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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오늘날 중고등 역사 교과서에서는 ‘세계 최초의 발명’, ‘서양보다 몇백 년 앞선 성과’라는 수식어가 붙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발명품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아 장영실을 위시한 학자들을 여럿 지원한 세종대의 성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로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화유산인 측우기에 대해 일본, 중국학자가 서로 ‘우리나라(我國)’의 자랑거리라 했다하니 새삼 또 분통이 터질만도 하다. 실상 측우기가 중국 기술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기구였으며, 식민지 시기 일본인 과학자에 의해 일본 제국의 역사로 주목받게 되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우수한 전통이라 자랑스러워한 측우기 역시 에릭 홉스봄이 지적한 ‘국민통합’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만들어진 근대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서민우는 그의 논문 「민족의 경계, 과학의 경계: 20세기 전반 동아시아 삼국 천문기상학사 서술에 어른거리는 민족의 유령」(『마르크스주의 연구』, 21, 2016)에서 역사왜곡으로 비추어질 측우기를 둘러싼 한중일 삼국의 논란의 뿌리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이들의 대립이 어떤 맥락에서 전개되었는지를 세심하게 검토하고 있다. 필자가 반복해 강조하듯, 이 논문의 목적은 측우기 우선권 논쟁의 진위를 판별하는 데 있지 않다. 논문에서 저자는 측우기와 조선시대 우량 관측 기록이 한중일 “삼국의 상이한 맥락에서 상충하는 방식으로 역사화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비교함으로써 과학과 과학사가 어떻게 민족의 ‘만들어진 전통’을 형성하는 핵심요소가 될 수 있는지, 또 역으로 민족의 서사가 어떻게 과학과 과학사를 전통의 일부로 재구성해내는지를 보여줄 것”에 그 목적이 있다고 설명한다(243쪽). 그런 의미에서 삼국이 모두 개입하고 있는 측우기 논쟁은 전쟁과 제국주의, 서구 과학의 확산 등이 요동쳐 긴박했던 20세기 당시 각국의 행위자들이 “각기 어떠한 과학적 전통과 미래를 기획했는지 대조”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되고, 이를 통해 20세기 삼국의 과학과 민족 혹은 국가의 문제를 더 세심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제국의 기상학 vs. 구국(救國)의 기상학
: 과학 기록의 재편집 및 재맥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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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2월,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유지(和田雄治, 1859~1918)는 ‘과학사의 사료’를 서구에 널리 알리겠다며 조선의 측우기와 신라의 첨성대 기록을 정리, 발표하였고 이를 “세계 유일의 자료이자 우리나라(我國)가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이라 평가했다. 와다의 발표를 시작으로 측우기는 <네이처>, <계간 왕립기상학회지> 등에 연이어 소개되며 ‘세계 최초의 우량 관측 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처럼 뒤늦게나마 일본 과학자 와다 덕분에 숨겨져 있던 세종대의 업적이 재평가를 받게 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세종대의 영광, 즉 조선의 ‘훌륭한’ 기상 관측 역사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는 것과 함께 일본 제국의 영광으로 편입-재구성되었다. 요컨대, 와다의 작업은 조선시대 과학사를 일본의 과학사로 편입하는 일종의 ‘과학적 동화’ 작업이었고, 더이상 조선의 영광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의 새로운 영토에서만 오직 과거 140여 년의 우량표를 갖춘 것이니, 기상학상 이와 같은 귀중한 자료를 가진 자는 오직 우리 제국 뿐이다. 크게 천하에 자랑할 만한 일이다(和田雄治, 1911: 35-37). (249쪽 재인용)

