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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2016년 말에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5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 결과’에 따르면 2015년 한국의 1인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의 27.2%에 해당하는 520만 가구라고 한다. 1인가구는 2015년 주된 가구 유형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 50.2%에 해당하는 260만 가구가 여성이다. 남성 1인가구를 지칭할 때와 달리, 여성 1인가구에 대해서는 독신·비혼·노처녀·골드미스·올드미스·싱글·돌싱 등 다양하게 명명하며 ‘노처녀 히스테리’ 등의 언어로 평가·분류하고 범주화한다. 여기에는 ‘혼자 사는 여성’에 대한 호기심과 경계, 염려나 배려 등 유난스럽고 특별한 사회적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혼자 사는 사람이 ‘대세’인 세상이지만, 여전히 이성 간의 결혼을 전제로 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에 지금의 1인가구와 비슷한 형태로 살았던 여성들에 대한 연구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정지영의 조선시대의 외람된 여자 ‘독녀’: 위반과 교섭의 흔적들(『페미니즘 연구』16(2), 2016)에서는 ‘독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던 여성들이 그 이름을 통해 어떤 삶의 전략과 행위성을 구사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 논문은 ‘정상가족’의 경계에서 자신의 생존을 영위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때로는 그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의 규범을 위반하기도 하고 그것과 협상하기도 하는 21세기 ‘독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비가시화된 서발턴
‘독녀’ 기록을 읽는다는 것

조선 시대 ‘독녀’는 남편과 자식이 없는 나이가 든 여자를 가리킨다. 때로는 과부라는 말과 혼용되기도 하고 중첩되기도 한다. 하지만 독녀는 남편뿐 아니라 자식이 없어서 나이 들어 의지할 곳 없는 상태의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엄밀하게는 과부와 구별된다. 그들은 부모·자식 관계, 부부관계 등의 관계 밖에 놓여 있으며 혼자이면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또는 의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규범에 따라 누군가 다른 남자에게 소속되어야 했던 조선시대 여자의 규범적 정상성 밖에 놓여 있었다. 남자가 혼자인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자가 혼자인 것은 불쌍하고 불안하며 위험하다. ‘불성인: 온전치 못한 존재’라는 것이 그들을 묶는 이름이었다.

과부들이 집에서 술을 팔았던 ‘내외술집’의 풍경. 조선 18세기 회화로 추정됨. 출처: 리뷰 아카이브

조선시대 인구를 늘리는 동시에 ‘부부’의 일원이 되어 백성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는 혼인 장려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나이 들어서 혼인하지 않은 처녀를 “성질이 사납다”고 표현하며 비난하고 폄하하곤 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독녀’는 더욱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보호할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녀들을 특정한 ‘범주’로 묵어내고 분류하는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정지영,  「조선시대 ‘독녀(獨女)」’의 범주: ‘온전치 못한’ 여자의 위치」, 『한국여성학』 , 32(3), 2016)

조선시대 ‘독녀’에 대한 기록은 주로 국가의 공식 문서인 호적대장과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관찬 자료에만 남아 있는데, 그 자료 속에서도 그녀들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내용을 찾기는 어렵다. 역사적 기록 속에 비가시화 된 그녀들은 국가에서 금하는 일을 범했거나, 특별한 물질적 지원을 요구하거나, 호소문을 올린 일에 대한 처리 과정의 논의 속에 모습을 남겼다. 그녀들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거나 기록되지 못한 비가시적 존재들이었으며, 역사 속에서 지워졌고,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그녀들을 부르던 이름과 함께 사라진 존재들이다. 또한, ‘독녀’는 조선시대 지배 규범인‘삼종지도(三從之道)’에서 전제한 정상적 여성이 되기 위한 기본 전제인 혼인의 밖에 놓인 존재이기도 했다. 연구자는 그러한 점에서 그녀들이 신분과 성별 등의 경계와는 또 다른 경계 밖에 놓인 채 스스로를 서술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대변하지 못한 ‘서발턴’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연구는 기존의 역사서술에서 비가시화되어 있던 ‘독녀’라고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삶의 기록을 찾아, 그녀들이 그 ‘독녀’라는 이름을 활용하면서 유리한 위치에서 교섭하고 위반했던 흔적을 읽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 흐릿한 흔적으로만 남은 독녀를 찾아 그녀들의 삶의 전략과 행위성을 읽는다. 그리고 서로 다른 지층의 ‘복수적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전략적 개입과 교섭, 그로부터 생겨나는 저항 지점의 생산 가능성에 대해 탐색한다. 그러한 움직임은 구조 안에서 작동하지만, 동시에 그 구조에 균열을 내는 틈새를 파고들며 지배질서를 어그러지게 만들고, 변화를 만들어낸다.

