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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2016년 일본에서 개봉한 이상일 감독의 영화 <분노(怒り)>는, ‘사회 통합’이라는 공화주의적 이상이 오늘날 어떤 구체적인 이슈들 속에서 어떤 양상으로 도전받고 있는지를, 일본 사회의 이슈인 ‘묻지마 살인’ 현상을 중심 소재로 삼아 풀어내고 있는 영화다.

도쿄, 치바, 오키나와 등 세 지역을 무대로 삼아, 세 커플의 연인들은 저마다 다른 여섯 가지의 각도에서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침묵의 강요를 경험한다. 이들을 배제한 일본 사회는 이들이 묻지마 살인의 범인일지 모른다며 두려워하고, 이들은 호소할 곳 없는 억울함과 무력감 속에서 터져나오지 못한 분노를 느낀다. 일본 사회가 포섭해주지 않고 대변해주지 않는 개인과 소수자들의 억울함과 이야기들은 침묵의 감옥 속에서 분노(怒り)로 응어리지고, 이들의 분노를 사회는 다시 잠재적 불안 요소로 간주하여 두려워하고 타자화하는 것이다.

영화의 세 주요 에피소드들 가운데 오키나와 에피소드는 이중의 식민지로서의 오키나와의 현실을 넌지시 비춘다. 색색의 만장을 들고 나하 시내를 행진하는 시위 군중을 배경으로 소년은 “항의한다고 뭐가 바뀌겠냐”며 무력감을 토로하고, 소년의 무력감은 미군 범죄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일본 정부의 태도, 그리고 성폭력 피해 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연결되어 소녀에게 상처로 다가온다.

영화의 배경을 이룬 시위는 1995년 이래로 전개되어 오고 있는 후텐마 미군 기지 반대 운동이다. 강경자 씨의 논문 「후텐마기지 문제를 둘러싼 평화운동의 규범적 고찰」(『일본연구』, 38, 2015)에서 인용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이 운동은 “1956년의 토지보상투쟁, 1972년의 오키나와 일본복귀투쟁에 이은 오키나와투쟁의 ‘제3의 파도’“로 규정할 수 있다.

강경자 씨에 따르면 이 운동은 “문화적 정체성에 입각하여 평화를 갈구하는 새로운 패턴의 운동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기존의 사회 운동 혹은 반기지운동과 선명한 차이점을 드러내는 새로운 시민 사회운동이다.” 이번 리뷰에서는 강경자 씨의 논문을 통해 제3세대 오키나와 평화운동의 흐름을 살펴보고, 이 운동의 성격 규정에 관해서도 검토해 보고자 한다.

2010년 기준 오키나와 미군 기지 배치 현황. 붉은 색 영역이 미군 기지 부지로, 오키나와 섬의 25% 가량을 차지한다. 위키미디어 공용, by Amagase, CC BY-SA 3.0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문제의 시공간적 위치

오키나와에는 주일미군 기지 전체의 70%가 집중되어 있어, 오키나와 본섬과 주변 부속도서 면적의 25%를 미군 기지 부지가 차지하고 있다.

특히 1995년 이후 문제가 되고 있는 후텐마 미 해병대 비행장의 경우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있어, 이 기지에서 이착륙하는 군용기들이 오랜 기간 소음 피해와 공포감 등으로 주변 지역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쳐 왔다. 특히 이착륙하는 군용기들이 사고로 주변의 가옥 등을 덮칠 지 모른다는 공포감은 2004년 후텐마 기지 바로 옆에 위치한 오키나와국제대학에 미군의 CH-53D 수송헬기가 추락한 사고를 통해 현실로 드러난 바 있다.

아시아리뷰 5권 2호에 실린 논문에서 개번 맥코맥 교수는 오키나와의 이같은 피점령 상황을 과거 류큐 왕국이 겪어 왔던 역사적 경험과 연결해 “극장국가” 상태, 말하자면 일종의 기만으로 규정한다. 1609년 침공 이래로 오키나와 지역은 일본의 직접 지배 하에 있었으나, 주변 강대국인 명과 청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던 일본은 260여 년간 류큐 왕가를 형식상 존속시키며 독립국인 척 연기하도록 강요했다.

