후원금의 5%를 운영비로 받는다.
이 두 플랫폼을 통해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텀블벅 홈페이지 (https://tumblbug.com)
자본과 시장성 확보

텀블벅과 플라잉브이에서 프로젝트 검토시 가장 우선시하는 창의성, 독립적인 문화창작자라는 조건은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의 근본적인 목적을 드러낸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상업적 가치는 무시할 수 없지만, 상대적으로 자금력이 부족한 문화예술 영역에서 자금 조달은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문화예술 영역의 니즈와 맞아떨어진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은 이 분야에 더욱 특화될 수 있었고, 서로의 니즈를 채우고 시너지를 낼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은 개인 창작자나 예술가 그리고 소규모 제작사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한 경제적 지원을 기본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리고 홍보 마케팅 툴과 공급창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문화예술 영역 내 개인 창작자, 독립 창작자에게 크라우드 펀딩은 좋은 창구가 된다.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신의 결과물을 리워드로 제공하는 공급 통로를 확보할 수 있기도 하며, 크라우드 펀딩으로 이루어지는 SNS 홍보로 인지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크라우드 펀딩은 자본을 모을 수 있는 플랫폼이자 대중과의 소통이 잦고 홍보가 용이한 플랫폼으로서 자본과 시장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툴이다.
“제품을 제작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으는 대표적인 사례로 책 출판과 게임제작을 들 수 있다. 텀블벅의 그 첫 번째 사례로 2016년 4월 29일부터 6월 26일까지 진행한 크툴루의 부름 프로젝트는 미국 카오시움사(Chaosium)의 콜 오브 크툴루(Call of Cthulhu)의 번역판을 제작하는 프로젝트이다. 이 게임은 H.P.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를 바탕으로 만든 30년 역사의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으로, 텀블벅에서 최근 진행한 프로젝트는 그 최신판인 Call of Cthulhu 7판의 번역이다. 해당 프로젝트는 5,000원부터 200,000원까지 총 12가지 선택이 제시됐다. 여러 선택에 따라 이뤄진 후원은 총 1,708명의 후원을 받아 206,836,000원의 후원금을 모았으며, 이는 목표액 15,000,000원 중 1,378%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플라잉브이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맞춤형 교육 게임 프로그램 ‘해적(海霸)’인 어린이 보드게임 제작을 진행했다. 100달러부터 50,000달러까지 총 14개의 후원 선택에 300,000대만달러의 목표액 에서 현재 752명이 후원하여 850,183대만달러를 후원받았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은 프로젝트를 제안한 제작자가 현재 모두 대학교(交通大學) 재학생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현재 대만에서 어린이 대상의 적절한 놀이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논리성과 사고력을 키울 수 있는 보드게임 제작 프 로젝트를 진행했다. 자본이 없는 학생이 설계한 아이디어를 후원하기에 크라우드 펀딩은 적절한 플랫폼임이 분명하다.”(122~123쪽)

플라잉브이 홈페이지 (www.flyingv.cc)
공동체 의식의 제고

오래전부터 지역 연구를 위해 활용되었던 공동체 의식은 요즘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이용자와 대중 간 교류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공동체 의식은 크게 구성원, 상호작용, 필요의 통합과 충족, 정서 교류로 이야기될 수 있으며, 구성원이 소속감과 정체성, 안정감을 느끼며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을 통해 이 의식은 지속된다. 크라우드 펀딩 역시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만들 수 있다. 자신의 돈을 이용하여 프로젝트를 후원한다는 것은 그 당사자가 해당 프로젝트에 공감 후 행동을 시작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 물질적 보상이나 금전적인 보상이 어려운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대중들의 후원 이유는 진심으로 공감, 동의의 감정에서 비롯됨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효용성 때문에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여 이를 알리고 바꾸고자 하는 사회적 프로젝트가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중들은 해당 프로젝트의 취지에 공감하고 그 움직임에 동참하고자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문화적 기억의 환기

