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endt

logofinale1978년 보드리야르는 『침묵하는 다수의 그늘에서』를 출간하며 부제로 ‘사회적인 것le social의 종언’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사회적인 것’은 근대적 통치성의 대상 영역으로 구축된, 시민사회의 조직, 원리, 가치를 지칭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것이 종언됐다는 것은 복지국가와 조직 자본주의가 제공했던 직업안정성, 삶의 서사의 연속성, 각종 리스크에 대한 집합적 안전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970년대 이후 사회적인 것의 위기를 경고하고, 그 종언의 불안을 표명한 사회학자들은 보드리야르 뿐만이 아니었다. 투렌은 “사회가 사라졌다”라는 도발적인 언명을, 로장발롱은 “사회적 상상력”이 좌초됐음을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탈사회적 시대’의 파장은 줄어들기는커녕 현재 더 큰 진폭으로 영향력을 과시하며 집합적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인 것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사회적인 것을 가장 선구적인 방식으로 이론적 핵심 개념으로 설정하고, 이를 비판적을 탐구했던 정치철학자인 아렌트(1906~1975)의 논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의 전투: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한국사회학』, 47(5), 2013)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출한 이 ‘사회적인 것’의 개념의 의미론을 분석하고, 이와 대립되는 범주로 제시된 ‘정치적인 것/공적인 것’과의 사회적 상상의 수준에서의 차이를 심층적으로 드러낸다. 사회적인 것에 대한 아렌트의 이 선구적 논의가, 그것의 종언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 갖는 함의는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 ~ 1975
아렌트에게
‘사회적인 것’이란?

아렌트에게 사회적인 것의 개념은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앞선 연구자들의 의미론적 분류를 참조하되 해당 개념을 세 가지 상이한 분석적 차원으로 구분하여 접근한다. 즉,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은 근대적 사회공간에 출현한 새로운 ‘영역’이자, 근대 사회의 새로운 ‘통치 대상’이자, 근대 대중 사회에 지배적인 ‘삶의 형식’이라는 세 가지 의미로 구성된 복합체라는 것이다.

먼저, ‘영역’의 의미로 접근하면, 고대 그리스 이래 서구의 정치사상은 인간의 집합적 삶을, 두 상이한 공간의 이중구조로 파악해왔다. 한편에서는 이성/언어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공적 영역polis, 즉 자유의 공간이 있다. 다른 한 편에는 생물학적 생산/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사적 영역oikia, 즉 필연의 공간이 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인간 활동 공간의 기본적 위상학을 규정하던, 공/사 영역의 이분법은 새로운 제 3영역의 발생에 의해 불가피한 재구조화를 겪게 되는데, 아렌트는 이 새로운 영역을 ‘사회적인 것’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제3의 영역이 바로 가족과 국가 사이에 형성되어 펼쳐지는 국민경제의 영역이다.

다음은 ‘통치 대상’으로서의 사회적인 것. 과연 새롭게 등장한 영역, ‘사회적인 것’은 어떻게 통치될까? 아렌트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을 통치하는 것은 가부장의 도덕적 권위도, 정치 기관들도, 공론장에서의 ‘말하는 입들’도 아니다. 즉, ‘누군가’에 의해서도 통치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사회적인 것을 지배하는 주체는 ‘아무도 아닌 자nobody’다. 개별 행위자들의 의지, 원망, 성취를 넘어선, 익명적 시스템에 의해 사회적인 것 전체가 생산/재생산 될 때, 우리는 그 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의 인격적 주체를 식별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아무도 아닌 자’의 가장 대표적인 메타포가 바로 시장이 스스로를 통치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물론 이를 통해 붕괴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존재가치다.

그렇다면 마지막 의미론인 ‘삶의 형식’으로서의 사회적인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문화적’차원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아렌트는 자신의 첫 저서 『라헬 파른하겐』에서 이미 ‘사회’ 혹은 ‘사회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상류사회와 그에 고유한 사회성의 내용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다. 이 경우 사회적은 것은 “인간 상호작용의 패턴들, 의복, 식사, 레저, 그리고 일반적으로 라이프 스타일에서의 취향의 양태들, 미학, 종교, 그리고 시민적 매너와 외양에서의 차이들, 결혼, 우정, 지인관계들 그리고 상업적 교환을 형성하는 패턴들”을 모두 포함하는 소위 ‘삶의 형식’일반을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매너의 체계’로 이해되는 ‘삶의 형식’은 인간 행태를 표준화/규범화함으로써 문명화에 기여하지만 이와 동시에 “다양성을 부정하고 하나의 관점을 강요하는 척도”를 부여하는 효과 또한 갖고 있다. 특히 아렌트는 루소가 혐오했던 상류사회의 위선적 분위기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비판한 대중문화의 천박하고 텅 빈 속성을 모두 ‘사회적인 것’의 개념으로 묶고 이를 부정적으로 응시한다.