1800년대 후반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를 향한 야욕을 드러내자 일본은 이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도 근대 국가로 변모하여 주권과 국경을 근대적으로 재편할 필요를 느꼈다. 일본과 청에 이중 복속되어 있어 주권 개념이 모호했던 류큐 왕국은 유럽 국가들에게 개입의 빌미가 되었고, 일본은 1872년 오키나와 지역을 일본의 영토로 정식 편입함으로써 국경을 분명히 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근대 군국주의 국가로서의 필요에 따라 이후 70여 년간 일본은 오키나와에 혹독한 동화 정책을 펼친다. 동화 정책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의 오키나와 전투에서 주민들에게 강요된 ‘옥쇄’를 통해 그 정점에 달하지만,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은 본토 지배자들의 이익 수호를 위해 오키나와를 철저히 버린다. 1947년 덴노가 직접 맥아더에게 미군의 오키나와 장기 점령을 청원했던 것은 그 사실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미국의 아시아 지역에서의 군사 전략에 있어 중요한 동맹자가 됨으로써 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다시금 되찾기를 의도했던 일본의 이해 관계에 따라 오키나와 지역은 거래의 상품이 되었다. 1956년 일본 본토에서의 미군 점령이 종료되었음에도 오키나와에서는 미 군정이 계속되었는데, 임경화 씨의 2015년 논문에 따르면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주민의 민생 복지 향상을 위해 미일 양국이 협력”하고 있음을 이유로 들어 오키나와가 식민지 상태가 아니라는 주장을 미국과 함께 국제 사회에 주장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평화헌법 하의 일본으로의 복귀가 오키나와의 군사 점령 상태를 끝내고 평화로운 삶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으로 기대해, 1972년 대대적인 운동을 통해 일본 복귀를 이뤄낸다. 그러나 이 반환은 또다른 기만의 시작이었다. 형식 상으로는 일본 영토가 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미군이 오키나와에 계속 주둔해 주기를 희망하면서 거액의 보조금을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일본은 오키나와 지역을 오랜 기간 지배 하에 두면서도, 오키나와를 실질적인 일본의 일부로 간주하여 책임지려 하지는 않고 본토의 지배자들의 이익에 따라 삼키고 뱉는 것을 반복해 오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기만을 강요해 온 것이다. 400년간 이어져 오고 있는 오키나와의 기만적인 피지배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 패권을 차지하려는 강대국들의 이해 관계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다.

후텐마 미 해병대 기지 이전 문제에 항의하여 2009년 11월 8일 오키나와 현 기노완 시에 모인 시위 군중. 위키미디어 공용, by Nathan Keirn from Kadena-Cho, Japan, CC BY-SA 2.0
1995년 이후 후텐마 미군 기지 문제의 전개

미 해병대 소속 병사 2명과 해군 소속 병사 1명이 12세 아동을 납치하여 성폭행한 1995년의 사건은 후텐마 미군 기지의 철수를 요구하는 여론이 불타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기노완 시 대공원에 결집한 8만5천 명의 시위 군중이 보여준 여론에 밀린 미일 양국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기구인 SACO를 설치하여 1996년에는 후텐마 기지 반환 및 이를 위한 대체 시설의 마련을 골자로 하는 보고서를 발표한다.

후텐마 기지를 반환하겠다는 미일 양국의 약속은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어 온 기만의 또다른 시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96년의 공동선언은 겉보기에 오키나와 주민들의 민의를 반영하는 제스쳐처럼 보였지만, 이를 근거로 1997년에 수립된 “신미일방위협력지침(신가이드라인)”은 아시아 지역에서 미군의 활동에 대한 일본의 지원 역할을 강화, 그에 따라 오키나와 미군 기지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오키나와 주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같은 방향성은 2001년의 9.11 테러와 뒤이은 미국 부시 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 등을 거치면서 양국 정부에 의해 몇 차례에 걸쳐 강조되고 재확인되었다. 오키나와의 미군 점령을 끝내라는 주민들의 요구로 인해 만들어진 정세 변화를, 미일 양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미군의 전략적 재배치를 본격화하기 위한 기회로 역이용했던 것이다.

