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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요즘 우리가 말하는 고전古典은 수많은 세월을 버티고 살아남을 만큼 보편적 지혜를 담은 책을 주로 가리킨다. 이러한 고전은 고전화의 과정을 거치는데 단순히 책의 내용만으로 고전이 탄생된다고 보긴 힘들다. 거기엔 우연과 필연의 여러 요소들이 개입되는데 ‘인위적 요소’가 더 많아질수록 그것은 ‘정전 만들기’로 분류되곤 한다. 조선시대는 신분제사회여서 양반층이 학문을 독점했다. 500여 년 동안 매우 길게 지속되었고, 게다가 폐쇄적인 사회여서 학문이 갖는 권위는 더욱 대단했다. 이런 사회에서 ‘정전 만들기’의 작업은 구성원들의 매우 치열한 의지와 갈등이 복합적으로 전개되는 공간이 되곤 했다.

김태년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이 쓴‘正典’ 만들기의 한 사례, 『栗谷別集』의 편찬과 그에 대한 비판들(『민족문화』, 43, 2014)은 율곡 이이라는 조선 중기의 걸출한 학자의 저술이 정전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는 『율곡전서栗谷全書』,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언행록인 『율곡별집栗谷別集』의 편찬과 그에 따른 논란을 살펴봄으로써 이이의 학설을 둘러싸고 그의 후학들이 대립하여 분화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이이의 학문적 업적을 정리하는 사업은 성혼成渾이 편찬을 주도한 『율곡집』 발간(1611), 박세채에 의한 『외집外集』(1682), 『속집續集』(1682), 『별집別集』(1686) 발간, 그리고 양자의 작업을 기반으로 진행된 이재李縡의 『율곡전서』 편찬(1744), 홍계희洪啓禧에 의한 『율곡전서(습유拾遺 포함)』(1749) 발간 등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정전화의 기본 코스: 소학의 경우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 전, 조선시대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책이 정전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김태년 연구원은 율곡이 편찬한 『소학제가주해小學諸家集註』를 대상으로 삼아 그 구체적 흐름을 보여준다.

소학제가집주. 출처: 리뷰 아카이브

이 책은 이이가 중국에서 넘어와 조선에서 유통되고 있던 여러 판본의 소학 등을 간편하게 추리고 주석을 덧붙여 1579년(선조 12) 편찬한 것으로, 처음으로 출간된 것은 1612년(광해군 4)이었다. 이항복이 김장생 소장 원고를 토대로 실록 편찬에 동원되었던 인력을 활용하여 6권 4책의 활자본으로 간행했다. 이후 1655년(효종 6) 김집金集이 공주에서, 1659년(효종 10)에 홍명하洪命夏가 전주에서, 1663년(현종 4) 조귀석趙龜錫이 전주에서 간행하는 등 보급과 확산을 위하여 끈질긴 노력을 기울인 끝에 1666년(현종 7)에는 정부에서 이 책을 저본으로 하여 새로운 『소학언해』를 간행했고, 1694년(숙종 20)에도 이 책을 토대로 어제御製 서문을 실은 새로운 『소학』을 간행하여 세자 교육에 활용하게 했다. 1744년(영조 20)에는 숙종대에 간행된 소학을 저본으로 훈의를 달아 『소학훈의小學訓義』를 간행하여 보급하고, 이 책으로 시험을 치러 성취도에 따라 상벌을 주는 정책을 펼치게 했다. ‘소학’과 관련해서는 율곡학파가 조선의 학문 권력을 장악한 것이었다. 물론 이는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필주, 어유봉 등 율곡학파 학자들이 주도한 결과였다.

율곡 생전에 직접 완성한 저술에 대해서는 주로 이러한 정전화 과정을 거쳤다. 『성학집요』와 『격몽요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율곡 생전에 미처 저술화되지 못하고 후학들에 의해 전집으로 묶여지는 과정은 어떠했을까?

전집에는 필연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과정이 개입된다. 여기에는 후학들이 정학正學이라고 여긴 글들이 실릴 가능성이 높은데, 율곡은 제자들이 많아서 이 과정이 순조롭지 못했다.

정전화의 관점 차이: 송시열 vs. 박세채

퇴계의 유고를 정리하여 원집原集, 속집續集, 외집外集, 별집別集으로 편찬하는 최초의 대대적인 정리 사업은 1672년부터 1681년까지 재상 박세채朴世采(1631∼1695)가 주도했다. 여기서 큰 문제는 별집이었다. 이이가 작성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자 확정이 애매한 작품, 제자들의 기록, 다른 이들의 기록에 나타난 이이 관련 대목으로 구성된 것이다. 박세채는 당시 남아 있던 문헌 중 스승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모두 별집에 모아 놓았고, 여기에는 당연히 李珥의 언행, 다른 이의 평가 등이 실려 있었는데, 송시열은 여기에 이이를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사실 율곡집의 재출간은 박세채 단독으로 기획한 것이 아니라 송시열과 함께 진행한 것이었다. 애초에 송시열은 노선생의 언행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빠뜨릴 수 없으니 모두 수합하자고 제안하기도 했고, 출간 한해 전까지도 박세채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편집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1686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송시열 측) 박세채가 별집을 출판하자 송시열은 그에게 재고를 요청하는 한편 지인들에게 별집의 문제를 알리며 이의 유통을 막고 빨리 고쳐서 다시 출판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정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급기야는 이이의 종증손인 이동노에게 박세채와 타협이 되지 않으면 판목을 부수어버리라고 하는 데까지 이른다. 도대체 무엇이 합의되지 않았기에 송시열이 이렇게까지 나왔을까.

