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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2016년 5월. 강남역 인근에서 젊은 여성이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살인’의 배경에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여성혐오’가 자리한다는 점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은 큰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으며, 다양한 형태의 추모 행렬을 통해 애도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계기로 ‘여성혐오’를 둘러싼 사회문제에 대하여 온라인상에서는 대립각을 세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구분하는 것을 언짢게 여기는 시선과, 이 ‘죽음’이 ‘나’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공감 속에서 두려움을 표출하는 시선이 첨예하게 맞부딪친 것이다. 논쟁은 실로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일상 속에서 자행되는 ‘여성혐오’를 문제시하는 모든 수사들이 ‘꼴페미’, ‘프로불편러’와 같은 말로 조롱되기에 이르렀다. 정인경은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인터넷 여성혐오」(『페미니즘연구』, 16, 2016)에서 오늘날 인터넷 매체 속에서 다뤄지고 있는 여성혐오적 발언들이 ‘포스트페미니즘’ 이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포스트페미니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을 밝히고 ‘성차의 윤리’를 통하여 ‘혐오’를 극복하고 공생을 모색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논문으로 쓴 리뷰 “‘위대한 거짓’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여성혐오” 가 있다-편집자]

‘포스트페미니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을 밝히고 ‘성차의 윤리’를 통하여 ‘혐오’를 극복하고 공생을 모색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

여성혐오 문제는 남녀의 성별을 이원적으로 구분하는데 그 근원이 있다. 여기서의 ‘구분’이란 남성을 공적인 영역에, 여성을 사적인 영역에 위치시킨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별의 차이를 표상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우에노치즈코는 이와 같은 ‘성별이원제’에 대하여 “여성혐오는 특정한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 전반에 스며있는 여성의 열등성을 전제하고 강화하는 관념”이라고 주장한바 있다. 필자는 문명적 관점에서 남성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언제나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주체성’ 문제를 상기시키며 이를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공간적 특수성과 결부시켜 논의함으로써, ‘혐오’의 문제를 ‘정치적 갈등 구조’나 ‘사회학적 특성’, 청년이라는 ‘세대적 특성’을 통해 분석하는 기존의 논의들과는 다른 관점을 취한다.

 

인터넷 마을세계와
여성혐오의 사회성

오랫동안 인터넷 문화에 대한 논란과 비판은 ‘익명성’ 문제에 기대왔다. 자신의 이름 즉, 정체를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을 기반으로 악의적인 댓글이나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일탈이 자행되어 왔고 이것이 수많은 반사회적 인간들을 생산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인터넷 속에서 더욱 견고하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 ‘사회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현실의 ‘나’와 인터넷 상의 ‘나’가 구분된 익명의 상태에서 노골적인 혐오와 모욕의 표현 같은 반사회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회와 괴리되고 싶어 하는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도리어 인터넷 공간 속의 수많은 ‘익명’들과 상호작용하고자 하는 사회성 추구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특정 집단(특히 소수자)을 향한 혐오의 감정 표출은 “일시적이고 즉각적인 감정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소통’으로서 일련의 연대감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날 이것은 일종의 유희로서 ‘놀이’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온라인 내의 혐오 표현은 주로 ‘여성’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베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뿐만 아니라 인터넷 상에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 하는 ‘문화’는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성을 막론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만연해 있던 ‘남성 간의 유대’ 현상 중 하나였다.

여성혐오를 통해 증진되고 강화되는 것이 온라인 사회성의 한 측면이며, 소통 행위자들이 그러한 사회성을 추구할수록 여성혐오는 현실에 저항력을 갖는 독자적이고 새로운 사실이 되어 실시간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퍼져나가는 방식으로 자기강화 한다. 또한 이렇게 네트워크를 통해 퍼져나간 ‘정보’로서 여성혐오의 영향력이 사이버 세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매일 온라인에 접속하는 현실의 인간들의 사고와 언어에 영향을 미치면서 성별 동일성(identity)의 형성에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194쪽)

 

온라인 여성혐오 담론
남성의 피해의식과 여성의 자기혐오

‘욕설’과 ‘혐오’표현들이 인터넷 공간 어디에든 만연한 것임에도 일베라는 특정 사이트가 더욱 두드러지게 문제시 되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여성혐오’ 발언에 있다. 일베는 ‘보지년’이나 ‘보슬아치’와 같이, 여성을 성기로 환원하고 또는 ‘○○녀’와 같은 표현을 통해 여성 혐오적인 담론을 조장해 냈으며 이는 현재진행중이다. 일부 여성의 문제적 행위가 아닌, 그것을 ‘여성’ 전반의 문제로 확대하는 ‘○○녀’ 담론은 여성에 대한 고정적이고 정형화된 표상으로 자리 잡고, 여성 혐오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즉, ‘○○녀’ 담론을 통해 여성이란 “공공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남성의 능력에 기생하며 무엇보다 성적으로 방종한 존재”로서 재생산 되는 것이다. ‘○○녀’ 이야기는 이렇듯 사례의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사례를 접하는 이들에 대하여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이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와 타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남성에게는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여성에게는 ‘자기혐오’를 낳게 한다.

