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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한국도 그렇지만 중국 또한 과거 일본군에 의한 무참한 성폭력의 기억을 간직한 나라다. 일본군이 진주한 곳에서는 어김없이 이와 같은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것은 동아시아 전체의 아픈 과거이기도 하다. 중국 위안부 성폭력 피해 실태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에 그리 잘 알려져 있지 못한 가운데 이선이(경희대) 씨가 일본군의 성폭력에 대한 일고찰: 중국 산시山西성 피해자의 구술을 중심으로(『사학연구』, 120, 2015)를 발표해 이해를 돕고 있다.

산시 성 위현의 아름다운 산간마을의 모습.

산시 성 주민들은 1940년 8월 20일부터 1941년 1월 24일까지 허베이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 공산당의 국민혁명군과 일본 제국 육군 사이의 전투 백단대전百團大戰의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중국 팔로군이 일본 제국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 광산, 수송 통로를 기습 공격했으며 120사단, 129사단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전투는 100개 연대가 참여했다고 하여 백단대전이라고 부른다.

피해자들은 전쟁이 본격화되기 전 일본군이 침투해 들어온 1939년과 점령과 탈환을 반복하며 전투가 엎치락뒤치락하던 1941년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41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잔인하고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했다. 논문 228쪽에 실린 지도에서 보듯 산시 성 타이위안과 양취안의 접경 지역에 있는 위孟 현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붉은 점). 이 씨는 관련 자료들을 모두 모아 개별 사례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당시 마을 원로는 증언했다.

산시 성과 허베이 성의 접경에 위치한 위현.

 

진격하는 팔로군.
하나는 주변 마을에 할당되어 가족이 돈을 받고 인신공양처럼 모인 여성들, 두 번째는 ‘토벌’ 등으로 다른 지역에서 연행되어 와서 가족이 인질금을 내고 해방되는 경우, 세 번째는 닥치는 대로 납치 감금한 경우다.(214쪽)

피해자와 관계자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필자는 이를 다시 “첫째, 거점에 만들어진 ‘강간소’에 마을의 안전을 위하여 희생양으로 제공된 피해자들, 두 번째, 일본군과 괴뢰군이 무작위로 행한 납치 강간, 세 번째, ‘한간漢奸’의 개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지명하여 이루어진 피해, 네 번째, 항일(공산당) 활동에 대한 고문과 복수 등”으로 나눈다.

다음은 중국인 할머니들이 증언한 개인별 구체적인 증언이다.

피해자 柴玉花는 자신이 감금된 곳과 도망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밤이 되자 일본군이 나의 집으로 찾아와 마을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나를 노새의 등에 싣고 작은 산촌의 한간의 집에 가두고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했다. 나에게 도망하지 못한다고 했으며 만약에 도망가면 우리 가족 전부를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나는 일본인이 가족을 살해할까 두려워서 그곳에 있었다.’ 또 다른 사람 楊喜何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의 친정은 河東촌 내에서 羊馬山으로 향하는 외길을 끼고 경비대가 있는 포대의 맞은편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일본군 두 사람이 집으로 들이닥쳐 강간, 차례로 밖에서 지키면서 강간 (…) 시댁으로 돌아왔으나 부모님의 상처와 일본군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왔다. 강간당할지 알면서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 달 간격으로 친정과 시댁을 오가는 생활 (…) 부모님과 동생들을 일본군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야만 했다.’

이는 비교적 소수의 피해 사례로 ‘강간소’ 등의 거점 밖에서 자택 등에서 피해를 입은 경우다.

그 외 대다수는 감금 피해자들이다. 감금 기간은 길게는 2년부터 짧게는 10여 일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군 다수’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5명은 특정인에게 ‘독점적’으로 강간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 5명은 피해 기간이 장기간이다.

증언에서 ‘일본군 반장’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왔는데 이는 중국인 마을 안에 있는 경비대주둔지에 교관으로 상주한 소수의 하사관을 가리킨다. 이들은 마을 밖 일본군 토치카 거점에 있는 상관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곳의 최고 권력자로서, “나쁜 짓은 무슨 짓이든 했다”고 한다.

증언을 보면 曹黑毛는 “일본군 정보반장이 무리 속에서 맘에 드는 여자들을 골라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끌려갔지만 사람들이 무서워서 어쩌지 못하였는데 강간 후 괴뢰군에게 넘겨 進圭거점으로 데려가 요동에 가두었으며 정보반장이 매일매일 찾아와 자고가기도 하였다”는 식이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촌장이 나서서 위안부로 나설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우리집과 마을에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며 촌간부들이 매일 우리 집으로 와서 설득하여 어쩔 수 없이 허락”하거나 “일본군이 격노하여 그냥두지 않겠다고 협박, 더 이상 끌 수가 없어서 성격이 내향적이고 말수가 적은 侯金良을 선택하였다”(238쪽)는 식이다.

일본군은 주민을 가옥에서 내쫓고 마을 안에 여성을 상시 두는 장소를 만들게 했다. 말 매매를 했던 楊福手가 장남인 4형제의 집이 정원이 넓고 방이 많아서 그 집이 접수되어 사용되었다. (…) 상시 수명의 여성이 있었으며 외출은 자유였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여기에 여성은 모두 다른 마을에서 데려온 자들이었다. (…) 여성들을 산위 포대로 데려가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好看, 二毛, 二妹로 불린 여성들을 기억하며 노새에 실려 가는 그녀들은 무표정으로 포기한 모습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과 팔로군도 납득한 가운데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일본군이 사라진 후 무사히 자신의 마을로 돌아갔다.(241쪽)

결론에서 필자는 “감금 기간과 폭행에 관여한 일본군의 인원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폭행은 일본군에게 협조했던 ‘한간’들과 괴뢰조직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전쟁 이후 석방된 상황을 보면 “일본군이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하거나 마을의 유지회維持會 등의 괴뢰조직을 거쳐서 행하는 식으로 여성들의 석방을 위해서는 금전이 거래되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금전적으로 어려워서 구출할 수 없는 경우는 몸이 완전히 망가진 후에 버려졌다”는 증언도 적지 않게 보인다.

일본군의 성폭력을 겪어낸 피해자들에게는 심각한 후유증이 남았다. 후유증은 육체에 남겨진 상흔을 넘어 2차, 3차 정신적, 사회적 피해를 낳으며 피해자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항상 가해자들에게 보다 피해자들에게 더욱 잔인한 오욕이 뒤따르는 특징을 보이는데 중일전쟁기간에 일본군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들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251쪽)
위의 표 3개는 논문에서 필자가 표로 작성한 77명 중 25명에 대한 구체적 피해 내용들이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와 시간, 형태부터 이후의 삶에 남겨진 후유증의 종류까지 살펴볼 수 있다.

 

강성민 리뷰위원  review@bookp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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