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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2010년대 이후 한국 담론장에서 유행처럼 번져온 키워드는 바로 재난, 재앙, 파국, 천재지변, 폐허 등으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사건들을 암시하는 심상들이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은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영구적 승리를 선언한 이후로 예고되어 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와는 다른 세계, 다른 질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표지하는 일말의 가능성이 비치지 않을 때, 가능한 것으로 현상하는 정치는 단독적이고 일회적이며 반성 불가능한, 은총처럼 개시되는 사건의 정치학, 혹은 메시아주의이고, 그 반대급부에서 나타나는 것은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상들에 거리를 두면서도 이와 관련된 유비들을 체현하고 있는임옥희의 「재난 이후, 추락의 재의미화: 페미니즘은 어디로」(『여성학연구』, 25,  2015; 이 논문은 후에 저자의 저작 『젠더 감정 정치』(2016)의 부분으로 묶여 나왔다)은 흥미롭게도 재난 이후의 젠더정의와 페미니즘정치의 가능성을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헌데 어째서 저자는 재난과 페미니즘을 연결하고 있는 것일까?

우선 그는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 사태로부터 한국사회의 “미래가 가라앉고 있는 듯한 묵시록적인 비전”을 보게 된다고 말하며, 이를 1997년의 IMF,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와 병치한다. 그는 어떤 기대와 희망도 갖기 힘든 조건이 편재할 때, 파국의 상상력이 도처에 함께 편재하게 된다고 말하며, <지구를 지켜라>에서 등장하는 편집증에 시달리는 주인공, 인간사냥꾼들로부터 달아나며 방랑하는 「더 로드」 문화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사례들을 열거한다. 그런 한편 저자는 재난이 신의 심판으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재앙” 또한 그러한 천재지변으로 여겨짐으로써 재난의 효과는 개인이 감내해야할 책임이 되며, 재난의 일상화와 동시에 비극은 과잉상태와 과소상태에 빠진다고 말한다.

 

종말론 대잔치

이런 상황에선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에서부터, 페미니즘의 종언 등 갖은 종언의 시리즈들이 들끓는데, 저자는 페미니즘 또한 종말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한다(이 논문이 발행된 2015년 초만 하더라도 영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의 소요에서부터 시작된 페미니즘의 대약진(?)이 가시화되기 이전이라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저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재난이 망각되는 것인데, 그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일어나지 않은 사건처럼 취급된다”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법의 제정이 아니라, 오래오래 잊지 말고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이라 말한다.

잠시 다른 접근을 소개하자면, 이와 대조적으로 서동진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롯한 일군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세월호와 같은 사안을 통해 주체화되는 것과 별개로, 많은 이들이 파국, 재난과 같은 심상과 사건들에 우리가 매료당하는 이유를 캐물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바 있다(「변증법의 낮잠」, 2014). 요컨대 삼풍백화점 이후 한국사회, 와우아파트 이후 한국사회, 성수대교 이후 한국사회라는 식의 문제설정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현 시점엔 재난을 둘러싼 ‘애도의 공동체’와 ‘애도의 정치학’이 저항의 유의미한 준거로 격상되느냐는 것이다. 그는 제임슨 식 표현으론 역사 감각에 해당될 법한 적대 혹은 규정적 부정성의 상실이, 재난과 파국에 관련된 ‘사건event’들을 소비하도록 하는 기제가 아닌지 질문하며, 세월호를 둘러싼 지식인들의 반응이 역사에 대한 실어증에 가까운 것이 아닌지 추궁한다(한편 이러한 서동진의 문제의식은 주체-객체, 표상, 재현, 개념으로부터 도피하며 존재론의 실체화로 나아가는 사변적 실재론, 객체지향적 존재론 등 그레이엄 하먼, 브루노 라투르를 위시한 신유물론의 흐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볼 때, 본 논문의 저자(임옥희)는 어떤 희망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조응하는 의식형태가 바로 “파국의 상상력”이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국’과 관련된 담론들을 이데올로기로서 규정하면서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재난들이 날마다 일어난다”고 말할 때는 ‘파국(재난)’을 일종의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인 것으로 자연화시키는데, 이는 그가 양자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거나, 개념상의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어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국은 새로운 꿈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말하며 벤야민의 환등상 개념을 인용한다. 즉 “파국적 상상력의 충격이 마비를 초래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환등상’과 같은 꿈에서 깨어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파국적 상상력은 환등상의 고착에 봉사하는 화석화된 신화인 동시에 미래의 창조적 가능성을 암시하는 회복과 치유이며, “폐허에 남겨진 사물들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바닥모를 추락의 순간은 꿈에서 깨어나는 각성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때 파국은 종언이면서 시작인 것으로 간주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의 종언은 한편으로는 몰락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작”으로 볼 수 있고, “페미니즘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편차와 틈새로 인해, 다양한 페미니즘으로 귀환할 것”이라 주장하는데, 이러한 진단 직후 페미니즘의 귀환정도가 아니라 페미니즘의 광풍이 불어닥친 상황을 생각하면 꽤 의미심장하다(허나 메르스갤러리에 이어 메갈리아에서부터 워마드, 혹은 트위터 등지의 성폭력아카이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전선(?)이 남녀 간의 투명한 대립으로 상상되며, 그로부터 어떤 물질적인 원인과 기제도 찾지 못하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역시 지식인의 역할은 파국을 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전선을 철저히 상징화하고 원인을 규명하는 일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저자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추락한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자들(조앤 스콧, 낸시 프레이저 등)을 언급한 뒤, “매춘, 성노동, 성폭력, 성희롱, 강간을 비롯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대상화하고 물신화하는 것에 대한 페미니즘의 저항은 젠더 정의의 실천이 아니라 남성을 거세하려는 ‘불편하고 편파적인’ 젠더당파성으로 읽”히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이러한 역설을 드러내 보여주는 존 쿳시의 소설 「추락」을 검토한다. 저자에 따르면 가야트리 스피박이 비평한 적 있는 이 소설은, 페미니즘의 정치학에 화두를 던져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국의 재의미화
숭고한 결단?