와다 이후 보다 직접적으로 측우기 우선권 논란에 불을 지핀 사건은 1926년 중국 기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주커전(竺可楨, 1890~1974)이 그의 논문에서 ’중국 고대의 아주 정밀한 우량관측’의 증거로 조선의 측우기를 언급한 것으로 시작된다. 더구나 저명한 중국과학사 학자인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 1900~1995)이 주커전의 주장을 수용한 이후 중국 과학사학자들이 측우기의 중국 기원설을 고착화시켰고, 그 결과가 소위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으로 오늘날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저자는 와다와 주커전이 측우기를 각각 일본과 중국의 역사로 전유하는 모습에서 측우기 기원의 진위 여부에 집중하기보다, 20세기 이후 소환된 측우기를 누가 어떤 맥락에서 무슨 목적으로 다루고 있는가로 질문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과 중국 학자는 조선의 측우기와 기상 관측 제도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처한 상이한 사정에 따라 각기 다른 서술로 시각차를 드러냈다. 요컨대, “다가올 영광이 더욱 커보인 부상하는 제국”이었던 일본 학자는 다가올 영광을 위한다는, “지나간 영화가 오늘의 쇠잔을 더욱 부각하는 과거의 제국”이었던 중국의 학자는 지나간 영광을 되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244쪽).

우선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의 학자 와다는 일본 제국이 추진하던 ‘서구 제국화’ 기획의 일환으로 일본이 조선 내에서 행한 “공간적 장악력”을 발판삼아 제국 기상학의 ‘서구 과학화’를 추진하려 했다. 저자에 따르면 와다는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있던 제국 일본의 필요에 발맞추어 그가 다루는 기상 데이터의 범위 역시 외부로 확장해나갔고, 그 과정에서 한때나마 과학사의 최전선에 있던 조선의 훌륭한 우량기록을 일본 제국의 역사로 전유하며 조선의 과거 시간을 흡수한 셈이었다. 심지어 와다는 조선의 고전적 자료를 재맥락화하는 작업이 아직 과거의 자료를 제대로 읽어내는 눈을 갖추지 못한 조선인들을 대신하는 것이라며 역사의 시간을 장악하는 작업을 다시 그들이 조선땅에서 하는 공간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하기도 하였다.

반면, 주커전이 처한 고국의 상황은 와다와는 또 달랐다. 빈번했던 전쟁 이후 과거의 영광이 무색하게 무너진 반식민지라는 참담한 중국의 현실을 마주한 주커전은 미신과 같은 구시대 악습을 없애고 서구 과학정신을 받아들이되, 고대 중국의 우수한 과학 전통을 복원해 이를 서구의 근대 기상학 전통에 접목하는 것이 중국의 활로라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영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빼앗긴 “기상 연구는 경제, 문화, 국방의 세 방면이 모두 관련된 사업”이기 때문에 중국 기상학자들이 근대적인 기상 연구를 통해 중국의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주커전은 미신 전통이 난무하던 당시 현실을 비판하며 중국의 역사에서 서양보다 우수했다 여겨지는 과학적 방법의 존재, 즉 기상학의 과학적 ‘실측’ 전통을 드러내려 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옛 중화질서의 맥락에 있던 ‘중국 고대의 아주 정밀한 우량 관측’ 기구인 측우기는 중국 근대 기상학의 역사로 소환되었다. 즉, 주커전이 제도화한 역사기후학은 “중국 제국의 장대한 역사, 그것을 기록한 방대한 문헌들, 그리고 그 기록에 관한 과학 구국적 관심”이라는 배경에서 탄생한 ‘구국의 기상학’이었다(256쪽).

 

과학사 서술은 가치중립적?
:
보편과학이라는 ‘전략’을 통한 조선 정체성론 비판

그렇다면 와다와 주커전이 다룬 동일한 기록에 대해 ‘한국 최초의 학술적 과학사를 쓴 것으로 평가되는 순수 역사가’ 홍이섭의 서술은 어떠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홍이섭의 과학사는 조선의 후대 과학자들이 와다를 넘어서 조선의 과학을 연구해주길 희망하는 바람을 담은 ‘조선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이었고, 외부로부터 조선의 과거를 지켜내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해석한다. 앞서 와다유지와 주커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사실의 기술에 다름 아닐거라 생각했던 조선의 과학사는 한국 역사학자 홍이섭에게 와서도 새로이 ‘굴절’되었다.

