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dericjameson2_1

logofinale비판이란 어떤 대상을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며, 그들을 서로 관련짓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의미를 탐색하는 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비판이 잘 수행될 때, 가장 개인적이고 독립적으로 여겨지는 것에서도 사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여기에 기꺼이 그렇다고 대답할 동시대의 학자를 꼽아보자면, 우선 프레드릭 제임슨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그는 정치적 무의식 Political Unconscious: Narrative as a Socially Symbolic ACT』(2015/1982)을 통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신좌파적 클리셰를 정반대의 방향에서 증명해 보여준바 있다.

정윤길의 제임슨과 무의식: 비유를 넘어 매개로서의 무의식(『현대사상』, 11, 2013)은 바로 이러한 제임슨의 작업을 다룬다. 그 목표는 문화, 예술, 혹은 일상적 실천들의 범주에서 무의식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정치적 기제를 추적하는 작업인 정치적 무의식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제임슨의 ‘무의식’ 개념에 집중하여 그가 알튀세르와 라캉을 독해하는 방식을 검토하고, 그것이 제임슨에게 미친 영향을 살펴본 뒤 제임슨의 강점과 한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쉽게 제거할 수 없는 총체성
제임슨의 이데올로기 비판

저자는 우선 제임슨의 작업이 지닌 특징과 그 매력을 기술한다. 그에 따르면 제임슨의 작업은 “인류의 역사 역시 하나의 서사로 결합되게 마련이라는 기본적인 믿음을 거침없이 주장하는 대담성”에 그 정수가 있으며, “총체성에 대한 탈근대주의의 비판을 사회적 총체성과의 연관을 잃어버린” 증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이론들과 구별된다. 이는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독법으로서, 세계의 현상 형태를 윤리적으로 단죄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사건과 행위들이 역사 속에서 그러한 모습으로밖에 드러날 수 없었던 필연성을 인지하며, 그것이 동시에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수 있음을 밝히는 사유 방식이다(종교는 인간 의식의 산물이 실체화되어 인간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지만, 동시에 현실의 불평등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리의 계기가 있다는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이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이어 저자는 제임슨에 대한 제임스 캐버너James Kavanagh와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상반된 평가를 대조하고, 그의 이론이 “데리다의 성찰을 전유하면서도 해체주의를 압도하고 있다는 점, 과거의 윤리 비평을 다시 회복시키려 한다는 점”, “일종의 ‘알튀세르 혁명’을 전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미 비평가들의 평가가 나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허나 사실 이 차이는 기본적으로 헤겔의 총체성을 생산적으로 독해하는 제임슨에 비해 이글턴은-<Holy Terror>(2005) 이후론 보다 헤겔을 보다 긍정적으로 언급하긴 하지만-그 방법론에 보다 비판적인데서 연원하는 듯하다.

이후로는 구조주의적 계기를 지닌 레비스트로스와 초기 푸코가 모두 자신의 작업에서 (프로이트에 의해 제기되었던 정신분석학의 개념인)무의식이란 개념을 차용했던 사례가 제시되며, 구조주의와 무의식의 상동적인 관계가 언급된다. 저자에 따르면 구조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전체로서 하나의 정체성 대신 그들 사이의 관계성을 그리고 개별적 구성 요소보다 그들이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구조를 사고할 수 있는 시각을 갖게 한” 점에 있다.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려 부연하자면 구조주의는 ‘객체의 선차성’을 주장하며, 개인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강조하고, 결과적으로 주체를 구성하는 지위에서 구성되는 지위로 설정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주체 범주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점에서 유사하게 소급되는 일련의 학문적 경향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즉,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19세기 말의 심리학에서부터, 20세기 초 소쉬르 등의 언어학을 거쳐 레비스트로스, 푸코, 라캉, 알튀세르 등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연속적인 요인들의 흐름이 이에 해당된다. 물론 이중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구조주의자로서 선언한 인물은 없다는 점에서, 이는 사후적으로 연구자들이 명명한 일종의 공통적인 연구 방식의 경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의 한계:
무의식이라는 은유

