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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전 세계적으로 반려동물 문화가 확산되면서 일부 동물은 외부 영역이 아닌 동반자로서 인간문화 안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동시에 동물과 인간의 관계설정에 있어 다양한 모순점들이 발생한다. 동물은 인간의 육식을 위한 사육 대상인가? 반려의 대상인가? 아니면 자연세계의 독립적인 존재인가? 놀랍게도 이 질문들은 동물의 현재 위치를 모두 설명해준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형성되었으며, 현재 동물론은 인간중심주의 사고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에 관해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동물과 인간 사이, 그 철학적 질문들과 문화적 실천」(『문화과학』, 76, 2013)에서 다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전개한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을 소개하고 해석한다. 또한 여기서 도출한 의미를 문화적 실천으로 전환하려는 기획을 시도한다.

동물론의
두 가지 테제를 넘어

저자는 우선 세 명의 이론가의 난해한 주장을 살펴보기 앞서 전통적인 동물담론에서 제기하는 동물복지론과 동물권리론을 비판적으로 언급한다. 이를 저자는 동물담론의 정형화된 관점을 교정하고, 그것의 사회적, 문화적 실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우회적 전략이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동물담론은 동물을 최적의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공리주의적 입장에 기반한 ‘동물복지론’과, 종별 차이와 상관없이 동물의 본래 타고난 내재적 가치를 중시하는 ‘동물권리론’으로 양분된다.

동물복지론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동물의 존재를 강조한다. 벤담에게 있어 인간이 동물을 차별하는 것에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동물의 이성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여부이다. 즉,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인간과 동물은 같은 존재이며, 동물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복지론자의 대표적 이론가인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감각을 가진 존재로서 동물은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며, 인간에게 ‘배려와 돌봄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한편, 동물권리론은 동물복지론보다 더 급진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동물복지론이 인간과 동물의 평등을 주장한다면, 동물권리론은 인간과 무관하게 동물이 가질 수 있는 내재적인 순수한 권리를 주장한다. 즉, 동물은 인간과 대당적인 관점에서 해석되거나 인지될 수 없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 종이며, 인간의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감각이나 고통의 유무와 관계 없이 타고난 권리가 있음을 강조한다. 동물권리론은 동물복지론의 윤리적 관점이 동물의 내재적 가치론에 근거하기보다는 인간의 도덕의식의 각성에 기초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따라서 동물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은 야만적인 집단사육 자체를 반대하며, 인간의 식욕을 위해 동물이 죽어가는 현실, 인간의 오락을 위해 동물을 가두는 방식 자체를 반대한다. 동물의 해방은 인간의 윤리에 의해 조절된 제한된 해방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해방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저자가 비판하는 점은 두 이론이 동물과 인간 사이에 대한 충분한 철학적 성찰 없이 동물을 위한 현실문화의 진단과 인간중심주의적 사유, 거대농장이 지배하는 육식자본주의의 비판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즉 동물복지론에서의 평등과 동물권리론에서의 권리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복잡하고도 의미심장한 문제들을 내장하고 있는데, 철학적, 사회적, 문화적 탐색 없이 단순한 주장만 하게 될 경우,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본 연구를 현실 동물담론의 더 심도 깊은 철학적 성찰을 보충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밝힌다.

종횡단적 사회성으로서
반려동물 인지하기

미국의 대표적인 비판 구성주의 페미니스트 다나 해러웨이는 반려동물의 존재와 위치에 대해 가장 중요한 이론적 관점을 제시한다. 1985년에 발표한 『사이보그 선언』으로 유명한 해러웨이는 2003년 『반려동물 선언』을 발표하면서 반려동물 문화에 논쟁을 일으켰다. 해러웨이는 이 선언문에서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를 서로 공생co-habitation, 공진화co-evolution, 자연문화natureculture의 형성으로 설명한다.

‘자연문화’는 자연과 문화,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선택적, 도덕적 결합이 아닌 진화하는 사회의 실체로서, 종횡단적 사회성cross-species sociality을 갖는다는 것을 표방한다. 종횡단적 사회성은 종과 종의 경계를 허무는 사회적 성격을 상상하는 것이며, 기술, 인간, 동물의 사회적인 경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새로운 형태의 자연문화를 형성하길 요청한다.