와다와 주커전과는 다르게 과학자가 아닌 홍이섭이 과학사를 쓴 데는 와다와 같은 일본 학자들이 조선땅에서 수행한 조사 활동 및 연구의 영향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당시 홍이섭은 그 자신의 연구를 “1940년대의 일제의 군국주의적 파쇼화 정책하에서 ‘조선문화’에 있어 무엇을 활자로 전해볼 것이냐는 데에 제시한 답답한 답안지”라 자평한 바 있다. 홍이섭은 일본 사람의 검열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무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녔다 여겨진 과학사를 유일한 담론적 무기로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홍이섭의 과학사는 “입을 벌릴 수 없었던 날의 일제 침략을 알리고자 한 고심의 표현”을 나타낸 결과라 할 수 있었다. (258쪽)

특히 저자가 논문에서 주목한 부분은 홍이섭의 조선과학사가 일문판과 한글판 두가지 판본으로 출간됐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홍이섭이 서술한 두 가지 판본의 조선 과학사를 비교하고, 당시 저널에 실린 홍이섭의 글을 분석하며 그가 과학사 서술에서 의도한 전략과 강조하려 한 메세지를 드러낸다. 일문판과 한글판의 서술은 미묘하면서도 상당히 의미 있는 차이를 드러냈는데 가령 홍이섭은 한글판에서 측우기에 대해 “일찍이 세계 과학사상에 가장 선구적 발명품으로, 또 그에 의한 기록된 문헌을 남긴 민족문화의 유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이라 극찬한 반면, 일문판에서는 “세종 24년에 이르러 근대적으로 손색없이 가장 정밀하게 제조됐다.”는 식의 ‘사실적’ 기술에 그쳤다. 이런 이유로 홍이섭의 일문판 조선 과학사는 ‘무이데올로기적’ 중립적 과학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일문판에서 홍이섭은 무이데올로기적으로 읽힌 과학사 서술을 잣대로 일제의 식민 정책을 넌지시 비판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저자는 홍이섭이 일문판에서 조선 과학이 한 때 정체되었던 결과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를 ‘조선 민족의 본성적 한계’가 아닌 ‘조선 사회의 정치경제적 제약’이었던 봉건국가의 성격으로 돌린 서술을 두고 홍이섭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라 해석하였다.

반면 국문판 조선 과학사는 앞서 일문판이 담고 있던 구조적 비판, 즉 “구조적 제약을 제도화한 일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었던” 내용에 조선인들에게 기대하는 주체적 민족주의와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홍이섭의 바람이 더해졌다 볼 수 있다.

와다는 근대 기상학 연구를 조선사 연구와 결합하여 조선과학사를 제국 일본의 과학사로 다시 쓰고 있었다. 홍이섭의 과학사는 이런 상황에 맞서 적어도 조선의 과거는 지켜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요, 미래의 과학자들이 와다를 넘어서 줄 것을 희구하는 간절한 요청이었다. 그러므로 홍이섭이 염두에 둔 전문 과학적 기획은 독립한 조선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에 가까웠다. (242쪽)

이처럼 홍이섭이 와다의 연구를 그저 ‘제국 일본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 한 것처럼 조선의 측우기와 기상 관측 기록은 한중일 삼국에서 각기 다른 맥락에서 원석으로 발굴된 후, 각 도입 주체들이 가진 각기 다른 목적을 향해 새로이 정리되고 편집, 해석되었던 것이다.