부시 정부의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GPR)”에 따라 미일 양국은 후텐마 기지의 대체지를 오키나와 섬 북부의 나고 시에 위치한 헤노코 만을 매립하여 건설하는 것으로 2001년 합의한다. 이는 후텐마 기지의 철수 혹은 적어도 오키나와 현 이외 지역으로의 이전을 원하던 주민들의 바람을 정면으로 묵살한 것이었고, 이후 오키나와 반기지 운동은 헤노코 이전 반대 및 후텐마 조기 반환 요구로 기조를 분명히 하게 된다.

헤노코 이전을 추진하는 미일 정부와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대중 운동 사이의 충돌은 헤노코 만 해저 조사가 시작된 2004년부터 본격화되었다. 2004년 8월 오키나와국제대학 미군 헬기 추락사고는 후텐마 기지가 기노완 시 주민들에게 주는 공포감을 현실화시켜 보여준 사건이었던 동시에, 사고 지점이 민간인 사유지였음에도 일본인이 사고 현장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 미일지위협정의 불평등성 문제를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끓어오른 반기지 여론은 1995년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로 나타났다. 주민들의 여론은 2006년에 헤노코 신기지 건설 계획이 미일 양국 합의에 의해 구체화되면서 역시나 묵살되지만, 2009년 후텐마 기지의 “적어도 현외 이설”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하토야마 총리의 취임은 이 시기에 이미 미군 기지에 대한 반대 여론이 오키나와를 넘어서 일본 전역에서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강경자 씨가 진필수 교수의 2011년 논문을 인용하며 평가하는 바와 같이, “하토야마 내각의 후텐마문제 재협상 시도는 미일안보체제 50년의 역사를 뒤돌아보게 하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일본 정부의 이같은 시도를 반미로 규정하며 강하게 압박했고, 일본의 정치 지형에서 미국과의 관계 악화는 커다란 모험이었다. 정치적 동력을 상실한 하토야마 정부가 취임 1년도 채 되지 않아 후텐마 기지 재협상 시도를 사실상 포기하자, 2010년 4월 25일 오키나와에서 9만 명의 군중이 결집해 항의한 것을 비롯해 도쿄 등 일본 각지에서도 시위가 벌어졌고, 워싱턴과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에서도 연대 집회가 개최되었다.

후텐마 기지 문제 해결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하토야마의 후임 간 나오토 총리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참사를 거치며 낮은 지지율 속에 무기력하게 미국의 요구에 끌려다니며 네 차례에 걸쳐 헤노코 신기지 건설 계획을 재확인한다. 뒤이어 “미일 동맹 강화를 핵심 안보 과제로 삼은” 아베 신조 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헤노코 이전은 급물살을 탄다.

아베 정부의 전폭적 지지 하에 나카이마 오키나와 현 지사는 2013년 말 헤노코 만 매립 신청을 승인하는 등 헤노코 이전을 강하게 추진한다. 이에 대한 일본 대중의 저항은 두 가지 형태로 드러나는데, 첫째는 “초국적 연대 운동의 양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반기지 운동으로서, 2014년 1월 시작된 세계 지식인 및 문화인들의 서명 운동을 강경자 씨는 그 대표적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둘째는 2014년 11월 치러진 오키나와 현 지사 선거에서 나카이마 지사가 참패하고, 후텐마 기지를 적어도 오키나와 현 이외 지역으로 이전시킬 것을 공약한 오나가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한 것이다. 2013년의 매립 신청 승인으로 헤노코 이전은 기정사실화된 듯 보였으나, 신임 오나가 후보가 취임사에서 “헤노코 연안 매립 승인 무효화를 위한 검토계획”을 밝히고 있어 향후 추이를 예단할 수 없다고 강경자 씨는 정리하고 있다.

경향신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오키나와 현청의 “헤노코 연안 매립 허가 취소 결정”은 2016년 12월 일본 대법원에서 위법으로 판결되었다. 이후 2017년 초부터 헤노코 만의 매립 공사가 진행 중이며, 이를 저지하기 위한 주민들의 저항도 치열해지고 있다.