 

하층 신분 불쌍한
배려의 대상 ‘독녀’

연구자는 조선시대 기록물에서 ‘독녀’에 관한 내용을 찾는 것에서 본 연구를 시작한다. 연구자는 우선 『단성호적』에서 1678년부터 1789년 사이에 여성이 호주가 되어 혼자서 호를 이루고 있는 경우를 찾아 제시한다. 과부가 아니면서 여성 혼자서 호를 구성한 경우는 전체 호구 가운데 약 1~3% 정도로 매우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은 예외적이지만 조선의 여성이 살았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들이 어떤 사정으로 혼자 호를 구성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하층 신분의 여성들이다. 하지만 여성 혼자서 호를 구성한 경우에도 남편이나 아들이 다른 호에 기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호적대장에 혼자서 기재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독녀’는 아니다.

연구자는 다시 『단성호적』에서 ‘독녀’로 기재된 사례를 찾아 1678년 5건, 1732년 1건, 1759년 1건을 제시한다. [표2]는 1678년의 호적에서 호주의 직역이 ‘독녀’인 경우를 찾아서 그 호에 대한 간단한 정보와 그 구성원을 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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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 『단성호적』에 기재된 독녀와 그 호의 구성원. 저자 논문에서 인용.

 

1678년에 보이는 5건의 독녀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들의 신분은 모두 사비이다. 연구자가 『단성호적』에서 찾은 내용을 보면 독녀라고 쓰인 경우에 남편이 함께 기재된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독녀는 대개 혼자가 아니라 자녀와 함께 기재되어 있었다. 호적대장에 등장한 독녀들의 경우 반드시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며, 자녀가 없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서구가 진휼청의 말로서 말하기를, ‘한성부별단을 보니, 남부 이태원의 독녀 양소사 집이 무너졌다고 하니 휼전으로 돈 2량을 지원해주고자 하는 생각이 들어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승정원일기』정조 13년(1789) 4월 20일) (326쪽)

『승정원일기』중에 집이 무너진 독녀에 대한 부분이다. 조선시대에 독녀는 대개 왕이 먼저 보살펴야 할 대상이며, 의지할 곳 없는 존재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조정은 진휼(흉년에 가난하고 군색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을 할 때도 독녀를 먼저 배려하도록 했고, 각종 세금에서 면제해주는 등 특별한 대우를 했다. 『승정원일기』에는 그러한 진휼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구체적인 명단인 ‘별단’이 들어 있어서, 그 속에 포함된 독녀의 이름과 피해 상황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었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읽어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그렇게 등장한 독녀의 명단은 130여 명이다. 그 가운데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경우가 2건, <한성부실화별단(漢城府失火別單)>으로 보고된 화재로 사망한 경우가 1건이다. 나머지는 <한성부민가퇴압별단(漢城府民家頹壓別單)>으로 보고된 집이 무너진 일과 관련된 경우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진휼청(賑恤廳)의 주관으로 포(布) 1필, 전(錢) 2량 등의 휼전을 거행하도록 조처되었다. 그러한 기록 가운데에도 ‘독녀’라고 칭하면서 아들 또는 딸이 죽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모호한 경계에
위치한 존재 ‘독녀’

연구자는 위의 호적대장이나 진휼 기록을 통해 ‘독녀’ 가운데 자녀가 있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엄밀하게 독녀가 아닌데, 독녀로 기록된 것이다. 연구자는 이것이 어떤 맥락에서 가능했던 것인지를 조선시대의 다른 기록들에서 찾아본다.