허나 저자는 구조에 대한 개체의 자율성과 개별성 즉 개별 요소들의 정체성을 사고하기 위한 답변이 구조주의에 부재하며, 신광현의 연구(“텍스트의 무의식: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우”, 2005)를 참조하여 구조주의의 논자들이 무의식을 일종의 초월적인 은유로서 사용함으로써 정작 해명되어야 할 체계로서의 구조를 쉽게 전제한 채 논의를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즉,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개념쌍이 단순히 개인/사회에 유비됨으로써 구조와 요소의 관계에 대한 개념적 사고를 차단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탈중심화된 구조, 부재하는 원인으로서의 구조의 이론가로서의 알튀세르를 언급하며, 이를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무의식 개념을 도입한 가장 중요한 사례로 꼽는다(허나 정신분석과 역사유물론,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주의를 동일한 지평에서 사고하려했던 시도는 이미 20세기 초중반에 아도르노를 위시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해 취해진바 있다. 저자가 알튀세르를 무의식과 마르크스주의를 대표적 사례로 소개하는 것은 한국적 좌파담론의 편향이라는 배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는 알튀세르 또한 마찬가지로 개별 현상 형태들에 의식을, 중층결정되는 모순의 작용에 무의식을 유비하게 된다고 주장하며, 알튀세르의 ‘징후적 독해symptomatic reading’ 개념을 비판하고 이 경우 결국 구조는 요소들의 타자에 머물러 본질로서 실체화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회 구조를 사회현상의 무의식으로 보는 것은 구조의 구조성을 보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제임슨이 알튀세르와 다른 방식으로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수용하려한다고 말한다. 도달 불가능한 타자성과 언어 외부의 무nothing를 표현하는 라캉의 실재계는, 제임슨에 와서 “총체성 또는 역사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라캉에게 언어 외부를 지칭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이 항상 언어를 통해서만 이뤄지듯, 제임슨에게도 역사(실재)는 텍스트(문화, 예술 등을 포함하는)를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텍스트는 상징계(지배체계), 상상계(이데올로기)를 경유해서만 역사를 운반한다. 허나 의식이 거하는 상징과 상상의 세계, 즉 지배와 전도의 세계 속에서 무의식은 역사에 닿고자 하며(<세기>에서 제기된 바디우의 “실재를 향한 열정”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소여의 체계들로부터 이탈된다(이는 실재가 상징화에 저항하고, 물자체가 기호와 일치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과정이다). 여기서 텍스트는 역사와 조우하고자하는 무의식을 동시에 담지하고 있고, 역사를 향한 욕망은 “이데올로기의 억압으로 마치 꿈에서처럼 치환, 보상, 투사의 작용으로 드러난다.”(A.로버츠, <트랜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동일화하고 위계와 지배를 설정하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무의식은 정치적이며, 이미 모든 텍스트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편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소외와 파편화, 지배와 억압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재, 역사에 대한 열정은 대상의 무의식의 측면에 있기에, 이제 쟁점이 되는 것은 그러한 열망, 유토피아를 향한 충동을 해석하는 작업이라는 것이 제임슨의 주장이다. 무의식의 지반, 역사성을 해명하고 그 저변을 넓히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허나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제임슨의 결론은 “개인적 범주”와 “사회적 범주”, “개별 주체의 경험”과 “사회적 총체성”, 즉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이미 이뤄진 자본주의의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양자를 종합할 수 있는 방안을 그린다기 보다는 그 불가능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결국 총체성을 인식의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닌데, 이유인즉 그러한 주/객의 분리가 자본주의 하에서는 필연적인 것임을, 따라서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분리의 간극을 끊임없이 좁히고자하는 열망 또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제임슨의 주장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 역사
제임슨의 3단계 해석학

이제 저자는 제임슨이 대상을 해석하는 방식이 정치, 사회, 역사라는 범주로 나뉘며, 이는 각각 “ 첫째,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역사: ”특수한 시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사건의 연대기적 연속체“, 둘째, 그와 연관된 사회적 맥락: 공시적 체계 내에서의 ”사회적 계급간의 구성적 긴장과 투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역사: ”일련의 생산양식과 원시 시대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인간 사회구성체의 운명“ ”에 조응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텍스트들에 나름의 방식으로 개입하고, 상이한 위상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순서와 관련된 것이다.