또한 해러웨이에게 있어 ‘공생’과 ‘공진화’는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를 이해하는 주요 키워드이다. “사이보그와 유사하게, 반려종의 의의는 고정되거나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전환하고 변화하고 불완전한 것이다.”라는 지적은 반려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공생’하면서 ‘공진화’하는 관계라는 점을 강조한다. 해러웨이는 “동물 진화의 살아있는 역사의 모든 단계가 내부적, 외부적으로 동물에 대량 서식하는 박테리아에 적응하는 과정”인 것처럼 인간의 질병 역시 가축과의 공생을 통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결과라고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어형변이적인 관점에서 예술과 기술이 서로 공진화하듯이, 자연과 문화가 상호작용함으로써 인간과 반려동물도 서로 적응하면서 공진화한다.

해러웨이는 동물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일방적인 사랑과 배려가 아니라 “존경과 신뢰”이며 이 관계는 자기통제를 위한 반려동물의 훈련 속에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그녀는 반려동물의 훈련을 인간에 의한 종속적인 행위로 보지 않고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긍정으로 본다. “반려자로서 얼굴을 맞대고 함께 추는 춤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일종의 훈련을 통해 상호주체성과 종횡단적 성취가 가능해진다. 해러웨이의 이러한 사유는 인간과 반려동물의 공진화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의 가족구성원으로 인간과 반려동물은 “가족만들기”라는 끊임없는 공생, 공진화의 실천을 필요로 한다.

동물화,
혹은 인간의 개방성

해러웨이가 인간과 반려동물 사이의 끊임없는 종횡단적 사회성을 강조했다면, 조르조 아감벤은 인간과 동물이 서로 개방성(the open)에 다가가는 것을 강조했다. 아감벤에게 ‘개방성’은 인간과 동물이 가진 본래적인 속성이다.

아감벤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이분법적 구분 사이에는 예외가 존재하며, 이 예외적인 공간에는 인간적 삶도 아니고 동물적 삶도 아닌 그 자체로 분리되어 있고 배제되어 있는 ‘발가벗은 삶(bare life)’이 위치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감벤이 말하는 이러한 발가벗은 삶이 바로 인간과 동물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사이’의 삶이며, 인간의 동물화, 동물의 인간화로 이행하는 경계의 삶이다. 아감벤은 이 삶의 공간에서 개방성을 찾는데, 여기서 개방성은 인간만이 열린 세상을 볼 수 있다고 믿는 은폐된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아감벤은 인간의 개방성과 동물의 개방성이 만나는 지점을 하이데거가 말하는 “심오한 따분함(profound boredom)”에서 찾는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따분함이란 “텅 빈 채로 남겨진 상태”로 집중할 일이 없이 동물처럼 심심함에 매혹된 상태를 말한다. 텅 빈 상태로의 순간은 따분함을 본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심오한 따분함으로 인해 공허함에 남겨진 상태에서 인간은 동물과의 관계에 있어 과거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타자’로서 본질적인 분열의 반향처럼 뭔가 떨림이 일어난다. 결국 아감벤에게 있어 따분함이란 동물의 개방성과 인간의 개방성이 만나는 순간이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 가로지르기
발가벗음의 역설과 양가성

인간과 동물의 발가벗음의 역설과 양가성에서 타자성의 진리를 질문하는 데리다의 철학적 성찰 역시 해러웨이와 아감벤과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특히 데리다는 발가벗음의 역설을 통해 그가 오랫동안 비판했던 로고스중심주의의 해체를 기획한다.

발가벗음의 역설이란 무엇일까? 데리다는 실제로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와의 에피소드를 기억하며, 발가벗은 채 동물 앞에 서 있는, 그리고 동물의 시선에 포착된 인간의 곤란함, 부끄러운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한다. “동물의 집요한 응시 앞에, 발가벗은 채 진실된 모습으로 서는 이 곤란한 만남의 원초적인, 단일하고 비교 불가능한 경험”은 원래 발가벗은 동물 앞에서 인간의 발가벗음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알게 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자신이 발가벗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발가벗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자연 속에서는 어떤 발가벗음도 존재하지 않으며, 동물은 오로지 “발가벗음 속에서만 실존하는 감수성, 정동, 경험만이 있을 뿐이다.” 데리다의 언급대로 인간은 자신의 성기를 가리기 위해 옷을 발명한 유일한 존재이다. 여기서 역설이 발견된다. 인간은 발가벗겨질 수 있다는, 즉 부끄러워질 수 있다는 한에서만 인간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부끄러움을 이기기 위해 옷을 입는 것은 사실상 발가벗겨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 속의 동물과 문화 속의 인간의 역설의 의미하기도 한다. 발가벗음의 역설은 곧바로 발가벗음의 양가성을 생산하는데, 이 양가성은 로고스 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선의 주체가 동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고양이와 놀 때, 내가 고양이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내게 시간을 내주는 것인지 누가 알랴”라는 지적은 시선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주체의 시선의 전환으로 발가벗고 있는 나를 보는 고양이는 “종이나 유의 존재가 아니라 내 일상에서 대체할 수 없는 생명체”가 되며, “모든 개념을 거부하는 하나의 실존”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응시의 발가벗은 진실”은 다음과 같은 명제를 가능케 한다. 타자의 시선은 응시의 결핍이라기보다는 응시의 충만한 상호보완적 관계의 형성이라는. 이는 어떤 로고스적 언어도 불필요한, 응시하는 동물의 눈에 투영된 인간 존재의 깊은 성찰을 질문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거울과도 같은 동물의 응시에서 인간의 발가벗음의 역설과 양가성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철학적 사유에서
문화적 실천을 상상하기

