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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19세기 말, 중국이 서양의 무력 침략에 굴복한 이후 그들이 오랑캐라 불렀던 서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 수용은 어떻게 변화해갔는지 등의 문제는 중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이 시기에 활동한 저명한 사상가인 옌푸(嚴復, 1854~1921)는 중국인 최초로 해외 유학을 떠나 서양문물을 접한 중국인이자, 그렇게 배운 서양의 문화를 중국에 가져와 정착시키려 했던 학자였다. 옌푸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중국과 서구의 문물을 모두 잘 이해하고 있던 인물임과 동시에 중국 내 주류 사회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이 서양을 대하는 태도가 혼란스럽게 변화하던 과도기적 시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양일모의 논문 엄복: 서양에서 새로운 학문을 구하다 (『동서인문』 , 6, 2016)는 옌푸라는 한 지식인의 외국 경험을 사상적으로 분석하며 그가 살던 중국 사회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옌푸(嚴復, 1854~1921)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서양의 충격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 배우기 & 중국인 유학생 파견

중국은 야만적인 오랑캐라 무시했던 서양에 대한 인식을 아편전쟁 이후 새로이 했다. 부분적으로 서양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하고, 서양의 강한 군사력을 인정하며 그들의 과학기술을 배우려는 태도를 취했다. 이는 중국의 입장에서 매우 큰 변화였는데, 1876년 타국에 상주하는 외교관을 영국 공사로 최초 파견한 사건이 이런 변화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과거 중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의 문화 내에 포섭되는 국가들과 조공체제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타국과 문제가 생겼을 때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흠차대신을 파견보냈던 것이 전부였다. 이에 타국에 상주하는 근대적 의미의 외교관을 정식으로 파견시킨 것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더불어 중국 내부적으로도 외국어 학습을 위한 경사동문관(1862), 서양을 의식하여 그들에 대항할 군사 함대와 대포를 만들기 위한 강남기기제조총국(1865) 등이 설치되었다.

외국으로 학생을 직접 내보내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일 또한 비슷한 시기 추진되었다. “청조는 1871년 12세에서 16세까지의 학생 30명을 선발해 4회에 걸쳐 120명을 국비로 미국에 보내 15년 동안 공부하는 계획을 수립”(8쪽)하고 이듬해 30명의 학생들이 미국으로 떠났다. 중국의 유학생 파견은 중국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서양의 뛰어난 기술을 모두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양무운동의 영향 하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유학생 파견은 국방 관련한 기술의 필요성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학생들은 주로 군사학과 항해술, 제조술을 배우게끔 배치되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 하에, 옌푸의 영국 유학 기회는 푸젠 성에 있는 푸저우 선정국(福州船政局)이라는 조선소에 1866년 초빙된 외국인 근로자들이 1874년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만들어졌다. 옌푸가 다닌 선정학당은 군함을 조종하는 항해사나 배를 만드는 조선공을 양성하는 일종의 기술학교로 조선술, 항해술을 공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와 같은 외국어 공부 및 중국의 유교 학문 역시 함께 공부할 수 있던 곳이었다.

옌푸는 “5년 동안 영어와 항해술, 항해술에 필요한 수학, 물리학, 화학, 지질학, 천문학 등 기초적인 자연과학 과목을 공부”하고, 청조 황조의 지침을 싣고 있는 『성훈광유聖訓廣諭』, 효도를 강조하는 『효경』 등 유교적 이념을 담고 있는 서적 역시 강독했다.

그러나 기술 교육을 담당한 외국인 근로자들이 귀국한 이후 조선소와 학당 운영이 어려움을 겪자 일부 학자가 선정학당 출신 학생들을 유학 보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청 정부는 이런 의견을 받아들였고,1877년 3월 31일 옌푸를 포함한 영국으로 갈 학생 12명, 프랑스로 갈 학생 16명이 배를 타고 출발했다.

 

한 중국 지식인의 외국 경험기: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이상적 사회 경험

국비 유럽 유학생에 선발된 옌푸는 1877년 영국에 도착, 같이 간 6명의 학생과 함께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리니치 해군대학(Royal Naval College)에 입학해 근대식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중국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던 옌푸지만 영국에서 접한 과학기술은 그에게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옌푸가 유학하던 당시의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하던 시기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주의가 최고도로 발전한 시기였다.