사회적 기억이 힘을 얻기 위해서 실제적 매체로 재현될 필요성을 주장한 문화적 기억이란 이론은 기억의 생산 및 전달 그리고 수용에 관한 미디어 이론과 연계된다. 기억을 이동시키는 매체는 나름의 내러티브를 통해 사회적 소통을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사회적 응집력을 발현한다는 점에서 크라우드 펀딩은 문화적 기억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는 프로젝트를 만든 창작자의 취지에 공감하고 동의한다는 대중의 성격에서 볼 수 있는 효용성으로 공동체 의식을 활용하는 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창작자가 고안하고자 하는 작품, 서비스가 문화적, 사회적으로 특별한 사건의 메타포로서 제시될 때 대중은 그 사건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함께 기억하고 지지하고자 하는 의사를 펀딩 참여로 표현한다.
“텀블벅에서 2016년 2월 3일부터 3월 31일까지 진행한 ‘작은 소녀상 김서경·김운성의 프로젝 트’는 총 9,003명이 후원하여 최대후원으로 기록된다. 본 프로젝트는 16,978번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공유됐으며 홈페이지 내 제작자와 후원자의 소통 역시 활발했다. 이와 비슷하게 ‘위안부 기억 나비카드지갑/팔찌 품프로젝트x뉴바이올드의 프로젝트’는 2,378명의 후원을 받았다. 두 프로젝트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기억하고 함께 노력하자는 취지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텀블벅을 통한 후원은 일방적인 기부가 아니라 해당 프로젝트에서 제작한 상징성을 갖는 물품을 제공받는다. 이는 후원자의 일상에서 문화적 기억을 환기시키는 매개체로 위치한다. 2014년부터 한국 사회에 계속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세월호 관련 프로젝트도 텀블벅에서 진행됐다. “세월호 참사 2주년 416프로젝트 <망각과 기억>”은 2016년 2월 23일부터 3월 20일까지 진행하여 1,134명의 후원을 받았다. “망각과 기억” 프로젝트는 세월호 참사 2주년을 맞은 다큐멘터리 제작을 후원하는 것으로 2년여의 활동을 여섯 편의 옴니버스 영화로 제작한다.”(126쪽) “플라잉브이에서는 “지역음악을 위한 축제(為土地唱歌音樂祭): 세계 속의 대만 남쪽 섬의 어머니 (南島之母)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8월 1일은 대만 원주민 기념일이다. 많은 국민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원주민과 그 기념일에 관해 무지하다는 것을 인지하여, 7월 29일부터 3일간 원주민 음악축제를 통해 그들의 전반적인 문화를 함께 알아가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축제를 후원하며 대만 지역(토속)문화를 알리고 기억하며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프로젝트 제안자의 궁극적 목표를 읽을 수 있다.”(127쪽)

한국의 텀블벅과 대만의 플라잉브이는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으로서 그 효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작과 소비의 플랫폼이자 대중의 사고체계 및 관심과 창작자와의 연결 고리이자 소통의 공간으로서 크라우드 펀딩은 현대사회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 사회적 뜻 등을 가진 창작자는 경제적 지원을 위한 프로젝트를 제안하면서, 자신이 가진 의식과 의미를 널리 알리고 동참자(후원자)를 확보하며 힘을 키워간다. 출판, 영화제작, 게임제작 등 아이디어로 시작되는 프로젝트 뿐만아니라 반핵 운동, 성소수자를 위한 운동, 위안부 문제, 노동 문제 등 사회에 박혀있는 문제를 다루기도 하며, 세월호 사건, 사드 반대 투쟁 등 현재 진행중인 현대 사회의 이슈를 다루기도 한다. 이 모두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보다 사회의 여러 방면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하는 의식을 프로젝트를 통해 발현한다는 점에서 위의 3가지 효용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크라우드 펀딩은 자산 투자· 경제적 목적뿐만 아니라 대중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플랫폼 형태로서 더 다양한 사회적 효용성을 가지게 될 것이라 기대된다.

 

이지호 리뷰어  hwsc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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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의 정치적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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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SNS는 실제로 정치적 동원력을 얼마나 행사하고 있을까? 지난 번에 필자가 리뷰했던 논문인 「2012년 대선과 대중매체의 정치적 효과」에 이어 실제로 SNS가 정치적 영향력을 얼마나, 어떻게 행사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박창문, 조재욱 교수의 SNS의 정치적 동원 기능에 관한 비판적 고찰: 18대 대선에서 트위터를 중심으로(『한국정당학회보』 12(2), 2013)를 살펴보려 한다.