이런 ‘강경한’태도의 배후에는 아렌트의 지적 원천 즉 실존주의 철학의 지적 분위기가 존재한다. 실존주의가 사유의 거점으로 삼는 것은 추상적 인간 존재가 아니라 ‘나’의 실존이다. 즉, 인간 실존은 세인世人적 일상에서 그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야스퍼스가 이야기하는 “죽음, 죄, 운명, 우연”등의 한계상황에서, 그런 상황이 야기하는 절대적 고독 속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개방한다. 그런 경우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인지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의 ‘정치적 실존주의’는 사회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적 분과학문인 사회학에 대한 일관된 비판의 입장을 수반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사회학은 단독자가 영위하는 진정성의 세계, 한계 상황적 체험들을 탐구할 수 있는 인식론적, 방법론적, 윤리적 도구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 바로 사회학이 (삶의 형식으로서의)사회적인 것에 깊이 침윤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로 변신한 신,
사회신학의 논리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공적인 것)은 단순한 개념적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상상’의 차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회적 상상imaginaire social은 “동시대인들이, 그들이 그 안에서 살면서 유지하는 사회들을 상상하는 방식”이자 사회에 대한 “심층의 규범적 개념과 이미지들”이다. 풍경의 수준에서 말하자면, 양자의 차이는 결코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사회 풍경과 말하는 입들이 토론하는 사회 풍경 사이의, 지울 수 없는 차이이다. 저자는 전자를, 칼 슈미트의 용어를 활용해 ‘사회신학’을 구현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에 대응하는 아렌트의 이론적 전략을 바로 ‘행위신학’이라고 명명한다.

저자는 두 신학의 논리를 비교하며 논의의 깊이를 더해간다. 먼저 사회신학의 논리를 살펴보자. 사회신학은 두 가지 해답을 제공하는 논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질서’의 문제이다. 즉 ‘세계 혹은 사회에 어떻게 해서 질서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둘째, ‘악’의 문제이다. 즉 ‘세계 혹은 사회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두 질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보이지 않는 행위자(신)의 존재이다. 전능하고 전지한 존재인 보이지 않는 행위가 선험적으로 가정되면,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시선에는 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날 현상계의 카오스는, 사실 세계 혹은 사회의 전체적 선(질서)에 기여하는 질료로 이해될 수 있다.

사회신학의 의미를 함축하는 메타포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저자는 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의 힘이 단지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사회적 상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시장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사회보험’을 통해 통제하려는 집합적 시도의 결과로 등장한 서구의 복지국가, 사회국가, 혹은 보호국가 또한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보험 역시 개인적 이해관계의 추구라는 유일한 토대 위에 전체적 질서가 생산된다는 것인데, 리스크 앞에서 보험을 들고자 할 때, 사람들은 그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과로 개별적 사건에 대한 집합 회계가 도출되면서 보험의 테크놀로지는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의 한 변이에 불과하게 된다. 즉 근대는 두 개의 유사한 보이지 않는 손을 발명했는데, ‘섭리시장’과 ‘섭리국가’가 그것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사회적인 것’의 대표 제도로 파악한 시장과 복지국가는 모두 ‘사회로 변신한 신’에 다름 아니었다.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
행위신학의 논리

그렇다면 사회신학을 극복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행위신학’의 논리는 무엇일까? 아렌트에게 중요한 질문은 사회신학의 질문인 ‘개인의 악이 어떻게 사회의 선으로 변환되는가?’가 아니었다. ‘어떻게 선한(적어도 평범한) 개인이 특정 사회적 상황, 조직, 환경 속에서 악의 구현자로 변환되는가?’였다. 이 질문에는 인종대학살과 같은 근본악의 현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내포되어 있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한 유명한 리포트에서 아렌트는 사회신학의 역설(개인의 악덕이 사회의 행복)을 통렬하게 전도시킨다.

