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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강원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이 펴내는 『사회과학연구』 (55(2), 2016)강준만 교수가 쓴 「왜 부모를 잘 둔 것도 능력이 되었나?」가 실렸다. 이 논문은 제목과는 달리 세태 비판은 아니다. ‘능력주의 커뮤니케이션의 심리적 기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능력주의 편에 선 자들의 심리 기제를 다양한 담론 속에서 골라내 유형화하고 있다. 능력주의 신화를 벗기고 성토해온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엑기스를 뽑아내듯 핵심을 맵핑하고,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독자적으로 심화시킨 논문이다.

요즘은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해서 세상이 온통 시끄럽다. 인간이 기계에 밀리는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인간들 사이를 이간하고 서열화하는 공장들은 여전히 쌩쌩하게 돌아간다. 그 대열에 최근 ‘능력주의’가 가세한 모양이다. 그것을 매우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부모를 잘 만난 것도 능력”이라고 한 최순실의 딸 정유라다.

애초에 능력주의는 진보적 개념이었다. 출신과 배경에 따라 보상받는 ‘귀족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등장했다. 그 의미는 지능과 노력의 결실을 의미했다. 능력 없는 귀족들을 풍자했던 이 개념은 차츰 사용되는 맥락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논문에 따르면 4단계를 거쳤다. 귀족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능력주의(1단계), 교육과 시험평가에 의한 능력주의(2단계), ‘교육세습’의 영향을 받는 능력주의(3단계), ‘승자독식’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4단계) 등이다. 능력주의와 귀족주의가 같아진 아이러니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능력주의가 이런 스펙트럼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볼 때, 각 단계를 추동하는 심리적 기제란 어떤 것일까. 강준만 교수는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1)인정투쟁, 2)사회정체성이론 3) 시장신호이론 4)노력정당화 효과 5)내성 착각이 그것이다. 이 논문은 이 다섯 가지 개념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다.

 

인정투쟁 스모그로 가득한
사회

먼저 인정투쟁을 보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는 맛에 세상을 산다. 삶은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서로 인정해주는 인정의 공존화는 깨지기 쉬운 유리와도 같다. ‘대등 욕망’이 ‘우월 욕망’으로 액셀을 밟고 ‘지배 욕망’이라는 중앙분리대를 넘으면 ‘인정의 통속화’가 일어난다. “상처 입는 삶의 빗나간 인정투쟁”(장은주, 2008) 혹은 “냉소적 속물들의 인정투쟁”(최철웅, 2010)이 시작된다. 그 주요 무대는 학교다. 학생은 성적을 통해서만 인정을 받는다. 성적에 따라 서열화된 대학으로 성적에 맞춰 들어가기 위해 오체투지한다. 학부모들도 자식의 성적에 따라 인정을 받는 ‘인정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재산이 얼마라든지,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든지 등은 확인되기 힘들기 때문에 인정받기 쉽지 않지만, 자식의 대학은 빼도 박도 못 하는 사실이라 확실한 기준점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과잠’ 입고 지하철 타기의
심리학

자기정체성은 사회적으로 구분되고 싶은 욕구다. 연구 결과 자신의 사회정체성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열망은 매우 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정투쟁이 나와 너의 문제라면, 사회정체성이론은 우리와 그들 사이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담론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대학생들이 단체로 맞추는 것이 유행이 된 ‘과잠’ 또는 ‘야구잠바’가 그 예다. 중고 과잠 매매가 성행하기도 한다. 한 수험생은 “목표로 하는 대학 선배의 기(氣)를 받으려 중고를 많이 구한다”며 “일종의 부적”이라고 했다. (최은경, 2015)

 

신호에 집착하는 순간
이성은 무너진다

성골, 진골, 6두품 등 어느 대학의 게시판에 올라온 글은 자기네 학교 구성원들을 골품제로 서열화하여 구분하고 있다. 정시를 한방에 붙으면 진골이고, 편입이거나 지방캠퍼스면 6두품이 되는 그런 구조다. 강준만 교수는 속칭 명문대일수록 이런 구별짓기가 발달돼 있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론 마이클 스펜스의 ‘시장신호이론(market signaling theory)’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정보 보유량의 격차가 존재하는 노동시장에서 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신호’로 작용하는 것이 학력과 학벌이다. 기필코 명문대를 들어가겠다는 집념도 자신의 시장신호 효과를 높이겠다는 열망에 다름 아니다. 명문대는 ‘신호를 판매하는 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강 교수는 말한다.