강경자 씨는 1995년 이후 오키나와 반기지 운동이 이전의 오키나와 지역 대중 운동과 차별화되는 지점을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규범”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 1995년 이후의 반기지 투쟁에서 오키나와 주민들과 이에 연대하는 대중들은 “평화, 인권, 환경” 등의 가치를 공동의 주장이자 목표, 더 나아가 행동 양식이자 정체성으로서 합의하고 형성해왔으며, 이 점에서 이전의 반기지 투쟁과 구별되는 지점을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이 점은 1995년 이후 평화를 핵심 가치로 하는 수많은 시민 단체들이 오키나와 안팎에서 결성되어 이후의 대중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과, 이후 수많은 집회와 궐기대회에서 발표 및 채택된 성명, 입장, 결의 등이 일관되게 평화와 인권의 가치 및 요구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평화적 생존권(right to live in peace)”이란 국제적으로는 “평화권(right to peace)”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통용되는 개념으로서, 평화 문제를 인권의 일부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관점이다. 일본의 경우에 굳이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쓰이고 있는 것은, “전 세계 국민이 다함께 공포와 결핍에서 벗어나서 평화 속에서 생존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다”고 언급하는 평화헌법 전문 제2항에 이같은 개념이 이미 천명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맥락이 있다.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대안 가치의 제시는 오키나와 외부적으로는 군사력의 압도를 통해 전쟁을 억지해야 한다는 안보 논리에 대한 대항 담론을 형성하는 동시에, 오키나와 내부적으로는 오키나와라는 지역의 정체성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즉 기존의 오키나와란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하여 미군 기지 덕분에 먹고 사는 섬으로 인식되어 미군 기지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환경과 인권의 가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지역 정체성이 구성되고 있다.

국제 질서 유지를 통한 평화를 명목으로 강요된 군사 점령이 실제 오키나와 주민들의 삶에서 평화와 안전의 실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인식 하에, 오키나와의 평화란 미군 기지의 철수 및 축소, 그것을 통한 인권과 환경의 보호로써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시각이 공감을 얻으면서, 2004년을 전후하여 오키나와 주민들의 미군 기지 반대 여론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군사주의, 국가주의의 대항 담론으로서 평화운동이 갖는 국제 연대의 가능성은 현실 정치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희망이자 대안이다. 강경자 씨는 미일 양국의 정치외교 문제라는 사안의 특성 상 오키나와 지방자치 차원이나 일본 국내 정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어 평화적 생존권 담론이 규제적으로 역할하기 어려움을 한계로 지적하면서도, 미국 정치권 내에서도 헤노코 이전의 현실성이 의문시되고 있는 등 국제 연대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규제적 역할이 수행되고 있음을 희망으로 제시한다. 비슷한 문제로 투쟁 중인 한국의 제주도 강정마을 및 성주 주민들과 오키나와 주민들 사이의 연대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논문에서는 1995년 이후의 운동 양상만을 다루고 있을 뿐, 1956년이나 1972년의 이전 운동이 오늘날의 운동과 어떤 점에서 달랐는지를 자세히 비교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과거의 오키나와 평화운동이 경제적 보상요구나 생존권 보장, 반미 이념투쟁과 억압과 착취에 대한 투쟁과 같은 성격이 강하였다면 후텐마기지를 중심으로 한 평화운동은 문화적 정체성에 입각하여 평화를 갈구하는 새로운 패턴의 운동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며 짧게 언급할 뿐이다.

지나친 노파심일지 모르나, 이같은 구별은 자칫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받아들여질 경우에, 운동을 ‘탈경제적’이고 ‘탈정치적’인 것, ‘기존의 투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으로 지나치게 이상화하게 될 우려가 있다. 사회운동은 그 전개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현실적인 생존의 요구, 정치권을 향한 근본적 대안의 요구, 혹은 광범위한 연대를 위한 의제의 결합과 확장으로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기존에 운동을 이상화해 왔던 논리들은 그대로 운동이 ‘불순’하게 ‘변질’되었다며 매도하는 논리로 역이용되기가 너무나도 쉬운 것이다.

도식적 구별에 따른 이같은 위험성은 논문이 1995년 이후 운동의 전개 양상을 다루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을 수 있다. 오키나와를 둘러싼 문제를 총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기적으로 보다 넓은 범위를 시야에 넣고 역사적 사건들의 맥락과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필요는 결국 보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400년의 류큐·오키나와와 동중국해 기지문제의 현재」
개번 맥코맥, 2016, 『아시아리뷰』, 5(2), 233-258.

「’분단’과 ‘분단’을 잇다: 미군정기 오키나와의 국제연대운동과 한반도」
임경화, 2015, 『상허학보』, 44, 229-269.

강병준 리뷰어  iyyagg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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