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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영화 작가주의에 대한 비판적 연구」 (『씨네포럼』, 22, 2015)는 동국대학교의 김영일 씨가 주저자로, 같은 대학교 김정환 교수가 교신저자로 이름을 올린 2015년 논문으로, 영화 비평 이론으로서 작가주의의 유효성을 다른 예술 분야 비평 이론과의 비교 및 영화 작가주의 비평 이론 등장의 역사적 맥락의 두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다.

 

작가주의 영화 이론 등장의
역사적 맥락

영화에 있어 작가주의란 비평의 방법론이면서 동시에 창작의 방법론이기도 했다. 작가주의는 2차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프랑소와 트뤼포를 위시한 『카이에 뒤 시네마』지 필진들에 의해 주창되었다. 이들이 작가주의, 혹은 그 의도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나는 초기 명칭인 ‘작가정책’을 입안한 것은 영화를 예술의 독립적인 한 장르로서 자리매김시키고자 하는 기획이었다.

비시 프랑스 정권기를 거치며 프랑스의 영화인들이 대거 해외로 망명함에 따라 프랑스 예술영화의 전통은 단절되었고, 영화 시장은 시나리오 작가가 각본을 쓰고 감독은 각본에 충실하게 기술적인 촬영의 역할만을 담당하는, 상업적이고 문학 의존적인 형태의 영화가 지배하게 되었다.

이같은 풍토에서 영화는 대중 엔터테인먼트로만 여겨졌다. 2차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 영화계에서 설정된 과제는 이같은 인식을 타파하고 영화를 예술로서 (재)격상시키는 것이었는데, 특히 ‘카이에’ 그룹의 경우 그를 위한 전략 면에서 영화를 ‘종합 예술’로 파악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는 기존에 영화가 문학에 종속되는 하위 장르로 간주되었듯이 다른 예술들에 종속 내지 파생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어 영화라는 예술 장르의 고유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논리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작가정책을 주창한 평론가이자 누벨바그를 주도한 감독이기도 했던 프랑수아 트뤼포(1932~1984). 위키미디어 공용, Natinaal Archief, by Jac. de Nijs / Anefo, CC BY-SA 3.0 NL
작가정책을 주창한 평론가이자 누벨바그를 주도한 감독이기도 했던 프랑수아 트뤼포(1932~1984). 위키미디어 공용, Natinaal Archief, by Jac. de Nijs / Anefo, CC BY-SA 3.0 NL

 

트뤼포가 주도한 카이에 그룹의 전략에서 영화의 예술로서의 격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영화만이 갖는 장르적 특수성을 찾아내 부각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예술로서의 영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간주되며 그것을 통해 인정받고 칭송받는 ‘주체’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영화의 장르적 특수성, 즉 ‘영화성’은 영화가 ‘영상’을 이용하는 예술이라는 사실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그에 따라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의 재료를 제공할 뿐인 역할로 격하되고, 영상으로서의 영화를 제작하는 일을 총괄하는 감독이 영화 예술의 주체로 부각되었다.

이로써 영화는 감독이라는 이름의 한 작가가 자신의 개인적인 감각과 경험, 사상을 지극히 사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형식으로서 소설, 회화 등 다른 예술과 함께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카이에 그룹은 감독이 영화 제작의 전 과정에 개입하여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저야 하며, 그럼으로써 영화를 통해 감독 개인의 고유한 스타일을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평의 중심적인 대상은 작품에게서 작가, 즉 감독에게로 옮겨갔으며, 심지어 개별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 감독이 작가적 감독이라면 작품은 감독의 고유한 스타일을 드러내는 매개로서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가적이지 않은 감독의 수작보다 작가적 감독의 졸작이 더 가치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작가주의 비평가들은 작가적인 감독과 그렇지 않은 감독을 구별하는 작업에 했으며 일부 ‘급진’적인 비평가들의 경우 작가들을 서열화하기도 했다. 이같은 경향은 트뤼포에게서부터 이미 발견되는데, 『카이에』에 실린 1954년 논문에서 트뤼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입장을 피력하며, 이 입장들은 작가주의 경향의 뼈대를 형성하게 된다.

“첫째, 영화에서의 작가는 오직 하나뿐이며 그것은 바로 감독이다. … 둘째, 이 정책은 선입관에 의거하고 있으며 가치 평가적이다. 작가는 실패작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남을 수 있지만, 작가가 아닌 감독은 영화가 성공해도 작가로 인정받을 수 없다. 작가와 작가가 아닌 부류의 감독은 절대 섞일 수 없으며 그 구분은 불변한다. 셋째, 작품에 앞서 작가가 존재하고, 작품 없이도 작가는 평가받을 수 있다. 또한 비범한 작가의 실패작은 평범한 작가의 성공작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1962년작 영화 ‘쥘과 짐’의 한 장면.
문학 비평 이론들과의
비교 및 비판

김영일 씨에 따르면 작가주의 영화 이론은 작가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는 문학 비평 이론 가운데 전기적 비평과 비교할 수 있으며, 작품의 스타일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는 형식주의 비평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전기적 비평은 작가가 살아온 시대상과 사회상을 아울러 살피면서 그것들이 작가와 작품세계에 끼친 영향을 중요하게 보며, 형식주의 비평에서는 미학적 실체가 언어적 형식 속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간주하여 작가를 작품으로부터 분리하고 작품 자체에만 주목한다.