「추락」의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는 이혼한 중년 남성이자 전형적인 가부장적 백인 지식인으로서,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교수로 재직하며 따분하게 학생들을 가리키는 인물이다. 그는 이따금 매춘으로 성욕을 해결하며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한 여학생과 잠자리를 하게 되고, 그녀가 루리를 신고함으로써 성희롱혐의를 지고 진상규명위원회에 추궁 당하게 된다. 적당히 합의하고 심리 상담을 받으며 사과를 한다면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는 외려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를 되물으며 자신을 변호한다. 그는 자신이 법적으론 유죄임을 인정하지만 그에 반성하지는 않겠다고 말하며, 중년 남성의 사랑을 불가능한 것으로 단죄하는 페미니즘적 윤리에 반발한다. “사랑을 권력관계로 해석하고 나이를 초월할 수 있는 낭만적 사랑과 에로스를 세대간의 거래로 정치화하는 페미니즘적인 해석을 그는 수긍할 수 없”는 것이다. 루리는 몰락을 경험하고 딸 루시가 사는 케이프타운 고지대의 흑인거주지로 건너간다. 루시는 레즈비언이며, 꽃 농사를 지어 팔고 동물복지와 관련된 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보는 아버지에게 루시는 완곡하게 자신의 활동이 사회적으로 위계 지어진 ‘좋은 일’보다 못할 것이 없음을 어필한다. 그녀에게는 “여기에서의 삶이 유일한 삶”이며, 이를 “동물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인간과 동물의 차이와 분할은 없고, 따라서 더 높은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관해 부녀는 완전히 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다. 그러던 중 흑인 강도들이 루시의 집에 칩입하여 루리를 가둬놓고, 루시를 강간한다. 루리는 경찰에 신고해야한다고 말하며 강간범들을 처벌하여 정의를 실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루시는 이를 역사적 부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신고를 원치 않는다. 루시는 강간으로 인해 생겨난 태아를 지우려하지도 않고, 강간을 사주한 흑인 농장주의 세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한다. 루시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하며, 이는 단순히 굴욕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루리는 자신이 저주했던 결혼, 가정, 아이 등이 딸을 통해 되돌아옴을 확인하고, 자신이 끌고 다녔던 수컷강아지를 안락사 시키는데, 이는 모든 소여의 질서로부터 추락한 루리 자신의 상징적 죽음을 암시한다. 모든 체계와 상징으로부터 이탈하여 무nothing의 상태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루시는 정상적인 이성애가부장제가 규정했던 것들을 전부 깬 인물이다. 레즈비언이면서 강간으로 임신한 아이를 낳고, 강간을 당했음에도 도무지 그것을 고발하고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짓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의 품위를 측정하는 화폐인 이성애정상성에 부착된 재생산과 애정가치를 완전히 치욕으로 몰아넣는다. 그녀는 강간을 치욕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역사의 부채를 변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19쪽)

