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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병자호란은 조선시대의 양란 중 하나로 국왕의 출성出城 항복 등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억된다. 김훈의 『남한산성』, 한명기의 『역사평설 병자호란』 등의 책을 통해 병자호란의 비극적 이야기성은 줄곧 강화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호란과 관련 자학적 역사 인식에 대한 제동걸기가 시도되고 있다. 허태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가 발표한 丙子胡亂 이해의 새로운 시각과 전망: 胡亂期 斥和論의 성격과 그에 대한 맥락적 이해(『규장각』, 47, 2015)는 병자호란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통해 당대인이 처한 복합적 정세와 심리적 배경 속에서 전쟁이 새롭게 이해되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한명기, 계승범 교수 등 선행 연구자들의 논문에 의존하고 있지만 비판적 의견도 개진한다.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이자, 1만6천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를 함락한 예친왕 도르곤.
기존의 병자호란 이미지는 무엇인가

허 연구원은 먼저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이전, 광해군만 대명의리에 얽매이지 않고 후금後金 성립기의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다는 식의 상식은, 결과론적 해석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군비를 충실히 한 광해군과 국방을 방기한 인조라는 이분법적 통념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인조반정의 중심 세력은 명나라의 전력이 이미 후금과 상대가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후금의 반격을 받아 조선으로 도주해와 가도라는 섬에서 장기 주둔한 모문룡 군대에 대한 여러 평가를 종합하면 드러난다. 그리고 인조반정 세력은 숭명배금을 표방하며 명의 지원 요청에 기꺼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거듭 표했으나 그로 인한 경제적 곤란 때문에 골치아파하고 있었다. 심지어 지방 민생을 파탄시키고 노략질을 일삼는 모문룡 군대를 토벌하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니 명과의 군사적 연합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사르후 전투 이후 병자호란까지 조선 조정의 논의 과정 중에 명에 대한 원병 요청이나 명과의 연합 작전이 구체적이고 진지하게 논의된 사례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특이한 점은 그럼에도 후금과의 강화講和를 반대하고 내명의리를 고수하는 척화론斥和論이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 조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사르후 전투 기록화. 1619년 명나라에 쳐들어오는 후금에 대항하기 위해 명나라, 조선, 여진족까지 참전한 대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는 크게 패하여 쇠퇴하게되고, 후금은 만주 지역을 차지했다. 군대를 파병한 강홍립의 조선군 부대는 명군의 패배소식을 듣고 급히 진을 쳐서 청군을 막고자 했지만 양익을 잃고 후금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했다.

 

또한 일찍이 나만갑(1592~1642)에 의해 병자호란 패인의 하나로 지적된, 대로 방어를 포기한 산성 위주의 수성 전술 채택도 조선군 지휘부의 큰 패착으로 흔히 이해되어 왔다. 특히 지휘부 등 인적 책임론이 매우 강하게 제시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병력, 군량, 전술, 전략, 병기, 문화 등 다른 군사적 제요소의 종합적 검토를 통해 볼 때 역사의 진실은 ‘필연적’과 ‘역부족’이라는 단어 사이에 놓임을 알 수 있다.

우선 조선은 선조대부터 기마술이 월등한 여진을 상대하기 위해 성에 웅거하면서 화기를 사용해 적을 방어하는 전술을 검토해왔다. 압록강 등지의 성도 개축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도 이런 기조가 계승되었다. 다만 후금이 조선의 예상을 뛰어넘는 공성전 능력을 갖췄다는 점이 비극이었다. 정묘호란에서 이미 이러한 점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병자호란에서 청으로 이름을 바꾼 적은 조선의 자잘한 성들을 굳이 공격하지 않고 국왕의 강화도 천도를 중간에 끊고, 남한산성과 함께 제2의 방어성이었던 강화성을 함락시켜, 국왕이 공식 항복하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강화도의 무기력한 함락 또한 지도부의 비겁과 판단착오, 안일 등이 주요인이었다기보다는 양군의 절대적인 전력 차이에 패배의 중심 요인이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조선은 수전水戰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했는데, 청군의 기발한 소형 선박 작전이 먹혀들어 저항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결론은 당시 조선이 그만큼 허약한 국가였다는 셈인데, 광해군대와 인조대의 군사력 정비 과정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국방력을 단 기간에 끌어올리는 일은 당시 지난한 과제였다. 군역 자원의 확보, 정예 병력의 양성, 군량 비축, 요새 구축, 화포 등의 병기 비축, 군마 육성 등은 정치·사회·경제적 여건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자칫 민심을 험악하게 만들 수만 있다. 일례로 정묘호란 전 병역 자원 확보와 군사 재정 수입의 증대를 위해 추진된 호패법이 어이없게도 전쟁 발발 직후 민심의 반발을 우려하여 철폐된 것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 군대는 100년의 내전內戰을 거쳐 단련된 결과물이다. 집권세력의 의지를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주화론主和論과 척화론斥和論의 실상

