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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문학은 정치적일 수 있는가?’ ‘현실참여적이어야만 하는가?” 등의 질문은 몇 십 년에 걸쳐 정치 현실이 바뀜에도 꾸준히 제출되는 논쟁거리이다. 이와 관련해 랑시에르는 ‘문학이 윤리에 대립함으로써 감각적 자율성을 지닌 미학의 정치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문학과 정치’담론의 중요한 쟁점을 제공했다.

이에 진은영 시인은 시와 정치: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비평문학』, 2011 3)에서 랑시에르의 미학을 경유해 문학적 실험과 현실참여가 반드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랑시에르의
윤리비판

저자에 따르면, 랑시에르는 『감각적인 것의 분배』(2000)에서 미학의 세가지 체제(윤리적 체제, 시학적 체제, 미학적 체제)를 분류하면서 윤리적 체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할 뿐만 아니라, 『미학 안의 불편함』(2004)에서 문학의 윤리화에 대한 거부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한다. 그는 기존의 숭고의 윤리학을 넘어 문학이 ‘미학의 정치’로 넘어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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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는 숭고의 미학에서 드러나는 예술의 윤리화 경향을 ‘숭고의 윤리학’으로 규정하면서 숭고의 윤리학을 넘어‘미학의 정치’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출처: Universidad Internacional de Andalucía

 

그러나 저자는 랑시에르의 ‘문학이 정치적이되 윤리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미학이 윤리의 영역과 엄격하게 구분되고 무엇으로도 결코 침범 당하지 않는 예술의 자율성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인데, 이렇게 이해될 경우, 미학과 친화적인 정치란 미학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강화하는 데에만 기여하는 정치로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정치라고 간주하는 구체적 활동들과는 관계 맺을 수 없는 특수한 활동으로 여겨진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순수 모더니즘의 관점이 아닌 다른 방식이다. 랑시에르는 우선 윤리와 모럴을 구분한 후 ‘윤리’의 의미를 “평가하고 선택하는 행동 원리를 이미 존재하는 삶의 양식에 용해시켜 버리는 체류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사용한다. 가령 사회적으로 승인된 소박한 소시민적 윤리의식을 담지하는 데 만족하는 예술작품은 오히려 사회의 불합리를 은폐하고 부분적으로 보수하여 현존하는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뿐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러한 작품들 보다는 오히려 벤야민이 초현실주의에 대해 표현한 바대로 ‘악에 대한 숭배’가 느껴질 만큼 기존의 도덕과 감각에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 진정으로 정치적이다.

윤리에 대한 랑시에르의 이런 관점에 공감하는 비평적 입장들은 발산과 분열의 상상력을 가지고 감각적 실험을 수행하는 미학적 아방가르드 시인들을 옹호하면서 당연히 랑시에르의 미학의 정치에 대한 긍정적 평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478쪽)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란?

그렇다면 문학이 습속으로서의 윤리를 넘어선 문학의 ‘모럴’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간 문학이 단지 윤리적인 감성적 충격을 넘어 삶의 형식이 되려 할 경우 자본주의적 상품 유통의 전체주의나 소비에트적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 양자 중 하나에 포섭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바로 이러한 전체화의 두려움이 문학의 윤리성을 ‘단지’ 감각적 증언의 영역에만 머물게 하고 실제로 삶의 왜곡된 장벽들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것이다.

랑시에르는 문학과 예술의 역량에 대한 강력한 긍정 속에서 문학의 ‘삶에 저항하기’(미학적 자율성)와 문학의 ‘삶-되기’(미학적 타율성)가 모두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이쯤에서 저자는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을 재확인한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정치란 합의 또는 일치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간주되는 공동체에 매 순간 불일치를 가져오는 활동이다. 그의 이러한 정치 개념은 정치를 의회민주주의의 선거 절차와 같은 특정 절차와 국가 법질서로 환원시켜 몇 가지 승인된 합법 활동으로 국한하려는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다.

이렇게 랑시에르의 이론을 경유한 저자는 문학이 기존의 정치 영역에서 의제화되지 못한 목소리들을 듣고 비명을 지르는 존재들을 기억하고 가시화함으로써 불일치를 창조하는 광범위한 활동으로 나아가야 한고 주장한다. 그것은 의회주의의 한계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넘어서고 정치와 삶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환기시키는 재현 방식을 발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모럴’을 지닌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적 실험과 현실참여는
공존할 수 있는가?

저자는 랑시에르의 미학적 모럴을 살핀 이후에도 여전히 남는 물음이 있다고 말한다. 문학적 실험과 현실참여 사이에는 거리가 있으므로 모럴을 이야기하더라도 문학적 실험의 모럴과 현실참여의 모럴은 구별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두 가지 작업을 사례로 든다. 바로 6명의 시인들이 두 명씩 조를 이루어 상대 시인의 시에서 나온 단어 30~40여개를 활용하여 시를 쓰는 작업과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그와 관련해서 인터넷 언론에 글을 쓰는 작업이다.

저자에게 있어 이 두 작업은 구분되지 않는다. 순수하게 문학적인 시는 이렇게 써야만 하고, 현실참여적 시는 저렇게 써야만 한다는 ‘선험적’태도로 편의주의적인 감성과 형식으로 작업에 임하지 않는 한 시인은 항상 곤경을 예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30~40여개 단어와 용산참사라는 현실의 제한/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창작의 위기와 실패의 심연과 마주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그렇지만 그 심연을 두려워하지 않고 익숙한 길에서조차 헤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시인의 모럴인 것이다.

 

이것을 상기하는 순간 문학적 실험과 현실참여는 분류의 일반적 경계를 침입하며 만나게 되고 양자 모두가 일종의 문학적 실험의 지평에서 공존하게 된다. (485쪽)

 

또한 저자에게 있어 문학적 실험과 현실참여는 참여의 지평에서 공존할 수 있다. 다른 시인의 시어들이 주어지는 문학적 실험 속에서 시인은 타자의 언어가 주는 질료적 저항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언어의 형식을 만들어간다. 이 과정에는 저항적이며 갈등을 지닌 대화가 있다. “타자의 질료와 교감한다는 점에서 이 과정은 참여이기도 하다.” 용산참사에 대한 시를 쓸 때도 시 속에 타자의 언어를 들여와야 한다. 이때 시인에게는 낯선 시어들이 불쑥 던져지는데, 그 시어들은 그간 사회과학적인 방식으로 전유되어 왔고 그래서 많은 젊은 시인들에게 문학의 외부에 있는 언어로 간주되어 온 것들이다. “이러한 참여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시인의 모럴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시민적모럴을 포괄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다. ‘시인적모럴이란 참여의 과정을 미학적 실험으로 재창안하려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것이며, 시인은 이러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순간을 살아가는 자이다. 시인은 먹을 때도 슬퍼할 때도 사랑할 때도 시인이듯, 싸울 때도 분노할 때도 언제나 시인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심지어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해 시가 쓰여질 있다. (…) 이러한 시인적 모럴을 견지할 시인은 일종의 침입자로서 문학적 참여와 현실의 정치적 참여라는 감각적인 영역의 분배 방식을 파열시키게 된다(486)

 

시와 예술이 미학적이거나 정치적인 길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할 것만 같은 현실에서 저자는 논문을 통해 두 가지 모두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그간 세월호를 비롯한 여러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던 저자가 어떤 고민과 시학을 갖고 있는지 논문으로 유추할 수 있다. “기존 정치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듣고 가시화함으로써 불일치를 창조하는 문학의 정치”를 끊임없이 발명하고 발견하려는 저자의 노력에 ‘문학이 힘을 잃었다’ 말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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