유희춘의 ‘미암일기(眉 巖日記)’,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 ‘심심당한화(深深堂閑話)'(이우성·임형택 역편, 1973) 등에는 양반이 자신 또는 남의 비를 첩으로 삼으려다가 취소하거나 첩을 얻고 버리는 내용이 나온다. 연구자는 자녀가 있을 뿐 남편은 없는 정당한 위치를 점하지 못한 모호한 상태인 그 비와 같은 여성들이 ‘독녀’로 기재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검녀(劒女)'(이우성·임형택 역편, 1973)에서는 양반집 딸의 몸종이 남자를 골라 그의 첩이 되는 길을 선택하고, 첩이 된 뒤에 다시 그를 떠나기로 결정하여 그녀 스스로 혼인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녀는 혼인을 했었기에 처녀도 아니고 남편이 죽은 것은 아니므로 과부도 아니다. 그녀들을 어떤 범주 속에 묶어내기는 어렵다. 때로는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여자도 있을 수 있다. ‘독녀’는 그러한 모호한 상태의 그녀들을 부르는 이름인 것이다.

양반의 일기나 문헌, 설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신분은 모두 사비였다. 앞에서 살펴본 호적대장 속에 ‘독녀’로 기재된 사람들은 모두 남편이 없지만 자녀를 갖고 있기도 했다. 또 조선 사회의 어느 구석에서 양반 남성과 관계가 있지만 그들의 첩조차 될 수 없었던, 또는 첩이 되었다가 그 상태를 벗어난 여자들이 있었다. 호적대장에서 20~30대의 젊은 여자가 ‘독녀’ 로 인식되고, 독녀로 통용되었던 것을 볼 때, 조선시대의 독녀는 단지 나이 들어서 남편 없고 아이 없는 여자라는 의미일 뿐 아니라, 규범적 혼인의 질서 밖에 놓인 존재를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독녀’는 규범적 혼인 밖에 놓인 존재, 혼인했음과 혼인하지 않았음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위치한 존재들이었다.

『승정원일기』에는 유기아(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키우는 경우가 꽤 나온다.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독녀들이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것에 대해 지원을 해주었고, 이러한 정책을 통해 ‘자식을 가진 독녀’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자식이 있다면 더 이상 ‘독녀’가 아니지만, 그 자식은 데려다 키운 아이일 뿐이므로, 독녀는 역시 독녀였다. 그들은 ‘독녀’라는 이유로 국가의 보조를 받아 자식을 데려다 키우고, 그 아이의 혼례에도 보조를 받는 등 특별 대우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독녀’는 더욱 모호한 존재가 되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독녀’가 없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다. 모든 여자가 아버지, 남편 또는 아들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이 적절한 것이었다. 독녀에게 자식을 두게 하는 것은 ‘독녀’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자식이 없는 독녀에게 자식을 갖도록 하는 것은 한편에서는 버려진 아이를 구제하면서 동시에 혼자 늙은 여자에게 자식을 만들어주어 의지할 곳을 마련해주는 기획이었다. 이러한 국가의 노력이 독녀이지만 독녀가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었다. 어쨌든 국가에서는 그녀들을 여전히 예의주시해야 하는 ‘독녀’로 간주했고, 그에 따라 그녀들은 아이가 있더라도 ‘독녀’일 수 있었다.

 

‘독녀’라는 이름으로
위반하기

독녀를 특별하게 대우했던 것은 그들이 불쌍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한편에서는 이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어렵다는 이유로 세금 면제를 받았을 뿐 아니라 국가로부터 주어지는 각종 시혜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요구를 하고, 때로는 ’범법행위‘도 저질렀다. 특히 금주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술을 만들어 파는 일에 독녀가 종종 범인으로 등장하곤 했다. 『승정원일기』에는 금주령이 가장 엄격하게 내려졌던 영조 39년에서 48년 사이에 독녀가 술을 빚어 판 일이 11건 이상이 기록되어 있다.

독녀로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지난 임오년 8월에 몰래 술을 빚어서 추조에 붙잡혀서 형을 받은 후에 경상도 고성현으로 유배를 갔다가 같은 해 9월에 풀려나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 춘궁기를 맞아서 생계가 매우 어려워서 7되의 쌀로 중간 항아리에 술을 담가서 청령교에 사는 사노 송시태의 집에 술 2그릇을 팔고 남은 술은 보관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지금 붙잡혔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40년(1764) 3월 21일) (337쪽)

위 기록은 영조 40년에 술을 빚어서 판 ‘독녀’에 관한 내용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엄한 벌로 처단하는 것으로 논의하였고, 왕 또한 동의하였다. 그러나 엄한 처벌을 명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독녀에 대한 정상참작이 되기도 했다. 왕과 관료들 사이에 그녀들을 너무 가혹하게 처벌할 수는 없다는 암묵적 공감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여자가 술을 빚었더라도 남편이 있는 경우 그 가장을 처벌하는 조선시대의 방식과도 관련이 있는데, 남편 없는 ‘독녀’가 범법행위를 했을 때 그 책임을 엄하게 묻기 애매한 상황이 벌어졌다.