이 같은 논의를 토대로 허 연구원은 주화·척화론의 내용과 성격 재고찰로 나아간다. 즉,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에 대한 의리는 지켜야 한다”는 류의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임진왜란 때의 명의 군사적 개입이 대명의리를 고조시키고 재조지은再造之恩(거의 망한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 의식을 심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이 재조지은이 “조선의 유연한 외교적 행보를 크게 제작하여 끝내 병자호란의 패배를 야기했다”는 것이 흔한 상식으로 통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먼저 척화론은 ‘대세大勢’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을 보면 “주화·척화의 논쟁은 당론과 무관하게 제기”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대명의리 척화론이 광범위하게 지지받았던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척화론은 조선 내부의 자발적 동력을 갖고 있었다. 즉, 이것은 후금과 명의 세력관계를 오판한 데서 나온 ‘현실적’ 주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현실성’을 갖고 개진되었는데, “주류적 심성”이라는 ‘민심’이 그 현실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화론을 선제적·공개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상당한 비난과 부담을 감내해야 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그 상황에서 최명길, 김류 등이 “인군人君은 필부匹夫와 다르기 때문에 진실로 보존될 수만 있다면 극한 방법이라도 쓰지 않을 수 없다”며 정치적 부담을 안고 총대를 맸다. 인조반정 주도 세력은 처음엔 척화론을 폈지만 상황에 따라 주화론으로 기울었다. 오히려 나이가 어린 언관들이나 재야 유생들이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한 집단이었다.

그렇다고 최명길이 대명의리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최명길은 청이 요구한 명 잔당 척결을 위한 조선의 출병에 대해 목숨을 걸고 반대했으며, 청과 어쩔 수 없이 사대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편지를 비밀리에 명 측에 보냈다가 발각돼 심양에 끌려가 3년간 구금되어 있기도 했다.

허 연구원은 명에 대해 의리를 지키기 위해 “어느 선까지 희생할 것인가”가 주화파와 척화파의 차이였다고 정리한다. 여기서 그는 한 발 나아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말한 ‘명明’은 보편적 중화의 담지자로서의 명과, 하나의 특수한 왕조로서의 명으로 나뉜다고 지적한다. 조선중화주의는 결코 명의 멸망 이후에 생겨난 의식이 아니었다. 이미 명나라가 살아 있을 때부터 조선 사람들은 중화 문명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내면화했으며, ‘명’이라는 구체적 나라에 대해서는 그 정치·제도·학술·인심 등에 대해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중화 문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명이라는 특정 국가를 조선인이 체득한 중화 문명의 기준에 따라 비판한 결과다. 조선은 “명에서 유행하고 명나라 사람들이 추천하는 것이라 해도 양명학처럼 자신들이 설정한 중화 문명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완강히 거부했다.”

그들에겐 ‘두 개의 명나라’가 존재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인들의 중화 인식이 심화된 결과, 당대인들의 대명 인식 속에 특정 국가로서의 명에 대한 인식과, 보편적 중화문명을 상징하는 명에 대한 인식이 같이 존재했으며, 이것이 척화론과 대명의리론이 제기되는 내면적 맥락이었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지금까지 허태구 연구원의 논문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여기서 간취해낼 수 있는 메시지는 병자호란을 반드시 허둥대다 당한 인재人災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굴욕이든 뭐든 그것을 겪어낸 사람은 당대인들이고 우리는 철저히 그 당대적 콘텍스트를 심화시켜서 역사상을 길어올리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강성민 리뷰위원  review@bookpo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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