신호에 집착하는 순간 그 신호를 기반으로 형성된 능력주의의 옳고 그름을 구별할 마음의 여유는 사라지고, 신호의 ‘후반사 효과(basking in reflected glory)’를 목격한 이들은 좀더 나은 신호를 갖기 위해 애를 쓰는 악순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능력주의는 공고해지기 마련이다. (337쪽)
출처: https://aaronjelcock.wordpress.com/2015/03/17/the-myth-of-meritocracy-in-britain/
“이게 어떻게 해서 얻은
자격인데……”

자신이 큰 고생을 했거나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은 일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심리적 현상을 ‘노력정당화 효과(effort justification effect)’라고 한다. “이게 어떻게 해서 얻은 자격인데……” 하는 생각이 자신의 소속 집단에 대한 과대평가는 물론 집착에 가까운 애정으로 발전한다. 노력정당화 효과는 매우 광범위하게 빛을 발하는데 심지어 부동산 투기마저 능력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재테크’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으니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오찬호, 엄기호 등의 연구자가 사례를 통해 밝힌 부분이 있다. 오찬호가 강의중 학생들에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한 학생이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답했다. 이 학생은 다른 학생들의 우호 반응에 힘입어 이렇게 주장했다. “처우 개선과 정규직 전환의 문제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학생들이 왜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정규직이 되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면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오찬호가 이 주장에 동의하면 손을 들어보라 했더니 수강생 3분의 2 이상이 적극 지지를 표명했다고 한다. 엄기호는 “학생들이 이 문제를 공정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고 보았다. 죽자 사자 공부해서 서울대 오고, 정규직 됐는데 비정규직으로 온 사람들이 갑자기 데모하면서 정규직해달라 하면 반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엄기호는 “우리는 차별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잖아요. 이들의 경험 세계에서는 차별을 정의롭지 않다고 보는 게 공정하지 않은 거예요.”

갈수록 사회가 팍팍해지고 기회가 줄어들다보니 ‘수능시험의 종교화 현상’이라고 할 만한 것도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학벌이나 실력, 노력의 대가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는 심리”가 보편적으로 통하려면 “노력에 대한 대가의 규모나 정도를 어느 정도로 하는 게 정의로운가”가 규명되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적 의제로 부상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지적이다. 다들 각자도생에 바쁘기 때문이다.

 

내성 착각, 능력주의의
종교화

“나는 나 자신을 아주 잘 알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상태에 대해 자신이 잘 안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가리켜 ‘내성 착각’이라고 한다. 자기평가를 할 때 자기관찰에 의한 통찰의 비중을 과다하게 높이는 현상을 말한다. 강 교수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특권에 무감각한 채 사회를 향해 엉뚱한 말을 해대는 것도 바로 내성 착각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권에 맹목적인 이러한 ‘내성 착각’ 소유자들에게 소수자 우대 정책은 능력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소수자 우대 정책으로 인한 역차별의 정도가 과도하다면 그건 바로 잡는 것이 꼭 필요하겠지만, 그런 평가의 과정을 건너뛴 채 소수자 우대 자체를 반(反) 능력주의로 여기면서 혐오의 정서로 대한다.

 

반(反) 능력주의 포퓰리즘이
온다

우리는 일상적 삶에서 능력주의를 긍정하는 말, 즉 ‘능력주의 커뮤니이션’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간 커뮤니케이션 학계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는데, 필자는 이것을 ‘의도적 눈감기’라고 비판한다. 능력주의의 의롭지 못함을 알고 있음에도 다루지 않는 것은 마주하기엔 너무 고통스럽고 두려운 진실이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를 놓고 마지노선이라고 하는 용어가 사용되는 것도 그 맥락이다.

공공성의 부재 위에 버티고 선 이 능력주의 시스템은 ‘학습된 무력감’과 ‘자기효능감 상실’을 낳는다. 개인으로선 순응할 수밖에 없지만 정치적 해결책은 존재한다. 바로 포퓰리즘이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이 거울이 돼주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허울로 위선을 제도화시킨 기성 정치 세력이 엘리트주의로 지탄받고 극우 포퓰리즘의 공격에 무너진 미국의 사례는 한국 역시 그 길을 뒤따를 가능성을 충분히 시사한다. 능력주의가 가진 자들의 세습권력을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마당에, 이 모든 것을 포퓰리즘 선거를 통해 응징할 수는 있겠지만, 뒤집기는 그대로 다시 뒤집힐 가능성을 증폭시킨다는 걸 이미 목도한 우리로서는 그 엄청난 후폭풍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강준만 교수는 논문의 마지막에서 “모든 사람이 능력의 우연성에 대한 인식을 확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자신과 타인의 사소한 차이에 집착하고 그 차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정당화하는 심리에 대한 성찰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능력주의에 대한 공동체주의의 해체: 능력·공과·필요의 복합평등론」
김미영, 2009, 『경제와사회』, 84, 256-277.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위기: 탈조선의 사회심리학」
류동민, 2016, 『황해문화』, 90, 45-58.

강성민 리뷰위원  paperfa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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