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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자기의식이란 간단히 말해 ‘내가 나를 의식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좀 더 성찰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는 곧 주체인 내가 그 자체로서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 근대성이 바로 이런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서양에서 근대는 데카르트에 의해 정립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데카르트에게 자기의식은 곧 자기동일성이고, ‘나’는 바로 이 자기동일성 속에서 존재함으로써 모든 진리의 척도와 원형이 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근대도 서양과 같았을까? 식민지 시대를 근대로 본다면 같지 않을 것이다. 자기동일성을 보편적인 자기의식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비극적인 자기상실의 시대였다.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자아에게 가장 큰 고통이 된 시대이기에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시급한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데카르트에게서처럼 주체의 자명성이나 자유에 존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 시인들 가운데 유독 자기의식을 자기상실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시인이 있다. 바로 윤동주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윤동주의 이러한 측면을 윤동주와 자기의식의 진리(『코기토』, 69, 2011)에서 분석한다.

타인을 노래하지 않는
시인

윤동주는 타인을 노래하지 않으며 오직 집요하게 자기에게만 몰입하는 시인이다. 저자는 이것을 분열의 자기의식이라 부른다. 이 분열의 자기의식이 또렷하게 표현된 시 「또 다른 고향」을 살펴보자.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은 주체가 자기에게 돌아왔다는 의미다. 데카르트였다면 자기에게 돌아와 발견한 것은 자기동일성과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고향에 돌아와 만난 것은 자기가 아니라 제 백골이었다. 물론 이 백골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지만 그것은 부정된 자기, 주체의 능동성을 빼앗긴 자기이다. 여기에 진리는 없다.

하지만 비진리의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주체는 결국 어둔 방에서 우주로 통한다. 세계가 어둠 속에서 꽃잎처럼 열린 것이다. 데카르트가 자기 내면의 빛으로부터 영원한 빛인 신에게로 나아갔다면 시인은 어두운 좁은 방으로부터 세계로 나아갔다. ‘나’는 오직 슬픔 속에서 ‘나’에게로 돌아가고 또한 슬픔 속에서 고립된 ‘나’를 넘어간다. 슬픔의 어둠 속에서 열리는 세계는 다른 종류의 보편이다. 이처럼 자기 속에서 세계를 여는 자아는 자기 속에서 분열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 이상 시인에게 최종 안식처로서 고향은 없다. 그는 고향을 잃어버렸기에 하나의 고향은 끝없이 “또 다른 고향”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자는 이런 사정을 「길」에서 찾는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데카르트의 길이 의식의 명증적인 자기확신의 길이라면 시인의 길은 자기상실로서 자기의식의 길이다. 하지만 자기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잃어버렸다 하면서도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모른다. 또한 잃은 것이 자기이니 찾는 것도 오직 자기 속에서만 가능하다. 자기를 찾기 위해 두 손으로 제 주머니를 더듬지만 그것은 물건이 아니기에 거기에 없다. 결국 상실의 자기의식은 자기를 초월하여 외부를 지향하게 된다. 그 지향은 끝없이 자기를 찾아 나가는 길이며, 저자는 그것이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세계에서
소외된 자아

어쩌다가 시인은 이토록 치명적인 자기상실과 자기분열의 의식에 이르게 되었을까? 저자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윤동주의 시가 변화된 과정을 살펴본다. 앞에 소개된 두 시는 모두 1941년 9월에 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3년전 시 「새로운 길」에서만 하더라도 시인이 말한 “나의 길”은 그저 “새로운 길”일 뿐이었다. 새로운 길은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하던 길이며, 외부 세계의 대상에 몰입한 의식의 길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대상적 사물의 세계에는 막힌 담이 없다. 시간과 공간에 단절이 없는 것처럼 세계 내 사물들은 단지 새로울 뿐 본질적인 단절을 보여주지 않는다. 저자는 이를 진부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윤동주의 시에 근본적 전환이 일어나는 시기는 언제인가? 저자는 『새로운 길』보다 한 해 뒤에 씌어진 「자화상」에서부터라고 본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
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
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자화상은 의식의 자기복귀, 곧 자기의식의 시적 형상화이다. 저자는 이 시를 통해 윤동주가 대상의식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자기의식의 단계로 진입했다고 본다. 자기와의 만남이 외딴 우물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것은 세계로부터 소외된 자기의식의 은유인 것이다. 시인은 세상에서 멀어져 외딴 우물로 와 “가만히” 들여다본다. 저자는 이 조심스러움이 세계로부터 소외된 모든 자기의식에게 너무도 자연스런 몸짓이라 말한다. 그러나 시인이 우물 속에서 먼저 보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달과 구름과 하늘과 파아란 바람 그리고 가을이다.

자기반성의 거울 앞에서조차 시인은 자기와 또렷이 대면하지 못하고 대상 세계인 자연을 먼저 보는 것이다. 거기 아직 자기는 없다. 다만 한 사나이가 있을 뿐. (102~103쪽)

자기를 찾아 온 우물에서 낯선 사나이를 본 시인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갔으나 그가 가엾어져 다시 우물가로 돌아온다. 시인의 자기의식은 이처럼 돌아옴이 떠남이요 떠남이 돌아옴이다. “마찬가지로 자기에 대한 미움이 또한 자기에 대한 연민이요 사랑이다. 시인의 자기의식 속에서는 이 분열과 그에 따른 운동이 시간의 본질이다.” (104쪽)

서양이 근대적 주체를 강조한 데 반해 한국인에게 근대적 자기의식은 타자에 의한 자기상실과 그로 인한 내적 자기분열의 확인이었다. 분명 데카르트적 주체와는 다른 주체였으며, 그 주체를 잘 드러낸 시인이 윤동주였다. 저자에 따르면, 윤동주는 자기상실과 자기분열 속에서 기의 없는 기표 또는 한갓 은유로서 부유한다. 마치 “풀포기나 뜯고 있는 한 마리 양”처럼 말이다. 이 주체성의 은유를 저자는 철학자로서 개념적 사유 속에서 해석하고 있다.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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