그의 유학생활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한 당시 영국 주재 중국인 공사였던 곽승도의 기록에 따르면 옌푸는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영국의 선진적 해군 교육을 배울 수 있던 그리니치 해군대학에서 “수학, 역학, 화학, 전기 등 자연과학을 중심으로 구성된 교과목을 학습하면서 서양의 근대적 학문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15쪽) 뿐만 아니라 그는 해군전술, 해상전 공법 및 무기, 진지구축 등의 기술과 전술 역시 공부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옌푸의 유럽 경험은 단순히 자연과학 및 기술의 습득에 그치지 않았다. 일례로 1878년 7월 프랑스에서 개최 중이던 파리 만국박람회 관람을 통해 옌푸는 파리에서 정비된 근대 도시의 도로와 교통 체제, 배수 시설 등을 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근대적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공회’라는 합의를 도출해내는 일종의 민간 사회의 조직과 구성 원리”에 주목하기도 했다.(18쪽)

19세기 성숙된 자본주의의 전시장이라 할 수 있는 만국박람회를 경험하며 옌푸는 “조리”가 있는 서양의 뛰어난 점을 진정한 의미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여기서 옌푸가 말한 “조리”는 영국에서 학습한 자연과학이 기초가 된 것으로, 서양인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이끌어가는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까지 확대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유학 경험은 귀국 후 중국에서의 경험과 결합하여 옌푸의 행보, 즉 서양에 대한 부분적 수용을 비판하며 서양의 핵심을 진리의 탐구로 여기고, 공익의 실현 및 자유 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자신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번역자의 길:
불합리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청조 말 중국이 서양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과학기술을 배우려는 태도를 취한 건 사실이지만, 이를 중국이 모든 영역에서 서양의 우월함을 인정했다는 뜻이 아닌 점은 주의해야겠다. 청조는 군사적인 방면에서 서구 열강에 뒤쳐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했기에 서양의 무기 제조 기반이 되는 과학기술의 수용에는 긍정적이었지만, 정치와 도덕의 영역에서는 여전이 중국이 우월하다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옌푸의 관점에서 1860년대 시작한 서구 문화를 받아들여 강해지자는 양무운동 역시 서양에 대한 부분적 수용에 그칠 뿐이었다. 반면 옌푸는 영국 유학 시절 수학한 자연과학 공부와 더불어 서양 세계가 구성되고 운영되는 “조리”라는 원리에 관심을 두었다. 그가 보기에 서양은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적 태도, 공익의 실현 정신을 포함해, 자유가 사회를 조직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었기에 경제적으로 부를 획득하고 군사적으로 강대해질 수 있었다.

논문의 저자는 옌푸의 서양에 대한 인식, 중국에 대한 비판의식은 그가 중국으로 귀국한 후 겪은 여러 문제점이 유럽에서의 경험과 비교되며 더 명료하게 갈고 닦아진 것이라 주장한다. 옌푸는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왔지만 중국 해군 정책의 주요 업무에서 계속 배제되었다. 이는 중국이 국비로 외국 유학을 보내는 정책을 시행하던 초기가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대부들이 중화주의적 사고방식을 고수하던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권력층의 자제들은 중국에 남아 과거시험을 보길 선호했고, 초기 국비 유학생들은 가정 형편 등의 사정으로 과거시험 준비에 매진할 수 없었던 학생들이 주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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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푸가 번역한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좌),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우)  출처: 한중교류재단 http://www.withchina.org/foundation/board_XELV01/4178

옌푸가 유학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중국의 핵심 권력은 여전히 과거시험을 통과한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옌푸는 영국에서 배워온 지식이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그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자리를 얻지 못했고, 유럽에서 배워온 지식은 과거시험에 도움이 되질 못해 시험에서도 번번이 낙방했다. 저자는 옌푸가 조국 내에서 그 자신이 마주한 문제점을 서양과 대비하는 방식을 통해 중국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22쪽)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스펜서의 『사회학 입문』, 밀의 『자유론』, 스미스의 『국부론』 등 서양 근대 사회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다수의 저서들을 중국에 소개한 번역가로도 유명한 옌푸의 사상은 그의 번역서에서 더 잘 드러난다. 자신의 의도에 맞추어 편집되고 의역, 해설이 많이 추가된 형태로 오늘날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옮기는 번역 방식과는 매우 다르다. 번역자의 개입이 많다는 점에서 옌푸의 번역서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분석된다.

일례로 옌푸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번역하며 원문의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설명한 내용을 “벌을 재판하는 일에서 현명한 자가 못난 자를 다스릴 수는 있지만, 귀한 자가 천한 자를 다스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유럽의 입법은 법관과 죄수가 평등한 지위에 있다”라며 원문의 내용을 상당히 벗어난 의역을 보여준다.(23쪽)

저자는 사법제도에 관해 중국과 서양의 근본적 차이를 지적한 이 번역은 옌푸가 영국 법원을 방문하며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했던 경험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설명한다. 정리하면, 옌푸가 주장한 “자유와 평등”의 가치, “중국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유교적 이념에 의한 구속과 계층적 차별제도에 대한 비판” 등의 사상에는 그가 유럽에서 지낸 경험의 이상과 귀국 후 중국에서 마주한 현실의 벽 사이의 고민에서 온 결과물인 것이다.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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