SNS의 정치적 동원 기능

지난 논문은 TV나 라디오, 신문 등 구 매체(old media)와 SNS, 유튜브 등의 신 매체(new media) 사이에서 투표자들의 정치적 선택에 매체들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한 논문이었다면 이번 논문은 트위터에 한정하여 실제로 SNS가 선거에 어떤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알아보기 위한 고찰이다. 18대 대통령 선거는 트위터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던 대선이었으므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SNS는 오늘날 우리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 많은 이들이 관계를 맺고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것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전체 인구비율로 따져보았을 때 SNS로부터 정보를 습득하고 정치적 선택을 위한 통로로 활용하는 인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더욱이, SNS가 정치적 동원에 있어서 긍정적 효과를 미치는지는 파악하기 더욱 어렵다. 많은 논자들이 SNS를 통한 ‘소통의 혁명’을 말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SNS야말로 게토화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공간이라고 본다. 본 논문을 살펴보는 것은 SNS가 가지는 위력이 실제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SNS의 법칙? 트위터의 특성과 정치적 동원 기능

SNS가 긍정적 효과를 가지느냐, 아니면 부정적 효과를 가지느냐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오고갔다. 실제로 SNS가 등장한 이후 SNS는 지속적으로 확대 추세에 있으며 정치인들 역시 이러한 SNS를 유용한 플랫폼으로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정치적 동원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트위터는 어떻게 작동할까? 닐슨은 ‘1:9:90의 법칙’을 주장한다. 이것은 1%의 기여자(heavy Contributor)들만이 컨텐츠와 정보를 생산하고, 이렇게 생산된 정보를 리트윗이나 댓글을 통해 확산시키는 9% 간헐적 참여자(intermittent Contributors)가 있으며, 나머지 90%는 방관자(Lukers)로 1%와 9%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된 정보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관망한다는 것이다(Nielsen 2006).

뉴미디어, 특히 트위터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을 뽑아보자면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1) 먼저 트위터는 개방성을 가진 매체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고 따라서 이것은 정치적 무관심층이 정치인 개인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개방해줄 수 있다. (2) 신속한 전파력 역시 트위터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3) 또한 SNS 상의 커뮤니티는 단결된 하나의 공동체라기보다는,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만을 골라 특정 커뮤니티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자기중심적 커뮤니티를 구성할 수 있다. (4) 마지막으로 연결의 편의성은 SNS가 다양한 미디어와의 조합을 통해 손쉽게 연결될 수 있는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만일 SNS가 정치인과 지지자 및 무관심층 사이의 연계성을 높이고 친밀도를 강화시켜 이들의 정치참여를 확대할 수 있다면, SNS는 정치적 효능감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지지자들의 결집과 동원, 투표율 제고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것이 SNS가 가지는 정치적 동원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가지 한계

그렇다면 트위터는 지난 18대 대선에서 이러한 동원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을까. 논문저자들의 결론은 “아니다”이다. 그 이유로 논문 저자들은 다섯 가지의 한계를 지적한다.

첫째, 공급자 트위터의 소통이 대단히 부재했다. 쉽게 말해 트위터를 통해 정보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모두 SNS를 중심으로 선거 캠페인을 진행했지만, 이러한 각각의 채널들이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나 그 채널들이 공략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타겟을 설정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자연스레 비슷한 내용만을 여러 차례 반복 게시하는 선전매체로서만 기능할 뿐, 연령, 세대, 직능 등 여러 관심분야에 포진한 다양한 유권자를 공략함으로써 한 곳으로 집결시키지는 못했다.

둘째, 트위터 사용자 규모의 한계로 인해 생산주체가 대단히 한정적이었다. 앞서 말한 1:9:90 법칙을 적용한다면 트위터 가입자를 약 600만 명 정도로 추산할 때 6만여명이 적극적 기여자로서 활동하고 약 54만명 정도가 이에 멘션을 달거나 리트윗을 하지만 나머지 540만은 방관자들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한 트위터의 타임라인은 그 정보의 방대함으로 인해 팔로워의 수가 많다면 단지 몇 분 동안에도 수십개의 트윗이 올라가고 만다. 이 과정에서 이용자들은 정보를 놓치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장덕진과 김기훈(2011)이 분석한 자료를 논문 저자들이 제시한다. 그들에 따르면 한국 트위터리언의 75%가 상위 1%의 유명인을 팔로잉하고 있으며, 유명인의 메시지가 전체 트위터 메시지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요컨대, 트위터 이용자들의 규모와 그 적극성의 정도로 말미암아 트위터가 실제로 정치사회적 연대와 동원을 이끌어낼만한 유의미한 효과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셋째, 파워 트위터리안에 의한 정보와 여론의 독점화와 부정적 이슈의 확산으로 인해 트위터는 실제로 정치적 동원과 연대를 창출해내기보다 정치적 신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일반인들의 트윗보다 파워 트위터리언들의 트윗이 더욱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트위터 안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의혹’, ‘비리’, ‘네거티브’ 등의 이슈어로 부정적 표현어들로 표상되는데, 이것은 트위터 공간 안에서 구체적인 정책과 공약에 대한 후보자 검증 과정이 아니라 상대 후보의 과거 문제와 연결지어 비판적 내용을 반복함으로써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간다고 말할 수 있겠다.