저자는 앞서 분석한 세 가지 철학적 성찰들을 문화적 실천으로 연장하고자 한다. 이는 인간중심주의의 또 다른 편향이라 할 수 있는 동물중심주의의 담론 틀에 갇히지 않고 현실자본주의, 혹은 당대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문화적 상상과 맞닿아 있다.

먼저 해러웨이를 살펴보면, 저자는 그녀가 말하는 “공진화하는 자연문화”가 사회적인 것의 진보성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동물과 인간의 공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어형변이, 훈련, 후형질과 같은 개념들은 인간의 기술적 섭생과 육화가 가능해진 현실에서 사회적인 것의 진보가 무엇인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해러웨이는 인간과 동물의 공진화의 관계를 자연문화의 관점으로 제시하면서 사회적 진보의 다른 시각을 상상하고 있다. 즉,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그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고, 자연과 기술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사회적인 것 전체의 공진화를 기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아감벤이 말하는 동물의 따분함에서 인간의 개방성을 발견하자는 의미는 어떻게 문화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저자는 화폐 자본을 위한 노동의 시간에서 벗어나 생태적 삶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동물처럼 심심하고 따분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인간이 필요 이상의 노동과 필요 이상의 소비에서 벗어나 생태적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동물화의 가능성으로서 생태적 삶의 필요조건이 동물처럼 따분하게 살아가는 일종의 여유 있는 일상문화의 시간을 확보하려면, 동물화의 잠재성으로 생태적 삶의 충분조건은 과도한 식생활과 문화소비생활을 억제하는 삶의 패턴을 형성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인간과 동물의 발가벗음의 역설을 통해 타자성을 발견하고자 한 데리다의 언급이 자본주의 문화에 좀 더 비판적 관점을 내장하고 있다고 본다. 데리다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전례 없이 동물에게 가해지는 종속을 폭력으로 규정한다. 최근의 유전적, 생물학적, 동물학적 전환의 징후들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자기정의, 자기이해관계, 자기상황과 관련된 것들이다. 데리다가 지적하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착취는 나치가 유태인을 가스실에 던져 넣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폭력의 논리와 같다. 데리다는 이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서 고통, 연민, 동정과 같은 파토스의 문제에 귀 기울이기를 호소한다. 데리다가 자신의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와 발가벗은 채로 마주 대하고 있듯이, 말하지 않은 고양이의 눈에서 타자의 시선과 말의 의미를 간파할 수 있듯이, 일상 속에서 타자의 시선, 타자의 침묵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는 자연과학적으로도 사회문화적으로도 명확하게 경계 짓기 어렵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가장 나은 해석을 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복잡한 질문을 철학에서 찾는 저자의 시도는 하나의 좋은 방편일지 모른다. 논문에서 저자가 살펴 본 세 명의 이론가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관해 공통적으로 ‘상호관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이분법을 넘은 생성의 관점이며, 현대철학의 주요 화두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문화적 실천으로 나아갈 방법을 강구한다. 저자의 말처럼 이러한 접근은 동물담론 계열에서 벗어나 다소 논점을 흐릴 여지가 있지만, 문화연구자로서 해석적 실천을 도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논문에서 살펴본 동물 인간 간의 철학적 관점이 어떻게 구체적인 동물담론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또한 저자가 말한 문화적 실천이 어떤 구체적 양태로 나아갈 수 있는지 후속 연구가 궁금해진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동물의 권리에 대한 윤리적 논의의 현황: 동물해방론과 동물권리론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허남결, 2005, 『불교학보』, 43, 173-199.

「동물의 인격: 시간성에 기초한 후설의 동물존재론 해석」
김태희, 2016, 『철학과 현상학 연구』, 70, 35-72.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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