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학’ 이후의 한국문학은?

문학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와 관계한다. 그리고 ‘공동체’ 모델은 그 시대가 지향하는(혹은 매몰되어 있는) 담론에 따라서 그 양상을 달리한다. 고봉준 경희대 교수는 「근대문학과 공동체, 그 이후: ‘외부성의 공동체’를 위한 시론」(『상허학보』, 33, 2011)을 통해 근대문학과 공동체의 관계를 정리하고, ‘공동체’ 모델의 변모양상을 시대적인 맥락과 작가의식을 통해 고찰한다.
‘문학의 공동체’
두 개의 범주
우리는 문학 그리고 공동체와의 관계 문제를 사유할 때, ‘문학과 공동체’ 그리고 ‘문학의 공동체’라는 두 범주를 고려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 ‘공동체 내부에서 발화되는 문학’을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공동체’라는 특정한 한계조건에 무게가 실리고 문학의 ‘(공동체에 대한)종속성’이 강조된다. 반면 ‘문학의 공동체’라는 말을 통할 경우, ‘공동체’를 표상하는 문학의 생산적 기능이 살아난다.
“‘문학의 공동체’라는 문제의식에서 보면 공동체는 문학이 소재로 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필자는 문학 그 자체가 ‘목적’으로서 그 내적인 논리가 인정될 수 있는 후자의 경우, 즉 ‘문학의 공동체’를 각각 내부성의 공동체와 외부성의 공동체로 구분하고 이를 근대문학과 2000년대 문학의 변모과정을 경유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한국문학이 내부성의 공동체에서 외부성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사유이며 기록이다.
‘민족’ 공동체
: 민족, 국민, 고향
유럽의 근대문학이 “중세의 보편언어인 라틴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다양한 민족어들이 등장하는 과정”을 통하듯이, 근대문학의 성립은 민족과 국민 그리고 국가가 동일선상에 놓여지는 “근대적 삼위일체”의 역사에서 출발한다. 한국문학사에서 근대문학의 ‘출발’로 여겨지는 이광수의 <무정> 역시 ‘계몽’을 통한 ‘민족’ 공동체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일반적인 근대문학의 성립과정을 답습하고 있다. 좌 · 우나 진보 · 보수와 같은 이념을 막론하고 그 시기 한국문학은 “민족국가적 주권의 확립과 확장이라는 단일한 목표의 실현에 기여”한 것이다.
‘민족’이라는 ‘공동체’에의 지향에 근거한 개화기 ‘민족문학’은, 중일전쟁 이후에 ‘국민문학’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이는 ‘민족’이 일본이라는 ‘제국’을 기준으로 지방화 되는 과정에 따른 것이다. “민족문학에서 국민문학으로의 전환은 ‘제국/지방’의 담론을 매개로 했을 때 가능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국민문학’은 “‘동양’, ‘대동아’, ‘일본’등의 새로운 공동체상을 제시하여 ‘민족’의 범주에 붙들려 있는 식민지인들을 ‘국민’으로 재영토화하는 과정의 계몽적 통합장치로 기능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문학이 국민문학의 잠재태”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민문학’을 통한 공동체성의 확립은, 일본의 ‘민족(국가)’주의에 스스로를 편입시키는 방향을 따를 뿐 여전히 민족담론을 통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친일문학은 ‘반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의 ‘민족주의’를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다.
“문학에서 국민의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신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국민이라고 하는 의식, 따라서 자기 자신 한 사람으로는 의미도 가치도 없는 존재이며, 국가에 의해서 처음으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는다고 하는 자각으로부터 문학상의 국민의식은 출발한다. 국가와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가치를 살리는 관계로 확실히 묶여질 때, 거기에 처음으로 문학상의 국민의식은 성립하는 것이다.”(최재서)
“민족문학은 한 민족을 통일된 민족으로 형성하는 민주주의적 개혁과 그것을 토대로 한 근대국가의 건설 없이는 수립되지 아니할 뿐 아니라(…) 그러면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는 투쟁을 통하야 건설될 문학은 었더한 문학이냐 하면 그것은 완전히 근대적인 의미의 민족문학 이외에 있을 수가 없다.”(임화)
그런 점에서 최재서의 친일적인 주장과 임화의 민족문학론은 각각 ‘국민’ 그리고 ‘민족’이라는 하나의 실체적인 공동성,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원리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문학=민족문학’이라는 등식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는데, 특히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4ㆍ19세대의 주체적인 역사의식과 맞물려 ‘민중’이라는 새로운 주체상이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투쟁에서 핵심기능을 수행했다. 또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황폐화되어 가는 ‘농촌=고향’이라는 공동체를 생산해내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과 문순태의 『고향으로 가는 바람』은 ‘유토피아’로서의 ‘고향’ 공동체를 구성하여, 탈향과 귀향의 서사를 그리고 있다.