저자는 소설이 그리는 타자로서의 루시는 추락의 의미를 재의미화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때 “역사의 부채를 여자를 통해서 갚아야”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역사의 부채를 상환하기 위한 알레고리적인 인물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게 루시의 결단은 페미니즘이 다시 시작할 지점을 암시하는 환유적 표지이다. “루시는 부채의 역사를 상속함으로써 미래를 약속하는 자”이며,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하고, “부채의 청산과 더불어 치욕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루시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치욕적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순순히 그 점을 인정한다”는 말인데, 이는 상징계를 갖지 않는 동물과 그녀가 맺는 도착적인 수평적 관계에서부터 암시된다. 그녀는 대상과의 모든 거리와 차이를 존재론 속에서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모든 사물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인간과 동물의 거리는 삭제된다. 언어와 기호, 상징, 재현의 지배를 유발하는 기제를 끝까지 상대하고 그것을 탐색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목가적이고 관조적인 영성주의와 관계하는 동일성이 그 자리를 채운다. 언어가 수반하는 동일성은 지배와 공모하는 현실적인 환상이지만, 반대로 존재론이 수반하는 비위계적 동일성을 택한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또한 그조차도 결국 언어를 매개로 사고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저자가 루시의 선택을 지나치게 낭만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녀에게 역사의 부채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고행(흑인들에 의한 욕보임)을 통해서, 주관적으로만 해소될 뿐, 결코 백인들의 식민통치와 지배의 흔적을 객관적으로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의 부채를 객관적으로 지양하는 것이라기보다 역사로부터의 도피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루시의 실천은 급진성을 담지한 세속화된 시민의 저항윤리가 아닌, 전근대적 소승불교의 구도자와 유사하다. 오히려 모든 상징(여기엔 지배와 위계가 포함되지만, 인권 또한 포함된다)을 거부하는 순간 도래하는 것은 추상적 상징의 위계적 배열 보다 끔찍한 구체적인 인격적 예속(강간을 모의한 농장주에게 보호를 받고자 하는)인 것이다. 이런 견지에선 “자기 자신에게 타자라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굴욕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야말로 심리의 영역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기에 상호주관성과 주체의 탈중심성을 강조하는 버틀러식의 테제는 외려 소여의 지배와 공모한다. 차라리 우리는 부르주아적 주체 개념으로부터 달아나는 순간 ‘나’와 대상세계와의 비판적 거리마저도 소멸하게 된다는 역설을 떠올려야하는 것이 아닐까.

글로벌 타자의 몫과
글로벌 젠더정의를 위하여

그러나 저자는 “치욕 속에서 평등해지고 내가 타자를 관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제나 타자에게 포획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추락의 시학이라고 한다면, 추락 가운데서 ‘마법적으로’ 구원으로 나갈 수 있는 비상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라며, 루시의 행위를 긍정하고, 이를 “지구적 젠더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단초로 출발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여자들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비체로 떠”도는 상황을 지적하며, 그 예로 제 1세계 남성들을 욕망하는 우크라이나 여성들, 한국의 남성들을 욕망하는 베트남 여성들, 외국인 신부를 거느린 스위스 남성들이 기거하는 태국의 스위스마을을 예로 든다. 이어 그는 하층 이주노동자들의 초국가적 이동이 ‘아래로부터의 초국적 실천’을 유발하며, 이는 “다국적 혼종성을 재영토화”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즉, “결혼이주는 사랑, 신뢰 등의 감정교환과 송금 같은 물질적 지원이 새롭게 교환가치를 획득하는 ‘초국적 호혜관계’의 한 형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글로벌 경제질서 속에서 몫 없는 자들로서의 여성들의 몫을 찾기 위해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는 ‘지구적 젠더정의’를 실현해야 하고, 그 방안은 ‘최소수혜자 차등원칙’에서부터 시작해서 “비체화되어 배제된 사람들, 잉여, 좀비, 유령으로 떠도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러한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저자의 주장을 따라, 지구적 차원의 ‘젠더정의’ 혹은 지구적 규모의 젠더윤리학을 설립해야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글로벌 자본세’를 부과할 것을 역설했듯, 세계화 이후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더 이상 일국적 차원의 해법으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국민국가가 강제할 수 있는 법 제정의 효과와 위상을 무시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는 양자를 동시에 사고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추락을 대하는 루시의 태도를 논한 저자의 주장은 페미니즘이 폐허 속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추는 유비에 가까울 것이다. 허나 이제 저자의 바람대로 페미니즘적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시점에, 우리는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 전통적으로 경험은 이성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저평가되어 왔기에, 말할 수 없는 것, 상징화에 저항하는 것, 언어 외부에 있는 것, 남성의 부정항으로서만 존재하는 것 등으로 특징지어진 ‘여성’ 주체에 관한 논의는 마찬가지로, 경험의 소멸을 한탄하고 경험의 계기들을 강조한 벤야민의 논의에 매료당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보여준 루시의 결단에서 볼 수 있듯, 파국적인 사건에 대한 침잠은 그와 한 짝을 이루고 있다. 허나 그런 속에서 글로벌 젠더정의를 제정하고 설립하는 일은 이뤄질리 만무하다. 세계적 차원의 불평등을 인지시켜주고, 일국적 규모 이상의 젠더적 양태를 일깨워주는 것은 결국 추상적인 이성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사건, 혹은 반대로 말해질 수 없는 사건 자체가 정치의 대상이 되는 한 페미니즘은 남녀 대립의 구도 이상의 전선을, 혹은 대립을 구조화하는 기제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취해져야할 첫 번째 단계는 파국을 논하지 않은 채 정치를 사유하는 일이 아닐까. 외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적 시간성 속에서 정치를 사유하는 일이 아닐까.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구원 없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2000년대 한국문학에 나타난 ‘재난’과 ‘파국’의 상상력」
정여울, 2010, 『문학과 사회』, 92, 333-346.

「증오, 폭력, 고발: 반지성주의적 지성의 시대」
서동진, 2017, 『황해문화』, 94, 87-103.

정강산 리뷰어  wjdrkdtks9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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