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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법치주의 지수(2005). 녹색에 가까울수록 법치주의를 높게 실현하고, 적색에 가까울수록 그러하지 아니하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logofinale푸틴 지배체제와
현대 러시아의 문제

구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기를 겪는 듯 하다가 푸틴의 집권으로 인해 오늘날에는 거의 공고한 권위주의 국가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 무엇 때문에 실패하였는가? 민주주의를 공고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꿔 질문하면, 무엇 때문에 러시아는 권위주의로 퇴행하였는가.

오늘날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평등을 한 축으로 하고, 그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또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법의 지배’를 또다른 한 축으로 해야만 한다. 법의 지배가 곧 민주주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법의 지배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어렵다. 정치적 평등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라 할지라도 규율과 규칙은 필수적으로 필요하며 또 그러한 규칙에 복종하는 시민이 있어야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법의 지배(rule of law)’란 법 그 자체의 신성성과 불변성, 혹은 절대성 따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행사를 위한 요건과 근거들을 마련하고 그럼으로써 권력이 효과적이고 공정하게 집행되도록 강제하기 위한 장치다. 법의 지배는 달리 말하면 ‘지배(rule)’의 편의성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전횡과 독단을 방지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근대국가의 견제장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본 고에서 살펴볼 논문은 이선우 교수의 민주주의 공고화에 있어 ‘법의 지배’의 우선성: 탈공산 러시아의 사례(『한국정치학회보』 51(1), 2017.3, 49-72)로써, 탈공산 러시아의 사례를 통해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기 위해 법의 지배가 왜 필요한지를 고찰하고, 또 그를 통해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사이의 관계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려 한다.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
충돌의 양상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미묘해서, 양자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 ‘사법의 정치화(politicization of justice)’라 불리는 현상을 야기하며 종종 충돌하곤 한다. 종종 법의 지배는 민주주의의 수호신을 묘사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훼손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법은 어떻게 작동하나?

‘법’은 지배할 수 없다. 법은 종이 위에 쓰여진 글자에 불과하며 글자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이다. 쉐보르스키(2008)는 ‘법의 지배’라는 용어를 두고 “사실에 대한 기술로서도 설득력이 없으며, 더욱이 설명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라고 말한다.[1] 물론 이에 비판하는 이들도 역시 있기는 하나, ‘법의 지배’ 개념은 여전히 논쟁적인 개념 중 하나라고만 요약해두도록 하자.

그렇다면 법은 실제로 공정한가? ‘법’이 그 자체로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오히려 법은 수많은 권력이 개입하는 공간이며, 다원적 이익들이 충돌하는 회랑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였던 트라시마코스가 지적하듯, “법은 강자의 도구”이며, 나아가 그것은 사회 세력 간의 힘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세력 간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이 유용한 것으로 인식될 때, 비로소 제도적 균형이 이루어지며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2]

다른 한편, 현대 민주주의는 대단히 복합적인 구성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오랜 전통(?)은 정치적 평등 위에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글자 그대로 ‘인민의 지배’를 뜻하지만 사실 이러한 정의는 인민이 어떻게, 왜 지배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공허한 정의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분분한 논의가 있을 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통일된 정의를 내리기보다 각 정치체제 사이의 특징을 비교함으로써 귀납적으로 공통된 몇 가지 특질을 찾아냈을 뿐이다(Rose 2009, 12).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한 고전적인 논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보자면 최소주의적 정의와 최대강령적 정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쉐보르스키 등(Przeworski et al. 2000)은 사회적 안정이나 경제적 번영 등이 민주주의의 전제로 고려될 때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 추구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의회 및 행정부 수장을 선출하는 정기적인 선거시스템의 존재 유무로서 민주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최소주의적 민주주의, 다시 말해 선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권력자가 선거 이외의 기간에 독단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와 유인이 있다면 민주주의는 위협받게 된다. 따라서 민주적 과정들이 안정적으로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법의 지배는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사례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로, 퇴행의 대표 사례

