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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ofinale죽음을 둘러싼 인간의 호기심과 탐구는 인류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 고유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는 밝혀진 바가 없으며, 밝혀지지 않은 세계 때문에 온갖 형이상학과 인간적 질서가 생성되고 재편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生·死·死後의 연결고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충분히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왜인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존엄사와 같은 주제를 공론화하는 것은 명쾌하지 않다. 두려움과 슬픔에 연결되기에 진중해야만 하며, 예의의 영역으로 여겨지기에 공론장에서의 발언이 위축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사가 자유로운 이치이며 이에 따른 규범적 합의를 위해서는 더욱 담론화되어야 할 주제가 ‘죽음’이다.

권수현 성신여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생물학적 죽음에서 인간적 죽음으로」(『사회와 철학』, 30, 2015)에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생명의 생물학적 정의를 통해서 살펴보면서, ‘생명’과 ‘죽음’이 ‘그 자체로 본질적인’ 실체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임을, 그리고 통합적 메타개념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죽음의 존엄성을 되살리고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죽음에 대한 담론이 공론장에서 활성화되고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의 자기결정권,
존엄사

저자는 인간에게 삶의 존엄이 필요하듯 죽음에도 존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에서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곧 주도권이 있는 죽음 즉 존엄사 문제와 연결된다.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통제하며, 남은 삶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보내는 데 할애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자연스럽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진다.

저자는 존엄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기결정권이라고 본다. 저자에게 있어 환자를 대신해서 가족들이 결정하는 죽음은 존엄사가 아니라 비자발적 안락사이다. 존엄사를 허용하는 나라는 미국,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태국 등이며 프랑스도 ‘인생의 마지막에 대한 법’을 제정하여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다. (리뷰어 주: 논문이 쓰여진 이후 19대 국회는 ‘호스피스 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 결정에 관한 법’을 의결해, 이 법은 2018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뇌사란 무엇인가?

저자는 죽음을 선고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죽음선고가 반드시 생명의 중단이라고 볼 수 없는 점을 뇌사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어떤 정의에 따르면 ‘죽음’과 ‘죽어가는 것’은 다르다. 죽어가는 것이 “개개의 조직세포가 분해되고 재생능력이 쇠퇴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면, 죽음은 “하나의 인격체의 삶의 종말에 이루어지는 일회적 사건”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죽어가는 사람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다. 이 정의 안에서 죽음의 시점을 결정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의료처치나 기술 장비의 발달로 죽어가는 과정을 한 없이 늘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죽음이란 심장이 멈추고 숨이 끊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숨이 끊어지고 나서도 모든 신체 기능이 완전히 정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심폐기능의 정지를 기준으로 하는 사망시간의 확정은 죽음발생 시간이라기보다는, 죽어가는 과정 중에서 어떤 한 시점을 임의로 정해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과거에는 죽음을 확인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인공적으로 호흡과 순환기 작용을 유지시키는 것이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반면 뇌의 기능은 한 번 완전히 멈추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또한 뇌의 기능소멸은 다른 장기들의 자발성 상실로 이어진다. 즉, 뇌사상태에 빠지면 목숨은 붙어있지만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죽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뇌사는 곧 모든 장기의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바로 이어지기에 인격의 죽음과 생명의 소멸을 나눌 필요도 없이 영원한 죽음을 초래하게 된다. 굳이 죽음의 시점을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뇌사인정에 따라오는 윤리적 문제

저자는 이쯤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임의적으로 사망선고를 내려야 하는 이유를 밝힌다. 우선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무의미한 생명연장을 시도하는 개입을 중단하기 위해서다. 기약 없는 생명 연장은 환자의 존엄한 죽음에도 환자가족의 불필요한 부담과 고통을 막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다음은 장기이식의 필요성 때문이다. 심장사 판정으로는 장기이식이 어려우며, 심장이 뛰고 있을 때 신선한 장기를 적출해야 성공률이 높아진다. 이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의 법률은 장기 기증을 전제로 하는 경우에만 뇌사판정이 인정된다.