 

근대 기상학의 탄생
:
탈맥락화와 재맥락화의 반복

측우기를 중심으로 20세기 전반에 걸쳐 상이한 형태로 서술된 조선 기상학의 역사는 오늘날 동아시아 역사기후학에서 여전히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주커전은 측우기로 증명되는 과거 중국의 우수했던 과학 문명을 복원하는 노력을 통해 그가 염원한 영미제국주의 침략에 빼앗인 중국 기상 연구의 자립을 이루어냈고, 중국 내에서 기상학의 제도화에 누구보다도 큰 공을 세웠다 평가받는다. 와다의 연구 역시 일본 근대 기상학 역사의 중요한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논문에서 흥미로운 점은 와다의 연구를 시작으로 이미 한 번 조선의 역사에서 탈맥락화 된 조선의 기상 관측 역사가 일본 근대 기상학의 역사로 재맥락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특히 측우기처럼 지역성이 짙은 산물의 관측 데이터가 추후에 말끔한 그래프로 정리되기까지의 과정을 일련의 그래프로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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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자가 지적한 와다의 연구에서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그가 조선의 기상학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세심한 추가 작업을 덧붙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와다의 데이터는 조선대의 데이터이긴 하나 와다의 손을 거쳐 선택되고 정리, 처리된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다. 와다는 여러 곳에 흩어진 조선 시대 우량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일괄적인 표로 정리하는 추가 작업을 하였고, 한자 표기였던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로, 기준 단위는 서구식으로 변환하고 평균/합계량 등을 추가하며 “근대 기상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수고를 하였다. 즉,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상징정치’ 체제에 속했던 조선 시대의 강우 담론에서 ‘조선의 우량관측 및 기록만을’ 추출해, 근대 기상학 내 지식 체계의 언어로 ‘번역’한 셈이다(245쪽).

주목할 점은 그렇게 정리된 조선의 기상 데이터가 제국 일본의 관측 기록과 더해진 후 말끔한 그래프로 변환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일본 역사기후학 분야에서 와다의 후예들이 놓인 새로운 맥락에서 재맥락화되었다는 점이다. 일례로, 와다의 연구를 적극 확장한 일본 기상학자 아라카와 히데토시(荒川秀俊, 1907~1984)는 그가 쓴 1950년대 역사기후학 논문에서 와다가 문헌고증적으로 추출한 조선의 1770-1907년의 기록과 일제가 직접 조선땅에서 측량한 1908-1944년의 기록을 종합하여 하나의 도표(연간 강우 변화 그래프)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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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의 변화 추이를 보면, 초반에는 ‘검은 점’과 ‘속이 빈 원’이 서로 다른 출처의 기록을 구분해 주었지만 다음해 그래프에서는 그 구분점이 없어졌다. 마지막 그래프에서는 표의 설명에서마저 그 구분을 완전히 지운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그래프가 깔끔하게 정리되며 관측의 국지성이 사라진 것이다. 더 나아가 아라카와는 앞의 도표를 다시 “‘통계 처리’하여 강우량 ‘이동 평균’ 그래프를 그린 뒤 170여 년이 넘는 기간에 걸친 장기 강우 변동 추세를 ‘추론’했다”.(273쪽) 이런 점에서 아라카와의 연구는 와다의 기록을 와다의 맥락에서 탈각시킨 후 그가 놓인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문제와 ‘재매개화’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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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며
:
새로운 연대의 필요성

정리하자면 이 논문은 첫째, “동아시아 역사 논쟁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는 과학사의 사례” 중 측우기를 중심으로 과학사가 민족사와 상호 형성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 측우기의 기원을 밝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측우기를 둘러싼 역사 논쟁을 검토함으로써 “동아시아 역사 논쟁의 근저에 놓인 이론적 문제, 즉 근대성과 민족주의가 과학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는가 하는 문제를 재검토” 하는 것이다. 둘째, 더 나아가 저자는 일본과 중국의 학자가 과거를 ‘착취’ 했다는 것에만 집중하여 그들이 근대 역사기후학 분야를 선구적으로 개척하고, 오늘날 기후변화 문제에 대처하는 데 중요한 연구를 내놓은 공적까지 부정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주의한다. 저자는 과거 학자들이 역사의 지역적 맥락을 소흘히 다루어 과학을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쉽게 사용한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지역성에 매몰되지 않는 연대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 더 시급한 사안임을 상기시키는 셈이다.

문지호 리뷰어  lunatea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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