법의 지배를 먼저 확립한 후에라야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느냐, 혹은 ‘민주주의의 습관화’를 통해 시민사회를 성장시킴으로서 민주주의를 공고화시킬 수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선적인 경로가 없다는 답변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선거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고 하더라도 해당 국가가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로 나아가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미 정당이 존재하고, 정당 간 경쟁이 존재하며, 또 시민사회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 3의 민주화 물결 때 민주주의로 나아갔던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 중 많은 수가 권위주의로 퇴행한 것은 시민사회나 혹은 정당체계의 미발전이 신생민주주의 국가의 권위주의적 퇴행을 낳은 결정적 요건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3]

러시아는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다가 권위주의로 퇴행한 대표적인 사례다. 옐친 대통령 시기(1993-1999)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꽤 양호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4] 또한 집권 후반기에는 정당의 발전 가능성 역시 있었고 시민사회 역시 꽤 발전한 상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논문 저자는 옐친 대통령 시기에 ‘법의 지배’의 원칙이 관철되고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한다. 일차적으로 헌법과 법률상 대통령이 사법부에 대해 과도한 통제력과 제도적 우위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를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사법부의 독립인데, 만약 대통령이 제도적으로 사법부보다 우위를 점한다면 법은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러시아의 경우 사법부를 둘러싼 각각의 이해관계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또 다원화되어 있었으므로 이것을 일종의 과도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법의 지배가 확립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항상적으로 권력에 대해 견제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때라야 법의 지배가 확립된 것이지, 만약 지지율이나 임기 등의 변수에 의해 유의한 영향을 받는 상황이라면 법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이는, 만일 사법부에 대한 강하 장악력을 가진 권력이 등장할 경우 국가 내 정치적 경쟁을 허물고 정례적 선거마저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5]

결과적으로 푸틴 정부가 출범하면서 허약한 법의 지배는 사실상 무너졌다. 푸틴은 새로운 법을 제정하면서 정당 등록 요건을 대폭 강화하고, 언론과 시민단체들에 대한 재정적, 행정적 검열과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사법기관을 적극적으로 동원했고, 통제된 언론들은 급속도로 푸틴에 대해 압도적인 보도 시간을 할애하는 등 불공정한 정치적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2007년 12월 치러진 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단합러시아당은 315석을 획득하여 개헌선을 돌파하였고, 이것은 더 이상 러시아의 선거제도가 집권당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 경쟁의 장으로 기능하지 않음을 뜻했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법의 지배의 중요성
준법정신보다는 사법의 독립성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대단히 복잡한 관계이며 어떤 것이 더 우선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사실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논문 저자는 “정당체계와 시민사회가 사법권력의 공정성과 투명성, 책임성을 제도화시킬만큼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 국가의 시민적 자유와 권리는 언제든지 위축될 수 있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하며 글을 끝맺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과정에서도 법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권력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장치가 없을 때, 권력은 언제든지 자신을 견제하려는 세력에 대해 적대적인 칼날을 세우고 달려들 것이며 또 그것은 많은 경우 좋은 결과보다는 재앙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법의 지배를 두고 단순한 준법 정신이나 법 그 자체를 지켜야만 한다는 의무적 당위성만을 설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정치체제를 이루는 요소로서의 법의 지배는 시민들의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가 얼마나 잘 독립되어 있는가, 또 그들이 얼마나 사회적 책임성 하에 노출되어 있는가, 그들이 효과적으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논문 저자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그 공고화에 있어서 정당체계나 시민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을 수정하여 법의 지배를 먼저 확립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전략이 신생민주주의 국가들에게 긍정적일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1] 애덤 쉐보르스키(2008), p.47

[2] 스티븐 홈즈의 주장이다. 자세한 것은 애덤 쉐보르스키(2008), p.51 참조.

[3] 이선우(2017), pp.55-56

[4] 프리덤하우스의 평가에서 대부분 3점대를 기록하였다.

[5] 이선우(2017), p.59

최태준  xowns518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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