장기기증은 생명을 살리는 숭고한 일이지만, 저자는 장기기증을 위한 뇌사인정에는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윤리적 문제가 남았다고 말한다. 일단 죽음 앞에서 인간적인 삶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는 사람에게 장기이식을 위한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처사다. 이와 같이 인격을 근거로 사망판단을 내린다면, 무뇌아, 식물인간, 중증의 알츠하이머 환자 등과 같이 인격체로서의 삶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인간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생물학적·의학적 차원의 문제도 있다. 뇌사인정은 사망시간을 임의적으로 확정하는 것이기에, 이를 죽음의 사실로 받아들일 만큼 뇌와 다른 신체기관의 유기적 상호작용이 충분히 규명되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뇌기능의 완전한 소멸 후에도 체온조절이나 상처회복, 심지어 성장과 같은 통합적 기능을 일정 정도 유지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기에, 뇌사를 죽음으로 간주하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심장이나 뇌 모두 인간의 생명을 장기로 환원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물학적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죽음에 대한 통일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이지만, 죽음에 대한 기준이 임의적이라면 죽음을 둘러싼 법적·제도적 난관은 물론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곤경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죽음이 시작되는 지점이 삶이 끝나는 곳이라면, ‘삶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써 그 기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문제를 가장 간단하고 엄밀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역시 자연과학적 접근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논증에 의하면 그 또한 확실하고 통일된 의견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생물학적으로 ‘삶’이란 ‘생명’이다. 생명의 정의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생명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한 슈뢰딩거에 의하면, 생명이란 ‘저엔트로피를 먹고 사는’ 것이다. 즉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저엔트로피 상태인 다른 존재를 양분으로 섭취하고, 양분 섭취의 대상이 된 존재를 고엔트로피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의를 적용하면 자동차 또한 ‘생명체’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기술발전을 근거로 가까운 미래에 자기복제가 가능한 자동기계가 만들어지거나, 학습능력과 기억능력을 통해 ‘자아’라고 불릴만한 로봇이 발전된다면 이 또한 ‘생명체’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생명’의 실체를 규명하거나 ‘생명력’의 근원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언제나 실패하는 건, 생명이 실체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생명의 탄생과 진화 과정 그리고 그 생명을 둘러싼 질문은 생명을 ‘명사’라기 보다는 ‘동사’에 가까운 것으로, 생명의 원리를 “동일한 상태로 머물기 위해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개념의 영역에서 보자면, ‘생명’과 ‘죽음’은 모순대립의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삶과 죽음에는 중간영역이 없으며, 회색지대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와 실천은 이 삶과 죽음이 함께 부유하는 중간영역을 만들어 내며, 뇌사는 이 회색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이 생물학적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이며,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선 인간의 행위와 삶의 실천적 영역에서 부여되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칸트의 말처럼 스스로 목적을 정하고 그에 맞는 수단을 구하는, 그리하여 그 목적에 따라 각각의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부여자로서 인간에게 죽음은 사실과 더불어 가치가 함께하는 영역이다.

저자는 이러한 ‘목적의 왕국’의 구성원에게는 죽음에 있어서 ‘규범적 차원’의 의미가 부여된다고 말한다. 죽음이 생물학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규범적 사건이라면, 뇌사에 대한 판단 역시 생물학적 결정이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규범적 결정이어야 한다. 때문에 뇌사에 어떤 규범적 의미를 부여할지에 대한 숙고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죽음의 의료화를 넘어
죽음의 자기결정권으로

논문 후반에 저자는 생물학적 죽음에서 인간적 죽음으로 규범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를 인문학적으로 성찰한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는 죽음이 친숙한 자연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견하였으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의사나 가족들도 죽음의 시간이 가까이 왔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불만을 표하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했지만 죽음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죽어가는 사람과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주변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죽음을 은폐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둘러싼 주도권은 죽어가는 자로부터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에게로 넘어갔다. 이와 함께 죽음에 추한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청결은 근대의 공중위생의 시작과 함께 부르주아의 도덕적 덕목의 하나로 자리 잡으며, 질병과 죽음을 불쾌한 것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죽음을 드러내는 일은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더불어 죽음은 자연현상이 아닌 의료적 처치의 중단으로 인한 기술적 현상이 되었다. 그 결과 죽음은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이 되었고, 의료인의 과제는 죽음을 통제하며, 죽음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들에서 임종환자는 자신의 임종에 대한 주도권을 가족들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었고, 그 위임의 조치마저도 죽음의 지배자인 의사에게 전권을 빼앗긴 채, 삶의 마지막 순간을 철저히 무지하고 무력한 상태로 끝내게 된다.

생의 마지막을 병원에서 고독하게 보내는 ‘죽음의 의료화’는 서구에서 1950년에 절정에 달했으나 이에 대한 비판이 6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죽음의 시간을 함께하는 ‘죽음동반’의 문화가 출연했다. 이러한 문화의 하나로서 ‘호스피스’는 임종환자의 신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고통을 함께 어루만지며 남은 시간 안에서 삶의 질을 극대화함으로써, ‘죽음의 질’을 높이려는 운동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은 호스피스 운동조차도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과 같은 형태에 의존하고 있어 ‘죽음의 의료화’와 크게 차별화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의 존엄성을 되살리기 위해 무엇보다 변화가 필요하다. 죽음동반 문화가 활성화되고 호스피스 운동이 제대로 결실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담론을 공론장에 올리는 것이다. 죽음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드러내며 죽음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 물론 이런 자기결정권의 강화가 자본주의적 시장의 논리에 잠식되어 이윤추구의 일환으로 자리잡는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에 따른 한계 또한 분명하기에, 마냥 환영만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할 권리와 이 죽음을 가까운 이들과 함께 하는 ‘죽음의 문화’는 인간적인 삶의 가능성이다. 죽음은 자연적인 현상인 동시에 규범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적극적인 개입이 허용되는 영역이다.(218~219쪽)

논문은 죽음이 생물학적으로만 정의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며, 문화적·규범적 합의에 따른 절차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논리, 당위적으로 주장한다. 또한 이에 근거해 죽어가는 환자에게 자기결정권이 주어져야 하는 이유 역시 당면한 윤리적 문제들을 근거로 다각적 설명을 시도한다. 전반부의 치밀한 논증과정에 비해 후반부 죽음에 대한 감상적인 어조나 잠언 등에서 이질감이 느껴지지만 이 또한 죽음과 친숙해지고 삶과 죽음 모두에 자기결정권을 갖기 위한 내적 성찰 중 하나일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을 논문

「노인여성의 죽음 결정과 죽을 권리: 연명의료를 중심으로」
이동옥, 2015, 『한국여성학』, 31(1), 123-159.

「죽음에 관한 자기결정권과 존엄사」
김은철·김태일, 2013, 『미국헌법연구』, 24(1), 97-124.

권성수 리뷰어  nilnili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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