아렌트에 따르면, 악의 뿌리는 개인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시스템에 내재하고 있다. 악인은 악하지 않다. 그는 평범하다. 악은 악인의 악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무사유성에서 나온다. 정식화하자면, 악은 “사회화에 저항할 도덕적 책임”의 부재 혹은 사회적인 것이 부과하는 공인된 규범과의 윤리적 대결의 부재에서 발생한다. 만일 아이히만이 학살의 명령에 내포된 도덕적 의미를 깊이 사유하고, 무고한 살해를 중지할 것을 의지했다면, 그리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행위로 옮겼다면, 그는 절대악의 실행자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렌트의 행위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만나 ‘사회신학’을 해체하는 ‘행위신학’으로 전환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이 세계에 등장하는 것은 우주가 창조되는 것과 비견할만한 중대한 사건이다. 인간이 탄생했다는 사실은 모든 행위에 내포된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의 원천이 된다. 여기에서 바로 아렌트의 탄생성 개념은 메시아주의로 전화된다.

아렌트의 메시아는 아직 아무 것도 수행하지 않은 자, 미래 밖에는 갖고 있는 것이 없는 ‘아이’이다. 메시아의 도래는 감격적이지만 자못 소박한데, 그것은 메시아가 왔다는 것이 현실적 정치질서의 변화를 자동적으로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렌트의 메시아는 특정 초인이나 계급이나 젠더나 사회적 집합체가 아니다. 반대로 태어나는 ‘나’는 모두가 메시아이다. 왜냐하면, ‘나’는 자연적 흐름, 법칙의 규제, 사회적인 것, 즉 보이지 않는 힘이 허용하지 않은 ‘무한한 비개연성’을 뚫고 어떤 새로움을 이 세계에 가져올 수 있는 행위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사아주의를 반대로 말하면 인간 행위자를 제외한 어떤 존재도 이 세계를 변화시킬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사회신학과 행위신학의 첨예한 대립은 표면상으로는 개념의 대립인 듯이 보이지만, 궁극적 수준으로 내려가면 두 상이한 신들의 싸움이라고 본다. 보이지 않는 신(운명)과 내 안에 깃들여 있는 미약하지만 생생한 신(행위) 사이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 사이의 전쟁이다.

이처럼 저자는 ‘사회적인 것’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과 대안을 역사적, 사상적 맥락에서 자세히 소개한다. 하지만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아렌트의 행위신학에 대한 남아있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이것이 사뭇 비판적이다.

첫 번째는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비판이 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 과연 적절하느냐는 의문이다. 현재는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유동성의 시대, ‘사회적’안전망이 사라진 불안의 시대, 사회적인 것의 대안이 묘연한 시대이다. 이 시대의 고통은 사회적인 것이 발휘하는 억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 자체의 부재에서 온다. 저자는 묻는다 만일 아렌트가 신자유주의가 드리운 이 시대의 어둠을 목격했다면, 사회적인 것에 대한 판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둘째는 행위신학의 대안적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메시아주의와 결합한 아렌트의 행위 이론에서의 ‘아이’는 미래에 더 낳은 세계를 만들어갈 것으로 기대되는 존재다. 하지만 저자는 아렌트의 행위신학도 사회신학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일정한 ‘낙관론’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대안의 부재, 지구환경의 위기, 핵의 문제, 진보 개념의 파산 등의 현상들로 상징되는 ‘미래 개념의 파산’과 대면하여 과연 아렌트의 행위신학은 존속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결국 사회학자로서 저자는 20세기 후반 이후 사회적인 것의 상실을 인지적으로 진단하고 정서적으로 애도하면서, 그것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사회이론가들의 의견에 더욱 무게가 쏠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학의 무용함를 주장한 아렌트와는 달리 21세기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가능한 또 다른 사회적인 것의 원리, 가치, 제도, 윤리, 장치들을 발견 또는 발명하는 사회학의 노력이 현재 더욱 필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마도 마음의 사회학을 비롯한 저자가 현재 전개해나가는 이론적인 노력들이 그러한 창의적인 대안들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사회과학과 예술 간 융합교육의 필요성과 가능성: 한나 아렌트의 ‘행위’ 개념을 중심으로」
서덕희·이희용, 2015, 『문화와융합』, 37(2), 31-60.

공적 영역의 상실과 현대사회의 위기: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중심으로」
정미라, 2015, 『철학논총』, 81, 241-258.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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