‘독녀’는 가장이 없고 기댈 곳 없는 가엾은 존재이기 때문에 국가의 입장에서 그들의 범법행위는 늘 곤란한 문제가 되곤 했다. 독녀는 가장을 통한 단속이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불쌍하기에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으므로 ‘독녀’ 자신이 직접적인 처벌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장’을 대신 처벌하는 방식의 규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실패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녀의 행위를 단속하고 그에 책임을 지고 처벌받을 가장이 없는 여자인 ‘독녀’는 엄단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보면 가혹하게 처벌하기도 어렵고, 교묘하게 어기면서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존재였다.

 

심히 외람되나
처벌할 수 없는 그녀들

독녀를 불쌍하게 여기고 보살피는 것은 유교 정치에서 왕이 ‘인정(仁政)’을 행하고 있다는 것의 주요한 징표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독녀가 먹고 살기가 어렵다고 호소할 때, 국가에서는 우선적으로 그녀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었다. 그러한 가운데, 한편에서는 독녀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사소한 억울함을 왕에게 호소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승정원일기』에는 가족 관계에서 벌어지는 문제 등 소소한 문제에 대해 관청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하거나 지인에게 돈을 떼이자 왕의 행차 앞에서 꽹과리를 울리며 격쟁(조선시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거동하는 길거리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하소연하던 제도)하는 ‘독녀’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그녀들은 왕에게 상언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규정을 따르지도 않았다. 독녀들의 호소가 과도하여 ‘외람’된 것으로 논의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외람율(猥濫律 분수에 지나침에 관한 법)로 처벌받는 일에서도 예외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녀들은 가혹하게 처벌할 수 없는 불쌍한 존재였기에 엄격한 규제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독녀’들이 다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실상 기와집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고, 노비를 거느리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과도하게 자기 이해에 밝고 국가의 금제를 어기며 왕에게 거침없이 상언하는 그녀들이 골칫거리로 논의되기도 한다.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기에 국가의 특별한 배려와 감시가 필요했던 그녀들은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기에 어디서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주의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었다. 조선시대 사회에서 신분의 위계와 중첩되면서도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혼인’이 부여한 지위에서 최하층에 위치한 그녀들은 감시와 보호의 대상으로서 국가 기록 속에 흔적을 남겼다. ‘독녀’라는 이름은 여성을 부르는 이름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었다. 늙은, 남편 없는, 자식 없는 여자는 ‘비-삼종’이었고 ‘불-삼종’이었다.

그녀들은 조선 국가에서 위험하고 불안정하며, 온전치 못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고 정상적 범주에 속한 부녀들과 구분되어 한편에서는 보호를 받고, 한편에서는 배제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설정하는 매개가 그녀들이었다. 그녀들을 ‘독녀’라는 이름 속에 묶는 것으로, ‘삼종의 도’는 더욱 강한 울타리를 두르고, 그 내부를 결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러한 경계 밖에 내던져진 채 단순히 배제된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오갔다. 삼종의 구속 밖에서 국가의 혜택과 처벌 사이를 오갔다. 그녀들은 범죄를 저질렀거나 국가의 규칙을 어겼을 때, 자신을 ‘독녀’라고 내세웠다. 그녀들이 ‘독녀’임을 강조할 때 유교의 정치를 표방한 조선 국가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들은 ‘독녀’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보듬어 인정을 펼치는 유교적 규범 체계와 협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논문

「조선시대 혼인장려책과 독신여성: 유교적 가부장제와 주변적 여성의 흔적」
정지영, 2004, 『한국여성학』, 20(3), 5-37.

「조선시대 ‘독녀(獨女)」’의 범주: ‘온전치 못한’ 여자의 위치」
정지영, 2016, 『한국여성학』, 32(3), 1-26.

 

김연정 리뷰어  equ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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