첫 번째 단계, 정치적 역사의 범주는 개별 작품들의 발화와 일치하는데, 이는 형식주의적 비평, 혹은 구조주의적 비평과 비슷하지만 “작품이 사회적 모순을 상상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상징적 행위로서 파악된다는 점에서” 여느 형식주의와는 다르다.

두 번째 단계는 개별 텍스트에서 사회 질서로 확장되고, 이때 사회 질서는 각 텍스트를 내외재적으로 규정하는 “계급담론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텍스트는 변증법적으로 변형되어 더 이상 좁은 의미에서의 개개의 텍스트로 이해되지 않고, 보다 큰 집단적이고 계급적인 담론의 형식으로 재구성”되며 “계급 담론과 개별 텍스트간의 관계는 랑그와 파롤의 관계로 재정립된다.” 즉, “첫번째 차원에서 텍스트가 하나의 규정, 말하자면 텍스트의 형식적 무늬와 구조에 내재적인, 실재적 사회 모순에 대한 상상적 해결책으로 보인다면, 두 번째 차원은 계급 담론의 랑그에 대해서 텍스트를 빠롤 또는 개별적 발화로 취급한다.”

세 번째 단계는 “전체로서의 인류의 역사, 혹은 일련의 생산양식”과, “원시시대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인간 사회구성체의 운명”에 집중된 방식이다. 여기서 개별 텍스트는 전체로서의 역사 속에서 독해된다. 이 역사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생산양식’으로 표현되는 것이지만, 제임슨의 용례는 구조적 인과성, 기계적 인과성, 표현적 인과성과는 구별되는데, 외려 그에게 생산양식은 “사회 각 층위들의 상대적 자율성과 불균등 발전을 통하여, 통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생산양식의 흔적들과 미래의 맹아가 공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사회 구성체의 형식을 띤다.” 즉 그는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적 공간을 인정하고 그들을 섣불리 경제로 포섭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인 것과 그들 간의 총체적 연관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이 상대하는 것은 ‘문화혁명’인데, 문화혁명은 “사회 형성이 새로운 사회생활 양식을 위해 주체를 재교육하거나 재프로그램화하는 과정을 지칭”하며 새로운 실천을 생산할 새로운 주체를 암시한다.

 

텍스트의 역동성의 부재
제임슨의 한계?

이러한 주장의 귀결은 결국 역사와 실재에 대한 접근이 “정치적 무의식 속에서의 서사화”를 거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예술작품은 “사회적으로 상징적인 행위”이며, 그 정치적 무의식이 해석되어야만 그 의의가 현현하는 것이기에, 그자체로 총체성에 대한 인식에 있어 실천적인 함의를 담지하지는 못한다. 즉, “무의식의 비유가 중요해지면 중요해질수록 작품의 한계는 한층 더 구조적인 것으로 미리 전제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제임슨처럼 해석이 작품의 표면에 숨겨진 심층을 찾는 작업이라 여기는 경우 작품은 작품의 표면으로 환원되고 작품의 심층은 해석자의 전유물로 취급되기 쉽다. 작품의 표면으로 환원된 작품은 자기도 모르는 채 숨기고 있는 심층적 의미나 자기의 본질을 결정하는 심층적 구조에 의해 탈신비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격하된다. (151쪽)
이런 예술적 실천성은 애초에 과학적 인식과는 차별되는 방식으로 제한된 성취를 이룰 수 있을 뿐이다. 예술적 재현을 통해서 총체성에 가장 근접할 수 있다는 루카치(G. Lukács)의 입장과 비교해보면 총체성이 작품의 무의식의 영역에서 상징적으로만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는 제임슨의 시각이 작품의 실천성에 얼마나 큰 제한을 두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52쪽)