넷째, 친야권 인사의 큰 영향력으로 인한 이념적 편향성이 심화되었다. 트위터 공간 안에서는 보수 인사들보다는 야권 인사들이 더욱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말이다. 다음 표에서 트위터 내 정치인들의 영향력 순위를 살펴보면 트위터 안에서 친야-반여 성향의 인사들이 더욱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박창문, 조재욱(2013)에서 발췌

 

마지막 다섯째, 자발적 캠페인이 침체되어 있는 것 역시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지난 18대 대선은 2030세대의 투표율이 중요한 변수였고 따라서 그들의 투표율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던 선거였다. 그렇다면 야권 인사들이 투표율을 제고하기 위해 적극적은 투표참여 캠페인을 펼쳤으리란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살펴본 결과 투표 이슈 자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큰 이슈로 부각되지 못했다. 그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는 투표 이슈가 그렇게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논문저자들은 트위터에 열심히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미 투표를 할 의향을 가진 적극적 투표 참여층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투표 독려 캠페인이 정치적 효능감을 유의미하게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투표 독려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논문 저자들은 지적한다.

결과적으로 18대 대선은 높은 투표율을 보이긴 했지만 트위터에서 형성된 투표 독려 캠페인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한 SNS 상에서 전개된 캠페인 역시 세대별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빼놓아서는 안되겠다. 2040세대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투표참여를 독려하지만, 5060세대는 비교적 쉽게 만질 수 있는 카카오톡을 통해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의 투표를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부터

SNS가 갈수록 활성화되면서 SNS가 일종의 담론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SNS가 일종의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섞인 주장들을 종종 접하다보면 나는 항상 “정말?”이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물론 그런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것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느냐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 전, 모 교수가 던졌던 농담을 떠올리게 된다. “여러분, 세상은 키보드 밖에 있어요.” 우스갯소리이지만 나는 이 말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라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환상도 부지기수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바로 선거나 선거결과에 대한 환상을 품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SNS가 가져온 힘을 그렇게 크지 않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2017년 현재에도 과연 SNS가 영향력을 유의미하게 발휘할 수 있을지는 다소 회의적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 위의 현실은 온라인 속 가상에 펼쳐진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온라인의 세계는 언제든 현실을 왜곡할 위험을 안고 있고, 또 그렇게 왜곡된 현실을 마치 실제의 세계처럼 포장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누군가는 SNS를 통한 전자민주주의(?)를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SNS가 실제로 정치적 동원 효과를 가지려면, 정치적 무관심층으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해야 하고 또 그럴만한 유의미한 캠페인이나 기타 유인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무관심층이 SNS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증거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물론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다. 혹시 아는가, 미래에 정말 휴대기기를 활용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정치참여를 활성화할 수 있는 새롭고 혁신적인 계기가 마련될지. 그러나 그것은 다만 희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희망은 차라리 유보하는 게 낫다. 지금의 현실이 어떤지부터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최태준 리뷰어  xowns51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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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당’ 성패는 무엇으로 결정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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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곳이 어떤 곳이냐는 질문이 던져지면, 나는 지옥을 고르기보단 차라리 현실 정치무대를 고른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이 정치는 언제나 결과로 말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 번 실패하면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한 번의 실수 내지 잘못이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 정치의 영역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들이 정당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충분히 분분한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좌우간 정치의 영역이 대단히 혹독한 평가의 장이라는 데에서는 대부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건강한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건강한 정치가 만들어지기 위한 조건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을 때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떤 대답들이 가장 많이 나올까. 나는 개인적으로 ‘강한 진보정당의 성장’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치에서 정당 구조는 반공 이데올로기 위에서 세워진, 대단히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만을 가지는 지역 정당 체제라고 요약된다. 이러한 정당 체제 안에서 동원될 수 있는 갈등은 매우 제한된다. 최장집 선생의 주장에 따라,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란, ‘노동’ ‘노동조합’ ‘노동3권’ 등 노동과 관련한 모든 의제와 텍스트들이 강고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마치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듯한 연상효과를 가짐으로써 억압되어 온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민주화 이후 지난 3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이런 정당 체제가 오래도록 지속되지 못한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2000년 노동자-서민의 계급적 이해를 대표하겠다고 등장한 민주노동당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그 기대와 희망과는 정반대로, 초반에 성장하다가, 급기야 통합진보당으로 개편한 뒤 헌법재판소의 해산 심판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러한 민주노동당의 성장과 실패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를 통해, 2017년 현재 진보정당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정의당은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번 글에서 함께 살펴볼 논문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 교수가 함께 공동으로 연구한 「틈새정당의 전략과 제도화: 민주노동당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연구」(『한국정치학회보』 50(2), 2016)로써 민주노동당이 왜 실패했는지, 또 어떤 요인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가늠해보고 그를 통해 현재적 의미를 찾아볼 것이다.