이렇듯 1970년대의 민족담론은 ‘민중’ 그리고 ‘고향’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외부에 대한 방어와 저항의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여전히 ‘동일성’의 원리를 따른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 내부에 대한 ‘억압’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외부에 대항하는 공동체의 방어가 내부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기능을 한다는 사실은 그 진보적 기능의 그림자에 가려져 왔다. 외부의 힘에 저항하는 구조의 이면은 민족 동일성, 통일성, 안보의 이름으로 내적 차이를 억압하는 지배력이다.”
1990년대 이후
‘외부성의 공동체’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학의 ‘민족’ 공동체가 해체되는 경향을 살필 수 있게 된다. 이는 “한국문학이 더 이상 ‘한국’이라는 문학적 영토를 ‘민족’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바로 이 변화의 지점을,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사유 방식, 레비나스-블랑쇼-낭시로 이어지는 철학적 계보가 그리고 있는 존재론적 층위의 공동체를 통해 사유하고자 한다. 80년대까지 ‘문학의 공동체’에서 지배적이었던 ‘동일성’의 문제가 ‘내부성의 공동체’라면, 9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 포착되는 ‘사인성’의 현상은 ‘외부성의 공동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블랑쇼-낭시 철학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타자’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란 자아(주체)의 동일성의 원리로 결코 포섭되지 않는 ‘낯선 자’이며, ‘공동체’란, 익명적 존재의 ‘있음’ 그 자체의 ‘실존적’ 사건을 의미한다. 블랑쇼 역시 ‘공동체’를 내가 ‘나’의 바깥과 만나는 ‘외존(外存)’의 체험으로 보고 있다. 또한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에서, ‘나눔’으로서의 ‘공동체’를 말하는데, 그에 따르면 “‘더불어라는 것’은, 내부가 공유된 ‘내부’를 형성하지 않은 채 내부로서 외부가 되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공동체’란 서로의 실존을 나누는 ‘함께-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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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특별히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와 최민석의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두 소설에서 2000년대 한국문학에서 ‘외부성의 공동체’가 실현되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서울시티투어버스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차 안에는 운전기사가 평생의 꿈이던 히말라야의 후예 구씨와, 내륙국가에서 태어나 바다를 한번도 못 본 칭기즈 칸의 후예 박씨, 그리고 키르기스스탄 전사의 족보를 자랑스럽게 이름에 달고 있으나 일시적으로 포박당한 나 ‘유리스탄 스타코프스키 아르바이잔 스타노크라스카 제인바라이샤 코탄스 초이아노프스키’가 함께 있다. 아, 빠듯한 직장생활에 시달려 그토록 좋아하는 주문진 회 먹을 여유조차 없었다는 운전자 김씨, 원더걸스의 이름을 울먹이며 부르는 중국소년과 그 옆에서 질세라 2PM을 외치는 태국소녀, 그리고 드라마 촬영지라며 마냥 들떠 있는 중국인 관광객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괴상한 조합이 한곳을 향해 달리고 있다.” (최민석,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중에서)
이렇듯 이방인(타자)들의 공동체가 ‘우연적’으로 형성되는 소설적 사건은, ‘안’과 ‘밖’의 경계 즉, 동일성 원리의 경계를 허무는 하나의 실천이자 외부에 대한 개방적 움직임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탈근대적 공동체의 표상”으로서의 ‘타자’의 등장은 소설쓰기에서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문제, 다시 말해 타자를 ‘재현’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또 하나의 무거운 시사점을 안겨준다.
이단비 리뷰어 ddanddanb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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