남성들의 ‘피해의식’이란, 예컨대 성평등을 위한 국가적 정책들을 ‘여성에 대한 특혜’로 인식하고 ‘남성의 박탈감’을 자극하는 사례로 여겨 이를 역차별 이론으로 수용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군가산점 폐지’나 ‘호주제 폐지’, ‘성폭력/성매매 특별법’은 “안티 페미니즘의 발화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반면 여성들에게 여성혐오는 ‘자기혐오’의 문제로 이어지는데, 상당수의 여성들이 “문제가 되는 여성의 특징을 한심하게 여기거나 그러한 여성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방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무언의 ‘규범’을 통해 재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주체적인 욕망과 그러한 욕망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자기표현들은 남성의 ‘피해의식’적 공격―“꼴페미라는 낙인찍기와 신상털기 등”―과 여성의 ‘자기혐오’라는 이중의 덫에 갇혀 그 목소리를 잃게 된다.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안티페미니즘

‘여전히’ 성별 불평등이 현존하고, 각종 데이터를 통해 그것이 가시화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개인의 노력’이라는 테제를 강조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은,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열등한 지위를 영속화 하는 데 공모”한다는 점에서 결코 정당하지 못하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상당수의 이론들의 공통점은 “페미니즘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그 주장을 공고히 하며 ‘포스트페미니즘’ 이론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오늘날 여성인권의 상승세와 더불어, ‘페미니즘’이란 낡고 시대적으로 뒤쳐진 이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는 곧 “페미니즘의 과제가 완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오늘 날의 ‘자기계발 열풍’, 즉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과 어딘가 닮아 있다. 즉, 성별과 관계없이 기회는 모두에게 평등한 것이라는 믿음을 부추겨, 낙오된 자들에 대하여 “개인의 무능”이라는 비판을 일삼는 인식적 잣대를 ‘여성’을 둘러싼 모든 논의들에 똑같이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포스트페미니즘의 수사는 ‘여성’이,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안티페미니즘’적 인식을 교묘하게 숨긴다. ‘여전히’ 성별 불평등이 현존하고, 각종 데이터를 통해 그것이 가시화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개인의 노력’이라는 테제를 강조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은,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열등한 지위를 영속화 하는 데 공모”한다는 점에서 결코 정당하지 못하다.

 

인터넷 여성혐오를 넘어
성차의 윤리

이렇듯 인터넷 문화를 통해 일종의 연대를 형성하고, 포스트페미니즘이라는 그럴 듯한 수사 속에서 ‘정당화’ 된 여성혐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이를 법적인 규제와 처벌이 아닌, 소통 문화에 대한 윤리적 고찰을 통해 모색해야 함을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2~ )의 이론을 빌려 주장한다.

그간 인간의 성차는 ‘자연적 요소’로 분류되었을 뿐 그 ‘문화적 의미’가 논의된 적은 없었다. 즉 여성은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자연적 재생산자”로서, ‘인간적 성취’인 ‘문명’과 달리 ‘자연’적인 요소로만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리가레는 남성과 여성간의 ‘성차’라는 토대 위에 ‘생성(becoming)’되는(되어야 하는) ‘인간성의 실현’을 주장한다. 문화가 남성의 전유물로서 ‘일자화’된 것이 아닌 ‘둘이 됨(to be two)’으로 자리할 때, “더 현실적이고 더 공정하며 더 보편적인 문화의 재정초가 가능”해 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시민 공동체’는 “서로에게 절대적 타자인 구별되는 성을 존중하는 관계에 기초해서만 건설”된다고 주장하며 이 모든 것의 시작에는 ‘여성성’의 고유함에 대한 존중이 필요함을 지적한다. 즉, 이리가레가 ‘문화’로 규정하는 것은, ‘이성’으로서의 ‘진리’에의 도달과 같이 오로지 ‘정신성’만을 추구하는 가운데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성’마저도 끌어안을 때 발생하는 ‘인간적 생성’이며, 이러한 ‘인간적 생성’을 통해서 모든 ‘차이’가 한 쪽으로 포섭되지 않고 그 자체로 공존하는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 생성은 더 이상 고독한 여정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 단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결정된다. 타자는 나와 동일한 이상 또는 절대를 공유하는 타자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 속한 타자, 내가 나와 다른 인간으로 고려해야만 하는 타자이며 그 다름의 원형이 바로 성차이다. …타자에게 향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보존하는 이 두 운동은 인간으로 생성되는 과정, 즉 타자와 맺는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요컨대, 이리가레가 주장하는 성적 차이의 윤리로서 ‘둘의 생성’은 자신을 포기하거나 내주지 않으면서 타자와 관계 맺고 사랑하는 문화의 창조와 관련된다. (209-210쪽)

이리가레의 주장은 꽤나 복잡한 듯 보이나 사실은 매우 단순하고 ‘상식적’이다. ‘차이’는 한 쪽이 어느 한 쪽에 대하여 우위에 서고자 할 때 ‘차별’로 변질된다. 그러나 ‘둘이 됨(to be two)’ 자체가 ‘문화’의 근간으로 작용한다면, ‘차이’는 다양성으로 보존되며 이를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체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필자의 제언처럼 “중성적인 개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가시화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옹호”해야 하는 이유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좋아요’가 만드는 ‘싫어요’의 세계: 페이스북 ‘여성혐오’ 페이지 분석」
김수아∙김세은, 2016, 『미디어, 젠더 & 문화』31(2), 5-44.

「전략적 여성혐오와 그 모순: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의 게시물 분석을 중심으로」
엄진, 2016, 『미디어, 젠더 & 문화』, 31(2), 193-236.

이단비 리뷰어  ddanddanbi6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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