 

틈새정당 이론
신생 정당들의 역할과 전략

먼저 간략한 개념부터 살펴보자. 틈새정당(Niche Party)이란 기존 정당체제에서 포괄되지 않는 이슈를 바탕으로 유권자를 동원함으로써 성장을 시도하는 신생 정당들을 일컫는다. 메귀드(Meguid 2007)는 틈새정당들이 성장하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다양한 이유를 정당의 전략적 결정과 정당 간의 상호작용이라는 틀을 통해 설명하려고 한다. 메귀드의 이론은 단지 정당이 점유하는 이념적 위치(Position)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기하는 정책의 중요성(Salience)과 그 이슈의 소유권(Ownership)까지 포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메귀드는 본인의 이론을 PSO이론이라고 지칭한다.

이 이론의 핵심은 틈새정당의 성공과 실패는 이념적 스펙트럼 상의 좌우 유권자를 선점하고 있는 기존의 정당들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틈새정당의 성패가 갈린다는 것이다. 기존 정당들은 틈새정당이 출현할 경우 그들의 점유율을 늘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그들이 동원하는 표들을 자신들에게 가져오도록 노력할 것이다.

기존 정당들이 틈새정당의 등장에 대응하여 취할 수 있는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틈새정당이 제시하는 이슈를 무시함으로써 그 이슈의 중요성을 떨어뜨려버리는 ‘무시전략(dismissive strategy)’이고, 둘째는 틈새정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념적 위치에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적응전략(accommodative strategy)’과 ‘적대전략(adversarial strategy)’을 취하는 것이다. 적응전략은 틈새정당과 이념적 거리가 가까운 기성정당이 틈새정당이 제시한 이슈를 흡수하면서 이슈의 소유권을 기성정당 쪽으로 가져오는 전략을 말하고, 적대전략은 틈새정당과 반대편에 있는 정당이 최대한 틈새정당의 이슈를 각인시킴으로서 유권자로 하여금 이슈의 소유권이 틈새정당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를 통해 상대편에 있는 기성정당의 지지자들이 틈새정당 쪽으로 이탈하도록 부추기는 전략을 말한다. (논문 132-133 쪽)

이러한 PSO이론은 분명히 틈새정당의 성장과 성공 및 실패에 대해 일관된 분석틀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점은 분명히 있으나 논문의 저자들은 이러한 이론이 틈새정당의 능동적 활동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노동당을 틈새정당이라 할 때, 그들의 성공과 성장에는 분명히 민주노동당 자체의 능동적인 전략과 선택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의 성장은 적극적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건설 운동이 결합된 결과물이며, PSO 이론을 통해 설명하기 어려운 난점이 존재한다. (논문 134쪽)

논문 저자들은 메귀드의 틈새정당 이론은 비판적으로 보며 틈새정당을 수동적 행위자가 아닌 능동적 행위자로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틈새정당이 성공할 수 있는, 즉 득표를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은 중화(Neutralization) 전략과 유인(Inducement) 전략이다.

중화전략이란 틈새정당이 제기하는 이슈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정책적 차별성을 강화함으로써 기성정당이 이슈를 선점하려는 것을 막고 기성정당 지지 유권자들을 틈새정당 지지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반면 유인 전략이란 이념적 지형 반대편에 위치한 기성정당이, 틈새정당이 제기하는 이슈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도록 만듦으로서 이념과 정책상 대비를 선명하게 하도록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요컨대, 중화-유인 전략이란 이슈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그를 통해 정책적 차별성을 드러내는 전략을 말한다.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전략을 제대로 수행했는가? 다음에서 살펴볼 정당의 제도화 수준이 심각하게 낮았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할 수 없었고 또 집행할 수도 없었다.