저자는 제임슨을 향해 위와 같은 식의 비판을 개진하며, 그에게 비판적 작가론, 실천적 문예론이 부재함을 지적하고, 텍스트 자체의 역동성에 주목하는 데리다 식의 해체론보다 닫혀있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제임슨의 작업이 비평가, 해석자의 역할을 과잉표상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로 미뤄보아 그는 제임슨의 이러한 경향이 실은 아도르노에 기대고 있으며, 제임슨의 작업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아도르노의 문예론을 둘러싼 쟁점들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진리계기란, 예술적 부정성에 있는 것으로, 이는 그때그때 존재하는 세계를 없애가지며, 즉 대상을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보존하며(mimesis) 무의식적으로 세계의 모습을 그 내부에 담지 하되,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었음을 증언함으로써(예술적 부정성) 모순을 응축하고 있는 한에서 간취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예술적 실천은 본질적으로, ‘실천’이라는 언표로 그것을 지시하려할 때 외려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어떤 측면에서 <정치적 무의식>은, 사회의 모순을 누구보다 기민하게 상연해보여준 인물로서 프로이트를 꼽았던 아도르노와의 분업 속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는 개인의 내면에서 상연된다:
정치성은 작품의 무의식에서 상연된다

이어 논의되는 것은 제임슨의 인식론에 대한 개괄이다:

“우리가 아무리 역사를 무시하고자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소외시키는 역사의 필연성은 결코 우리를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역사는 그것의 결과를 통해서만 감지될 뿐, 물화된 힘으로 직접적으로 느껴질 수 없다. 토대로서 또 초월할 수 없는 지평으로서의 역사는 어떤 이론적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는 필연성에 대한 경험이다. 이런 까닭에 제임슨은 역사와 서사의 문제,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추궁함으로써 문학적 서사 특히 로망스와 소설 속에서 끊임없는 서사의 흔적을 찾아내고 이 근원적 역사의 억압되고 묻혀버린 리얼리티를 텍스트의 표면으로 복원시키고자 한다. 텍스트의 모든 결절 구조 속에는 언제나 일련의 생산양식과 원시 시대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인간 사회구성체의 운명의 흔적과 예기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런 이질적이고 파편화된 단자들이 그 자체로 형식을 구성하는 것이다. 즉 예술의 형식 속에 존재하는 불연속과 차이, 그리고 동일성은 그 자체로 역사의 흔적이며, 미래의 역사를 위한 맹아적 존재인 것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제임슨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서사적 장르와 역사, 즉 생산양식과의 관계이다.”(156쪽)

이렇듯 제임슨에게 정치적 무의식은 집단적인 것이며, 역사는 효과를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실재이지만 가시적인 실체는 아니다. 다시 말해 “역사는 사물이거나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라 의식과 행위자에 대한 구조적 한계, 말하자면 우리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속적으로 부딪혀야 하는 한계”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전미래가 될 수 없는, 특정한 방식으로 서사화 되어야만 하는 역사는 이야기되는 것이지만, 삶은 일련의 선택과 조직화 방식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제임슨에게서 경험의 범주와 일종의 윤리학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한계라고 주장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저자의 주장대로, 제임슨에게 일종의 경험과 윤리학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험은 그의 초기 작업에서부터 “깊이 없음”이라는 표현으로, 윤리학은 “역사 감각의 상실”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불가능성이 지적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불가능성을 논한다는 것은 실천적이지 않은 것과는 상관이 없다. 외려 현실 속에서 상황은 정반대로 펼쳐진다. 오늘날만큼 수많은 직능단체들과 서클, 지역조직을 통해 매초마다 동시다발적인 실천이 벌어지고 있는 때도 없지만, 정작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채 공동의 전선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거라 믿는 행동주의적 실천의 비실천성은 외려 독이 된다. 오늘날 경험과 윤리학의 부재를 성토하거나, 급진성을 담지 한다고 자처하는 이들보다 그들의 아포리아를 사고하는 제임슨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미래는 차라리 모순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가장 공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정치라는 범주가 작품의 내밀한 무의식을 통해 상연되는 것처럼, 이미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치되고 굴절되지만 세계가 지금과는 다른 방식이어야 함을 증언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창조될 수 있음을 말하는 인식을 가리키는 이름이 바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던론 연구」
김현식, 2008, 『사회와 교육』, 44, 117-138.

「프레드릭 제임슨과 변증법」
정윤길, 2010, 『현대사상』, 7, 279-295.

정강산 리뷰어  wjdrkdtks93@hanmail.net

<저작권자 © 리뷰 아카이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porter, R

깊.게 판 진짜 지.식 @깊지라고 불러주세요.

RRESEARCH, REPORT, LIBRARY의 R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