두 문학 비평 이론 모두에서 창조성의 원천이자 작품 속 모든 미적 가치의 주인으로서의 ‘작가’라는 존재는 해체되는 셈인데, 이 점에서 작가주의 영화 이론의 작가 개념은 두 문학 비평 이론 모두와 구별된다. 즉, 김영일 씨가 보기에 작가주의 영화 이론은 문학을 비롯한 타 예술 분야의 비평 이론에서는 닮은꼴을 찾아볼 수 없는, 영화 비평에서만 존재하는 특이한 이론인 것이다.

한편으로 전기적 비평은 시대상과 사회상이 작품에 끼치는 영향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 비해 형식주의 비평에서는 작품 외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다는 점에서 둘은 상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작가주의 영화 이론에서는 둘이 “행복하게 결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점을 김영일 씨는 의아하게 여긴다. 김영일 씨는 그럴 수 있었던 이유로 앞서 설명한 작가주의 영화 이론 등장의 역사적 맥락을 들면서, 작가주의가 “논리적인 귀결에 의해 만들어진 비평적 방법론이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서 요청된 영화 비평의 태도”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문학 비평에 없는 이론적 틀이 영화 이론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해당 영화 이론에 대한 비판이 충분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는 당연히 없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는, 역으로 문학 비평에 기존에 없었던 이론이 영화 이론으로부터의 영향으로 새롭게 도입될 수 있는 가능성도 순전한 논리의 영역에서는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리뷰가 그같은 기획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1999년에 『씨네포럼』 제 1호에 실린 김준기 씨의 논문 「영화의 작가에 관한 연구(1)」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창조성의 단일한 원천으로서의 ‘신적인 작가’라는 관념이 예술 이론에 있어서 해체된 것은 근대 철학에서의 데카르트적 주체가 현대 철학에 이르면서 해체되어 온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롤랑 바르트는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죽음’을 선언한다. 바르트는 작품과 텍스트를 구별하고 둘을 기호학적으로 이해하면서, 텍스트라는 ‘기표’는 어느 한 단일한 ‘기의’에 고정적으로 결합할 수 없고 무수히 많은 의미들에 대응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존에 작가가 작품의 의미를 독점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하나의 올바르고 객관적인 해석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던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다양한 비평(가)들이 존재할 수 있고 그 비평가들이 텍스트 속에서 “놀고 작업하고 생산하고 활동하는 데”에서 무수히 많은 다양한 의미들이 생산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바르트의 시각에서는, 의미들은 텍스트와 작가 이전에 이미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다가 텍스트 속에서 잠시 교차한 뒤 다시 무수히 많은 다양한 의미들로 흩어져 나가는 것이고, 작가란 단지 의미들 가운데 일부가 통과해 가는 한 지점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이후 몇몇 감독들에 대한 ‘작가론’에 해당하는 글을 쓰는데, 이는 창조적 원천으로서의 ‘작가’ 개념은 해체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미들이 일시적으로 고정되는 지점”으로서의 ‘작가성’은 존재하며, 그 위치는 작가에게서 이동되어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유동적 관계 속에 놓이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푸코는 바르트가 작가를 해체했다고는 하나 작가가 사라진 자리를 “선험적인 익명성”으로 바꿔놓았을 뿐으로, 여전히 마치 이전의 ‘작가’처럼 절대적인 특권을 갖는 무언가가 텍스트를 둘러싼 의미와 해석들 속에 있게끔 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푸코는 ‘작가’와 “작가-기능”을 분리하는데, 그럼으로써 사회와 담론들로부터 영향받는 상대적인 주체로서의 ‘작가’를 상대적으로나마 인정하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판할 수 있고 분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다시금 있게끔 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논쟁을 거치면서 작가주의 영화 비평이란 이미 그 최초의 형태를 벗어나, 작가가 더 이상 창조적인 의미의 근원이 아니라 사회와 담론들의 산물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텍스트 해석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는 여러 맥락들이 모이는 지점으로서 ‘작가’라는 개념의 유용성을 인정하여, 다소 상대적이고 유예적인 차원에서 작가에 대한 분석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김영일 씨의 작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쩌면 다소 허수아비 때리기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긴다. 초기에 작가주의 비평가들이 영화를 예술로 격상시키고자 하는 인위적인 의도에 따라 영화 감독을 고전적 의미의 작가로서 신격화시킨 것에 대해 김영일 씨의 비판이 유효하다 할지라도, 그같은 논쟁의 지점들이 이미 영화 비평 내부에서의 비판을 통해 해소되거나 혹은 다른 논쟁의 지점으로 이행하여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 가지 정도 더 지적하자면, 김영일 씨가 다소 도식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논리적인 귀결에 의해 만들어진 비평적 방법론”과 “필요에 의해서 요청된 영화 비평의 태도”는 딱 잘라 분리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독립적인 예술 분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당위 명제는 “영상 예술은 고유한 예술 분야로서의 가능성을 가진다”는 사실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귀결’되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오늘날 후자의 명제는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반박의 지점은, 카이에 그룹에게 있어서는 이론적 분석과 창작의 실천이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 비평 뿐만 아니라 창작의 영역까지도 넘나든 카이에 그룹의 실천은 누벨바그라는 형태로 영화사의 한 시대를 풍미했고, 감독을 영화 예술의 주체로 부각시킴으로써 영화의 고유한 예술성이 인정될 수 있으리라는 이들의 예측은 그 실천 속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입증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같은 이론과 실천의 결합은 어쩌면 앞으로의 창작과 비평에 있어서도 다시금 요구될지도 모른다.

강병준 리뷰어  iyyagg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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