박세채가 별집의 편찬을 완료한 1681년부터 속집과 외집이 간행된 1682년, 별집이 발간된 1686년까지의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인조반정 이후 북인이 축출되고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다퉜다. 숙종대 전환기를 거치며 둘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했고,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남인이 축출되면서 끝났다. 1680년 서인 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서인 내부에서도 노론과 소론의 분열이 싹트고 있었다. 1681년 김익훈의 무고誣告 사건을 둘러싸고 송시열, 김수항, 민정중閔鼎重 등의 원로들과 조지겸趙持謙 등의 젊은 관료들이 대립하고, 태조의 존호를 가상加上하는 문제를 두고 송시열과 박세채가 견해를 달리하는 과정을 거치며 서인의 원로와 신진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둘의 의견 소통이 원활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면 송시열이 문제를 삼은 율곡별집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1)내력이나 내용을 볼 때 율곡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문답太極問答』의 수록, 2)율곡의 언행에 대한 기술 중 후대에 분란을 일으키거나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만한 것의 수록, 3)문인인 어록 기록자가 이름이 아닌 자字로 불리는 등의 부적절한 호칭 방법 등 편집 관련 문제, 4)입산과 삭발 관련 기사, 5)서모와의 불화와 입산 이유를 연결하는 기사 수록 등이었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박세채는 송시열의 의견을 하나도 받아들여주지 않고 그대로 간행했다. 삭제·가감 등의 편집을 통해 스승의 진면모를 드러내고 권위를 높이고자 한 송시열과 달리 박세채는 관련 문헌 자료를 가급적 폭넓게 수집하여 남기는 것을 편찬의 목표로 삼은 데 기인한 것이었다. 자신의 도통道統 이해와 의리관義理觀에 입각해 적극적으로 스승의 학문과 언행을 해석하고 계승하려는 자와 문헌에 드러난 사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요령 있게 정리하여 후대에 전수하려는 자 사이의 대립이었다. (93-94쪽)
선대가 확정한 선본이 후대에 뒤바뀌기도

하지만 송시열의 주장은 시간이 지나 후대에 관철되었다. 노론 가문에서 태어나 송시열의 학문을 이은 이재李縡는 1742년부터 1744년까지 『율곡전서』 편찬 작업을 다시 수행했는데, 기존의 ‘문집’ 체제 대신, 이정전서의 예를 따라 주요 저작을 망라하는 ‘전서’ 체제를 채택했다. 이 과정에서 율곡별집 내용은 검토·산삭을 거쳐 「어록語錄」과 「제가기술잡록諸家記述雜錄」으로 분산되어 편집되었다.

그가 율곡전서를 편찬한 것은 남인과 소론을 동시에 의식한 작업이었다. 이재는 남인들이 만든 퇴계집을 의식하고 이이의 문집을 정리하였으며, 소론에서 영수로 떠받드는 박세채가 편찬한 속·외·별집에 대해서 “널리 수록하는 데 주력하여 정통 주자학자로서 이이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재는 이이의 과거문이나 어린 시절의 시문들은 모두 삭제하고 오로지 도학을 밝히고 세교에 도움이 되는 글을 위주로 율곡전서를 편찬했던 것이다.

남당 한원진 초상(충주성박물관 소장)

한편 이재의 율곡전서가 나오기 전, 권상하權尙夏 문하에서 율곡별집에 대한 비판 작업이 계속 수행되고 있었다. 권상하는 율곡별집을 개정하려 한 송시열의 뜻을 완수하고자 기초 작업으로 신유申愈, 채지홍蔡之洪, 한원진韓元震 등에게 율곡별집에 대한 문제 제기를 지시했는데, 이때 한원진이 제출한 것이 「율곡별집부첨栗谷別集附籤」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송시열-박세채 때의 대립과는 그 성격이 판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한원진은 율곡의 이기론理氣論 자체를 문제삼았다. 먼저 항구적인 하나의 기氣가 실재한다는 점 등에 대해서 반박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논문을 살펴볼 일이고,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이이의 입산이나 삭발, 그의 성격 등에 대한 일화, 그리고 『태극문답』의 수록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송시열과 박세채 사이의 공방은 한원진 때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이기심성론을 소재로 한 문제제기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율곡학파 학자들은 이이의 학문 업적을 정리하고 보급하여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힘썼으며, 이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는 일이자 자기 학파의 학문적·정치적 권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이런 노력은 후대로 갈수록 철학적 차원으로 심화되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성민 리뷰위원  review@bookp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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