 

정당의 제도화, 그리고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이 실패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정당의 제도화 수준이 대단히 낮았다는 데 있다. 파네비앙코(Panebianco 1988) 및 랜달과 스바샌드(Randall and Svasand 2002)가 제안한 정당 제도화 수준을 평가하는 네 가지 지표는 다음과 같다. ① 당내 조직적 체계성의 정도 ② 당 지도부의 의사결정 자율성 정도 ③ 구성원 사이에 지향하는 가치의 동질화 정도 ④ 유권자들로부터 얻는 지속적 실체성의 정도가 그것이다.

“높은 제도화 수준을 보이는 틈새정당일수록 선거경쟁에 참여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고 논문저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 정당의 제도화 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그 정당의 성패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정당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언제나 선거로 결정지어지기 때문이다.

논문 저자들은 민주노동당의 제도화 수준을 앞서 제시한 네 가지 기준에 따라 비판한다. (1) 당내 조직적 체계성의 정도는 당내 계파 및 정파 갈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2) 당 지도부의 의사결정 자율성 역시 집단지도체제로 변화하면서 극히 취약해졌고 (3)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가치적 동질성이 대단히 극심했으며 (4) 마지막으로 이러한 경향으로 말미암아 유권자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대중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비판의 요점이다.

논문 저자들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상세한 지표들을 제시한다. 일례로 민주노동당이 조직으로서 체계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단지 당내 분열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능력 있는 정당으로서 신뢰를 보일 수 있는지의 여부 역시 중요한 요인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책 개발비는 아래 표에서 보다시피 대단히 낮은 비율을 보이는데, 이는 2005년 당시 한나라당의 정책개발비 비율이 20.6%에 이르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단히 낮은 수치이다.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2016)에서 발췌

또 하나,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민주노동당이 과연 정당으로서 제기한 이슈들을 효과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물은 아래 표에서 보다시피 지지율 하락으로 드러났다.

정재관, 김인원, 정은아(2016)에서 발췌

 

진보정당의 현재와 미래?
우리 안에 던져졌다는 조건, 거기서부터

민주노동당의 실패는 우리에게 여전히 큰 시사점을 안겨준다. 그것은 단지 한국의 정당 구조 안에서 진보정당이 살아남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충분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어야 함을 말한다. 논문 저자들은 브라질 노동당의 사례를 들며 결론을 짓는다.

논문 리뷰를 끝마치며, 나의 사견을 잠깐 덧붙여보겠다. 나는 거의 습관처럼 ‘능력 있는 정당’에 대해 말하곤 한다. 민주주의는 유능한 정당, 유능한 정부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해결해줄 마법사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해결해줄 유능한 정부와 정당을 우리 손으로 고르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의미가 다소 희석되어 오늘날에는 마치 ‘당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완성이자 실현인 것처럼 주장되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나는 진보정당이 보다 강하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충분히 수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또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민주노동당의 실패에서 우리는 한국 정당 체제의 악랄함(?)과 경직성을 규탄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을 갖춰가도록 역량을 키우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본다. 다양한 정당이 있고, 또 그럴 때에라야 민주주의는 비로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틈새정당이 유의미한 경쟁자로 성장하는 것은 꽤나 가치있고 고무적인 일이다. 거대한 반공보수주의가 비록 여전히 가로막고 있지만, 지난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이러한 정당 구조는 또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지금 상황에서 정의당이 처한 상황이 대단히 유리하고 또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정의당은 그 어떤 때보다 성장의 적기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정의당 내부에서의 잡음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내부의 상황이야 알 길이 없으니 공식적인 언론 보도만을 신뢰할 뿐인데, 여러 가치 의제들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잡음인 것 같다.

대중성을 가지지 못한 정당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앞서 제시했던 정당 제도화의 네 가지 수준 중 마지막, 유권자들 사이에서의 지속적인 실체성은 유권자들이 그 정당을 얼마나 지지하느냐의 여부이다. 대중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은 선거에서 질 수 밖에 없고 또 유의미한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나는 여전히 아주 미약하나마 희망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 희망이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조금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으로 눈을 돌리자면, 그 희망이 보다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틈새정당의 성장이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희망은 항상 ‘유보적’이다. 진보정당이 성장하여 당당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그 때가 언제쯤 올 수 있을까?

최태준 리뷰어  xowns51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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